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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03 <체인질링> 이스트우드 할아버지 손은 약손 (2)
  2. 2007.02.21 <The Flags of our fathers> by 클린트 이스트우드 (4)
2009.02.03 18:12

<체인질링> 이스트우드 할아버지 손은 약손


<체인질링> 이스트우드 할아버지 손은 약손


U.S.A; 2009; 141min; Drama; Color
Director: Clint Eastwood
Cast: Angelina Jolie, John Malkovich

 
요즘 들어 현실이 픽션보다 무섭고 비극적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다. 난민수용소와 아이들이 있는 학교를 무차별 폭격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세상이 무섭고,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철거민들이 부와 권력의 묵인 아래 새까맣게 재로 변하는 현실이 비극적이다. 살인, 유괴, 전쟁 등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 잔인한 범죄들이 공포의 원형질이었다면, 이제는 가난, 무지, 힘없음 등이 새로운 시대의 비극이자 공포가 됐다. 그래서일까? 2008년은 유달리 공포영화가 힘을 못쓴 한 해였다. 극장보다 현실에서 더 크게, 자주 느낄 수 있는 것이 '공포'였으니 말이다. <링>을 보고 텔레비전 마주하기가 두려워도, <추격자>를 보고 밤 길 걷기 무서워도 스크린이 아닌 현실의 어디에선가 그 보다 더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눈과 귀가 확인하는 순간 만큼 공포스럽지는 않다.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영화, 소설, 드라마도 '그래, 가짜니까.' 하고 놀란 마음을 쓸어 내릴 수 있다. 하지만 텔레비전 뉴스 앵커나 친구, 가족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을 때, 아니면 내 눈으로 직접 현장을 목도할 때 공포는 픽션이 아닌 정말이지 현실이 된다.

현실의 비극성과 공포 때문인지 주요 사건들은 '실화'라는 이름으로 자주 영화의 소재로 사용된다. 그 대상은 희대의 살인마부터 전쟁, 범죄조직, 정치인들의 비리, 불평등한 사회 구조 등에 이르기까지 제한이 없는 듯하다.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무너뜨려 이야기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겠다는 일종의 전략인 셈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 자막 한 줄로 관객은 스크린을 대하는 마음을 고쳐잡게 된다.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었든, 모르고 있었든 '실화'라는 사실만으로 영화 자체를 온전히 허구로만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혹 영화를 보고난 후 뒤늦게 실화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작품이 완전히 새롭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런 이유로 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조심스럽게 지켜야 할 '보여주기의 윤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 때, 그 일을 "왜" 지금 스크린에서 다시 봐야 하는지 '공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바란다면 어느 정도 '치유의 효과'까지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파급력이나 대중성을 고려한다면 이유는 더욱 분명해진다. 영화로 옮겨지는 사건들은 대부분 한 시대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일들이다. 위인의 이야기이든, 미담이든, 비극이든 당시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한 공간의 역사를 뒤바꿔 놓을만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대상이 된다. 때문에 직, 간접적으로 얽힌 사람들도 많고, 비극일 경우 다시는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자칫하면 영화가 시간에 묻혀 간신히 아물어가는 사람들의 상처를 다시 덧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지 영화로 만들기 좋아서, 관객동원 수치를 올리기 쉬워서 도구가 되는 것은 그야말로 '두 번 죽이는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 만족스러운 경우는 많지 않다. 스크린으로 옮기면서 이야기는 실제보다 과장되고, 인물들은 영화적 인물로 재탄생된다. 일련의 영화화 과정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여러 영화적 기교와 수단들이 사건 자체를 왜곡하고, 본질을 호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미지와 소리로 충격만 남기고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메시지만 던져놓고 끝나버리는 영화들처럼 말이다. 이런 영화들한테서 처음에 던졌던 "왜"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는 요원하기만 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새 영화 <체인질링>이 개봉했다. 이제 배우보다 감독이라는 타이틀이 더 잘 어울리는 거장은 새 영화를 위해 '실화'를 선택했다. '휴머니즘'에 있어서 동시대 최고의 만듦새를 자랑하는 감독의 선택은 화려하지도 기쁘지도 않은 현실의 가장 추악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20년대가 끝나갈 무렵 전 미국을 흔들었던 한 유괴사건과 그에 얽힌 연쇄살인범죄, 그리고 LA 경찰의 무능과 부패가 그 주인공...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많이 사라진 사건이지만 여든의 노장은 2009년 다시 그 이야기를 세상에 재생시켰다. 그는 왜 100년 가까이 지난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이 사건을 다시 스크린으로 옮겼을까?

1928년의 LA의 한 마을. 전화교환소 매니저로 일하는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는 혼자 아들 월터를 키우고 있는 직장여성이자 어머니이다. 아이에게는 좋은 엄마이고, 동료에게는 신뢰를 받는 친구이고, 그리고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만능의 여성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크리스틴은 원더우먼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깡마른 몸매와 말투나 행동, 손짓까지 아이를 혼자 키우는 억센 여자라기보다 순하고 착한 여성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평생을 주변사람, 세상과 조화롭게 호흡하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 그녀의 삶은 전혀 의도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곳으로 전락한다. 회사에서 급하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아들, 월터가 사라진 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찾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고, 경찰에 신고하는 일 뿐이었다. 불성실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찰에게도 큰 소리 한 번 내지 못한다. 그저 스스로 전국의 실종센터에 일일이 전화해가며 아들 월터의 생존을 확인할 뿐이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아이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일상을 힘들게 보내고 있는 그녀에게 '월터'가 돌아온다. 하지만 경찰의 손에 의해 넘겨진 아이는 월터가 아니었다. 월터처럼 말하지도 않았고, 키도 작았다. 경찰에게 월터가 아니라고 항의해보지만 공격을 당하는 건 오히려 크리스틴 자신이다. 경찰은 전문가까지 동원해서 크리스틴을 모성을 잃은 정신병 환자 취급을 하고, 일이 커져 경찰의 입장에 곤란해지는 것을 애초에 막고자 한다. 지금까지 순종적이었던 크리스틴은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가짜 아이 때문에 경찰이 진짜 월터를 찾는 일을 멈추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 그녀를 돕겠다고 한 사람이 나타난다. LA 경찰의 부패와 무능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을 해왔던 교회의 구스타브 목사(존 말코비치)가 그 주인공... 크리스틴은 그와 함께 경찰의 실수를 폭로하고, 진짜 월터를 찾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퇴로가 막힌 경찰은 크리스틴을 정신병원에 감금하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라고 끊임없이 압박을 가한다. 그러던 중 엄청난 유아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잡히고, 그 희생자 가운데 한 명이 크리스틴의 아들 월터임이 밝혀진다. 경찰의 무능과 부패, 폭력은 만천하에 드러나고, 경찰은 사회의 지탄과 법원의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월터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은 어떤 것도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어디선가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실낯같은 희망 하나로 크리스틴은 일상으로 돌아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수화기를 통해 전해질 '낭보'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실존 인물 크리스틴의 경험은 보통 사람의 이성과 감정으로 예상할 수 없는 고통이다. 유일한 혈육인 9살 난 아이가 없어지고, 경찰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을 당하고, 없어진 아이가 연쇄살인범에 의해 희생됐다는 사실은 국외자로서 '당신의 상처가 얼마나 클지 마음이 아프네요.'라고 말하는 것조차 죄스럽게 만든다. 보는 사람조차 숨이 멎도록 만드는 이 추악하고 비극적인 실제 사건은 여든의 노장 손에서 영화로 다시 태어났다. 영화는 '관객 여러분, 이런 충격적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정도의 보여주기에 그치지 않는다. '요정이 앗아간 예쁜 아이 대신에 두고 가는 못 생긴 아이'라는 의미의 <체인질링>은 감독이 이전에 만들었던 영화들처럼 장르영화로서 만족할만한 재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메시지에 충실한 영화이다. <체인질링>은 은아리영이나 구은재가 보여주는 한 많은 여자의 한풀이도 아니고, <밀양>의 신애처럼 '신'에 정면으로 맞서는 복수극도 아니다. 도식적으로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전자보다 진지하게 거시적인 담론을 이끌어낸다면, 후자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사건을 통해 극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체인질링>의 실화를 대하는 클린트 이스트우트의 시선은 어딘가 전작인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닮아 있다. 태평양 전쟁 도중 일어난 이오지마 전투를 미국과 일본의 시선에서 각각 영화화 했던 두 작품은 개인이 집단(더 정확히 말한다면 국가)의 논리에 의해 희생될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교과서처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분명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아버지의 깃발>보다 수작임에도 국내에서는 개봉하지 못했다.) 국가나 집단은 분명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고수해야 한다고 믿는 가치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는 것이 전체를 위해 '옳은 일'이라고 스스로 자위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이 항상 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국가의 윤리와 인간의 윤리가 항상 상충하는 이유이다. 이럴 때 역사적으로 국가는 항상 개인의 희생을 요구해왔다. 통상 사람들은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희생을 참아내지만, 그것이 '정도'를 지나쳤을 때 제동력을 잃은 공권력은 항상 사람들의 손에 의해 무너졌다. 그래서 국가는 정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항상 견제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국가로 대표되는 공권력에 대한 '비판'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그 힘에 고삐가 풀렸을 때 <체인질링>의 크리스틴이 겪는 고통은 평범한 누군가의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체인질링>은 유괴와 연쇄살인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중심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여기에 그렇게 많은 분량을 소비하지 않는다. 말로만 들어도 무서운 범죄보다도 이 영화의 실질적인 공포이자 비판의 중심은 오히려 사건과 인물을 대하는 LA 경찰로 환유되는 공권력이다. 악명 높았던 LAPD의 부패와 폭력에 맞서 여리기만 했던 크리스틴은 아이를 찾기 위해 '투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물에게 그녀를 지켜줘야 할 경찰이 오히려 더 큰 적이 됐을 때 크리스틴이 가지고 있던 인내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결국 여린 여성의 강한 모성 앞에 서슬 퍼런 공권력은 무릎을 꿇고 만다. 역사의 순리이다. 이 과정에서 크리스틴이 인간으로서 받게 되는 고통은 살인자로 인한 것에 비해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정신병원에서 크리스틴과 경찰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감금당한 여성들이 온전한 이성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인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보다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철저히 우리의 편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 의해서 벌어졌다면 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100년 가까이 지난 사건을 지금 재생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단지 한 많은 여성의 눈물 겨운 스토리가 아니라 공권력이 난무한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긴 크리스틴을 통해 과연 무엇이 소중한지를,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되짚어 주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크리스틴을 통해 여성들이 받은 상처를 세심하게 보듬고 있다. 치유와 동시에 그녀에게 희망을 남겨둔다. 크리스틴은 동료들과 아카데미 결과를 두고 내기를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일상으로 되돌아 왔지만 여전히 월터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희망이 크리스틴을 일상으로 돌아오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아이였지만 절망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 것 역시 아이에 대한 희망이었다. 아이는 크리스틴이 살아야 하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이것이 여든의 현자가 한 여자의 비극을 통해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P.S. first
씨네21에서 영화평론가 박평식은 <체인질링>을 두고 "시대 공기에 휘감기면 감동은 곱절"이라고 평했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너무도 먼 사건을 마주하면서 '시대의 공기'를 운운하게 되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분명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분명 쉽게 넘길 일은 아닌 듯하다. 공권력의 잘못을 지적하는 크리스틴은 정신이상자로 병원에 감금당한다. 법은 자위적으로 판단되고, 공권력을 위해 남용된다. 2009년 대한민국에서도 법은 사람들은 폭력적인 범법자로 만드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현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빨갱이 내지 국가의 정체성을 흔드는 폭도로 내몰았다. 과연 사람들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두고볼 일이다. 제발 역사가 만들어준 교훈에 집중하기를 바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절친 부시의 말년이 어땠는지만 기억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P.S. second
영화 속에서 제프리 형사로 대표되는 경찰의 태도는 흥미롭다. 만약 제프리 형사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속죄를 했을 때 그는 인간으로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가 경찰로서 저지른 악행들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때문에 그를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행동이 경찰로서, 공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옳은 일이었다고 스스로 믿게 만드는 것이었을 것이다. 살기 위한 자기 체면이고 세뇌의 과정이다. 하지만 제프리는 그 선택이 자신을 점점 사지로 내몰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토록 위하고자 했던 조직에게서도 버림을 받았다. 결국 제프리 역시 조직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속한 '개인'에 불과하다. 여차 하면 버려지고 교체될 수 있는... 이것 역시 우리가 배워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P.S. third
크리스틴을 연기한 안젤리나 졸리는 의외로 인상적이었다. <툼레이더>, <원티드>의 여전사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바짝 마른 몸과 수줍은 표정과 행동은 그야말로 여성스러웠고, 큰 눈에서 눈물이 맺힐 때는 아이를 잃은 엄마의 모습이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그녀의 섹시한 입술도 전혀 이질감을 주지 못했다. 더불어 간만에 정상인의 역할을 맡은 존 말코비치 역시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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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1 03:28

<The Flags of our fathers> by 클린트 이스트우드

- The Flags of our fathers -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본토 사수의 마지노선으로 연합군과  말 그래도 목숨을 걸어넣고 대찬 싸움을 해야 했던 섬 이오지마... 두 번째 세계대전의 승패 명암이 핵무기 두 발로 가려지고 이오지마는 한 쪽에게는 승리자의 영광을 다른 한 쪽에게는 패배자의 치욕을 상징하는 기호가 되었다. 그리고 50년이 넘게 흐른 지금, 승리자는 네버 엔딩 승리자가 되기 위해 명분 없이, 이유 없이 말 안 듣는 이곳 저곳을 들쑤시고 다니고, 패배자는 전쟁의 생채기가 아물고 새살이 돋아 벌은 받을 만큼 받았다며 다시 탱크에 시동걸고, 대포에 기름칠할 준비를 하고 있다. 세계대전이라는 코미디와 같은 전쟁을 역사책에서나 기억해야 하는 2007년 현재, 두 나라에게 50년 전 전쟁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상징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미국의 광적인 전쟁 놀이와 일본의 자위대 정규군化라는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은 듯한 상황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배우 출신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절묘하게도 50년 전의 '이오지마'를 배경으로 두 편의 영화를 내놓았다.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그 주인공이다. 고희(古稀)를 넘어 미수(米壽)에 다다른 이 정력 넘치는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영화계의 다른 큰 손, 스필버그의 도움을 받아 2부작 대형 프로젝트를 완성시켰다. 전쟁의 승리자와 패배자에게 각각 카메라를 위치시키고 그들의 숨은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김으로써, 결국 전쟁이란 승리도 패배도 없는 모두에게 상처많이 된다는 전쟁 무용론을 알리는 것이 이번 작업의 목적인 듯 싶다. 과연 이번에도 할아버지의 교훈이 먹힐지 궁금하다.

설 연휴, 두 편 중 <아버지의 깃발>이 먼저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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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획을 갖고, 좋은 제작가와 좋은 감독이 좋은 의도를 가진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아버지의 깃발>은 분명 <좋은 영화>이다. 감독이 배우 시절 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영화에 담은 영웅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과 소재를 가리지 않는 감동적인 스토리는 이번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사람들의 울림과 떨림을 만들어낸다. 전쟁 중에 사진 한 장으로 영웅이 되었고, 필요에 의해 영웅으로 살아야 했지만, 그 필요성에 의해 다시 버림 받아야 했던 '개인'들의 인생이 비린내 나는 정치, 역사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희생되어가는 지를 보여준 영화는 아직도 포성 속에서 목소리를 잃어가는 개인들이 존재하는 현실에 던지는 의미가 크다. 전쟁이라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누구를 위해 개인은 돈으로 자신의 희생을 맞바꿔야 하는지, 영웅은 누구를 위해 태어나고, 버려져야 하는지에 대해 영화는 질문하고 그에 대한 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너무도 친절히 설명해준다.

하지만 이 '좋은 영화'가 왠지 모르게 지루하고 따분하다. 자꾸 자리를 이리저리 고쳐 앉게 만든다. 131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가 중반을 넘으면서 감독의 설교에 가까운 '수다'가 늘어지고, 스토리는 흥미를 놓치기 시작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같은 화려한 전쟁 장면을 원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기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의 영화는 항상 '재미'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 거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의 새영화에서는 <미스틱 리버>의 스타일도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담백함도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아침 조회 때 애들 모아놓고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라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할아버지 교장 선생님이 보일 뿐이다.

솔직히 이 영화에 대한 판단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보고 난 후 하려고 했지만, 두 번째 영화가 국내에서는 개봉이 불가능 할 것이라는 씁쓸한 생각으로 포스팅을 하게 되었다. 2부작의 반을 본 지금, 감독이 말하고자, 보여주고자 했던 의욕이 앞서 영화를 필요 이상으로 장황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더 담백했더라면 분명 <아버지의 깃발>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단연 눈부신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좋은 의도와 좋은 이야기가 아쉽다.

p.s 그럼에도 '라이언 필립'은 매력적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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