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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03 <체인질링> 이스트우드 할아버지 손은 약손 (2)
  2. 2008.10.14 <Disgrace> 수치와 추락
2009.02.03 18:12

<체인질링> 이스트우드 할아버지 손은 약손


<체인질링> 이스트우드 할아버지 손은 약손


U.S.A; 2009; 141min; Drama; Color
Director: Clint Eastwood
Cast: Angelina Jolie, John Malkovich

 
요즘 들어 현실이 픽션보다 무섭고 비극적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다. 난민수용소와 아이들이 있는 학교를 무차별 폭격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세상이 무섭고,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철거민들이 부와 권력의 묵인 아래 새까맣게 재로 변하는 현실이 비극적이다. 살인, 유괴, 전쟁 등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 잔인한 범죄들이 공포의 원형질이었다면, 이제는 가난, 무지, 힘없음 등이 새로운 시대의 비극이자 공포가 됐다. 그래서일까? 2008년은 유달리 공포영화가 힘을 못쓴 한 해였다. 극장보다 현실에서 더 크게, 자주 느낄 수 있는 것이 '공포'였으니 말이다. <링>을 보고 텔레비전 마주하기가 두려워도, <추격자>를 보고 밤 길 걷기 무서워도 스크린이 아닌 현실의 어디에선가 그 보다 더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눈과 귀가 확인하는 순간 만큼 공포스럽지는 않다.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영화, 소설, 드라마도 '그래, 가짜니까.' 하고 놀란 마음을 쓸어 내릴 수 있다. 하지만 텔레비전 뉴스 앵커나 친구, 가족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을 때, 아니면 내 눈으로 직접 현장을 목도할 때 공포는 픽션이 아닌 정말이지 현실이 된다.

현실의 비극성과 공포 때문인지 주요 사건들은 '실화'라는 이름으로 자주 영화의 소재로 사용된다. 그 대상은 희대의 살인마부터 전쟁, 범죄조직, 정치인들의 비리, 불평등한 사회 구조 등에 이르기까지 제한이 없는 듯하다.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무너뜨려 이야기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겠다는 일종의 전략인 셈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 자막 한 줄로 관객은 스크린을 대하는 마음을 고쳐잡게 된다.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었든, 모르고 있었든 '실화'라는 사실만으로 영화 자체를 온전히 허구로만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혹 영화를 보고난 후 뒤늦게 실화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작품이 완전히 새롭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런 이유로 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조심스럽게 지켜야 할 '보여주기의 윤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 때, 그 일을 "왜" 지금 스크린에서 다시 봐야 하는지 '공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바란다면 어느 정도 '치유의 효과'까지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파급력이나 대중성을 고려한다면 이유는 더욱 분명해진다. 영화로 옮겨지는 사건들은 대부분 한 시대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일들이다. 위인의 이야기이든, 미담이든, 비극이든 당시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한 공간의 역사를 뒤바꿔 놓을만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대상이 된다. 때문에 직, 간접적으로 얽힌 사람들도 많고, 비극일 경우 다시는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자칫하면 영화가 시간에 묻혀 간신히 아물어가는 사람들의 상처를 다시 덧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지 영화로 만들기 좋아서, 관객동원 수치를 올리기 쉬워서 도구가 되는 것은 그야말로 '두 번 죽이는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 만족스러운 경우는 많지 않다. 스크린으로 옮기면서 이야기는 실제보다 과장되고, 인물들은 영화적 인물로 재탄생된다. 일련의 영화화 과정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여러 영화적 기교와 수단들이 사건 자체를 왜곡하고, 본질을 호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미지와 소리로 충격만 남기고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메시지만 던져놓고 끝나버리는 영화들처럼 말이다. 이런 영화들한테서 처음에 던졌던 "왜"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는 요원하기만 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새 영화 <체인질링>이 개봉했다. 이제 배우보다 감독이라는 타이틀이 더 잘 어울리는 거장은 새 영화를 위해 '실화'를 선택했다. '휴머니즘'에 있어서 동시대 최고의 만듦새를 자랑하는 감독의 선택은 화려하지도 기쁘지도 않은 현실의 가장 추악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20년대가 끝나갈 무렵 전 미국을 흔들었던 한 유괴사건과 그에 얽힌 연쇄살인범죄, 그리고 LA 경찰의 무능과 부패가 그 주인공...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많이 사라진 사건이지만 여든의 노장은 2009년 다시 그 이야기를 세상에 재생시켰다. 그는 왜 100년 가까이 지난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이 사건을 다시 스크린으로 옮겼을까?

1928년의 LA의 한 마을. 전화교환소 매니저로 일하는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는 혼자 아들 월터를 키우고 있는 직장여성이자 어머니이다. 아이에게는 좋은 엄마이고, 동료에게는 신뢰를 받는 친구이고, 그리고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만능의 여성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크리스틴은 원더우먼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깡마른 몸매와 말투나 행동, 손짓까지 아이를 혼자 키우는 억센 여자라기보다 순하고 착한 여성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평생을 주변사람, 세상과 조화롭게 호흡하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 그녀의 삶은 전혀 의도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곳으로 전락한다. 회사에서 급하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아들, 월터가 사라진 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찾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고, 경찰에 신고하는 일 뿐이었다. 불성실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찰에게도 큰 소리 한 번 내지 못한다. 그저 스스로 전국의 실종센터에 일일이 전화해가며 아들 월터의 생존을 확인할 뿐이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아이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일상을 힘들게 보내고 있는 그녀에게 '월터'가 돌아온다. 하지만 경찰의 손에 의해 넘겨진 아이는 월터가 아니었다. 월터처럼 말하지도 않았고, 키도 작았다. 경찰에게 월터가 아니라고 항의해보지만 공격을 당하는 건 오히려 크리스틴 자신이다. 경찰은 전문가까지 동원해서 크리스틴을 모성을 잃은 정신병 환자 취급을 하고, 일이 커져 경찰의 입장에 곤란해지는 것을 애초에 막고자 한다. 지금까지 순종적이었던 크리스틴은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가짜 아이 때문에 경찰이 진짜 월터를 찾는 일을 멈추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 그녀를 돕겠다고 한 사람이 나타난다. LA 경찰의 부패와 무능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을 해왔던 교회의 구스타브 목사(존 말코비치)가 그 주인공... 크리스틴은 그와 함께 경찰의 실수를 폭로하고, 진짜 월터를 찾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퇴로가 막힌 경찰은 크리스틴을 정신병원에 감금하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라고 끊임없이 압박을 가한다. 그러던 중 엄청난 유아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잡히고, 그 희생자 가운데 한 명이 크리스틴의 아들 월터임이 밝혀진다. 경찰의 무능과 부패, 폭력은 만천하에 드러나고, 경찰은 사회의 지탄과 법원의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월터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은 어떤 것도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어디선가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실낯같은 희망 하나로 크리스틴은 일상으로 돌아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수화기를 통해 전해질 '낭보'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실존 인물 크리스틴의 경험은 보통 사람의 이성과 감정으로 예상할 수 없는 고통이다. 유일한 혈육인 9살 난 아이가 없어지고, 경찰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을 당하고, 없어진 아이가 연쇄살인범에 의해 희생됐다는 사실은 국외자로서 '당신의 상처가 얼마나 클지 마음이 아프네요.'라고 말하는 것조차 죄스럽게 만든다. 보는 사람조차 숨이 멎도록 만드는 이 추악하고 비극적인 실제 사건은 여든의 노장 손에서 영화로 다시 태어났다. 영화는 '관객 여러분, 이런 충격적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정도의 보여주기에 그치지 않는다. '요정이 앗아간 예쁜 아이 대신에 두고 가는 못 생긴 아이'라는 의미의 <체인질링>은 감독이 이전에 만들었던 영화들처럼 장르영화로서 만족할만한 재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메시지에 충실한 영화이다. <체인질링>은 은아리영이나 구은재가 보여주는 한 많은 여자의 한풀이도 아니고, <밀양>의 신애처럼 '신'에 정면으로 맞서는 복수극도 아니다. 도식적으로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전자보다 진지하게 거시적인 담론을 이끌어낸다면, 후자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사건을 통해 극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체인질링>의 실화를 대하는 클린트 이스트우트의 시선은 어딘가 전작인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닮아 있다. 태평양 전쟁 도중 일어난 이오지마 전투를 미국과 일본의 시선에서 각각 영화화 했던 두 작품은 개인이 집단(더 정확히 말한다면 국가)의 논리에 의해 희생될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교과서처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분명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아버지의 깃발>보다 수작임에도 국내에서는 개봉하지 못했다.) 국가나 집단은 분명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고수해야 한다고 믿는 가치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는 것이 전체를 위해 '옳은 일'이라고 스스로 자위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이 항상 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국가의 윤리와 인간의 윤리가 항상 상충하는 이유이다. 이럴 때 역사적으로 국가는 항상 개인의 희생을 요구해왔다. 통상 사람들은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희생을 참아내지만, 그것이 '정도'를 지나쳤을 때 제동력을 잃은 공권력은 항상 사람들의 손에 의해 무너졌다. 그래서 국가는 정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항상 견제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국가로 대표되는 공권력에 대한 '비판'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그 힘에 고삐가 풀렸을 때 <체인질링>의 크리스틴이 겪는 고통은 평범한 누군가의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체인질링>은 유괴와 연쇄살인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중심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여기에 그렇게 많은 분량을 소비하지 않는다. 말로만 들어도 무서운 범죄보다도 이 영화의 실질적인 공포이자 비판의 중심은 오히려 사건과 인물을 대하는 LA 경찰로 환유되는 공권력이다. 악명 높았던 LAPD의 부패와 폭력에 맞서 여리기만 했던 크리스틴은 아이를 찾기 위해 '투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물에게 그녀를 지켜줘야 할 경찰이 오히려 더 큰 적이 됐을 때 크리스틴이 가지고 있던 인내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결국 여린 여성의 강한 모성 앞에 서슬 퍼런 공권력은 무릎을 꿇고 만다. 역사의 순리이다. 이 과정에서 크리스틴이 인간으로서 받게 되는 고통은 살인자로 인한 것에 비해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정신병원에서 크리스틴과 경찰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감금당한 여성들이 온전한 이성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인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보다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철저히 우리의 편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 의해서 벌어졌다면 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100년 가까이 지난 사건을 지금 재생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단지 한 많은 여성의 눈물 겨운 스토리가 아니라 공권력이 난무한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긴 크리스틴을 통해 과연 무엇이 소중한지를,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되짚어 주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크리스틴을 통해 여성들이 받은 상처를 세심하게 보듬고 있다. 치유와 동시에 그녀에게 희망을 남겨둔다. 크리스틴은 동료들과 아카데미 결과를 두고 내기를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일상으로 되돌아 왔지만 여전히 월터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희망이 크리스틴을 일상으로 돌아오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아이였지만 절망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 것 역시 아이에 대한 희망이었다. 아이는 크리스틴이 살아야 하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이것이 여든의 현자가 한 여자의 비극을 통해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P.S. first
씨네21에서 영화평론가 박평식은 <체인질링>을 두고 "시대 공기에 휘감기면 감동은 곱절"이라고 평했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너무도 먼 사건을 마주하면서 '시대의 공기'를 운운하게 되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분명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분명 쉽게 넘길 일은 아닌 듯하다. 공권력의 잘못을 지적하는 크리스틴은 정신이상자로 병원에 감금당한다. 법은 자위적으로 판단되고, 공권력을 위해 남용된다. 2009년 대한민국에서도 법은 사람들은 폭력적인 범법자로 만드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현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빨갱이 내지 국가의 정체성을 흔드는 폭도로 내몰았다. 과연 사람들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두고볼 일이다. 제발 역사가 만들어준 교훈에 집중하기를 바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절친 부시의 말년이 어땠는지만 기억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P.S. second
영화 속에서 제프리 형사로 대표되는 경찰의 태도는 흥미롭다. 만약 제프리 형사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속죄를 했을 때 그는 인간으로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가 경찰로서 저지른 악행들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때문에 그를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행동이 경찰로서, 공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옳은 일이었다고 스스로 믿게 만드는 것이었을 것이다. 살기 위한 자기 체면이고 세뇌의 과정이다. 하지만 제프리는 그 선택이 자신을 점점 사지로 내몰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토록 위하고자 했던 조직에게서도 버림을 받았다. 결국 제프리 역시 조직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속한 '개인'에 불과하다. 여차 하면 버려지고 교체될 수 있는... 이것 역시 우리가 배워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P.S. third
크리스틴을 연기한 안젤리나 졸리는 의외로 인상적이었다. <툼레이더>, <원티드>의 여전사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바짝 마른 몸과 수줍은 표정과 행동은 그야말로 여성스러웠고, 큰 눈에서 눈물이 맺힐 때는 아이를 잃은 엄마의 모습이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그녀의 섹시한 입술도 전혀 이질감을 주지 못했다. 더불어 간만에 정상인의 역할을 맡은 존 말코비치 역시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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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4 19:36

<Disgrace> 수치와 추락

<Disgrace> 수치와 추락

Australia, Republic of South Africa; 2008; 120m; 35mm; Color
Director: Steve Jacobs
Casting: John Malkovich, Eriq Ebouaney

1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작품 <Disgrace>. 영화제에서는 <수치>라고 번역되었지만, <추락>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된 J.M. Coetzee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존 쿳시는 이 작품으로 부커상을 2회 수상한 최초의 작가가 됐고, 4년 뒤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솔직히 영화를 보면서도 존 쿳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barbarrians>을 읽은 게 전부였으니. 영화가 끝난 후 한참 동안 극장 주변을 서성이다가 컴퓨터를 켰다. 존 말코비치를 제외하면 모두다 굉장히 낯설고 생소했지만 분명 어디선가 한 번 맛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존 쿳시의 <Disgrace>라는 소설이 원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었을 때의 충격과 혼란이 방금 봤던 영화에서 받은 이미지들과 중첩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영화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화제가 끝나고 서울로 올라와 바로 책을 샀다. 길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었을 때처럼 완독을 하는데 1주일을 보냈다. 책 중간중간 포스트잇이 끼워져 있고, 메모와 줄을 그었던 흔적들이 마치 전공책을 연상시킨다. 사실 그의 소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특수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공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쉽게 납득하기 힘든 구성를 가지고 있다. 그 안에서 눈물겹도록 고민하는 인물들까지 말이다. 독자까지도 주인공이 겪는 처절한 고민에 동참시키는 그의 글쓰기는 여러번의 인내와 고통을 감내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완전하지 않은 문장, 함축적인 이야기가 독자에게 친절한 글쓰기는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절대 책을 덮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존 쿳시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마력이다. 고통스럽고 괴로운면서도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왜"를 외치게 만드는 힘 말이다.

책을 읽고서야 영화를 보고 왜 그리 뒤가 개운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았다. 사실 존 쿳시의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기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이야기가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인물과 소통하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을 유도한다. 하지만 텍스트가 영상으로 옮겨졌을 때 이야기만 남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소멸될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것은 존 쿳시의 소설은 이야기가 아닌 그 '외'의 것들이 방점이 찍혀있다는 것이다. 컨텍스트(context), 즉 문맥 속의 함의를 읽지 못한다면 그의 이야기는 그저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고, 인물들은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인물들에 불과하다. 결국 줄거리만 따라가기 급급했던 영화가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에도 온갖 물음표만 남기고 끝난 이유다. (때문에 리뷰는 영화보다는 소설에 집중하겠다.)


그러면서도 왜 호주 출신의 감독이 그토록 멀리 떨어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가 쓴 이야기를 선택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남아공과 호주에 살고 있는 두 백인 작가. 한 명은 소설을 쓰고 한 명은 영화를 만든다. 남아공과 호주, 지리적으로 떨어진 그 두 나라에는 뭔가 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두 나라 모두 얼마 전까지 최고의 인종차별정책을 가진 국가였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와 백호주의(Australia Policy). 하나는 소수 백인이 다수의 유색인종들을 통치하기 위한 차별적 정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색인종의 이민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다. 표면적으로 남아공에서 흑인 대통령이 집권하고, 호주에서도 차별 방지 법률이 제정되면서 완전히 평등한 국가 형태를 갖췄다고 하지만 몇 백년을 거쳐 뿌리깊이 형성된 습관이 그렇게 칼로 무 썰듯 사라지지는 않는다. 식민주의의 낡은 유산이었던 차별 정책들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의식은 고스란히 남아 탈식민지시대를 살아가게 만들었다. 거기서 비롯된 문제들. 식민주의 의식을 깨끗이 버리지 못한 상황에서 탈식민주의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 처지. 모순과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스티브 제이콥스는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존 쿳시와 같은 고민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스크린으로 옮기고자 했을 것이다. 존 쿳시는 그 모순을 정확히 파고드는 작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난 백인 출신 작가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한계를 한 인물을 통해서 처절하게 고민한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흑인이 대통령이 되고,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정책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식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은 그 기저에 여전히 흐른다고 보고 있다. 그로 인해 아무리 탈식민주의의 시대가 왔다 해도 백인과 흑인은 원점에서 출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백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그들의 원죄. 그들의 약탈과 착취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피부색의 우월함을 쉽게 놓치 못한다. 모두에게 과거는 책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의식 속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존 말코비치(최고의 캐스팅이라고 생각한다.)가 연기하는 데이비드 루리 교수는 쿳시의 고민을 그대로 투영한 인물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대학 교수 루리.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남아공의 역사, 모순, 갈등 따위의 것들에 큰 관심이 없다. 그에게는 오직 머리를 즐겁게 해줄 고매한 '시'와 몸을 즐겁게 해줄 '여자'만이 있을 뿐이다. 학생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밝혀지는 순간에도 그는 떳떳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시인 바이런도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지만 학교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에서 농장을 하는 딸(루시)과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그의 고통스러운 고민은 시작된다. 흑인의 땅에 살고 있는 백인들. 도시가 아닌 시골. 사람들의 감정이 원초적으로 남아 있는 그 곳에서 딸과의 갈등, 주변 흑인들과의 갈등이 싹이 튼다. 딸과 대등한 관계에서 그녀와 거래를 하는 흑인 농부 페트루스, 그에게 의지해야만 그 곳에서 살 수 있는 딸의 처지, 받아들일 수 없는 아버지. 뭔가 쉽게 요약하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 설명될 수 없는 문제들이 실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존재하고 있다.

세 명의 흑인 침입자에게 윤간을 당하고, 그 중 하나의 아이를 낳고, 페트루스에게 땅을 내어 주고, 그의 세 번째 아내가 되는 것을 그 땅에 안전하게 살기 위한 대가로 생각하는 루시. 그녀는 얼마전까지 자신의 일을 봐주던 페트루스의 소작인이자 부인으로서의 삶을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루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않는다. 아버지로서 그는 루시가 하루 빨리 그 곳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던가 아니면, 그녀의 농장 주변을 철책으로 둘러싸고 외부인의 침입을 당장 막아야 한다고 딸을 설득한다. 하지만 루시는 그 중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다. 루시는 아버지에게 자세히 설명을 하지 않는다. 아니 자신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달라고만 한다. 정말 루리의 말처럼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과거의 역사에 대한 속죄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찌 보면 루시가 처한 환경과 그녀가 안고 있는 고민은 루리를 포함한 이전 세대들이 뿌려놓은 씨에서 자란 것일지 모른다. 식민주의 이후 세대들이 안고 가야할, 감당해야 할, 극복해야 할  문제. 루시는 그 안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 그 문제는 이전 세대들이 갖는 인식과 철학으로는 분명 해결될 수 없다.

루리는 그 전까지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흑인들에 대한 원초적인 적대감을 표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흑인들은 루리에게 원래 '그런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백인의 영역을 호시탐탐 넘보면서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 페트루스를 인간적으로 신뢰하면서도 그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 없는 루리. 그가 남아공이라는 공간에서 백인으로서 흑인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인식론적 한계이다. 작가는 아버지와 딸, 그리고 그 사이에 개입한 흑인들을 통해 현재 남아공에서 벌어지는 탈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백인들에게 보상받을 것이 있다고 믿는 흑인들, 자신들도 감지하지 못하지만 뿌리깊은 곳에 인종에 대한 의식을 가진 백인들, 그 한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래서 공존하고 싶은 사람들이 뒤엉켜 있다. 이들 사이의 갈등과 모순이 현재 남아공이 안고 있는 문제이고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야기는 베브의 동물보호센터에서 일을 돕는 루리가 자신이 마음을 쓰던 개를 안락사시키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난 당신이 이 개를 한 주 더 살려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개를 단념하시는 건가요." /  "그렇소, 단념하는 거요." 베브의 질문에 대한 루리의 마지막 반응은 거의 포기에 가깝다. 한 쪽 다리를 절룩이며 그의 음악을 좋아하던 개를 병원 침대로 데려가면서 그는 스스로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다.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포기였다. 존 쿳시의 <Disgrace>가 비극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루시의 입장에서 보면 시각은 다소 달라진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딸 루시의 행동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녀의 말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설명이 불가능할 수도 있고, 역자의 평가대로 쿳시의 글쓰기가 양자택일이나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아닌 가치의 회색지대를 보고 사유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루시는 아버지 루리와 다르게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강간한 사람의 아이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아니요."라고 답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이 싹틀 것이라고 그것에 관한 한 모성을 믿는다고 말한다. 상처까지도 감싸안을 수 있는 모성이 희망인 것이다. 루리와 루시의 차이는 책 속의 표현대로 "형기를 채우고 있는 늙은 죄수"와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이다.

책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에 대한 생각을 여러번 했다. 굵직한 사회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곳곳에서 원인을 찾기 급급하다. "식민주의 유산이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 "근대화를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냉전의 상흔이 치료되지 못했다." / "탈근대화라는 전지구적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다." 등등 수도 없이 많다. 그 이유는 우리 역시 식민주의, 근대화, 냉전, 탈근대 가운에 어느 것 하나 깔끔하게 해결되지 못한 채 모순과 갈등이 계속 쌓이고만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도 루시와 같은 '모성'이 필요한 것일까? 쿳시의 소설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공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보편성'을 놓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살면서 이 책을 두 세번은 더 읽게 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한 번을 읽고서는 잘 모르겠다. 지금 정치를 공부하고 있어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정치적인 메시지들 뿐이다. 하지만 쿳시의 소설에서 그것이 전부가 아님은 확실하다. 아마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나씩 더 느끼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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