'황석영'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8.08 어데로 가야할꼬...
  2. 2008.10.13 <개밥바라기 별> 이 시대 청춘들의 단단한 철학을 위해
  3. 2007.01.06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과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
2009.08.08 17:08

어데로 가야할꼬...


어데로 가야할꼬...


가끔 "담임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살면서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놓일 때 특히 그렇다. 더구나 나이에 비례해 선택의 순간들은 점점 많아지고, 무게감 역시 육중해진다. 초, 중, 고 늘 옆에 있을 때는 그렇게 귀찮고 성가시기 그지없던 존재가 이제는 아쉽기만 하다. 12년 공교육이 이리도 사람을 타성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이거 해!!!" 라고 썩소를 날려줄 누군가가 필요한 건 어쩔 수 없다. 그토록 내 인생은 나 혼자 결정하고 이끌어갈 수 있다고 자부했건만 그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저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혹시 다른 변수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가만히 그냥 있는 게 좋을까..." 나이는 생각의 곁가지들만 무성하게 키웠을 뿐 결단력에는 물과 거름을 야박하게 준 것 같다.

궁시렁 대면서도 누군가의 말에 의지해 방향을 잡고 한 발 내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이제와 담임 선생님을 찾는 건 그 만큼 나이가 더할 수록 인생의 멘토를 찾기 어렵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순간부터 인생의 멘토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 주위의 누군가가 됐든, 역사 속의 인물이 됐든, 아니면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성공시대나 무릎팍 도사에 나올 누군가가 됐든 그건 개인의 선택이다. 내 그릇에 어울리는, 그래서 내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오늘부터 저 사람을 내 삶의 멘토로 삼겠어!" 떵떵거리고 선언하는 건 아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의식하게 될 때 그 누군가는 멘토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내게 있어 그런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니 누구일까?

부모님이라는 행사용 멘트는 차치하고 내가 지금까지 좇아왔던 멘토들은 책과 영화를 통해 만나왔던 것 같다. 박경리와 황석영... 그들이 살아온 삶과 상관없이 문장을 통해 그들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문장을 통해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고, 그 궤적을 훑어가는 과정에서 둘은 내 삶의 방향타로 자리를 잡았다. 조변석개하는 역사적 순간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생각과 행동, 문장을 일치시키고자 애쓴 흔적들이 마냥 멋있게 보였던 것 같다. 박경리가 지난 해 그토록 경외하던 '땅'의 부분이 되었고, 남은 건 황석영이었다. [오래된 정원]을 읽으며 뒤늦게 황석영의 작품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초기작까지 뒤져가며 거의 모든 작품들을 손에 잡았다. 네이버에 청년을 위한 소설 연재를 시작할 때도, 무릎팍 도사에서 예능에 어울릴 법한 과장된 몸동작을 보여줄 때도 여느 무게 잡는 작가들과 다른 그의 행적들을 응원했었다. 하지만 그가 얼마 전 '그 분'과 함께 중앙아시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모습은 내게 숱한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표 만을 남겼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는 믿을 수 없은 말들, 그리고 그에 대한 황석영 자신의 길고 긴 해명과 같은 글... 무엇이 진실이든 한쪽에서는 '변절자'로, 다른 한 쪽에서는 '첩자'로 전락한 그의 모습 자체가 내게는 상처였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의 글을 읽겠지만, 풀리지 않을 물음표들은 그를 예전처럼 대할 수 없게 만들 것 같다.

그리고 최근 신문기사에서 또 하나의 이름을 발견했다. 영화면이 아닌 국제면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문장을 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분명 문화부 기자였다면 그의 이름은 자장커가 아닌 지아장커라고 적었을 것이다. 페이지를 잘못 잡아 이름조차 낯선 그 이름이 그가 아니기를 바랐지만 우려는 현실이었다. 호주에서 열리는 멜버른 영화제에 중국 영화 감독들이 보이콧을 선언했고 그 가운데 지아장커가 있었다. 위구르 자치구 소요 사태의 배후로 지목 받은 레비야 카디르의 다큐멘터리(제프 다니엘스 감독)가 상영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중국의 해커들은 영화제 홈페이지를 급습했고, 지아장커 역시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물론 멜버른 영화제가 충분히 정치적인 의도에서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정치적인 쇼라면 꼭 정치적인 쇼로 답을 했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어느 쪽의 편을 들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지아장커라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대응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데뷔작 <소무>부터 시작해 최근작 <24시티>까지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영화를 난 좋아했다. 그리고 그 온기는 모두를 향해 있음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의 이름 앞에 하나를 추가시켰다. 그는 '중국인' 영화감독이었다. 이제 그가 어떤 따뜻한 영화를 만들어도 모두를 향한 '보편적 메시지'는 찾기 힘들 것 같다.

어찌 멘토가 사람만이 될 수 있을까. 물건이든 공간이든 마음을 붙일 수 있다면 충분한 자격 요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사이 멘토와도 같았던 공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화문 아트플러스 극장의 터줏대감 씨네큐브가 문을 닫을 지도 모른다는 소식... 백두대간이 10년 가까이 운영해 오던 씨네큐브에서 방을 뺀다고 한다. 흥국생명에서 단독으로 운영을 한다고 하니 정확히 말하면 당분간 씨네큐브가 문을 닫는 것은 아닌 듯하다. (물론 내년 3월 이후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음식맛이 좋았던 단골집도 주인이 바뀌면 이전만 못한 법이다. 20살 상경해서 지금까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숱한 기억과 추억이 그 곳에 있다. 해머링맨도, 씨네큐브도 그대로 있겠지만 이 친구들을 바라보는 나는 전과 같지 않을 것 같다. 술에 취한 주인을 실고 천관녀를 찾은 김유신의 말처럼 나 역시 광화문 사거리에서 무의식적으로 씨네큐브로 향할지 모를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이젠 여기가 아니야..." 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백두대간은 이대의 아트하우스 모모로 자리를 옮긴다고 한다. 부디 그곳을 통해서라도 오래된 친구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러가지 확인되지 않은 "썰"들이 난무하지만 무엇이 진실이든 인사는 해야할 것 같다. "그 동안 덕분에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씨네큐브!!!" 

여하튼 하 수상한 시절... 여러가지 방향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몸과 마음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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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3 02:15

<개밥바라기 별> 이 시대 청춘들의 단단한 철학을 위해

<개밥바라기 별> 이 시대 청춘들의 단단한 철학을 위해

황석영, 문학동네, 2008 8 1, 288p

<개밥바라기 별>은 황석영의 작품목록에서 하나의 변화였다. 블로그라는 인터넷 창구를 통해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했고, 새로운 독자층과의 대화를 시도했다.(6개월 동안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연재된 소설은 누적 방문자수 180만명을 기록했다.) <바리데기> 이후 자신의 책을 읽는 새로운 독자층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 그는 이번 작품에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성장'이라는 주제를 선택했다. 그 안에 1960년대 자신이 겪은 치열한 20대를 담았다. 아마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다.

<개밥바라기 별>은 과거로 거슬로 올라가는 시간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는 1장 <그날들 속으로>에서 베트남 파병을 앞둔 준이가 집으로 돌아와 가족, 친구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후 준이와 그의 주변에서 그와 함께 청년기를 보냈던 친구들의 시점이 번갈아 전개되면서 결말은 이야기의 처음과 마주하게 된다. 처음 베트남으로 떠나는 준이의 행동들에 낯설었던 독자들은 그의 청년기를 경험하고 다시 만난 그에게 공감을 느끼게 된다. 1960년대, 그러니까 40년도 훌쩍 넘은 과거에 살았던 인물들의 고민과 절박함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준이를 비롯해 인호, 상진, 정수, 선이, 미아 그리고 중길, 동재, 장무, 장대위, 가족까지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현재의 우리들 중 누군가와 다르지 않다. 역사가 만들어지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나름대로의 생존 규칙을 익히게 되는 그들과 우리들. 황석영은 시간을 초월해 통할 수 있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책은 이런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정치적 사건이나 인물들의 시대 인식을 그렇게 비중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


모범생이 되고, 대학을 가고, 그리고 좋은 일자리를 얻어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지금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시절. 준이와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삶 역시 그런 타성에 젖는 것을 거부했다. 어른들에게는 한 때 불장난이나 치기 정도로 보였겠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뭔지 모른다. 학교와, 사회와, 시대와, 부모가 정해 놓은 삶과 다른 자신의 목표와 꿈이 무엇인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그들의 기행은 시작된다. 학교를 몇 달씩 등지고 산에서 수도 생활을 한다던지, 전국 배낭 여행을 떠난다던지, 아니면 전국을 떠도는 부랑 노동자를 따라 다닌다던지...

그들은 길 위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많은 친구들이 (정해진)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들은 답을 얻었을지도, 못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기는 처음부터 답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는 있었을 것이다. 비슷한 경험이지만 그들의 방황은 각기 다르게 기억되고, 각기 다른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정해진 루트를 따라가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믿게 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자신의 길을 찾는 사람도 있다.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시간에 기대 살아가는 그래서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다. 누구의 선택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대부분이 20대를 전후에서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게 된다. 누구나 다다르고, 누구나 하게 되는 고민들. 답은 없다. 모두에게 가능성만이 있을 뿐이다.

준이의 경우는 어떠한가. 작가의 자전적 모습이 짙게 배어 있는 준이는 학교를 관두고 방랑을 시작하면서 길 위에서 인생을 배운다. 그에게는 길이 바로 학교가 된다. 하지만 그의 방랑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그는 자살을 선택한다. 수면제를 입에 털어놓고 그는 죽기로 한다. 방황에서 돌아온 후 그가 얻고자 한 답을 얻기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현실에 절망했기 때문일까? 결국 그에게는 살아가야 할 이유가 불분명했다. 자신만 빼고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세상. 준이는 그 세상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없어진다면 세상 모든 것이 분명하고 명확해질 것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병원에서 다시 눈을 뜨게 됐을 때. 그의 첫 생각은 <하늘이 쾌청하고 맑고 푸르다는 것>이었다. 죽음 앞에서야 그는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삶의 이유는 곧 자신이 숨쉬고 있음이다.

저자가 준이와 그의 친구들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60년대 자신들의 세대에게도, 지금의 청춘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단단한 철학>을 만드는 일. 먹고 살기에 바빠 철학이 빈곤하고 생각이 어려운 시기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상황에 따라 좌고우면하지 않는 자신의 단단한 철학이 바로 그 대답이 될 것이다. 그 철학은 곧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 된다. 그것은 타성에 젖지 않고 스스로의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그 철학을 위해 부지런히 생각하고, 부지런히 경험해야 한다.

작가는 책에서 부랑노동자 장대위의 입을 빌려 개밥바라기 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금성이 새벽에 동쪽에 나타날 적에는 샛별이라고 부르지만 저녁에 나타날 때에는 개밥바라기 별이라고 부른다. 식구들이 저녁밥을 다 먹고 개가 밥을 줬으면 하고 바랄 즈음에 서쪽 하늘에 나타난다 해서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다.> 개는 저녁무렵 서쪽 하늘에 나타난 금성을 보고서야 배고픔을 느끼고 밥을 먹어야 할 때란 것을 알게 된다. 그에게 별은 그의 삶 자체와 다르지 않다. 준이는 하루 힘든 노동을 마치고 장대위와의 대화를 하던 중 개밥바라기 별을 알게 된다. 준이의 개밥바라기 별. 그에게 삶이자 철학이자 길잡이가 되어 줄 별을 말이다. 

20대를 훌쩍 넘겨 30대를 코앞에 두고 있지만 준이의 고민은 현재 나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때문에 준이와 친구들은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였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었어." "나만 방황을 두려워하고 답을 찾지 못하는 것 아니었어." "누구나 그렇듯 나도 이 시기를 힘겹게 넘기고 있을 뿐 언제가는 내 안에서 답이 떠오를거야." "지금 내가 안고 있는 고민들, 청춘의 특권이자 숙제.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줄거야." 한 노작가의 치열한 삶의 흔적이 지금 내앞에 놓인 절망 속에서 희망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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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6 13:52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과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과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

2006년 8월 28일 -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 티저 포스터를 보고 든 생각...

처음 이 책이 임상수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 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참 어울리는 궁합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주제는 무겁되 그 표현만큼은 무게를 털어버리고 냉소와 냉무로 실팍했던 임상수 감독의 스타일이 황석영 소설의 수미를 관통하는 묵직한 주제의식과 탐미적 문체가 다소 어긋나는 느낌을 받았지만, <바람난 가족>과 <그때 그 사람들>을 인질삼아 볼 때. 황석영이라는 작가가 소설 속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메시지를 임상수 감독 만큼 영상으로 옮길 만한 이도 없을 거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개봉을 앞두고 처음 본 티저포스터에서는 약간 걱정이 앞선다. 자칫 영화가 오현우와 한윤희의 멜로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하기는 감독이 언제 영화 속에서 파스텔 톤 가슴 미어지는 사랑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던가... 괜한 걱정인가 보다. 아무튼 영화가 기대된다. 한 편의 좋은 소설이 좋은 영화로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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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1년 전, 약 한달간 손에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붙들고 살았었다. 내심 <장길산>이나 <삼국지>로 황석영과의 첫 대면을 하고픈 욕심이 있었지만, 그것보다 훨씬 슬림한 <오래된 정원>을 손에 든 것은 당시 21권 <토지>와 사투를 버린 끝이라 다시 대하소설을 끄집어 낼 엄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1권에 비하면 단편소설 주름도 잡기 힘든 2권을 한 달 동안이나 붙들고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순간순간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입으로 중얼거리기에도 눈으로 훑어내리기에도 미안할 만큼 고왔던 그의 문체 때문이었다. 책을 읽기 전, 황석영은 작가이기 이전에 사상가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그의 화려한 이력을 앞장세워 갖가지 언론들이 그를 작가가 아닌 사상가의 직함을 만들어주었고, 그것을 벼루 끝에 찍어둔 화선지가 먹물 빨아들이듯이 나는 흡수했다. 하지만 <오래된 정원>을 통해 만날 수 있었던 황석영은 '작가'였다. 머리카락, 눈, 손등, 목소리의 주름에서 한겨울 삭풍보다 살을 에이게 했던 세월의 흔적이 곱게 베어있는 그의 모습처럼 그의 글은 물색없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몸부림을 감싸안을 만큼 고왔다. 누구보다 세상의 중심에 서서 시대의 한파를 온몸으로 막아 섰던 그가 한 마디, 한 구절, 한 문장을 얼음갈라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싹을 틔우는 봄꽃마냥, 팔월 염천 하늘을 제 한몸으로 막아서고 있는 잎푸른 나무의 그늘마냥,  한 철 제 몫 다 해놓고 스스로 불태워 만산을 뒤엎는 단풍마냥, 동짓날 시리도록 맑은 보름달마냥 곱게 써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무엇도다고 그의 눈이 고왔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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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일년 뒤의 오늘,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을 봤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상영관 자리를 확인하고, 영화가 시작되기 전 친구와 가벼운 잡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내 머리는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지우겠다는 생각을 더욱 부풀려 가고 있었다. 이는 이전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들이 무참히 던져주었던 실망에서 얻은 반면교사였다. 전혀 다른 작품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원작은 내 발목과 뒷덜미를 붙들었다.
'저 인물은 좀 안어울리는데...'
'대사가 저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책에서도 이야기가 저랬었나....'
'그 이야기는 왜 안나오는거지?'
... 여러가지 번다한 생각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비집고 들어왔다. 애써 방해꾼들을 힘들게 몰아내려고 할 때쯤, 오래된 정원을 소설이 아닌 영화로서 보게해준 장면은 다큐 장면과도 같았던 대학의 시위 장면이었다. <그때 그 사람들>에서 아무 죄없이 무참히 잘려나간 다큐 장면들에 대한 예의인듯, 가슴을 울린 학생 시위대와 진압군 간의 대치는 꽤 오랜시간 붙둘린 시선을 놓아주지 않고 이야기를 '영화'로 잡아끌었다. 이 때부터 <오래된 정원>은 온전히 임상수의 이야기가 된 듯 하다. 작가가 소설의 모티브라고 밝힌 한윤희의 독일 유학 부분을 통째로 들어내고, 한윤희의 가족사, 오현우의 옥중생활을 가볍게 터치하면서 영화는 서정시가 불가능했던 시대의 서정시를 희망했던 오현우와 한윤희의 사랑에 포커스를 집중시킨다. 황석영이 소설속에서 혁명의 상흔을 감싸안을 수 있는 모성(母性)에 집중했다면(소설에서 연이어 등장하는 케테 콜비츠의 판화들이 이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메타포이다.), 영화는 정도의 차이겠지만 시대의 극복, 치유와 같이 소설이 부릴 수 있는 무거운 주제보다는 두 인물이 흘려보냈던 시간에 초점을 맞추면서 유유히 시대에 한 귀퉁이에 카메라를 고정시킨다. 하지만 결국 그 카메라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소설과 다르지 않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역사책에서나마 간간히 만나볼 수 있는 과거의 시린 기억을 사람들마저 아픔이라 지워버리려 하지만 결국 그 기억을 추억으로 떠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오현우와 한윤희 자신들이다. 은결이에게 자신의 부모는 남들보다 고집스러웠던 사람일 뿐, 자신들의 이야기로 딸을 고리매듭 지을수는 없는 일이다. 이해든, 원망이든 그것은 전적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은결이의 몫이기 때문이다. 마치 은결이가 한은결도 아닌, 오은결도 아닌 '은결'이듯 말이다.

P.S.  영화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캐스팅이다. 지진희와 염정아가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임은 인정하지만 둘의 등장이 너무 cool하고 코믹스럽다. 감독이 의도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지진희의 어색한 흰머리 분장처럼 너무도 영화적인 인물로 바뀐 것이 다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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