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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23 <레볼루셔너리 로드> 충돌하는 욕망들 - Who is right? (4)
  2. 2009.03.12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독일인의 사랑 (6)
2009.03.23 11:30

<레볼루셔너리 로드> 충돌하는 욕망들 - Who is right?


<레볼루셔너리 로드> 충돌하는 욕망들 - Who is right?


U.S.; 2008; 119min; Drama; Color
Director: Sam Medes
Cast: Leonardo Dicaprio, Kate Winslet, Kathy Bates, Michael Shannon

 
1925년 발표된 버지니아 울프의 네 번째 장편 소설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영국의 중상층 사람들의 하루를 담고 있다. 파티를 준비하는 댈러웨이 부인의 시선에서 시작하는 소설 속 이야기는 그녀와 연결된 여러 인물들의 내면과 의식을 농밀하게 훑고 지나간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군상들이 바로 그들이다. 영광 못지 않게 많은 상처를 안겨준 전쟁은 그들의 '삶'에 있어 현실성을 극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전장에서 가까운 누군가를 잃어버린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다름 아닌 살아있음(생존)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숨을 쉬고,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있다는 사실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충분조건이 되는 것일까? 적어도 버지니아 울프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그녀가 당시의 소설 양식을 거부하고 선택한 <의식의 흐름>을 통해 그토록 인물의 내면에 침잠했던 이유는 분명 인물의 존재는 밖이 아닌 안을 통해야만 볼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댈러웨이 부인> 속의 인물들은 과연 어떤가? 버지니아 울프가 만들어 낸 인물들은 모두 그녀의 펜끝에 자신들도 미쳐 감지하지 못했던 의식의 깊은 곳까지 드러내게 된다. 활자로 옮겨진 그들의 내부는 겉모습과 닮아 있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한 가지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어느 누구도 '확신'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파티를 열고, 휘트브레드는 권력을 탐하고, 브래드쇼는 사람들의 존경을 구하고, 브랜튼 여사는 명예를 떠받들고, 샐리는 평범한 주부의 모습에 안주한다. 모두들 각자의 방법으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확신에 찬 듯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자신의 삶이 진정으로 원하는 곳으로 흘러가는가?' 의 질문 앞에서 그들은 모두 주저한다. 댈러웨이 부인, 샐리, 피터의 삶은 그들이 젊은 시절 욕망하고 꿈꿨던 것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중년에 접어든 그들은 어디를 가든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누군가가 되어 있을 뿐이다. 이들은 모두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못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겉모습과 달리 이들의 안(內)은 회의와 의심으로 가득차 있다.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과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대부분은 전자의 승리로 끝이 난다. 이들의 반대편에 셉티머스가 있다. 모순적이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삶을 포기한다. 정상인의 루트에서 벗어난 그래서 정신병자라고 낙인이 찍혀버린 그는 일반적인 욕망의 잣대들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견디지 못한다. 그가 창밖으로 몸을 던진 이유는 '타인의 욕망'에서 '자신의 욕망(존재)'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댈러웨이 부인이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는 셉티머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 마음이 동요하는 이유는 분명 그녀 역시도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현실적 욕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욕망들은 모두에게 공유되고 있는 것들이다.(그 욕망은 '수상'으로 요약된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타인을 바라보며 마음의 안도감을 얻는다. "내가 틀리지 않게 살고 있어..." 그 안도감은 댈러웨이 부인이 한없이 못마땅하면서도 그들을 파티에 불러 모으는 이유이다.
 

샘 멘더스의 새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한 중산층 가정의 위험하고도 위태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작 <아메리칸 뷰티>를 통해 미국 중산층 가정의 모순과 허위를 풍자적이면서도 극적으로 그려냈던 감독은 이번에도 역시 평화롭기만 해보이는 한 가정의 은밀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결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가 알고 알고, 모두가 갖고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순간 그 폭발력을 감당할 수 없어 평생을 없는 척 묻어둬야 하는 그런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솔직히 영화를 보면서는 <레볼루셔너리 로드> 역시 <아메리칸 뷰티>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 갇힌 사람들의 파국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일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생뚱맞은 생각도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담고 있는 엄청난 텍스트를 곱씹을수록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 계속해서 생각의 이곳저곳을 파고들었다. 앞에서 소설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길게 풀어쓴 이유이기도 하다. 

공간도 시대도 다른 두 텍스트가 오버랩되는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어쩌면 각각 1차 대전과 2차 대전 직후라는 상황적 유사성이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소설과 영화 속의 캐릭터와 그 인물들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이야기에 있다.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은 댈러웨이 부인을 닮아 있고,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피터와 리차드를 섞어놓은 듯하다. 존(마이클 새넌)은 셉티머스의 또 다른 모습이고, 그들을 둘러싼 이웃은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장에 모인 사람들과 연결된다. 이 인물들은 모두 욕망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욕망은 한 개인의 내부에서부터 충돌을 일으킨다. 하지만 결국 선택되고, 행동으로 옮겨지는 욕망은 사회가 허용하고 합의한 범주 내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공허하고 희망은 없더라도 최소한 다른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안도감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그 범주에서 벗어난 욕망을 시도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부러움을 느끼지만 그보다 더한 '공포'를 느낀다. 사람들이 정신병자로, 낙오자로, 부적응자로 그 이탈자를 낙인을 찍는 이유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인물들 역시 평범한 듯, 평화로운 듯 살아가지만 각자의 욕망을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욕망이 표출되었을 때 갈등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욕망

애이프럴(케이트 윈슬렛)은 특별하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직업과 이름을 묻는 대신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냐." 고 묻는다. 그리고 그와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동화 속에나 있을 법한 교외의 조용한 마을(Revolutionary road)에 살고 있는 그녀는 중산층이라면 누구가 꿈꾸는 부족함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욕망하는 바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재능이 없음에도 연극배우를 놓치 않는 것은 뭔가 다른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무대가 아니면 청소와 빨래, 육아로 정작 자신은 누구인지 잃어버리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사는 삶에 숨이 막힌다. 피터의 <영혼의 죽음>이라는 말이 댈러웨이 부인을 도망치게 했던 것처럼, 범부의 삶은 애이프럴에게 영혼이 없는 삶일 뿐이다. 애이프럴은 스스로 욕망을 이룰 방법을 잃어버렸을 때, 자신의 욕망을 남편을 통해 이루고자 한다. 모든 안락하고 보장된 환경을 뒤로하고 파리로 떠나고자 했던 것. 애이프럴은 파리가 남편의 진정한 삶을 찾아줄 수 있는 곳이라 믿었다. 하지만 사실 파리는 남편의 욕망이 아닌 그녀의 욕망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 욕망이 좌절됐을때 그녀는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다. 자신의 욕망을 좌절시킨 남편에 대한 실망과 뱃속의 아이에 대한 원망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만약 댈러웨이 부인이 리차드가 아닌 피터와 결혼을 했다면 그녀 역시도 애이프럴과 닮아 있지 않았을까? 

그의 욕망

애이프럴에게 파리로 가자는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프랭크는 비웃으며 "Great!!!"를 연신 외친다. 현실성 제로의 제안이 당황스럽고 황당했을 뿐이다. 하지만 평범한 회사원으로서의 공허한 일상과 희망이 없는 미래에 그 역시 지쳐가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탈이란 아내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아내의 계속된 설득에 프랭크 역시 파리에 대안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금씩 갖게 된다. 결국 그는 가족과 함께 파리에서 자신의 진정한 삶을 찾을 계획을 세운다. 한동안 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날 기대감으로 행복에 취해 있지만 일상의 욕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그를 포기하지 않는다. 회사의 승진 제안과 아내의 임신은 그가 '현실의 욕망'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리고 전혀 다를 수 있었던 삶을, 그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을 기회를 포기한다. 그에게는 "미래의 무엇"이 아무리 핑크빛일지라도 그것을 위해 현재의 모든 것을 내던질만큼의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누구나 탐을 낼만한 달콤한 현실의 욕망들이 있다. 문제는 "혁명적 길"을 포기한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와 존(마이클 새넌)의 시선이다. 프랭크는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려 하지만 아내와 존에게 자신은 그저 내면의 욕망에 애써 침묵하는, 또 한 명의 범부가 되려는 비겁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 시선을 견디기 힘들다. 그에게 파리는 처음부터 실현되지 않을 꿈이었을지 모른다. 그저 퇴근 시간 건물에서 우르르 몰려 나오는 직장인들이 술자리에서 희망 없이 내뱉는 레퍼토리처럼 말이다.


그리고 타인의 욕망

영화의 배경이 되는 레볼루셔너리 로드... 그곳은 미국의 안정적인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평화로운 곳이다. 미국인 누구라면 꿈을 꾸는 그런 곳이다. 그 곳에 프랭크 부부가 이사를 온다. 중개인 헬렌의 말처럼 마을에 가장 어울리는 부부일지 모른다. 비슷한 일상을 즐기고, 꿈을 공유하며,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 헬렌이 자신의 아들 존을 프랭크 부부에게 소개시켜주는 이유 역시 그들 부부에게서 '건전한 상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프랭크 부부가 파리행을 결정했을 때 그들의 기대는 무너진다. 앞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철없고 대책없다고 단정한다. 프랭크 부부가 모두가 공유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동이 자신들의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 두려워한다. "어리석은 짓이야." 남편 셉의 말 한 마디에 밀리는 눈물을 쏟아낸다. 아마도 그녀는 남편의 말에서 자신의 가정은 그런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레볼루셔너리 로드 사람들에게 일상은 절대적이고, '변화'는 두렵기만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비춘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허황되지 않은 건전한 욕망이라는 확신과 안심을 얻는다. 다른 욕망이 있더라도 절대 밝혀서는 안 된다. 아예 없던 것처럼 여기고 살아야 한다. (셉 캠벨은 애이프럴에 대한 욕망을 끝까지 함구한다.) 만약 누군가 그 확신에 돌을 던진다면 더 이상 좋은 이웃과 친구가 될 수 없다. 마치 "존"이 정신병자가 된 것처럼 말이다. <댈러웨이 부인>의 셉티머스와 닮아 있는 존 역시 끝없이 '전향'을 요구받는다. 그가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방법은 일상은 공허하지 않고, 그 곳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전향)이다. 하지만 셉티머스가 전향을 거부하고 창밖으로 몸을 던졌듯이, 그 역시 사회의 요구에 저항한다. 마음이 통할 것이라고 믿었던 프랭크 부부에게서 얻은 실망은 그래서 더욱 거칠게 폭발한다. 애이프럴의 욕망, 프랭크의 욕망,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타인의 욕망은 모두 다르다. 솔직히 그들 각자가 어떤 욕망들을 갖고 사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들이 평화를 유지하며 사는 방법은 그저 일상을 벗어나지 않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목표들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단지 나른한 봄날 어쩌다 한 번 씩 생각하는 달콤한 욕망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과연 누가 옳은가?

샘 멘더스의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리차드 예이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원작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감독은 영화에서 과연 누가 옳은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누가 옳은 것인가? 당신은 누구의 편에 서겠는가? 불필요한 욕망은 접어둔 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들은 내심 프랭크 부부의 성공적인 파리 안착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영화니까 가능하겠지..." 라는 생각을 갖으면서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애이프럴의 입장에서 그녀의 시도와 절망에 계속 마음이 쓰인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눈앞의 보장된 성공을 선택한 프랭크를 비겁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정확히 모른채 무작정 파리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 애이프럴의 욕망이었다. 가장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현실의 벽을 높게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주고자 헌신했지만 절망감에 아이를 스스로 포기한 애이프럴은 동정 받을 수 있을까? 그녀에게 도덕적, 윤리적 잣대만을 들이댄다면 절대 그럴 수 없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며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었던 그녀가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을 때 느꼈을 박탈감은 여전히 그녀는 보듬게 만든다. 그녀에게는 앞으로 '영혼이 없는 삶'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애이프럴에게는 의미 없는, 곧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이다.


이렇게 보면 누가 옳은가의 질문은 무의미하다. 어찌 보면 옳고 그름의 질문 자체를 봉쇄하는 것이 프랭크와 애이프럴, 그리고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회의와 염증을 가졌던 존은 정신병자가 됐고, 도전하고자 했던, 벗어나고자 했던 애이프럴에게 찾아온 것은 결국 비극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를 유지시킬 수 있는 욕망일 뿐이다. 다른 것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사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메리칸 뷰티>에서 통쾌한 일탈을 시도했던 래스터 번햄은 '비극적 해피엔딩'을 맡는다. 릭키의 말처럼 그의 죽음은 일면 아름답다. 하지만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결말은 수식어가 필요 없는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이 아직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현실이다. 미국이든, 대한민국이든 어디에도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P.S. 1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이젠 두말 할 필요가 없겠다. 솔직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은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더 어울린다.(<더 리더>에서의 연기가 더 못하다는 말이 아니다. <더 리더>는 한나의 이야기라기보다 마이클의 영화기이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선이 굵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디카프리오 역시 프랭크의 캐릭터를 잘 소화한다. 하지만 수염을 깍은 말쑥한 얼굴의 디카프리오는 너무 동안이다. 살을 찌워 몸은 자연스럽지만 같은 또래의 케이트 윈슬렛이 가지고 있는 원숙함이 그의 얼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애이프럴과 프랭크는 부부라는 느낌이 다소 들지 않는다. (어떤 때는 엄마와 아들 같기도 하다.) 동안도 배우에게는 꼭 좋은 것만은 아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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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2 12:30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독일인의 사랑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독일인의 사랑


German, U.S.; 2008; 123min; Drama; Color
Director: Stephen Daldry
Cast: Kate Winslet, Ralph Fiennes, David Kross, Bruno Ganz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법을 어겼다. 죄는 단지 법률에 어긋난 행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양심과 도덕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적법'한 절차를 통해 죄에 응당한 처벌을 받는 것 뿐이다. 그 결정은 물론 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법을 행사할 수 있는 힘(사법권)은 국가만이 독점할 수 있다. 이것이 법치주의이고,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총이나 칼을 들고 피의자를 단죄하는 '친절한 금자씨'와 같은 행동은 또 다른 단죄의 대상이 될 뿐이다. 사적인 집행은 법치의 논리에서 엄연한 위법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범죄자는 검찰의 기소와 법원의 재판을 거쳐 판사에 의해 '형'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적법한 절차가 과연 '범죄자의 속죄'를 담보하는 것일까? 범죄자에 대한 법 집행의 목적은 사회 질서의 유지를 위한 것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범죄자의 교화에도 있다. 죄를 뉘우치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거듭나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기능과 목표에 군더더기 남지 않는 설명이 어렵다면, 법의 집행은 그저 주어진 형을 채우는 것 외에는 큰 의미가 없다. <밀양>의 유괴자처럼 온전한 속죄는 법에 의해서가 아닌 하느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양심에만 기대야 하는 것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이런 복잡한 생각을 보기 좋게, 사용하기 편하게 정리한 것이 '법' 아닌가...) 

이건 분명히 개인의 수준이었다. '한 명'의 문제라면 그렇게 어렵지 않을수도 있다. 솔직히 우리가 살을 대고 같이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법원의 엄중한 판결이나 감옥에 가기 전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속죄하기 위한 무던한 노력을 할 것이다.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만약에 범죄의 대상이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집단의 기억, 집단의 행동은 개인에게 더할 나위 없는 면죄부가 되기 마련이다. "왜 나한테만 잘못했다고 그러는가. 숱한 사람들이 나와 같은 행동을 했다. 그 사람들을 모두 내 앞에서 나와 같이 처벌하라."고 목을 높인다면 그에 대한 깔끔한 대답은 무엇이 가능할까. 법원의 판사는 단지 "더럽게 운이 없게도 당신만 꼬리가 잡혔어요." 라며 증거가 될만한 것들을 피고 앞에 던져줄 수 있을 뿐이다. 만약에 '한 국가' 전체가 피의자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피해를 입은 이웃의 나라들이 현대식 무장을 하고 국경을 넘어 단죄를 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역사적으로 가장 간단하고 빠른 해결책은 그랬다. 그렇다면 이 집단의 피의자들은 타(他)국가들에 의해 부과된 형벌을 달게 받으며,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을 갖게 될까? 만약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들의 '속죄'는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이 속죄의 역사는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고민으로 가장 치열하게 20세기를 보낸 국가를 꼽으라면 단연 '독일'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20세기의 반토막을 통째로 전쟁통으로 몰아 넣은 이 무시무시한 국가가 행한 짓은 역사책에 기록하기도 죄스러울 정도였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집단의 광기가 얼마나 폭발적인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두고두고 후세 사람들에 경계시킬 수 있는 "모범적인 사례'를 남겼다.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가져온 이들에 대한 단죄는 물론 그들과 맞서 싸운 국가들에 이루어졌다. 독일은 프랑스에 영토를 할양했고,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네 토막으로 분열돼 감시하에 놓이게 됐다. 하지만 이런 전범 처리는 공식적인 것일 뿐이다. 과연 엄청난 만행과 그에 대한 조치들이 독일인들의 양심에 죄책감을 심어주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속죄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피의자로서의 역사는 후세대에 어떻게 기록되어야, 기억되어야 하는 것일까?  더 나아가 이들의 '치유'는 어떻게 가능할까?

독일인들에게 추악한 과거는 도망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공식적인 전후 처리는 끝났을지언정, 그들은 여전히 죄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독일의 총리는 때가 되면 이스라엘 국회에서 고개 숙여 사과를 하고(일본의 수상이 우리 국회에서 지난날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는 장면을 떠올린다면 이건 엄청난 일이다.), 나치의 광기가 재점화 되는 것에 대해 극도로 민감하게 대처하고 있다.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스스로 전쟁 시절 만행을 폭로해왔고, 이는 앞으로 국제사회의 평화를 지향하는 일원이 되겠다는 다짐이었다. (요즘 다시 나치들의 날뛰고 있긴 하지만) 독일에서 나치는 더 이상 영광의 역사가 아닌 치욕의 역사일 뿐이다. 씻을 수 없는 죄의식... 문제는 이제 '치유'의 수준이다. 죄인에게 절대 씻기지 않을 죄책감이면 됐지 무슨 치유가 필요하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들이 가지는 죄의식, 죄책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치유 없는 죄책감'이 잘못 됐을 경우 더 큰 폭력을 야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치유는 피해자 뿐만 아니라 피의자의 수준에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단지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죄인들의 잘못을 용서해줄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치유는 타자에 의해서가 아닌 그들 스스로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엄청난 광기의 시대를 숨죽이며 살았던 사람들과 그 이후 세대들이 짊어져야 했던 죄의식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빌리 엘리어트>와 <디 아워스>의 스티븐 달드리의 세 번째 장편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먼저 상영됐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효과 였는지 상영 때마다 매진이었다.) 베른하라트 슐링크의 1995년 소설을 토대로 한 <더 리더>는 원작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을 완벽하게 스크린으로 옮기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누구나 가질 법한 첫사랑의 알싸한 기억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결코 달달하게 끝낼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도덕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문제제기, '법'이 가질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한계, 인간과 집단의 죄의식, 그리고 치유를 위한 은유까지... <더 리더>는 나치가 범한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굉장히 지적인 서사를 풀어낸다. 그리고 이 서사는 이제껏 홀로코스트 관련 영화들이 미치지 못했던 경계를 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홀로코스트 영화들은 역사적 사실의 고발이나 폭로의 단계에 집중되어 있던 점이 사실이다. 물론, 그 시도 자체도 충분한 의미를 갖지만 <더 리더>는 이를 넘어 '속죄'나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법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영역'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굉장히 특이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그 메시지까지 독일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난 개인이든, 집단이든 '지울 수 없는 죄의식의 역사'를 가진 이들에게 공히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더 리더>의 이야기가 강렬하고 집요하게, 아름답고 따뜻하게 담아내고 있는 문제들은 분명 인간 보편의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열 다섯의 마이클이 비가 많이 내리는 이른 봄 열병을 앓는 것에서 시작한다. 온몸이 고열에 시달리는 병은 마치 사춘기 시절 강렬하게 시작되는 첫사랑과도 닮아 있다. 그리고 마이클은 우연처럼 그를 도와준 16살 연상의 전차 검표원 한나를 사랑하게 된다. 반듯한 모범생에 지나지 않았던 마이클은 무더운 여름 만큼 그녀와 진한 사랑을 나눈다. 그녀를 통해 남자가 되고, 아이가 아닌 어른이 된다. 하지만 책을 읽어주는 걸 유난히 좋아하던 한나는 어느 날 이유를 남기지 않고 그를 떠난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만난 곳은 8년 후 법정.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세미나에서 참관한 한 법정에서 피고인으로 앉아 있는 한나를 보게 된다. 그녀의 죄는 전쟁 시기 나치당원으로 유태인 홀로코스트에 가담했다는 것. 마이클은 첫사랑을 만났다는 기쁨보다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자신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너무도 참혹한 죄를 저지른 한나가 '적법'한 처벌을 받는 모습을 지켜볼지, '죄인'이라는 주홍글씨에서 그녀를 구해줘야 할지, 그녀의 비밀을 지켜줘야 할지... 마이클은 치열한 고민 끝에 결국 침묵을 지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이클은 '감정'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결혼을 했지만 아내에게도 심지어 딸에게까지 마음을 주지 못한다. 죄인을 사랑했던 기억, 지금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 그녀를 구하지 못한 미안함이 그에게 있어 하나의 죄의식으로 남아 있다. 그 죄의식과 함께 변호사가 된 지금 당시의 판단이 과연 옳았는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형체를 알 수 없게 얽혀 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공유할 수 없는 그 만의 '비밀'이 된 채 말이다. 마이클은 시간이 흘러 성장한 딸과 함께 찾은 고향집에서 한나와의 추억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가 한나에게 읽어줬던 책들... 마이클은 그 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기억하려 하지 않았던 과거로부터 현재 엉망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마이클은 다시 한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곧 자신의 과거 속에서 또렷하게 살아 있는 죄의식과 대화를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글을 익힌 한나로부터 편지가 오지만 그는 답장을 하지 않는다. 아직 그 죄의식의 실체와 대면할 준비가 안 된 듯 말이다. 다시 시간이 흘러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한나가 가석방을 앞두고 그에게 연락이 온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위해 일할 곳과 살 곳을 마련한다. 

석방을 일주일 앞두고 긴 세월을 돌아 다시 만나게 된 한나와 마이클. 하지만 그들의 변한 모습만큼이나 둘의 만남은 전혀 감격적이지 않다. 수감 기간 동안 배운 건 '글' 뿐이라는 한나의 모습은 마이클이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한나의 입을 통해 진정한 속죄와 치유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죄의식에서 가벼워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색하게 헤어지고 난 후 마이클은 한나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그녀가 남긴 건 짧은 편지와 수용소의 피해자들 몫으로 남긴 그녀의 전재산이다. 그리고 마이클은 미국으로 건너가 "한나 자신이 해야 했던 일"을 대신한다. 영화의 마지막, 마이클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비밀을 딸에게 들려준다.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듯 말이다.


마이클이 가진 죄의식의 실체는 한나이다. 자신보다 16살이나 많은 여자를 사랑한 것에 대한, 진한 에로티시즘에 빠진 것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너무도 참혹한 죄를 저지른 죄인이며, 그녀에게서 어떤 참회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마이클이 여전히 그런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생 그녀 아닌 누구도 마음에 담지 못할 만큼 그의 인생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한나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이 그녀가 행한 모든 행동들과 그녀를 사랑하는 마이클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곧 마이클이 가진 죄의식에 대한 치유는 한나를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리더>에서 마이클이 사랑하는 한나는 두 가지 은유를 갖는다. 하나는 '독일 그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나치에 복무했던 평범한 독일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이클이 평생을 떠안은 죄의식은 곧 사랑하는 모국 독일에 대한 죄의식이기도 하면서, 나치에 복무했거나 그에 침묵했던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죄의식이기도 하다. 법대 세미나 장면에서 교수와 학생들은 법정 판결을 두고 열띤 논쟁을 벌인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친구 볼커는 전쟁 시기 유럽에 수용소가 수 천개였으며, 그 곳에서 일한 셀 수 없는 나치들이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에게 한나와 같은 사람들은 최소한의 도덕적 양심마저 잃어버린 파렴치일 뿐이다. 마이클은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말을 내뱉는 마이클 마저도 그의 목소리에 힘을 실지 못한다. 그리고 '법의 한계'를 부르짖는 볼커의 거침없는 주장에 한 학생은 더 듣기가 괴로운 듯 강의실을 박차고 나간다. 그 역시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나치를 위해 일했던 누군가를 침묵한 채 살고 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죄의식을 가진 '또 하나의 마이클'이다. 이런 점에서 한나가 독일 내지는 나치를 위해 죄를 저지른 독일인들을 환유한다면, 마이클은 그들 때문에 평생 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독일 사람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이후 영화는 마이클이 자신의 죄의식과 직면하고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이는 곧 사랑하는 국가와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평생 죄의식에 시달렸던 평범한 독일 사람들을 위한 치유이기도 하다. 법정에서 처음 한나를 보고 그녀를 찾아 갔을 때, 마이클은 몇 걸음 앞에서 방향을 돌린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녀 앞에서 왜 마이클은 걸음을 돌렸을까? 그녀를 만나기 전 참혹한 홀로코스트 현장을 둘러보며 그는 '사랑하는 한나'가 아닌 '추악한 죄를 짓고 형무소에 갇힌 한나'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첫사랑의 존재이자, 죄의식의 실체였던 한나라는 모순적인 존재로 인해 편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긴 시간이 흘러 가석방을 앞둔 한나와 다시 만났을 때, 그는 한나에게 과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감옥에서 배운 게 무엇인지 묻는다. 이것은 마이클이 죄의식에서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수 있는 필요조건이다. 누차 말했듯이 마이클의 죄의식은 한나를 통해서만 덜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판사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느냐." 며 어쩔 수 없었던 입장을 호소하던 한나는 마이클을 만나고서야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에게 절대 지워지지 않을 상처와 죄책감을 남긴 것이다. (나치는 곧 독일인들이 갖는 죄의식의 실체이다.) 마이클이 돌아간 후 결국 한나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전 재산을 피해자들에게 전한다. 그것이 잘못된 선택에 대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죄인듯 말이다. 그리고 마이클은 그녀를 대신해 피해자에게 힘든 용서를 구한다. 그 용서에는 평생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함께 담겨 있다. 빗장에서 자유로워진 마이클의 비밀은 결국 그를 치유하는 시작이 됐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그는 '딸'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치 독일이 가진 죄의식의 역사가 앞으로 어떻게 기억되고, 기록되어야 하는지 암시하듯...


덧붙여 처음 얘기했듯이 <더 리더>가 홀로코스트라는 특수한 상황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 메시지는 보편적인 울림을 갖고 있다. 해방 후 15년과 20년 동안 각기 두 명의 지도자에 의해 독재를 경험한 우리에게도 마이클의 치유는 적지 않은 메시지를 던져 준다. 아직까지 이어지는 독재의 흔적들과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역사를 어떻게 기억해야할 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더 리더>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뜨거워지게 하는 영화를 만났다. Thak you...





P.S. 1 책과 영화가 나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치를 미화하는 작품이라는 비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효자동 이발사>가 박정희를 미화했다는 평가만큼이나 텍스트 자체를 통째로 오독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더 리더>는 한나를 이해해야 한다는 텍스트가 절대 아니다. 그녀 때문에 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마이클'이 스스로를 치유해가는 이야기이다. 그 치열한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때문에 케이트 윈슬렛이 미치도록 연기를 잘하는게 오히려 흠이 될 수도 있겠다.) <더 리더>와 <효자동 이발사> 모두 엄청난 광기의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영화이다. 단지 엄청난 힘에 눌려 그 시대를 침묵했던 약한 사람들을 그렸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비판은 설득력에 없어 보인다. 

P.S. 2 두 편의 영화가 생각났다. 한 편은 루이 말의 <라콤 루시앙>, 다른 한편은 코스타 가브라스의 <뮤직박스>이다. 많은 부분에서 한나는 루이 말의 '라콤 루시앙'을 닮아 있다. 우선, 정치적 목적이 아닌 먹고 살기 위해 나치에 복역하게 된 점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철저하게 감정의 이입을 막고 있는 캐릭터이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법적, 도덕적 판단의 기준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이클은 <뮤직박스>의 앤(제시카 랭)을 연상시킨다. 그녀 역시 변호사이면서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 나치에 복무한 혐의 때문에 법정에 서게 된 아버지를 변호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죄가 진실이었음을 알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캐릭터이다. 앤 역시 사랑하는 아들에게 치욕적인 죄의식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과연 아이에게 진실된 치유가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후회가 남지 않을 선택을 한다. 어쩐지 비밀을 공유하는 부녀의 뒷모습을 비추는 <더 리더>의 엔딩과 바닷가 벤치에 앉아 있는 모자의 뒷모습을 비추는 <뮤직박스>의 엔딩은 서로 무척이나 닮아 있다.

P.S. 3 배우들의 연기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케이트 윈슬렛은 두말 할 것도 없고, <다우트> 못지 않게 모든 배우들이 참 매력적이었다. 마이클의 어린시절을 연기한 데이비드 크로스는 이제 갓 19살인데도 한나로 인한 복잡한 감정들을 무리없이 소화한다. 그에게는 '용감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당할 것 같다.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나는 레나 올린은 1인 2역을 맡는다. 유태인 피해자 어머니와 딸의 역할을 동시에 소화하는데 감독이 의도한 바가 분명 있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갓 사우나를 한 것 같은 얼굴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랄프 파인즈 역시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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