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06.03 <무뢰한> 남자를 성장시키는 여자, 여자를 파괴시키는 남자 (10)
  2. 2008.10.08 <멋진 하루> Human Therapy-대인관계향상 1日투어
  3. 2007.08.29 이창동 <밀양>
2015.06.03 14:29

<무뢰한> 남자를 성장시키는 여자, 여자를 파괴시키는 남자

<무뢰한> 남자를 성장시키는 여자, 여자를 파괴시키는 남자 

Korea; 2015; 118min
Director: 오승욱
Cast: 전도연, 김남길, 박성웅, 곽도원

 

영화 ‘무뢰한’은 장르로서 하드보일드 느와르의 뼈대를 가지고 있지만 한 남자의 성장이야기에 가까운 듯하다. 감정에 인색하고, 소통에 젬병인 이 남자의 성장은 그를 스쳐간 여성들을 통해 이뤄진다. 재곤에게 몹쓸 취조를 당한 여인, 그의 전처, 황충남의 부인, 김혜경,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피를 흘리는 여인까지 그를 스쳐간 여인들은 유무형의 흔적을 그에게 남긴다. ‘기억하기 싫은 상처들’이겠지만 그 관계들은 재곤이 아주 천천히 자신이 가진 감정의 결들을 알아채고, 타인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드는 ‘사건’들이기도 하다. 황충남 부인의 페디큐어는 정사 중인 혜경의 붉은색 매니큐어와 연결되고, 김혜경이 가진 손목의 상처는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여인의 것과 맞물린다. 어찌 보면 재곤에게 이 여성들은 각기 다르지만 같은 혹은 연결된 의미를 가진 타자일 수도 있다.

흔들릴 준비가 되어 있던 재곤이 혜경을 상대로 시작한 게임은 처음부터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혜경과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그는 정재곤과 이영준의 경계에서, 참과 거짓의 경계에서, 사랑인지 뭔지 모를 감정의 경계에서 다른 차원의 질척이는 싸움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재곤이든 영준이든) 오롯이 혜경을 사랑했을까? 아니면 끝까지 그녀를 이용하고자 했을까? 영화는 양쪽 모두에 대한 단서를 던지며 관객마저도 그 질척이는 감정의 싸움판으로 끌어들인다. 확실한 것은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서 갈팡질팡하던 재곤에게 혜경은 또 하나의 기억하기 싫은 상처가 되겠지만 그 상처를 통해 남자는 다시금 느린 걸음의 성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피를 흘리는 피해자 여성에게 자신의 옷을 덮어 줄 수 있는 딱 그 만큼만.

이 남자의 맞은편에 김혜경이 있다. 느와르라는 장르적 한계 속에서도 굳건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는 이 여성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혼자서는 온전히 서 있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녀를 삶의 바닥까지 끌어내린 것은 남자들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남자를 통해(손님들), 남자에 기대(박준길) 삶을 이어간다. 그런 혜경이 남자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고자 할 때, 직업이 남긴 흔적이겠지만 그녀는 습관적으로 남자의 성기를 목표로 한다. 준길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할 때도, 민 상무의 협박을 달래고자 할 때도, 밀린 외상값을 받아내기 위해 남자를 으를 때도 혜경이 상대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남자들의 성기였다.

하루 종일 남자들과의 처절한 싸움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돌아온 집에서 혜경은 처음으로 재곤의 성기를 반복적으로 만진다. 재곤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감정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혜경의 이 행동은 언뜻 준길의 말대로 영준에게서 돈을 얻어내기 위한 전략처럼 보인다.(영준은 그녀의 손을 잡아 그의 가슴 위에 놓는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달리 영준에게 뱉는 말들에 거짓은 없다. 같이 살자는 영준의 말이 그녀는 분명 진심이길 바랐다. 그에게 기대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다는 찰나의 희망이 그녀의 얼굴에 스쳤다. 혜경은 영준을 진정 사랑했을까? 아니면 그녀 역시 그를 이용하려고만 했을까? 그녀의 행동과 말 모두 재곤처럼 그 사이 어딘가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혜경과 재곤 모두 감정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워 했지만 맡은 바 역할에 충실했다. 재곤은 박준길을 잡는데 성공했고, 혜경은 영준으로부터 돈을 얻어 준길에게 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다르다. 재곤이 여성들의 관계를 통해 조금씩 성장했던 것과 달리 혜경은 남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더욱 처절하게 파괴된다. 그녀를 거쳐 간 숱한 남자들이 그녀를 파괴했듯 재곤 역시 그녀를 파괴시킨다. 박준길의 죽음은 재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녀를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그 나락에서 재곤의 등장은 그녀를 또 (빚을 갚기 위해) 어떤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을 만들었다. 재곤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알리가 만무한 혜경은 재곤에게 다른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재곤은 이 상처를 기억하지 않음으로 그녀를 흔든 대가를 치렀다고 믿을지 모른다. 더디게 성장하지만 재곤은 여전히 감정에 서툴고 방법에 배려가 부족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재곤의 말은 진심일지언정 혜경에게는 공허하다. 영화의 마지막 재곤의 얼굴 위로 겹치는 ‘무뢰한’은 다름 아닌 혜경의 울부짖음일 수도 있다.

여자를 통해 성장하는 남자와 남자를 통해 파괴되는 여자의 등장은 장르 영화로서의 느와르의 공식에 대한 일종의 전복으로 보인다. 느와르 속의 팜므 파탈로 상징되는 여성의 캐릭터는 완전한 자기 세계를 구축한 듯 보이는 남성을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인물이었다. 하지만‘무뢰한’의 여성은 무너진다. 승자처럼 보이지만 남성의 성장 역시 극도의 고통을 동반한다. 이러한 변주는 결핍된 인물들이 엮어내는 극의 비장미를 더욱 짙게 만든다. 모든 것을 갖춘 듯한 남녀가 속고 속이는 게임을 벌이다 클라이맥스를 거쳐 한쪽은 모든 걸 얻고, 다른 한쪽을 모든 걸 잃는 장르의 전형성은 감정에 서툴고 나약한 무뢰한 속 인물들의 비극과 어울리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무뢰한’은 장르로서 느와르를 표방하지만 인물, 구성, 이야기 등 어느 것 하나 고정적인 장르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하드보일드 멜로’라는 타이틀을 붙이긴 했지만 이 영화를 어느 한 장르에 묶어 놓는 것은 영화가 가진 엄청난 상징과 은유를 오독하거나 놓칠 수 있는 행위이다.

선인지 악인지 모를 인물들, 사랑인지 뭔지 모를 인물들의 감정, 참인지 거짓인지 모를 표정, 행동과 말, 해질 무렵인지 새벽인지 모를 시간... 이 모든 것들이 결합되어 ‘무뢰한’의 매 순간은 의미의 범람을 일으킨다. 봉준호의 말마따나 그래서 ‘무뢰한’은 ‘영화다운 영화’다. 소설이 아닌, 시가 아닌, 영화.

그나저나 전도연은 ‘another level’이 아니라 ‘beyond leve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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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17:12

<멋진 하루> Human Therapy-대인관계향상 1日투어


<멋진 하루> Human Therapy-대인관계향상 1日투어

Korea;2008;123min;color
Director:이윤기
Casting:전도연, 하정우, 김혜옥

이윤기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 전도연의 11번째 영화 <멋진 하루>가 한창 상영중이다.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벼르다 일요일 저녁에서야 이삿짐을 대충 정리하고 극장을 찾았다. 새집, 새가구, 새집기들이 반가울 줄만 알았는데 스산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익숙한 동네의 익숙한 풍경과 향기를 떠나 낯선 곳에 혼자 서 있는 느낌 정도로 표현이 될까? 아무튼 새 동네 극장은 어떻게 생겨먹었나 확인해볼 겸 겸사겸사 발길을 잡았다. (티켓 대신 웬 영수증 쪼가리 하나 줘서 완전 짜증났다. 갈수록 멀티플렉스는 정말 상종 못하겠다 싶다.) 

전작들에서 흥행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이윤기 감독은 네 번째 영화에서 전도연과 하정우라는 지금 충무로 최대의 우량주와 블루칩을 물었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지만 그만큼 흥행은 작품의 색깔과 동시에 고려해야 할 십자가가 됐을 것이다. 그래서 난 이 영화가 더욱 궁금했다.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언어를 이전 작품들을 통해 나름대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갔던 이윤기 감독이 이름값한다는 배우들을 만나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전도연과 하정우의 만남이 어땠을지, 와이드릴리즈가 되는 만큼 흥행은 할 수 있을지... 영화를 보기 전부터 영화 자체에 대한 궁금증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던 적이 참 오랜만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멋진하루>는 영화를 보기 전처럼 보고 난 후에도 영화에 대한 많은 생각을 갖게 만든 작품이다. 이처럼 잔상을 오랫동안 깊게 남기는 영화 역시 참 오랜만인듯 싶었다. 영화는 희수(전도연)의 시점에서 진행이 된다.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빌려준 350만원을 받기 위해 무작정 찾아온 희수. 그녀는 왜 돈이 필요했는지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단지 시종일관 짜증나는 표정과 말투로 빚독촉만 계속할 뿐이다. 하지만 병운(하정우)은 그런 희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받아준다. 헤어진 여자친구의 태도에 빈정이 상할 법도 하지만 병운은 오히려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그녀를 "돕겠다"고 나선다. 그런 병운을 희수는 따라나선다. 오늘 꼭 돈을 받아야겠다고, 돈 떼먹고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둘러대지만 실상은 그게 아닌듯 하다. 그렇게 그들의 <멋진 하루>가 시작된다.

병운은 희수의 돈을 만들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꼬깃꼬깃 접힌 전화 목록을 뒤지면서 돈을 구할 상대를 물색한다. 사업에 성공한 중년 여성, 잘 나가는 술집 여성, 마트에서 일하는 이혼한 초등학교 여동창, 스키 강습 제자, 자유분방 친척 부부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 후배 부부까지 병운은 하루 동안 멋지게 350만원의 돈을 만들어 낸다. 돌려막기의 수준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환상적이다. 성별, 직업, 나이를 불문한 폭 넓은 병운의 인관관계의 승리였다. 병운의 관계들에 뛰어든 희수는 의아하면서도 짜증스럽게 그 관계들을 대한다. 돈을 빌려주는 입장에서도 전혀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병운씨 힘들면 내가 도와야지."라는 말을 당연스레 뱉는 사람들이 신기하고, 배려인듯 착한 척 행동하는 병운에게 짜증을 느낀다.

하지만 병운과의 하루가 진행되면서 두꺼운 스모키 화장으로 자신을 감추고 있던 희수는 점점 무장해제를 당한다. 무언가를 깊이 숨기고 그렇게도 병운을 원망했던 희수는 그녀의 예기치 않은 행동에 대한 변명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희수의 말이 아닌 행동으로 드러난다. 결혼에 실패하고 일자리까지 잃은 자존감 강한 희수는 원망할 수 있는, 기댈 수 있는, "넌 잘 할 수 있어"라고 다시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상대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350만원은 희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지 병운과 같은 '사람'이었다.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돈을 위해 굳이 경마장까지 찾아간 희수에게 병운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병운은 일종의 치료제였을 것이다. 굳이 구구절절 자기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상대.

희수의 변화는 희수와 병운이 처음 찾아갔던 한여사(김혜옥)에서 마지막 미혼모 은정(장소연)을 만나는 과정에서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병운과 한여사의 관계를 역겹게 바라보던 희수는 세미, 홍주, 병운의 친척 부부, 소영을 만나며 타인에 대해서 꽁공 닫아두었던 빗장을 열기 시작한다. 마지막 은정에게 40만원의 절반을 나눠갖는 희수는 결국 타인과의 완전한 공감을 완성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많이 하는 얘기지만 타자와 자아는 애초에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하나의 타자를 만드는 일은 다른 하나의 자아를 만드는 일이다. 타자에게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관계는 생성될 수도, 유지될 수도 없다.

희수의 문제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무엇이 인과관계의 앞과 뒤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타자와의 관계 역시 거부하는 것이고, 반대로 타자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자신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희수는 지금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병운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병운과 돌아다니며 만났던 모든 인물들은 모두 희수라는 존재의 하나의 단면들이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학 맞은 소영은 희수의 과거이고, 부잣집에 시집가서 자존심 구기고 사는 홍주는 희수가 결혼을 했다면 될 법한 인물이다. 희수는 그렇게 타자 속의 자신을 발견하며 자기를 지키는 법을 배운다.

희수는 살면서 분명 다시 병운을 찾을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아마 다 못 받은 20만원과 견인비 등등을 마저 받으러 왔다고 투덜대며 다시 그와의 하루를 보내자고 할 것이다. 포스팅의 제목을 <Human Therapy-대인관계향상 1日투어>라고 붙이기는 했지만 희수는 타자와의 관계와 함께 무엇보다 자기를 지키는 법,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을지 모른다. 하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거니까... 대인관계로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단비 같은 힌트를 줄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한다.


하정우가 연기하는 병운의 능청맞음과 전도연이기에 가능했을 법한 온몸 연기(?)가 이윤기 감독의 영화 속에서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영화의 아슬아슬한 스토리를 따라는 것과 동시에 두 배우의 앙상블을 보는 것 역시 멋진 경험이다. <여자, 정혜>에서 그저 묵묵히 정혜의 뒤를 밟던 카메라는 이번에도 희수와 병운을 따라 서울의 곳곳을 비춘다. 서울은 아름다운 곳이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다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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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9 17:01

이창동 <밀양>

밀 양

<신애>
신애는 눈물이 많은 여인이다. 엄마 몰래 숨은 아이를 찾다 바닥에 주저 앉아 울기도 하고, 자신과 아들을 버린 남편을 두둔하며 보고싶어 눈물을 흘리는 여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그녀를 감추며 산다. 그래서 밀양으로 떠나온다. 가족마저도 뒤로 하고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은 남편과 아들과 자신 만의 판타지를 이루며 살기 위해 온다. 자신은 불행하지 않고 주변에 휘둘리지 않는 강한 여자로 다시 살고자 한다. 그래서 세상에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그 거짓말이 그녀의 판타지를 산산히 부셔놓는다. 아이의 유괴... 다시 그녀는 시종일관 눈물을 머금은 너무도 약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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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물이 막혀 버린다. 초점 없는 눈동자를 가득 채운 눈물이 금방이라도 볼읕 타고 쉼없이 흐를 것 같았던 그녀의 눈물이 막혀 버린다. 아이가 죽었다. 가장 큰 슬픔과 고통이 그녀의 전신을 부셔놓았지만 그녀의 눈물은 가슴 어딘가에서 목구멍 어딘가에서 절대 토해낼 수 없을 정도로 막혀 버렸다. 그녀는 내내 알 수 없는 구역질만 해댄다. 자신이 토해 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신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짓누루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자신이 놓인 고통에서 서서히 침잠한다.

그녀가 울음을 토해 낸다. 하나님의 앞에서 자신을 쉼없이 짓누르는 무언가를 걷어내고 그 동안 쌓였던 울음을 눈을 통해서가 아닌, 목을 통해서가 아닌 가슴을 찢어 절규에 가깝도록 쏟아 낸다. 그래서 그녀는 평화를 얻는다.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품에서 해석하고 그 분의 뜻에 따라 삶을 살 것을 약속한다. 그녀에게 새로운 판타지가 시작된다. 종교를 통해 신애는 다른 틀 속에서 그녀의 삶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고 벅찬 신애의 판타지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넘치는 행복과 기쁨을 "찢어죽여도 쉬원치 않을 그 놈"에게 나누려 한다. 신애는 그것이 새로운 판타지의 시작이자 완성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다시 그녀의 눈물이 막혀 버린다. 자신에게 평화를 준 그 분이 벌써 '그 놈'에게도 평화를 내려주셨단다. 신애는 이를 받드리지 못한다. 자신을 고통 속에서 살게 했던 그 놈을 자신의 허락도 없이 하나님이 차별 없이 용서해 주셨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신애는 꽃을 버리고 믿음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신애가 다시 울음을 토해 낸다. 이번에는 땅이 그녀를 울게 한다. 아이의 죽음이 가져온 고통을 토하게 만든 것이 하늘이었던 것과 달리, 믿음의 배신으로 인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신애는 땅 속에서 기어나와 그녀의 앞에 불현듯 나타난 '지렁이'를 통해 토하게 된다. 하늘이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지렁이를 눈 앞에서 맞닥뜨린 순간 신애는 자신이 삶이 처절하게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여름 장마철 한바탕 쏟아진 비가 그친 후 미쳐 땅 속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뜨거운 태양볕에 괴로워하는 지렁이의 모습에서 신애는 잠시 하늘의 고매한 빛으로 삶을 이어가려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눈물을 토하게 된 것이다. 삶은 이런저런 사람들의 나름대로 깔끔하고 지저분한 관계들이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애의 복수는 처절하다.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고 한다. 마치 땅 속으로돌아가기를 포기한 지렁이처럼...) 그녀는 애써 땅 속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처절한 지렁이의 꿈틀거림처럼 그녀는 버거운 싸움을 시작한다. 도둑질을 하고, 교회를 찾아가 울분을 토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를 유혹하고, 자신을 위해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이들에게 돌을 던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구원하지 못한 하늘에 대한 최고의 복수로 자살을 선택한다.(때문에 소설에서 주인공의 자살과 영화에서 신애의 자살시도는 분명 다르게 읽혀야 한다.)

하지만 신애의 삶은 연장된다. "살려주세요"를 목에서 쥐어 짜내며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왜? 신애는 하늘과 화해하지도 않고, 하늘을 용서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하늘이 개입되어 있음을 불편해 한다.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신애는 자신의 삶을 관계를 통해 살아가고자 한다. 타인에 대한 그녀의 "살려주세요..."라는 한 마디가 영화 내내 가장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내는 이유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양장점 사장은 고까운 충고를 했던 신애와 소통했고, 신애는 그녀의 '미쳤나부다'라는 말실수에 지금까지 가장 천진한 표정으로 베시시 웃는다. 마지막, 신애는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자른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그녀가 그토록 밀어내려 했던 종찬이 거울을 들고 서 있다. 그런 신애와 종찬을 햇빛은 사방에서 비추고 있다. 그들이 발을 디디고 살아가야 하는 지저분한 땅까지도 말이다.

이제 그녀는 진정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판타지의 연속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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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찬>
신애만 만나면 코너에 몰리는 39살 노총각이 있다. 지방 소도시의 카센터를 운영하며 다방 아가씨에게 지저분한 농도 칠줄 알고 여기저기 뿌려놓은 그물같은 인간관계에 흐뭇해 하는 속물이다. 아니 속물이라기 보다 가족 때문에 힘들어 하고 친구들에게는 인심 좋은 너무 평범한 우리 주위의 인물이다. 그런 종찬은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신애를 사랑한다. 그는 항상 그녀의 몇 걸음 뒤에서 다가가기를 준비하고 있다. 절대 틈을 보이지 않는, 가장 처절했던 순간들에도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그녀의 주위를 그는 지름 넓은 원처럼 맴돌 뿐이다. 신애의 고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고, 몇 뼘 뒤에서 그녀가 괜찮아지기를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없다. 그런 그가 신애의 삶에 다시 숨을 불어 넣는다. 신애에게 다시 꽃을 안기는 사람은 바로 종찬이다. 신애의 앞에서 거울을 들고 있는 사람 역시 종찬이다. 신애에게 있어 밀양(密陽)은 종찬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정아>
신애는 정아와 다섯 번 만난다. 쉽게 끝날 수 있었던 그 만남은 신애와 정아의 삶을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게 한다. 영화 속에서 정아는 신애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주요한 메타포로서 역할을 한다. 신애는 정아를 통해 유괴범을 알게 되고, 정아를 통해 유괴범을 용서해야겠다는 결심을 세운다. 그리고 정아를 통해 절대자를 거부한다. 더불어 정아라는 어린 여인의 고통 역시 신애와 다르지 않다. 신애를 통해 아버지의 죄를 알게 되고, 그녀의 괴로움을 통해 살인자의 딸로서 자신의 처지를 힘들어 한다. 코끝을 붉히며 '안녕하세요'를 건네는 정아를 통해 그녀가 화면 밖에서 어린 나이로 유괴범과 살인자의 딸로 성장한 과정에서 알게된 삶의 비릿함과 처절함이 동시에 묻어난다. 신애에게도 정아에게도 서로는 가장 큰 상처이가 아픈 관계가 될 것이다. 결국 정아 역시도 신애가 거부하려 하지만 절대 거부 할 수 없는 밀양(密陽)의 한 줄기이다.  
<그들의 밀양>

이창동 감독의 네 번째 영화 <밀양>은 상당히 거시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의 삶과 그 안에서 신이라는 절대자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화두를 제시한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말처럼 이 영화를 종교적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무거운 주제는 세상의 가장 미시적 구성체인 인간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 카메라는 세상을 아우르는 절대자의 손이 아닌 그 손에서 기쁨과 슬픔과 고통과 절망의 순간에 몸부림치는 인간들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밀양>을 신에 대한 영화라고만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이 영화는 분명 '인간'의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물음에서 출발하는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종교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각 종교가 어떤 교리와 가르침을 갖고 있는지,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는 지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이렇게 한 발 물러선 자리에서 교회의 십자가와 절의 일주문을 보고 섰을 때, 분명 인간에 대한 의미 있는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영화는 분명하지 않지만 인간의 고통이라는 것은 그것이 하늘의 뜻에 의해 이루어졌을 지라도 결국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은 그것과 함께 피를 흘리며 싸우고, 극복해야 하는 주체는 땅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인간'이라는 답을 내린다. 그리고 가장 미시적인 주체인 인간들 간의 소통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신애는 신으로 인해 평화를 얻었고, 그로 인해 다시 고통 속에서 괴로워한다. 보이는 것조차 다 믿지 않았던 신애는 이제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신의 잘못이라 여기고 그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가장 처절한 복수로 그의 열매(선악과가 반드시 사과는 아니지만)를 먹으며 자살이라는 원죄를 범한다. 하지만 그녀를 구한 것은 철저히 땅에 디디고 서 있는 삶에 대한 욕망이고, 그녀와 관계맺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었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감당할 수 없는 거시적인 고통 속에서 미시적인 인간 자신과 인간들의 관계를 통해 구원의 빛을 찾을 수 있다는 평범하지만 우리가 쉽게 놓치고 사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밀양(密陽)>이라는 '비밀의 볕'은 분명 신애를 둘러싼 종찬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절대자의 존재를 부정한 것일까? 이 영화에 대해서 이것만큼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는 질문도 없을 것이다. 라페엘로의 <아테네 학당> 정중앙에는 그리스 철학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플라톤의 손이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왼손은 땅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지고지순의 가치는 이데아를 추구하는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의 감각, 현실의 감각을 인정하는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을 손가락 방향 하나로 상징한다. 그렇다면 둘의 가치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굳이 <밀양>을 두 틀에서 나눈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쪽에 가깝지만 그의 철학은 절대 플라톤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느 것이 우월하고 열등한 지를 가를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림에서 그들의 마주보며 소통하고 있는 것처럼 공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밀양>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화의 마지막 아무렇게 자란 잡초와 쓰레기가 뒹구는 마당의 지저분한 한 켠을 묵묵히 비추고 있는 빛을 바라보고 있을 때 답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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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을 본 개인적인 느낌을 정리했다. 정말 오랜만에 영화를 보고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질문들에 괴로워했던 것 같다. 분명 기분 좋은 괴로움이다. (결국 이 괴로움이 영화를 세 번이나 보게 만들었다.) 분명한 것은 세 번이나 봤음에도 이 영화에 대해서 아직 모르는 것이 많고, 이렇게 글로 풀었음에도 아직 할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함부로 감동적이다, 재밌다라고 말할 수 없는 영화의 깊이를 간만에 느끼게 한 작품에 감히 고마움을 표한다.

이 영화를 보는 데 있어 스토리 뿐만 아니라 미적 장치, 영화적 장치들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말들이 많을 듯 싶다. 안타깝지만 거기까지는 아직 내 눈이 따라주지를 못한다.

<이창동>
소설가가 이자 영화감독으로서 소설 같은 영화도 아니고, 영화 같은 소설도 아닌 영화 자체의 장치들로 메세지를 영상으로 풀어내는 그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툭툭 던지는 대사 한 마디, 배우들의 동작 하나, 소품 하나 모두 쉽게 흘려 보낼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관객과 소통을 시도한다. 그 엄청난 정보가 영화를 보는 내내 감정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지만 그 고통으로 인해 영화가 더욱 깊이 각인된다. 정말이지 그의 다음 영화가 벌써 기대된다.
<송강호>
종찬은 보이지 않을 때 더욱 존재감이 커진다. 신애의 뒤에서 그의 존재는 더욱 각인된다. 감히 종찬은 송강호가 아니었으면 영화 속에서 빛을 잃었을 것이라 말하고 싶다. 영화 속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가 아닌 종찬으로서의 역할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그는 영화 속에서 스스로를 낮춘 듯 싶다. 전도연의 수상 소식에 상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함에도 누구보다 크게 웃고, 끝까지 옆을 지키고 있는 그에게서 정말이지 연기자를 느낀다.

<전도연>
지인들은 알고 있지만 난 전도연의 빠돌이 생활 10년차이다.ㅋ 그녀가 <접속>으로 스크린에 등장 한 순간부터 그녀의 연기를 의심해 본 적이 없고, 그녀 역시 나의 기대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오랜 기간 동안 팬의 입장에서 열 번째 영화 <밀양>에서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행복하게 해준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아주 오랫동안 지금처럼 배우로서의 모습을 지켜주었으면 한다. 그녀의 칸 영화제 수상 소식이 무척이나 반갑다. 10년 빠돌 생활이 보상받은 느낌이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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