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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24 <케스> 고마워요, 켄 로치
  2. 2008.10.12 <자유로운 세계> 윤리가 불가능한 세상
2008.10.24 01:43

<케스> 고마워요, 켄 로치

<케스 Kes> 고마워요, 켄 로치
UK;1969;112min;35mm;color
Director: Ken Loach
Casting: David Bradley, Colin Welland

<자유로운 세계>를 보고 켄 로치의 초기작들이 궁금해졌다. 하긴 늘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초기작품이 어떨지 궁금하긴 했다. 이 이름값 좀 한다는 감독이 어쩌다 이 경지에 이르게 됐는지... 그 변화와 지속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 사실 영화가 궁금했다기 보다 그의 젊은 시절을 훔쳐보고 싶었다. 지금 갈 길 모르고 헤매는 나에게도 메시지를 툭 하고 던져줄 것 같은 기대로. 자료를 뒤지다 TV 시리즈를 빼고 1967년 <불쌍한 암소 poor cow>부터 지금까지 20편 남짓한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거의 2년 마다 한 편씩 꾸준한 작품 활동을 했는데, 노년에 들어서도 게으름 피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모습에 애정을 더하게 된다. 필모그래피 중에서 내 눈에 들어온 영화는 그의 두 번째 작품 1969년 <케스 Kes>. 베리 하인즈의 소설 <매와 소년>을 스크린으로 옮긴 이 영화는 켄 로치를 영화감독으로서 재능을 알린 계기가 됐다고 한다. (베리 하인즈는 이 영화의 각본을 직접 맡았다.)


영화 속 배경은 1969년 영국 요크셔의 어느 탄광 마을. 주인공 빌리는 평일에는 일 하기 바쁜 엄마, 그리고 배다른 형과 함께 살고 있는 15세 소년이다. 또래들에 비해 키가 작고 볼품 없이 깡마른 빌리는 이미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사는 법을 익혀가고 있는 중이다. 배움에는 별로 큰 관심이 없다. 친구들에게도 그다지 애정이 가지 않는다. 오직 신문을 돌리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그 친구에게는 버거운 삶의 십자가다. 그런 그에게 관심거리가 생긴다. 낡은 성당의 처마 밑에 살고 있는 황조롱이 가족(매)이 주인공. 자유롭게 그리고 날카롭게 비행과 사냥을 하는 매의 모습에 매료된 빌리는 어미가 빠져 나간 둥지에서 몰래 꺼내온 새끼 매와 친구가 되기로 한다. 그 녀석에게 <Kes>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빌리는 케스가 죽지 않고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 녀석이 굶지 않도록, 날 수 있도록. 어디 한 군데 마음 붙일 곳이 없었던 빌리에게 케스는 친구이자, 가족이자, 선생님이자, 꿈이 된다.

<Kes>는 지금 켄 로치의 영화들보다 훨씬 문학적이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글로 옮긴 소설보다도 능수능란하게 화면에서 이야기를 다룬다. 지금까지 그의 영화가 '재미있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아마도 메시지를 담고 있는 기본적인 스토리라인이 흥미롭고, 그것을 스크린에서 전개시키는 영화적 구성이 매력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미 초기작에서부터 이런 재능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오히려 지금은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에 가려 그의 섬세한 문학적 코드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30대 초반에 그가 만든 케스는 성장 영화라는 장르 속에서 그의 문학적 감수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고마운 영화다. 마치 재미있는 소설 한 편을 대하는 기분으로 문맥에 감정을 이입하며 때로는 안타깝게, 때로는 따뜻하게 즐길 수 있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어느 덧 빌리와 함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빌리가 케스를 만나 성장하는 과정은 곧 우리가 성장했던 모습이다. 또한 빌리를 둘러싼 학교와 가정, 사회 속에서 그가 경험하는 목마름은 분명 누구나 한 번쯤은 느꼈을 감정들이고, 피와 살이 답하는 경험들이다. 그의 이야기가 영국의 탄광마을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게 되는 이유다.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이 <케스>에 대해 "자신의 유년시절의 기억을 바친다."라고 표현한 것이 우연은 아니다. 시스템의 안에 포함되지 못하고 겉돌면서도 뚜렷하게 반항이나 저항을 하지는 않는 그저 그런대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년들은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또한 미래가 된다. 어디든 지금의 사회와 학교는 제 기능을 잃어버린지 오래고, 가정 역시 이들을 따뜻하게 품기에는 버겁기 그지 없다. 오히려 빌리처럼 우리 역시 애초에 학교와 가정, 그리고 사회에 기대 같은 것은 하지 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극중에서 학교는 직업인을 배출하는 곳일 뿐 그 외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무엇을 원하고 요구하지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좋은 직업적 소양을 갖춘 노동자로서 "찍어 내기"만 하면 된다. 묻지도 않고 매질부터 퍼붓는 폭력적인 교장선생님, 그리고 축구 경기 진 것이 억울해 공연히 아이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어이 없는 담임 선생님까지. 이들은 불쾌하고 어이없다 못해 실소까지 나오게 만든다. 가정 역시 다르지 않다. 탄광마을이라는 공간적 특성 때문인지 빌리의 엄마와 형은 모두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고된 노동자들이다. 이들이 기댈 곳은 주말 저녁 바에 앉아 친구와 맥주 한 잔을 마시거나, 경마에 돈을 걸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학교를 통해 끊임없이 대량생산되고 있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이미 의미를 잃어버린 단어고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건너 뛰어 지금 이 공간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느 누구도 빌리에게 정말 원하는 것을 묻지 않는다. 직업교육 선생님은 빌리를 포함한 졸업을 앞둔 아이들에게 기능직과 사무직 두 개의 답안지를 내밀고 미래를 결정지으라고 다그친다. 책상 앞에 마주한 학생이 진정 되고 싶은 것은 고려 사항이 아니다. "졸업하면 무엇이든 하면서 돌은 벌겠죠. 뭘 하든 상관 없어요." 라고 말하는 빌리 역시 자신의 미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빌리는 제도와 기관이 가르쳐 주지 않는 인간관계와 삶의 철학을 그의 유일한 친구인 케스를 통해서 배운다. 빌리에게 케스는 친구이자 희망이다. 자유롭고 매섭게 주위를 정적으로 만드는 케스에게서 존경심까지 느낀다. 그래서 빌리는 사람들이 케스를 애완매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케스는 애완용으로 길들여지는 것이 아닌 맹수로서의 본성과 야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빌리와 함께 훈련될 뿐이다. 매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곧 죽음과도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에게도 다르지 않다.


빌리와 케스가 훈련하는 곳에 찾아온 선생님에게 빌리는 케스를 가리키며 "이렇게 옆에서 보게 해주는 것만도 제게 큰 선심을 쓰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케스는 빌리에게 이렇듯 자신이 경외하고 사랑하는 희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는 자유로운 케스처럼 되고 싶은 희망. 하지만 영화는 비극적이다. 경마에 배팅하라고 심부름으로 받은 돈을 케스 먹이 사는데 써버린 빌리에게 화가 난 형 쥬드가 케스를 더 이상 날지 못하게 만든 것. 어쩌면 진정한 자유에서 벗어난 케스에게는 정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빌리라는 좋은 친구가 있더라다고 새장 안 횃대는 케스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빌리는 형에게 있는 대로 악다구니를 해보지만 죽은 케스는 돌아오지 않는다. 케스를 빌리는 한 동안 끌어안고 그들이 함께 훈련하던 곳 한 켠에 묻어준다. 어쩌면 케스와 함께 빌리의 희망 역시 그를 떠났는지도 모른다.

켄 로치의 두 번째 영화 <Kes>는 아무래도 오랫동안 가장 인상깊은 성장영화 가운데 하나로 남을 듯 하다. 심각하게 우울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무작정 희망을 안겨주는 다른 해피엔딩 식의 성장영화가 아닌 삶의 고됨이 그대로 묻어 나는 빌리의 이야기가 두고두고 떠오를 것 같다. <KES>. 우연히 알았지만 내 이름의 영문 이니셜과 같다. 오늘부터라도 나 역시 죽지 않을 Kes를 품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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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2 01:55

<자유로운 세계> 윤리가 불가능한 세상

<자유로운 세계> 윤리가 불가능한 세상

Germany,England,Italy;2007;96min;color
Director:Ken Loach
Casting:Kierston Wareing, Julliet Ellis, Leslaw Zurek

켄 로치(Ken Loach)의 영화는 항상 진보, 좌파, 정의, 노동자와 연결돼 있다. 각각의 단어들이 책에서는 미묘한 차이를 갖겠지만 현실에서는 보수, 우파, 질서, 자본의 다른 편에서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개념 혹은 현상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켄 로치는 항상 진보적인 감독, 좌파 영화의 첨병, 전 세계 노동자의 대변자와 같은 수식어를 얻게 되었다. 그것이 그의 의도였든 아니면 그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만든 수사였든 그가 동시대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세계 유수의 감독들이 그에게 찬사와 존경을 보내고, 많은 관객들이 그의 신작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1967년 <불쌍한 암소(poor cow)>로 데뷔한 이래 25편 남짓의 극영화를 만들어 온 영국 출신의 노장 감독이 받고 있는 이 융숭한 대접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40년이 넘는 영화 인생을 통해 그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을 그려가고 있다. 그것은 곧 '인간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 종속된 인간이 해방되기를, 그래서 인간이 가진 본연의 선함이 실현되기를 그는 희망한다. 그의 영화가 현실에 대해 매서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그 안에서 따뜻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그 기저에 항상 '사람'이 있어서이다. "착취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말에서 그의 철학과 고집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때문에 켄 로치의 영화는 그가 태어난 영국이라는 공간과 현재라는 시간의 경계를 넘어선다. 그의 카메라는 내전을 겪었던 스페인(랜드 앤 프리덤)과 니카라과(칼라 송)에 머물렀다 미국의 이주노동자들(빵과 장미)을 건너 독립전쟁 시기 아일랜드(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까지 이른다. 

그의 영화들이 이렇듯 공간과 시간을 관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영화들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전지구적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착취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범람하는 현재 상황에서 어느 단일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동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그의 영화가 신자유주의가 대대적으로 전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현실 세계는 그의 희망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노동자에게는 빵 한 조각의 배부름 뿐만 아니라 장미 한 송이의 향기도 필요하다는 소소한 가치를 강조하는 그의 앞에 펼쳐진 세상이란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글로벌 자본에 영구적으로 종속되는 신자유주의의 범람일 뿐이다. 윤리와 도덕이 불가능한 세상. 그 세상에서 켄 로치는 그 거대한 물길을 돌리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영화를 통해 하고 있다.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최대 화제작 중 하나였던<자유로운 세계>는 켄 로치가 2000년 <빵과 장미> 이후 신자유주의의 추악함을 다시 한 번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다. <빵과 장미>가 미국으로 넘어온 멕시코 불법 이주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그렸다면 이번 영화는 동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으로 흘러온 노동자들에게 카메라를 비추고 있다. 직업과 경력,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자국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이들이 영국으로 건너와 이중 착취의 대상이 되는 모습이 켄 로치와 그의 영화적 소울 메이트라고 할 수 있는 폴 래버티의 손에 의해 영화로 태어났다. 이 영화의 원제가 <These Times>인 만큼 영화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동시대 국제질서의 중심에 정면으로 비수를 꼽고 있다. 국내 개봉 제목인 자유로운 세계와는 영 딴판인 절대 자유롭지 못한 세계가 비판의 핵심이다.

극중에서 앤지는 노동자다. 정확히 말하면 화이트 칼라의 노동자다. 그녀는 비유럽(정확히 말하면 영국과 서유럽이 아닌 모든) 지역의 노동자들과 그들을 필요로 하는 영국 내 기업을 연결시켜주는 일종의 헤드헌팅 업체에 근무하는 여성이다. 앤지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 하나 뿐인 아이를 부모님에게 맡겨두고 성희롱이 난무하는 회사에서 최고의 업무실적을 기록할만큼 일에 있어 헌신적이다. 하지만 부당한 인사조치로 인해 그녀의 월급쟁이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역할은 끝이 난다. 하루 아침에 그녀는 애 딸린 실업자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 순간 앤지는 노동자에서 스스로 이윤을 창출하는 사업가로 변신을 시도한다. 자신의 경력을 살려 친구와 함께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닌 착취자가 되는 것이다.

<자유로운 세계>의 핵심은 바로 노동자였던 앤지가 착취자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있다. 감독이 그토록 경멸하는 시스템 안에서 도덕과 윤리를 잃어버리는 착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앤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당장 법인을 만들 여력이 되지 않는 앤지는 일단 불법으로 노동자와 업체를 연결시켜 준다. 남자들에게 기죽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그녀는 가죽점퍼에 오토바이를 타고 강한 음성으로 스스로를 철저히 무장한다. 변한 겉모습과 달리 앤지는 기본적으로 위기에 처한 이란인 불법 이주 노동자가 일을 할수록 돕고, 그의 가족이 살 곳을 마련해 줄 정도로 선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앤지는 불법 이주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업계의 '진리'를 알게 된다. 시스템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앤지가 또 하나의 착취자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이제부터 그녀에게 도덕과 윤리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 하나뿐인 아들과 단둘이 살 수 있도록 될 수 있는 한 많은 '돈'을 모으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앤지의 변화는 결국 노동자들과의 갈등을 낳고 그녀를 파국으로 몰고간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빼돌리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주 노동자를 악용하는 모습에 친구 로즈가 떠난다. 뒤이어 강도로 변한 노동자들에 의해 그녀의 목적이었던 '돈'을 뺏기고 아들의 안전 역시 위협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결국 그녀는 노동자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또 다른 노동자로부터 더 큰 착취를 하게 되는 괴물로 변한다. 영화는 그렇게 비극적으로 끝이 난다. 마지막 앤지는 윤리와 도덕과 동떨어진 인물이 되어 있다. 그녀 입장에서는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시스템 안에서 윤리와 도덕은 애초에 거부의 대상인지도 모른다. 시스템은 사람들이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도록 종용한다. 그저 돈의 흐름에 충실히 따르도록 중독시킨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그것이 도덕이자 윤리가 된 것이다.


비서유럽 지역에서 넘어온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임금과 복지혜택 없이 일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빵이 필요해서 왔지만 장미 역시 원하는 사람들이다. 해당국가들은 이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육아, 교육, 근로복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외부에서 유입된 노동자들에 의해 현지의 인력들은 일자리를 잃는다. 일자리를 잠식당한 사람들은 분노의 화살을 이주민에게 돌리고 이는 원형 민족주의 재등장의 단초가 된다.(독일에서 나치가 재등장하는 예가 그렇다.) 결국 서로의 필요에 의해 모인 사람들끼리의 갈등이 태어난다.(최근 프랑스의 연이은 소요사태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인종과 종교, 민족 문제는 갈등을 강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다. 이것이 현재 영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당장 해결해야 할 고민이다.

이 문제는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의 사생아이다. 전 세계의 산업 구조를 강대국, 자본, 기업에 편하도록 짜맞춰놓은 신자유주의는 노동의 흐름 역시 변화시켰다. 주변국의 노동자들은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불법, 탈법 가리지 않고 미국과 서유럽 등 선진국으로 향하고 있다. 켄 로치는 앤지라는 한 여성의 변화를 통해 그 현상이 가지고 있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측면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올라가지 않는 경제 성장률과 실업, 이민 문제는 영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앤지가 처한 하나의 피할 수 없는 구조다. 그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힘이 약한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 속에서 갈등은 증폭되고 반복될 수밖에 없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해결책은 없을까?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원래 노동자들끼리 연대해 저항하는 촬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완성본에서 그 장면은 빠져 있다. 노동자들끼리로 국적과 피부색,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저항을 위한 조합 형태의 연대를 이루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해결책은 과연 없는 것일까? 감독은 여기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혹자는 이것을 켄 로치의 한계로 지적할지도 모르겠다.(켄 로치는 전작들에서 '행동'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글의 처음에서 강조했듯이 켄 로치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애정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그가 기대하는 것 역시 인간의 윤리와 도덕의 회복이다. 비록 현실 세계가 윤리와 도덕이 불가능한 시대지만 그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희망 때문에 그는 계속 영화를 만들어 내는지도 모른다.

P.S. 켄 로치의 영화는 사회성이 짙고 비판적이면서도 상당히 문학적이다. 이야기가 재미있고 구성이 탄탄하다는 의미다. (초기작 <케스>부터 최근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까지 적지 않은 영화가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켄 로치의 영화가 계속 기대가 되는 것은 반복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세계> 역시 이야기만으로 충분히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여기에 극의 대부분을 혼자 이끌고 있는 키얼스틴 워레잉(앤지)의 변화무쌍한 연기가 인상적이다. 벌써 촬영을 마친 다음 영화는 축구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영국인답게 켄 로치 영화에서 축구는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 전면에 등장하기는 처음이다. 벌써 기대가 된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고 들려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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