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장커'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8.08 어데로 가야할꼬...
  2. 2009.02.17 <소무> 거장의 탄생
  3. 2009.02.08 <24시티> 기록자으로서의 카메라
2009.08.08 17:08

어데로 가야할꼬...


어데로 가야할꼬...


가끔 "담임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살면서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놓일 때 특히 그렇다. 더구나 나이에 비례해 선택의 순간들은 점점 많아지고, 무게감 역시 육중해진다. 초, 중, 고 늘 옆에 있을 때는 그렇게 귀찮고 성가시기 그지없던 존재가 이제는 아쉽기만 하다. 12년 공교육이 이리도 사람을 타성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이거 해!!!" 라고 썩소를 날려줄 누군가가 필요한 건 어쩔 수 없다. 그토록 내 인생은 나 혼자 결정하고 이끌어갈 수 있다고 자부했건만 그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저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혹시 다른 변수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가만히 그냥 있는 게 좋을까..." 나이는 생각의 곁가지들만 무성하게 키웠을 뿐 결단력에는 물과 거름을 야박하게 준 것 같다.

궁시렁 대면서도 누군가의 말에 의지해 방향을 잡고 한 발 내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이제와 담임 선생님을 찾는 건 그 만큼 나이가 더할 수록 인생의 멘토를 찾기 어렵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순간부터 인생의 멘토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 주위의 누군가가 됐든, 역사 속의 인물이 됐든, 아니면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성공시대나 무릎팍 도사에 나올 누군가가 됐든 그건 개인의 선택이다. 내 그릇에 어울리는, 그래서 내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오늘부터 저 사람을 내 삶의 멘토로 삼겠어!" 떵떵거리고 선언하는 건 아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의식하게 될 때 그 누군가는 멘토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내게 있어 그런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니 누구일까?

부모님이라는 행사용 멘트는 차치하고 내가 지금까지 좇아왔던 멘토들은 책과 영화를 통해 만나왔던 것 같다. 박경리와 황석영... 그들이 살아온 삶과 상관없이 문장을 통해 그들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문장을 통해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고, 그 궤적을 훑어가는 과정에서 둘은 내 삶의 방향타로 자리를 잡았다. 조변석개하는 역사적 순간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생각과 행동, 문장을 일치시키고자 애쓴 흔적들이 마냥 멋있게 보였던 것 같다. 박경리가 지난 해 그토록 경외하던 '땅'의 부분이 되었고, 남은 건 황석영이었다. [오래된 정원]을 읽으며 뒤늦게 황석영의 작품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초기작까지 뒤져가며 거의 모든 작품들을 손에 잡았다. 네이버에 청년을 위한 소설 연재를 시작할 때도, 무릎팍 도사에서 예능에 어울릴 법한 과장된 몸동작을 보여줄 때도 여느 무게 잡는 작가들과 다른 그의 행적들을 응원했었다. 하지만 그가 얼마 전 '그 분'과 함께 중앙아시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모습은 내게 숱한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표 만을 남겼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는 믿을 수 없은 말들, 그리고 그에 대한 황석영 자신의 길고 긴 해명과 같은 글... 무엇이 진실이든 한쪽에서는 '변절자'로, 다른 한 쪽에서는 '첩자'로 전락한 그의 모습 자체가 내게는 상처였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의 글을 읽겠지만, 풀리지 않을 물음표들은 그를 예전처럼 대할 수 없게 만들 것 같다.

그리고 최근 신문기사에서 또 하나의 이름을 발견했다. 영화면이 아닌 국제면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문장을 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분명 문화부 기자였다면 그의 이름은 자장커가 아닌 지아장커라고 적었을 것이다. 페이지를 잘못 잡아 이름조차 낯선 그 이름이 그가 아니기를 바랐지만 우려는 현실이었다. 호주에서 열리는 멜버른 영화제에 중국 영화 감독들이 보이콧을 선언했고 그 가운데 지아장커가 있었다. 위구르 자치구 소요 사태의 배후로 지목 받은 레비야 카디르의 다큐멘터리(제프 다니엘스 감독)가 상영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중국의 해커들은 영화제 홈페이지를 급습했고, 지아장커 역시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물론 멜버른 영화제가 충분히 정치적인 의도에서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정치적인 쇼라면 꼭 정치적인 쇼로 답을 했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어느 쪽의 편을 들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지아장커라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대응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데뷔작 <소무>부터 시작해 최근작 <24시티>까지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영화를 난 좋아했다. 그리고 그 온기는 모두를 향해 있음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의 이름 앞에 하나를 추가시켰다. 그는 '중국인' 영화감독이었다. 이제 그가 어떤 따뜻한 영화를 만들어도 모두를 향한 '보편적 메시지'는 찾기 힘들 것 같다.

어찌 멘토가 사람만이 될 수 있을까. 물건이든 공간이든 마음을 붙일 수 있다면 충분한 자격 요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사이 멘토와도 같았던 공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화문 아트플러스 극장의 터줏대감 씨네큐브가 문을 닫을 지도 모른다는 소식... 백두대간이 10년 가까이 운영해 오던 씨네큐브에서 방을 뺀다고 한다. 흥국생명에서 단독으로 운영을 한다고 하니 정확히 말하면 당분간 씨네큐브가 문을 닫는 것은 아닌 듯하다. (물론 내년 3월 이후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음식맛이 좋았던 단골집도 주인이 바뀌면 이전만 못한 법이다. 20살 상경해서 지금까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숱한 기억과 추억이 그 곳에 있다. 해머링맨도, 씨네큐브도 그대로 있겠지만 이 친구들을 바라보는 나는 전과 같지 않을 것 같다. 술에 취한 주인을 실고 천관녀를 찾은 김유신의 말처럼 나 역시 광화문 사거리에서 무의식적으로 씨네큐브로 향할지 모를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이젠 여기가 아니야..." 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백두대간은 이대의 아트하우스 모모로 자리를 옮긴다고 한다. 부디 그곳을 통해서라도 오래된 친구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러가지 확인되지 않은 "썰"들이 난무하지만 무엇이 진실이든 인사는 해야할 것 같다. "그 동안 덕분에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씨네큐브!!!" 

여하튼 하 수상한 시절... 여러가지 방향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몸과 마음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겠다.




Trackback 0 Comment 0
2009.02.17 16:36

<소무> 거장의 탄생


<소무> 거장의 탄생


China; 1997; 105min; Drama; Color
Director: Jia Zhang-ke
Casting: Wang Hong-Wei, Hao Hong-Jian

 
1997년, 향후 10년 간 중국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감독으로 기억될 지아장커는 자신의 고향을 담은 영화 <소무>로 세상에 첫 이름을 새겼다. 최근작 <스틸 라이프>와 <24시티>로 이어지는 작품을 통해 현대의 중국과 중국인을 가감없이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지아장커 영화의 뿌리는 다름 아닌 자신이 나고 자란 '샨시성' 마을과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그는 16mm의 거친 필름에 익숙한 삶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에 적응해야 했던 동시대 중국인들을 담았던 것이다.

지난 11일 막을 내린 씨네큐브 광화문의 지아장커 감독전에서 그의 데뷔작 <소무>를 봤다. 이 때가 아니면 극장에서 다시 보기 힘들 것 같은 다급한 마음에 아침부터 부랴부랴 극장을 찾았다. 마지막 상영이어서 그런지 평일 아침 이른 시각이었는데도 사람들이 꽤 많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이들도 일찍 집을 나섰으리라. 상영관에 불이 꺼지고 익숙하지 않은 색감의 16mm 필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적한 시골길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주인공 '소무'가 나타났다.


소무는 소매치기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부모와 형제들이 있지만 그는 일찌감치 '성공'을 위해 혈혈단신 도시로 나왔다. 하지만 배운 것도 없고, 밑천도 없는 소무가 생면부지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가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한 일은 다름 아닌 소매치기... 감옥에도 몇 번 다녀왔지만 여전히 버스와 시장 등지에서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경찰은 치안강화를 위해 범죄자를 엄하게 처벌할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지만 소무는 다른 대안이 없다. 사냥감을 쫓아 하루 종일 초원을 어슬렁거리는 야수처럼 그 역시 사냥감을 찾아 도시의 구석구석을 살필 뿐이다. 소무 주변의 사람들은 그런 그를 안쓰럽게 바라본다. 새로운 환경에 약삭빠르게 적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누군가의 주머니만 살피고 다니는 그가 어쩐지 한심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소무 입장에서는 그런 친구들이 있다는 게 고마울 뿐이다.

하지만 우연히 들른 친구의 가게에서 죽마고우 샤오닝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된다. 성공을 위해 같이 고향을 떠나 소매치기까지 같이 했던 친구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소무는 배신감마저 느낀다. 이제는 손을 씻고 TV에 나올 만큼 청년사업가로 성공한 샤오닝은 소무로 인해 자신의 불편한 과거가 드러날 것이 걱정이다.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소무는 자신에게 더 없이 냉랭한 샤오닝이 야속할 뿐이다. 어쩐지 새로운 환경에 발빠르게 적응하며 모든 것을 이룬 샤오닝에 대한 부러움도 있어 보인다. 없는 살림에 축의금까지 만들었지만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샤오닝은 이마저도 거절한다. 

답답하고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소무는 술집을 찾는다. 적당히 갈 곳도 없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노래를 잘 부르는 여종업원 메이메이를 만난다. 가수의 꿈을 안고 도시에 왔지만 가족에게 말도 못하고 술시중이나 들고 있는 그녀에게 소무는 이상하게 자꾸 마음이 쓰인다. 꼭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마음을 나누려 한다. 아주 서투르고 어설프지만 소무는 진심을 담았다. 그녀를 위해 생전 부르지 않던 노래도 배웠고, 그녀를 위해 반지도 샀다. 하지만 그녀는 곧 '부자'를 만나 타이위안으로 떠난다. 소무는 결국 시골의 가족을 찾아 가지만 그 곳 역시 그가 있을 곳은 아니다. '가족'은 이미 소무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로 올라온 소무는 다시 소매치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곧 경찰에 붙잡히고, 그는 거리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소무>는 영화의 형식적인 부분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 이후 전개되는 지아장커 영화들의 '원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이후의 작품들을 보고 난 이후 데뷔작을 처음 대하는 느낌은 '새로운 발견'이라기보다 '거장이 탄생하는 순간'을 즐기는 기분이었다.

지아장커의 언어들 - '거리두기'의 미학

움직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카메라 / 풍경화, 정물화, 인물화를 연상시키는 정중동의 화면 / 상하 움직임이 없는 좌우의 쉼 없는 트래킹 샷 / 화면과 분리된 사운드의 소격 효과 / 비전문 배우들의 캐스팅 등은 이미 <소무>에서부터 시작된 지아장커의 영화적 언어였다. 그리고 이런 장치들은 이후 그의 영화에서 더욱 정교하고 세련된 표현 수단으로 자리잡는다. 고정된 카메라는 변화의 중심에서 불안해 하는 중국인(소무)의 표정들을 오롯이 담아내고, 고다르의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롱 트랙킹 샷은 고단하게 삶을 이어가는 군상들을 담아낸다. 감정의 폭발 없이 '순간의 연속성'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장치들은 관객이 화면과 '거리두기'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과도한 감정이입으로 화면과 현실의 경계를 무마시키는 것보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실제'를 응시하는 듯한 사실적 이미지를 안기는 것이다. 비전문배우들의 캐스팅과 화면과 분리된 사운드 역시 거리두기의 효과를 돕는 장치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배우 경력이 없는 주인공 소무와 메이메이(이들은 이후 지아장커의 몇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리고 영화의 시작부터 음향이 제대로 맞춰졌는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사운드 역시 극에 대한 '몰입'보다는 '지켜보기'를 유도한다.

하지만 영화의 중간중간 이런 규칙이 깨지는 순간들이 있다. 주인공 '소무'의 시점으로 화면이 전개되는 부분에서 카메라는 지금까지의 워킹과 반대로 굉장히 역동적이고 화려한 움직임을 보인다. 노래방에서 만취한 소무, 샤오닝의 결혼식장에서 소동을 피우는 소무, 경찰에 잡혀 수갑을 차고 거리에 나선 소무는 모두 그의 시선에서 그려진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소무의 내면이 그대로 화면으로 옮겨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수갑을 찬 채 거리에 홀로 남겨진 소무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소무의 눈을 통해 보여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가장 극적으로 감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면이다.


지아장커의 메시지들 - 잊혀지는 것들에 대한 송사(送辭)

내용적인 면에서 2000년대 후반 작품들보다 사회성이 더욱 짙게 느껴진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소무>에는 지아장커가 그의 영화들에 담고자 했던 이야기의 원형이 담겨져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변화하는 세상에 살아가는 동시대 군상들의 면면(面面)이다. 그들의 피로와 불안, 아니면 희망이 고스란히 필름 속에 묻어 나는 것이다. 소무와 샤오닝은 여러가지로 대비되는 인물이다. 성공을 위해 도시로 나와 소매치기가 됐지만 소무는 여전히 길거리 소매치기로 살고 있고, 샤오닝은 청년사업가로서 단단한 입지를 굳히고 있다. "머리가 좋은 필요는 없다. 그냥 돈 냄새만 잘 찾아 다니면 된다."는 극중 인물의 대사처럼 샤오닝은 '돈'의 흐름을 쫓아 새로운 세상에 화려하게 안착했을 뿐이다. 샤오닝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샤오닝의 모습은 대부분 중국인들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반대로 소무는 그렇지 못하다. 새로운 세상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현재를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오늘을 살아가기가 다급한 상황이다. 그런 그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메이메이에게 연민인지 사랑인지 모를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쩐지 자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런 소무와 메이메이의 불안과 피로는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소무가 중국인들의 현재라면, 샤오닝은 그들이 모두 꿈꾸는 바이다. 소무와 같은 '웃음거리 괴물'이 되든가, 샤오닝과 같은 '영웅'이 되든가 그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1997년 중국인들의 모습이었다.

두 번째는 '해체'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다. 지아장커는 자본주의로 인한 도시의 성장, 그리고 도시로 향한 사람들의 '이주'가 가져오는 '가족의 해체'와 '공동체의 해체'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왔다. <세계>, <스틸 라이프>, <24시티>에서도 이주로 인해 해체된 가족과 공동체는 지아장커 이야기의 주된 테마였다. 모두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고향을 등진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샨샤댐 건설 현장에서 아내를 찾는 남편과 남편을 찾는 아내를 담은 <스틸 라이프>가 가장 대표적이다.) <소무>의 주인공 소무와 메이메이 역시 모두 가족을 떠나 도시로 나온 이주민들이다. 전통적인 가정에서 모여 살았던 그들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더 높은 꿈을 위해 도시로 나왔다. 하지만 부자를 꿈꾸던 소무는 소매치기일 뿐이고, 가수를 꿈꾸던 메이메이는 술집 여종업원일 뿐이다. 이들에게 가족은 언제나 돌아갈 수 있지만, 반대로 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돈'도 없고, 꿈도 이루지 못한 이들이 가족에게 짐이 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가족이 해체되고, 그 기능은 상실된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을 '복원'해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선동하지 않는다. 단지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현재의 모습을 통해 담담히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지아장커의 영화는 항상 '현재에 대한 기록'처럼 느껴진다.

13년이 지나고 처음 본 <소무>는 지아장커의 현재를 설명해 주는 그의 과거였다. 그리고 그 곳에는 지아장커가 구축해 온 영화적 언어와 이야기들의 원형이 숨 쉬고 있었다. 감독이 27살에 16mm 필름에 담아낸 영상이 다소 거칠고, 지금과 비교하면 조명과 촬영 등 튀는 부분도 있지만 거장이 탄생하는 순간 만큼은 벅찬 감동을 느끼게 만든다.


P.S. 지아장커의 영화에는 유독 '휴대전화'가 등장하는 화면이 많다. <세계>에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전달되는 장면을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는 등 그는 이 새로운 통신수단을 통한 사람들의 관계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휴대전화가 대중화 되기 전에 만들어진 <소무>에서는 '삐삐'가 중요한 메타포로 등장한다. 소무는 메이메이의 연락을 기다리기 위해 삐삐를 구입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기계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족들의 모습을 카메라는 비춘다. 뜬금 없지만 지아장커를 GV를 통해 만날 기회가 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당신 영화에서 휴대전화는 어떤 의미를 갖는 거죠?"



Trackback 0 Comment 0
2009.02.08 04:37

<24시티> 기록자으로서의 카메라


<24시티> 기록자으로서의 카메라


China; 2009; 112min; Docu&Drama; Color
Director: Jia Zhang ke
Cast: Joan Chen, Zhao Tao, Jianbin Chen

 
'중국'은 괴물이다. 잠시 멋친 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황하에 물이 흐르고, 인간이 모여 살 때부터 중국은 주변을 압도하는 괴물이었다. 그들의 역사가 곧 제국의 역사이자, 정복의 역사였다. 그들의 무력은 주변국을 오랑캐 내지 제후국으로 만들었고, 그들의 문화와 학문은 '동아시아적 사고'의 거대한 뿌리를 이뤘다. 세계 어떤 제국도 과거 중국의 역사 만큼 무력을 넘어선 사상적, 문화적 제국이 되지는 못했다. 한족의 무대였던 이 거대한 땅을 무력으로 정복했던 몇몇 민족들도 그 거대하고 고고한 문화 앞에 결국 칼을 내려놨다. 세상의 중심, 곧 중화(中華)는 수 천 년에 걸친 중국 역사가 만들어 놓은 결정체였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이 콧대 높은 중국의 본격적인 비극은 근대의 시작과 함께 했다. 유럽의 서구 열강과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상처를 안겼다. 원료생산지, 시장이 되어 버린 황제의 땅은 생면부지의 차지가 되었고, 사람들은 비참하게 희생되고 죽어갔다. 이 핍박과 수탈의 역사에서 사들어 간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다름 아닌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는 크나큰 상처를 안긴 '자본주의'를 뛰어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사람들은 붉은기 아래 모여들었고, 마오은 중국을 다시 통일하고, 불완전한 주권을 되찾았다. 하지만 마오가 중국인들의 자존감을 부활시킬 수 있었지만, 그들을 가난에서 구제하지는 못했다. 중국은 부활했지만 근대 이후 역사에서 수 천 년간 그들을 빛나게 했던 화려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울한 근대사를 극복하고 중국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그 중심은 단연 '경제'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등샤오핑의 이른바 흑묘백묘론은 일단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임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고, 세계 인구의 1/5이 살고 있는 이 나라는 더 이상 몸짓만 큰 나라가 아니다. GDP만으로 미국과 일본 다음이고, 연 10%에 육박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중이다. 세계의 자본을 빨아들이는 투자의 중심이 됐고, 모든 글로벌 기업이 꿈꾸는 시장이 됐다. 중국에 가뭄이 들면 밀과 옥수수와 같은 주요 곡물의 가격이 오르고, 중국의 자동차와 공장이 많이 돌아가면 국제유가가 오른다. 일본을 제치고 최대 미국 국채 투자국이 됐고, 최고의 외환보유고를 기록하며 미국 경제마저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경제대국이 됐다. 미개하다고, 가난하다고 무시했던 유럽의 콧대 높은 강대국들조차 티벳 분리 운동 과정에서 보여주듯 쓴소리 제대로 한 번 하지 못했다. 그리고 중국은 보란듯이 올림픽도 치뤘다. 정치, 군사대국을 넘어 부자나라가 된 중국은 그렇게 새로운 국가발전의 성공 모델이 되고 있다. 중국은 자신의 '굴기'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것이다. '괴물'의 부활...


중국은 변화했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의 외형을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 시장자본주의를 끌어 안는데 성공한 유일무이한 국가, 중국... 그들의 변화에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이 시스템의 변화는 비단 제도나 정책 등의 외형만 바꿔 놓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국의 땅의 생김새를 바꿔놓았고,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 태도마저 변화시켰다. 동부 해안에서부터 시작된 서구식 도시의 성장은 점점 서쪽으로 확대되며 대지를 변화시켰고, 사람들은 역시 돈을 최대의 가치로 신봉하며 농촌을 떠나 더 낳은 벌이를 위해 도시로 향하고 있다. 중국의 '땅'과 '사람들은' 바로 중국의 변화된 역사를 고스란히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넓은 중국의 대륙과 그 곳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중국이 가진 파란만장한 역사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피사체'가 된다. 우리는 중국의 화려한 과거도, 슬픈 상처도, 그리고 기적같은 부활도 그 땅과 사람들을 통해 변화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과연 중국은 지금 어디 있으며, 사람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과거의 대국의 지휘를 회복하고 있는 현재 중국의 모든 장면, 순간들이 휘황찬랑하게 빛이 나고 있을까? 지금은 그 땅과 사람들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 것일까? 그 답은 바로 중국의 땅과 사람들의 표정에 있을 것이다.

지아장커의 새 장편영화 <24시티>가 개봉했다. 1997년 <소무>를 통해 장편영화에 대뷔한 지아장커는 <플랫폼>, <임소요>, <세계>, <스틸 라이프>, <동>, <무용> 등의 장편과 몇몇 단편을 통해 동시대 중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됐다. 그의 카메라는 항상 현재 중국의 어느 공간과 그 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향하고 있다. 그는 공간을 통해 지금의 중국을 이야기하고, 중국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과 그에 발빠르게 적응하는 사람들... 이는 <세계>와 <스틸 라이프>를 지나면서 더 분명해진다. 세계의 유명 관광지를 그대로 복원한 거대 놀이공원 세계공원을 무대로 한 <세계>, 그리고 세계 최대의 댐이 될 샨샤댐을 담은 <스틸 라이프>와 <동>은 지금의 변화된, 변화하는 중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다. 변화된 공간은 단지 물리적인 땅의 모양을 바꿔 놓은 것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가진 사고와 태도의 변화 역시 이끌었다. 그 공간들은 전혀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자본주의적인 공간이었으며, 발전의 결과였다. 자본의 총체였고, 더 많은 자본을 생산할 수 있는, 소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람들이 변화된 공간에 창조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역시 스스로를 위해 최대한 많은 자본을 만들어 내는 것 뿐이다.


<24시티>가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쓰촨성 도시 청두의 420 공장 역시 지아장커의 이전 영화들의 공간들이 상징하는 바와 닮아 있다. 1958년 중국의 1차 5개년 계획경제개발 당시 만약에 있을 적의 공격에 대비해 내륙 깊숙이 세워진 이 군수공장은 풍부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타지의 노동자들까지 흡수하면서 청두 안에 하나의 작은 도시가 됐다. 하지만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고, 중국이 시장경제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420 군수공장의 역할도 점점 자리를 잃어갔다. 결국 420공장을 운영하던 청파그룹은 대지를 넘기고, 5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던 공장은 '24시티'라는 이름의 초고층 아파트 단지로 바뀔 예정이다. 중국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건물이 가장 현대적인 공간으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마지막 인터뷰이 자오 타오의 말처럼 24시티의 최신식 아파트 한 채를 얻기 위해 엄청난 돈이 필요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임금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집... 그 집들이 50년 동안 수 많은 노동자들의 생계를 책임진 곳을 대체하려 한다. 이제 그 곳은 더 이상 노동의 공간이 아니라 자본의 공간이 된다. 이 때문에 24시티는 중국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지아장커는 420 공장의 마지막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카메라는 마지막 업무를 마친 노동자들이 탄 자전거거 회사 정문을 빠져 나오는 모습을 비춘다. 곧 50년을 지키고 있었던 공장의 팻말도 교체된다. 시끄럽게 돌아가던 기계와 사람들로 쉴 틈이 없었던 공장은 비워지고, 육중한 장비들이 차례차례 건물들을 부순다. 그리고 한 편에서 없어지는 공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사라지는 공장과 함께 자신의 과거 역시 묻고 있는 사람들이다. 감독의 카메라는 420 공장과 함께 이 사람들의 얼굴과 말에도 눈과 귀를 기울인다. 공장이 처음 생긴 순간부터 함께한 사람도 있고, 공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을 시작한 사람, 타지에서 일자리를 위해 청두로 이주한 사람, 공장이 싫어 떠난 사람 등 그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어떤 이는 420 공장을 통해 영광을 말하고, 어떤 이는 아픔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공장이 세워진 1958년부터 현재까지 공장의 한 순간을 기억한다. 여덟 명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자신들의 이야기이면서 곧 420 공장에 대한 이야기이고, 동시에 중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간 순서대로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곧 변화하는 중국의 한 순간들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기록인 것이다.


지아장커는 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을까? 답은 사람들의 '말'과 '표정' 그 자체에 있다. 영화 <24시티>에서 사라지는 공단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알듯 모를듯 애매하다. 개발이 가져올 화려한 미래에 들떠 있지도 않으면서도, 노동자의 생계를 끊어버리는 철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격렬한 환희도, 매서운 비판도 없다. 카메라는 그의 영화들이 그렇듯 한폭의 풍경화나 정물화를 연상시키듯 큰 움직임 없다. 도시에서 발생하는 이 거대한 소멸과 탄생이 역사의 순리인 것처럼 변화의 현장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50년 전 아무것도 없던 곳에 공장이 들어섰고, 시간이 흘러 다른 구조물이 공간을 대체하는 순간... 이제는 사라져 없어질 것을 기록하려는듯 카메라는 공장의 구석구석을 바라볼 뿐이다. 감독이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이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420 공장의 소멸은 단지 5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건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50년은 중국이 온전한 국가가 된 이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천안문사태, 개혁개방 등 파란만장한 중국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역사적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420 공장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감독은 이 공간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아장커에게 곧 없어질 구조물만 기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영혼이 부재한 허울에 불과하다. 때문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마치 건물에 숨을 불어넣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덟 명의 화자들은 '3세대'로 나눠 볼 수 있다. 우선, 이주로 인해 '이별'의 상처를 공유한 이들이 1세대에 해당한다. 420 공장에 청춘을 바친 노인은 공장을 목숨보다 소중히 아낀 자신의 스승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다른 노파는 이주정책에 따라 셴양에서 배를 타고 청두로 오던 중 잃어버린 아이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가족을 떠나 이주한 중년 여성은 실직 후 생계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고, 가족을 떠나고 싶어 청두로 온 여성은 여자로서 자신의 외로운 삶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들은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변화를 묵묵히 따랐고, 그들이 겪어야 할 상처들을 자신의 몫으로 돌렸다. 그들이 모두 흘린 '눈물'은 인내한 상처들에 대한 반증이다. 그리고 2세대가 있다. 이들은 420 공장에서 태어나고, 공장에서 학교를 다니고,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공장과 함께 성장하고 중년이 된 2세대는 1세대 만큼의 극적인 인생이 없다. 태어난 순간부터 진로는 이미 결정이 돼 있었고, 큰 변화 없이 그저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았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3세대가 있다. 공장에서 태어나 성장한 점이 전 세대와 같다면 다른 점은 그들은 변화된 세상의 흐름에 맞춰 전세대가 살았던 삶을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세대와 다른 가치과 사고를 가진 세대이다. 공장의 노동자가 되길 거부하고 아나운서로 변신한 남자와 폴크스바겐을 모는 멋진 사업가로 변한 여성이 그들이다. 두 인물은 모두 공통적으로 '24시티'를 꿈꾼다. 420 공장을 벗어난 그들에게 있어 성공은 당이나 군의 고위직이 아닌 모두가 부러워 할 '부(자본)'를 갖는 것이다. 그 현실적인 목표가 바로 24시티이다. 근대와 현대를 가로지르는 50년 중국의 변화는 이렇게 420 공장에서 살았던 3세대에게 오롯이 담겨 있는 것이다.


<24시티>에서 흥미로운 점은 8명의 인터뷰이가 모두 실제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4명은 실제 인물이고, 4명은 배우들이 연기한 가짜이다. 그래서 영화는 온전히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까. 지아장커가 장르의 경계를 붕괴한 것은 이번 만은 아니다. <세계>에서는 애니메이션이 삽입됐고, <스틸 라이프>에서는 다큐멘터리였던 <동>의 영상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24시티>는 부분적으로 이뤄지던 경계허물기를 영화 전체에서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가 있다. 감독이 인터뷰 한 130명 중에서 촬영을 거부한 경우도 있지만,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배우들에게 연기를 맡긴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어 보인다. (조안 첸, 자오 타오, 루 리핑, 지안빈 첸 등) 여기에 대한 답은 감독의 말에 있는 듯하다. "내게 역사란 사실과 상상의 혼합체이기에, 지난 반세기 동안의 중국 역사를 재연하기 위해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평행한 흐름 속에서 통합했다." 분명 역사는 사실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개인의 상상이 덧대지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24시티>는 분명 개개인의 '기억에 근거한 기록'인 것이다.




P.S. first
지아장커는 이미 거장이다. 난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과연 불혹도 되지 않은 감독이 만든 것인가.' 하는 놀라움을 경험한다. 그의 영화적 언어, 영상미학은 둘째 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가진 깊이가 놀랍다. 그리고 거기서 묻어나는 인간적 성숙도가 부럽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걸 보여주는 그의 카메라가 고마울 따름이다.

P.S. second
지아장커는 가끔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넌지시 희망을 얘기한다. <세계>에서 "이제부터 시작이야." 라고 읊조리는 자오 타오의 마지막 대사에서 느껴지듯 <24시티> 역시 그 희망의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지아장커의 페르소나가 되어 버린 자오 타오는 '수나'라는 이름으로 마지막에 등장한다. 그녀는 공장이 싫어 뛰쳐나왔고, 자연스레 부모와도 멀어진 인물이다. 곧 그녀는 '중국의 근대'를 부정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우연히 집에 들렸다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게 됐음을 말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부모의 인생을 그들의 입장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녀의 눈물은 중국의 근대와 현대 그리고 420 공장의 3세대가 갈등이 아닌 공존이 가능함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4시티>가 따뜻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P.S third
용산 철거 현장에서 벌이진 일로 많은 문제들이 한국 사회에 던져졌다. 원래 있는 문제들이 곪아터져 비극적 사건으로 나타났지만 아직도 문제가 뭔지 감을 잡고 있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24시티>를 보면서 문득문득 용산현장이 생각이 났다. 왜 우리는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근거 없는 장밋빛 청사진에 가려 그들의 목소리를 묻어버렸을가? 용산에서는 눈부신 미래를 위해 '지금'은 부정되어야 했다. 그리고 더 비극은 그 곳에 있던 사람들까지 덩달아 부정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분노는 여기서 시작됐다. 왜 그들의 인생을 존중하지 못하고 부정해야 했을까? 그것이 비단 용산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개발 현장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문제이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를 명심해야 한다. 



Trackback 0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