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하우스 모모'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09.04.23 <똥파리> 무쓸모의 존재감 (8)
  2. 2009.03.23 <레볼루셔너리 로드> 충돌하는 욕망들 - Who is right? (4)
  3. 2009.03.01 <더 레슬러> 삶의 온전한 기록, 뒷모습 (8)
  4. 2009.02.04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제4회 블로거 상영회 후기 (4)
  5. 2008.12.21 <로큰롤 인생> 극장판 전국노래자랑 - They stay alive.
  6. 2008.12.16 <북극의 연인들> 우연과 운명 그리고 유한과 영원
  7. 2008.11.21 <사과> 당신은 어떻게 사랑하고 이별하나요?
  8. 2008.10.29 <나는 인어공주> 환타지가 불가능한 세상에서 꿈꾸는 환타지
  9. 2008.10.26 <비몽> 김기덕식 경계 허물기 (8)
  10. 2008.09.11 <더 걸> 그냥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진실이 어떤 얼굴을 했는지
2009.04.23 10:30

<똥파리> 무쓸모의 존재감


<똥파리> 무쓸모의 존재감


Korea; 2008; 130min; Drama
Director: 양익준
Cast: 양익준, 김꽃비, 이환, 정만식


 
시간을 뛰어넘어 2009년 연말로 가서 한 해 영화계를 정리할 때, 그 리스트에 "독립영화의 약진"이라고 적어놔도 쉽게 이의를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워낭소리>가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잭팟을 터뜨린 이후 <낮술>, <할매꽃> 등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여름의 시작과 함께 또 한 편의 독립영화가 수상한 세를 모으고 있다. 연이은 국제영화제 수상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극장 개봉에 성공한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가 그 주인공.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감독, 각본, 주연까지 혼자 1인 3역을 도맡은 신인 감독의 영화에 쏠리는 관심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제목부터 범상하지 않다. 여름이면 모기와 함께 찾아오는 무쓸모의 양대산맥이 "똥파리"다. 과연 영화 <똥파리>는 어떤 존재감을 갖고 있을까? 여러가지 기대감으로 극장을 찾았다. 영화가 시작하고 2시간 10분이 지나서 다시 상영관에 불이 들어왔다. 다소 긴 러닝타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스토리는 흥미로웠고, 구성은 찰졌다. 짧게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우리 이전 세대 아버지들의 권위주의적 폭력에 '안녕'을 고하는 영화"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거친 제목과 달리 영화는 따뜻하고, 인간적이었다. 감독의 자기고백적 느낌이 강하지만, 누구나 한 번 쯤 품었을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래서 왠지 많은 사람에게 깊은 울림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폭력의 시작

늦은 밤, 한적한 동네 사거리에서 한 남자가 여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질을 하고 있다. 잠시 후 상훈이 앵글 안으로 들어온다. (상훈은 '주먹'을 통해 처음 영화 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남자는 상훈에 의해 폭력의 가해자에서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폭력에 더 큰 폭력으로 남자를 응징한 상훈에게서 관객들은 묘한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상훈은 돌아서 매를 맞던 여자에게 뺨을 날리고 침을 뱉는다. 방금 전의 쾌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남은 건 짜증과 멸시에 찌든 상훈의 표정 뿐이다. 그 표정에서 연민과 동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똥파리>의 첫 장면, 감독은 폭력의 변이를 파노라마가 이어지듯 보여준다. 첫 시퀀스로 똥파리 상훈의 캐릭터에 대한 모든 설명이 끝이 난다. 상훈은 보통 사람이 가진 평범한 감정을 공유하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과 표정을 갖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폭력'이다. 이 후의 영화는 그가 가진 폭력이 어떻게 체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몇 번의 플래시백을 통해 드러나는 상훈의 폭력은 '가족'으로부터 출발한다. 특히 아버지는 상훈이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배설하는 욕설과 폭력의 실체가 된다. 약한 어머니에게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고, 그 와중에 어린 여동생을 죽인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것이다. 동시에 상훈의 폭력에는 가해자였던 아버지만큼이나 피해자였던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함께 얽혀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매맞는 여자를 대한 상훈의 태도는 "속수무책으로 맞고만 있었던 어머니"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상훈은 어머니에게 피해자로서의 연민과 어린 자신과 여동생을 지키지 못한 원망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상훈의 폭력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와 여동생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아버지에 대한 분노,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그가 아버지보다 더 큰 폭력을 갖게 된 것은 - 어머니와 같은 약한 존재가 되어 또 다른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겠다는 - 삶의 궤적이 만들어준 그만의 삶의 양식(a way of life)이다. 


더불어 <똥파리>는 지극히 감독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을 하고 있지만 '폭력'에서 사회적 맥락을 제거하지 않는다. 솔직히 <똥파리>를 보고 있으면 몇몇 장면에서 가난을 폭력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상훈과 영재의 가족이 속한 도시의 빈민촌은 지난한 가난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 곳에서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폭력이, 형제를 향한 다른 형제의 폭력이, 이웃을 향한 이웃의 폭력이 '가난'을 이유로 이뤄진다. 또한 영재가 가난을 벗어나고자 폭력을 휘두르는 용역 깡패가 되는 모습에서는 가난의 되물림이 폭력의 되물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약 이렇게 가난과 폭력을 등호의 관계를 놓고 영화가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갔다면 <똥파리>가 가진 윤리성은 심각하게 훼손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양익준 감독은 가난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위기를 돌파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가난하지만 '필사적'으로 그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가난의 굴레에서 한 걸음도 도망칠 수 없다. 그것은 가난이 이미 개인의 능력을 벗어나 사회적 구조 속에서 무한 반복되기 때문이다. 연희의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건 구청직원들에게 언제 헐릴지 모르는 포장마차였고, 그의 딸 연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시급 몇 천 원의 떡볶이집 아르바이트가 고작이다. <똥파리>는 가난이 폭력이 뿌리내리기 쉬운 토양을 제공하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가난한 사람이 폭력적 사람이 된다는 논리로 환원하지는 않는다. 
 
연희의 아버지는 폭력이 가진 사회적 맥락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국가를 위해 전쟁(베트남전)에 참여했다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그는 국가로부터 버려진 인물이다. 얼마 정도의 보조금을 받고 있지만 한 가정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노동력을 상실한 그는 곧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방기하고, 남자로서의 기능을 거세당한다. 그가 끊임없이 아내를 의심하고, 가족을 폭력으로 대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남자' 임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엄청난 국익을 가져올 것이라는 이유로 국가는 생면부지 전쟁터로 젊은이를 보냈고, 다시 돌아왔을때 국가로부터 소외 당한 참전용사는 고스란히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폭력의 시작점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들을 통째로 감당해야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닌 온전히 가족의 몫이 되었다. 결국 <똥파리>가 보여주는 폭력의 실체는 사회사와 개인사가 복잡하게 얽힌 결과물인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의 결과물... 영화 포스터의 카피처럼 "세상은 엿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은 아닐지언정 그 감정만큼은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폭력의 확대

영화 <똥파리>에서 아버지들(연희의 아버지와 상훈의 아버지)은 한국의 권위주의 시대에 가족에게 자행된 폭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리고 아버지들로부터 출발한 폭력은 이후 세대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오히려 더 확대된다. 폭력은 그 폭력을 누를 수 있는 더 큰 폭력을 야기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상훈의 아버지가 행하는 폭력이 가족의 틀 안에 있었다면, 상훈의 폭력은 아버지의 폭력을 방기한 세상을 향해 있다. 그의 폭력은 성별은 물론이거니와 적(敵)과 아(我)를 가리지도 않는다. 나이까지 경계가 없는 듯 보인다. 심지어 경찰로 상징되는 공권력에게까지 그의 폭력은 거침이 없다. 연민과 동정과 같은 감정은 애초에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분노 뿐이다. 그가 하는 말은 욕이고, 그가 하는 행동은 폭력이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상훈은 '언어 이전의 인간'인 것이다. 또한 등록금 시위현장에서 보듯 그의 폭력은 윤리와 도덕 이전의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폭력을 이용해 돈을 벌 수 있는 용역깡패가 고작이다. 


또 다른 상훈, 영재가 있다. 상훈처럼 불운하게 어머니를 잃고, 가장으로서 기능을 상실한 아버지를 두고 있다. 둘에게 아버지는 공히 분노와 원망의 대상일 뿐이다. 똑같이 마음을 쓰게 만드는 누나가 한 명을 두고 있는 점도 닮아 있다. 하지만 상훈의 폭력이 세상 밖으로 거칠게 표출되는 반면에 처음 영재의 폭력은 가정 내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상훈은 아버지와 누나에게 절대적인 폭력을 행사하지만 밖에서 그렇지 못하다. 친구 승훈을 따라나선 용역 현장에서 영재는 지금까지 경험으로 감당하기 힘든 폭력(상훈)을 마주한다. 그리고 영재는 그의 앞에서 우물쭈물한다. 하지만 그 주저함은 껍질을 벗고 더 큰 몸을 얻기 위해 몸부림 치는 파충류의 변태 과정과도 닮아 있다. 그 과정을 통해 영재는 더 큰 폭력을 물려받는다. 영재는 다른 용역들처럼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영화의 마지막, 영재는 자신의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상훈에게 충동적으로 막무가내 폭력을 휘두른다. '절대적인 폭력'이라고 믿었던 상훈의 약한 모습은 순간적으로 약자와 강자의 위치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영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영재는 상훈을 제거함으로써 그보다 강한 폭력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버지들의 폭력은 상훈을 통해 다시 영재에게로 확대, 전이된다. 결국 상훈과 영재는 한국의 근대사(우리의 아버지 세대)가 만든 폭력의 결과물인 셈이다.

폭력의 소멸


영화의 전반부가 상훈을 중심으로 한 폭력의 전이를 보여주고 있다면, 후반부는 치유의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치유의 파동이 시작되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가족'이다. 아마도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치유는 생채기가 생긴 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상훈의 아버지와 상훈이 행하는 폭력의 차이점은, 아버지 폭력의 피해자가 오직 가족이었던 반면 상훈의 폭력은 가족을 제외한 모든 세상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상훈에게 가족은 그토록 없었으면 하면서도, 그가 간절히 욕망하는 대상이었다. 15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세상에 나온 아버지에 대한 상훈의 무자비한 폭력은 자신에게 온전한 가족을 만들어주지 못한 원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가 아버지가 없는 동안 배다른 누나(현서)와 그의 자식(형인)을 돌봤던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아버지씨의 씨를 타고났지만 상훈은 현서와 형인에게서 희미하게 남아있는 가족의 흔적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표현이 거칠고 어설프지만 말이다. 

가족을 향한 상훈의 한 걸음은 만식과 연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상훈보다 네 살이나 많은 만식은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그의 유일한 친구이다. 세상과 이리저리 치받으며 결국에는 스스로 상처를 내는 상훈을 마음 쓰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만식은 아파하는 걸 알면서도 상훈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계속 상기시킨다. 아마도 상훈이 가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이다. 그리고 연희가 있다. 우연히 만난 이 겁없는 고3 소녀는 상훈에게 죽은 어머니이자 여동생, 구원자이자 친구와 같은 존재이다. 상훈 만큼이나 복잡한 가정사를 가진 연희 역시 가정과 학교 어느 곳에서도 위로를 받지 못한다. 그리고 세상과 소통하지 못했던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위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 상훈은 단 한 번 크게 웃고, 단 한 번 크게 운다. 항상 연희가 그 옆에 있었다. 연희 역시 상훈과 같이 웃고, 같이 눈물을 흘린다. 연희를 통해서 상훈은 타인과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운다. 둘은 질척거리는 가정사를 주저리 떠들지 않아도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상훈은 다시 가족을 용기내본다. 조카의 유치원 학예회에 상훈을 통해 탄생한 '가족'이 모인다. 여기서 감독은 가족을 굳이 혈연으로 뭉친 1차집단으로 한정시키지 않는다. 이미 <다섯은 너무 많아>, <가족의 탄생>에서 전복적으로 그려낸 가족의 탄생은 <똥파리>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상훈의 아버지, 현서, 형인, 만식, 그리고 연희까지... 이들에게는 '가족'이라는 타이틀도 붙지 않았고,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라는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 지붕 아래 모여 살지는 않지만 그들은 '가족'을 이루며 산다. 각자는 그 안에서 그저 서로를 보듬고 배려하는 동등한 구성원일 뿐이다. 감독은 근대적 가족이 가진 편협한 정의를 거부하고 타인에게까지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연희와 영재 남매가 슬프게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영재의 존재는 분명 한 번 전이된 폭력이 쉽게 없어질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연희를 통해 영재가 확대된 개념의 가족 공간으로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영재 역시 상훈 만큼이나 건강한 가족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닌 응당 해야할 일이다. 폭력은 개인과 가정의 테두리에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기에 그렇다.

여기서 상훈의 위치는 어디일까? 감독은 상훈에게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상훈의 아버지가 거세된 폭력이라면, 상훈은 살아있는 폭력을 의미한다. 곧 그의 죽음은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폭력의 마침표이자, 권위주의 시대 폭력의 종결인 것이다. 힘이 가득 들어간 '주먹'으로 영화 속에 들어온 상훈은 숨이 떨어진 그 손을 마지막으로 영화를 떠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에서 톰(비고 모르텐슨)의 가족은 폭력의 실체를 알면서도 침묵한다. 그 침묵은 엄청난 폭력을 묻어두고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상징이다. 하지만 <똥파리>는 상훈의 죽음을 통해 남은 자들에게 온전한 평화를 선물하고자 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는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다. 똥파리는 없어졌다.  
 


솔직히 <똥파리>의 모든 감정들이 이해되고, 모든 인물을 안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의 화해와 용서에 어느 정도의 물음표가 남는 것도 사실이다. 표현 방법에서도 여러 장르의 클리세들은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런 부족함에도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것은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뜨거운 '진심'에 있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난 누구를 위해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 만든다." 는 말을 했다. 그 만큼 <똥파리>는 한 컷, 한 컷에서 감독의 진한 인생이 묻어난다. 그럼에도 사변적이지 않고 그 진심이 온전히 전달되는 이유는 처음에 얘기했듯이 상훈의 이야기가 특별할지언정 그 메시지는 보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로 인한 갈등과 그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극복하기까지 한 개인이 겪는 감정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보편적이다. (영화의 엄청난 수상 성적을 봤을 때 서양 역시 마찬가지인 듯하다.) 감독은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녹여내 영화로 풀고 있다. 그리고 감독은 메마르고 황량한 현실에서도 감히 희망을 얘기한다. 또한 그것이 이뤄질 거라고 믿는다. 양익준은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다. 그 진심이 스크린에 그대로 묻어난다.


P.S. 1
긴 러닝타임에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 것은 스토리의 재미와 구성의 탄탄함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적재적소에서 터져주는 유머와 배우들의 군더더기 없는 연기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 듯 하다. 인물들이 뱉어내는 대사는 특히나 찰졌고, 캐릭터를 완벽하게 살려냈다. (개인적으로 콘프레이크를 먹는 채무자 장면과 만식의 대사들이 인상적이었다.) <똥파리>를 배우들의 발견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양익준은 감독, 각본, 주연까지 충무로의 좋은 영양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김꽃비, 이환, 정만식까지 벌써 차기작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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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3 11:30

<레볼루셔너리 로드> 충돌하는 욕망들 - Who is right?


<레볼루셔너리 로드> 충돌하는 욕망들 - Who is right?


U.S.; 2008; 119min; Drama; Color
Director: Sam Medes
Cast: Leonardo Dicaprio, Kate Winslet, Kathy Bates, Michael Shannon

 
1925년 발표된 버지니아 울프의 네 번째 장편 소설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영국의 중상층 사람들의 하루를 담고 있다. 파티를 준비하는 댈러웨이 부인의 시선에서 시작하는 소설 속 이야기는 그녀와 연결된 여러 인물들의 내면과 의식을 농밀하게 훑고 지나간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군상들이 바로 그들이다. 영광 못지 않게 많은 상처를 안겨준 전쟁은 그들의 '삶'에 있어 현실성을 극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전장에서 가까운 누군가를 잃어버린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다름 아닌 살아있음(생존)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숨을 쉬고,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있다는 사실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충분조건이 되는 것일까? 적어도 버지니아 울프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그녀가 당시의 소설 양식을 거부하고 선택한 <의식의 흐름>을 통해 그토록 인물의 내면에 침잠했던 이유는 분명 인물의 존재는 밖이 아닌 안을 통해야만 볼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댈러웨이 부인> 속의 인물들은 과연 어떤가? 버지니아 울프가 만들어 낸 인물들은 모두 그녀의 펜끝에 자신들도 미쳐 감지하지 못했던 의식의 깊은 곳까지 드러내게 된다. 활자로 옮겨진 그들의 내부는 겉모습과 닮아 있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한 가지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어느 누구도 '확신'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파티를 열고, 휘트브레드는 권력을 탐하고, 브래드쇼는 사람들의 존경을 구하고, 브랜튼 여사는 명예를 떠받들고, 샐리는 평범한 주부의 모습에 안주한다. 모두들 각자의 방법으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확신에 찬 듯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자신의 삶이 진정으로 원하는 곳으로 흘러가는가?' 의 질문 앞에서 그들은 모두 주저한다. 댈러웨이 부인, 샐리, 피터의 삶은 그들이 젊은 시절 욕망하고 꿈꿨던 것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중년에 접어든 그들은 어디를 가든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누군가가 되어 있을 뿐이다. 이들은 모두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못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겉모습과 달리 이들의 안(內)은 회의와 의심으로 가득차 있다.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과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대부분은 전자의 승리로 끝이 난다. 이들의 반대편에 셉티머스가 있다. 모순적이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삶을 포기한다. 정상인의 루트에서 벗어난 그래서 정신병자라고 낙인이 찍혀버린 그는 일반적인 욕망의 잣대들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견디지 못한다. 그가 창밖으로 몸을 던진 이유는 '타인의 욕망'에서 '자신의 욕망(존재)'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댈러웨이 부인이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는 셉티머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 마음이 동요하는 이유는 분명 그녀 역시도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현실적 욕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욕망들은 모두에게 공유되고 있는 것들이다.(그 욕망은 '수상'으로 요약된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타인을 바라보며 마음의 안도감을 얻는다. "내가 틀리지 않게 살고 있어..." 그 안도감은 댈러웨이 부인이 한없이 못마땅하면서도 그들을 파티에 불러 모으는 이유이다.
 

샘 멘더스의 새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한 중산층 가정의 위험하고도 위태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작 <아메리칸 뷰티>를 통해 미국 중산층 가정의 모순과 허위를 풍자적이면서도 극적으로 그려냈던 감독은 이번에도 역시 평화롭기만 해보이는 한 가정의 은밀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결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가 알고 알고, 모두가 갖고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순간 그 폭발력을 감당할 수 없어 평생을 없는 척 묻어둬야 하는 그런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솔직히 영화를 보면서는 <레볼루셔너리 로드> 역시 <아메리칸 뷰티>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 갇힌 사람들의 파국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일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생뚱맞은 생각도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담고 있는 엄청난 텍스트를 곱씹을수록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 계속해서 생각의 이곳저곳을 파고들었다. 앞에서 소설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길게 풀어쓴 이유이기도 하다. 

공간도 시대도 다른 두 텍스트가 오버랩되는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어쩌면 각각 1차 대전과 2차 대전 직후라는 상황적 유사성이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소설과 영화 속의 캐릭터와 그 인물들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이야기에 있다.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은 댈러웨이 부인을 닮아 있고,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피터와 리차드를 섞어놓은 듯하다. 존(마이클 새넌)은 셉티머스의 또 다른 모습이고, 그들을 둘러싼 이웃은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장에 모인 사람들과 연결된다. 이 인물들은 모두 욕망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욕망은 한 개인의 내부에서부터 충돌을 일으킨다. 하지만 결국 선택되고, 행동으로 옮겨지는 욕망은 사회가 허용하고 합의한 범주 내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공허하고 희망은 없더라도 최소한 다른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안도감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그 범주에서 벗어난 욕망을 시도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부러움을 느끼지만 그보다 더한 '공포'를 느낀다. 사람들이 정신병자로, 낙오자로, 부적응자로 그 이탈자를 낙인을 찍는 이유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인물들 역시 평범한 듯, 평화로운 듯 살아가지만 각자의 욕망을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욕망이 표출되었을 때 갈등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욕망

애이프럴(케이트 윈슬렛)은 특별하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직업과 이름을 묻는 대신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냐." 고 묻는다. 그리고 그와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동화 속에나 있을 법한 교외의 조용한 마을(Revolutionary road)에 살고 있는 그녀는 중산층이라면 누구가 꿈꾸는 부족함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욕망하는 바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재능이 없음에도 연극배우를 놓치 않는 것은 뭔가 다른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무대가 아니면 청소와 빨래, 육아로 정작 자신은 누구인지 잃어버리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사는 삶에 숨이 막힌다. 피터의 <영혼의 죽음>이라는 말이 댈러웨이 부인을 도망치게 했던 것처럼, 범부의 삶은 애이프럴에게 영혼이 없는 삶일 뿐이다. 애이프럴은 스스로 욕망을 이룰 방법을 잃어버렸을 때, 자신의 욕망을 남편을 통해 이루고자 한다. 모든 안락하고 보장된 환경을 뒤로하고 파리로 떠나고자 했던 것. 애이프럴은 파리가 남편의 진정한 삶을 찾아줄 수 있는 곳이라 믿었다. 하지만 사실 파리는 남편의 욕망이 아닌 그녀의 욕망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 욕망이 좌절됐을때 그녀는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다. 자신의 욕망을 좌절시킨 남편에 대한 실망과 뱃속의 아이에 대한 원망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만약 댈러웨이 부인이 리차드가 아닌 피터와 결혼을 했다면 그녀 역시도 애이프럴과 닮아 있지 않았을까? 

그의 욕망

애이프럴에게 파리로 가자는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프랭크는 비웃으며 "Great!!!"를 연신 외친다. 현실성 제로의 제안이 당황스럽고 황당했을 뿐이다. 하지만 평범한 회사원으로서의 공허한 일상과 희망이 없는 미래에 그 역시 지쳐가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탈이란 아내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아내의 계속된 설득에 프랭크 역시 파리에 대안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금씩 갖게 된다. 결국 그는 가족과 함께 파리에서 자신의 진정한 삶을 찾을 계획을 세운다. 한동안 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날 기대감으로 행복에 취해 있지만 일상의 욕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그를 포기하지 않는다. 회사의 승진 제안과 아내의 임신은 그가 '현실의 욕망'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리고 전혀 다를 수 있었던 삶을, 그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을 기회를 포기한다. 그에게는 "미래의 무엇"이 아무리 핑크빛일지라도 그것을 위해 현재의 모든 것을 내던질만큼의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누구나 탐을 낼만한 달콤한 현실의 욕망들이 있다. 문제는 "혁명적 길"을 포기한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와 존(마이클 새넌)의 시선이다. 프랭크는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려 하지만 아내와 존에게 자신은 그저 내면의 욕망에 애써 침묵하는, 또 한 명의 범부가 되려는 비겁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 시선을 견디기 힘들다. 그에게 파리는 처음부터 실현되지 않을 꿈이었을지 모른다. 그저 퇴근 시간 건물에서 우르르 몰려 나오는 직장인들이 술자리에서 희망 없이 내뱉는 레퍼토리처럼 말이다.


그리고 타인의 욕망

영화의 배경이 되는 레볼루셔너리 로드... 그곳은 미국의 안정적인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평화로운 곳이다. 미국인 누구라면 꿈을 꾸는 그런 곳이다. 그 곳에 프랭크 부부가 이사를 온다. 중개인 헬렌의 말처럼 마을에 가장 어울리는 부부일지 모른다. 비슷한 일상을 즐기고, 꿈을 공유하며,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 헬렌이 자신의 아들 존을 프랭크 부부에게 소개시켜주는 이유 역시 그들 부부에게서 '건전한 상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프랭크 부부가 파리행을 결정했을 때 그들의 기대는 무너진다. 앞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철없고 대책없다고 단정한다. 프랭크 부부가 모두가 공유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동이 자신들의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 두려워한다. "어리석은 짓이야." 남편 셉의 말 한 마디에 밀리는 눈물을 쏟아낸다. 아마도 그녀는 남편의 말에서 자신의 가정은 그런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레볼루셔너리 로드 사람들에게 일상은 절대적이고, '변화'는 두렵기만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비춘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허황되지 않은 건전한 욕망이라는 확신과 안심을 얻는다. 다른 욕망이 있더라도 절대 밝혀서는 안 된다. 아예 없던 것처럼 여기고 살아야 한다. (셉 캠벨은 애이프럴에 대한 욕망을 끝까지 함구한다.) 만약 누군가 그 확신에 돌을 던진다면 더 이상 좋은 이웃과 친구가 될 수 없다. 마치 "존"이 정신병자가 된 것처럼 말이다. <댈러웨이 부인>의 셉티머스와 닮아 있는 존 역시 끝없이 '전향'을 요구받는다. 그가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방법은 일상은 공허하지 않고, 그 곳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전향)이다. 하지만 셉티머스가 전향을 거부하고 창밖으로 몸을 던졌듯이, 그 역시 사회의 요구에 저항한다. 마음이 통할 것이라고 믿었던 프랭크 부부에게서 얻은 실망은 그래서 더욱 거칠게 폭발한다. 애이프럴의 욕망, 프랭크의 욕망,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타인의 욕망은 모두 다르다. 솔직히 그들 각자가 어떤 욕망들을 갖고 사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들이 평화를 유지하며 사는 방법은 그저 일상을 벗어나지 않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목표들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단지 나른한 봄날 어쩌다 한 번 씩 생각하는 달콤한 욕망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과연 누가 옳은가?

샘 멘더스의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리차드 예이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원작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감독은 영화에서 과연 누가 옳은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누가 옳은 것인가? 당신은 누구의 편에 서겠는가? 불필요한 욕망은 접어둔 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들은 내심 프랭크 부부의 성공적인 파리 안착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영화니까 가능하겠지..." 라는 생각을 갖으면서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애이프럴의 입장에서 그녀의 시도와 절망에 계속 마음이 쓰인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눈앞의 보장된 성공을 선택한 프랭크를 비겁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정확히 모른채 무작정 파리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 애이프럴의 욕망이었다. 가장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현실의 벽을 높게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주고자 헌신했지만 절망감에 아이를 스스로 포기한 애이프럴은 동정 받을 수 있을까? 그녀에게 도덕적, 윤리적 잣대만을 들이댄다면 절대 그럴 수 없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며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었던 그녀가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을 때 느꼈을 박탈감은 여전히 그녀는 보듬게 만든다. 그녀에게는 앞으로 '영혼이 없는 삶'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애이프럴에게는 의미 없는, 곧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이다.


이렇게 보면 누가 옳은가의 질문은 무의미하다. 어찌 보면 옳고 그름의 질문 자체를 봉쇄하는 것이 프랭크와 애이프럴, 그리고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회의와 염증을 가졌던 존은 정신병자가 됐고, 도전하고자 했던, 벗어나고자 했던 애이프럴에게 찾아온 것은 결국 비극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를 유지시킬 수 있는 욕망일 뿐이다. 다른 것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사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메리칸 뷰티>에서 통쾌한 일탈을 시도했던 래스터 번햄은 '비극적 해피엔딩'을 맡는다. 릭키의 말처럼 그의 죽음은 일면 아름답다. 하지만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결말은 수식어가 필요 없는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이 아직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현실이다. 미국이든, 대한민국이든 어디에도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P.S. 1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이젠 두말 할 필요가 없겠다. 솔직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은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더 어울린다.(<더 리더>에서의 연기가 더 못하다는 말이 아니다. <더 리더>는 한나의 이야기라기보다 마이클의 영화기이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선이 굵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디카프리오 역시 프랭크의 캐릭터를 잘 소화한다. 하지만 수염을 깍은 말쑥한 얼굴의 디카프리오는 너무 동안이다. 살을 찌워 몸은 자연스럽지만 같은 또래의 케이트 윈슬렛이 가지고 있는 원숙함이 그의 얼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애이프럴과 프랭크는 부부라는 느낌이 다소 들지 않는다. (어떤 때는 엄마와 아들 같기도 하다.) 동안도 배우에게는 꼭 좋은 것만은 아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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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03:21

<더 레슬러> 삶의 온전한 기록, 뒷모습


<더 레슬러> 삶의 온전한 기록, 뒷모습


France, U.S.; 2008; 109min; Drama; Color
Director: Darren Aronofsky
Cast: Mickey Rourke, Marisa Tomei, Evan Rachel Wood

 
누군가의 현재를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의 어디를 봐야 할까? 물론, 여기서 현재는 순간이 아닌 과거를 통한 현재이다. 과연 한 사람의 인생을 가장 함축적으로 응집시켜 놓은 곳이 어디일까?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은 "나이가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말을 뱉은 지 한 세기하고도 반이 지났다. 지금은 칼과 주사기로 무장한 성형외과 의사들이 있다. 이들이 "당신의 인생을 만들어줄 수 있다." 며 덤벼들지 모를 일이다. 얼굴이 아니라면 재테크 포트폴리오 만큼 확실한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주식은 얼마나, 펀드는 얼마나, 부동산은 얼마나, 은행 예금은 얼마나 가졌는지가 시대가 시대인만큼 그 가늠의 기준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돈은 언제나 부분일 뿐이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삶의 만족도와 언제나 비례 관계인 것은 아니다. 개인을 총체적으로 그려내는데 한 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다른 답을 내놓는 사람도 있다. 왕가위는 불혹을 넘기고 영화 <화영연화>를 만들었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담은 이 영화에서 그는 유독 장만옥과 양조위의 뒷모습에 카메라를 고정시킨다. 그리고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른다. 중년을 넘긴 남녀가 겪는 이별의 상처와 사랑의 떨림,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이별은 인물의 얼굴에서 묻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국수통을 들고가는, 택시 뒷자석에 나란히 앉은, 앙코르와트에 비밀을 묻는 뒷모습에 오롯이 담겨 있다. <밀양>의 신애도 그렇다. 이창동 감독은 신애가 지고 있는 버거운 삶의 십자가들을 굳이 주저리주저리 말로 떠들지 않는다. 그녀가 밀양에 내려왔을 때도, 아이를 잃어버렸을 때도,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하염없이 밀양의 골목골목을 배회하는 뒷모습을 따를 뿐이다. 표정은 감출 수 있다. 하지만 온전히 타인에게만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뒷모습은 거짓이 불가능하다. 신애의 뒷모습은 그대로 그녀의 과거이자 현재인 것이다.

꼭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니다. 아빠와 엄마의 뒤를 걷게 됐을 때, 문득 그들의 뒷모습에서 늘어난 얼굴의 주름보다도 깊은 세월의 흔적을 감지하게 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뒷모습은 그렇게 자신이 살아온 삶의 기록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더 레슬러>는 쉰을 넘긴 프로레슬러의 뒷모습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막 게임을 마치고 의자에 걸터 앉아 가쁜 숨을 내쉬는 이 한 장면으로 주인공 랜디(미키 루크)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은 사족이 될 뿐이다. 그의 뒷모습은 프로레슬러로서의 그의 삶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요약본이자,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프로레슬링은 TV가 만들어낸 최고의 쇼였고, 랜디는 현란한 기술로 그 쇼의 주인공이 됐다.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스타를 신문 첫장에 담기 위해 공격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이 있었다. 쥴스 데이신의 1950년도 영화 <밤 그리고 도시>에는 프로레슬링을 사기라고 경멸하는 노장 레슬러 그레고리우스가 등장한다. 그는 노쇠한 몸으로 한껏 인기를 끌던 프로레슬러 크리스토를 넉다운 시키지만 결국 그 자리에서 눈을 감는다. 그가 만약 얼마를 더 살았다면 이 '사기쇼'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고 더 독한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프로레슬링도 열흘 붉은 꽃은 아니었다.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쇼'였던 이 변종 격투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시들해졌고, 자연스레 링 위의 스타들도 빛을 잃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K-1과 같은 좀 더 과격하고 리얼한 격투기와 새로운 스타들의 차지가 됐다.
 
한물간 스타들은 젊은 날의 영광을 안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중고 자동차 판매원과 같은 직업인이 됐고, 누군가는 여전히 지방의 행사장을 기웃거리며 조악한 쇼를 펼치고 있다. 그리고 후자에 <더 레슬러>의 주인공 랜디가 있다. 프로레슬링과 자신의 인기가 끝이 없을 것이라 믿었을 그는 미래에 대한 준비도 없이 호시절을 즐겼을 것이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방값도 내기 힘든 주머니와 온갖 약의 도움 없이는 링 위에 오르기도 힘든 늙고 병든 반 백년을 산 몸 뿐이다. 유일한 혈육인 딸에게 버림 받은 지는 오래이고, 마트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며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를 지탱시켜 주는 것은 오로지 링 위를 호령했던 랜디로서의 기억 뿐이다. 그는 2000년대가 아닌 여전히 198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로빈슨 람진스키'가 아닌 랜디로 불러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는 이유이다. 앙드레 김이 김봉남이 아니듯, 그도 람진스키가 아닌 랜디이고 싶기 때문에...


과거의 화려한 기억을 안고 궁색한 현재를 살아가는 프로레슬러의 외로움은 그의 '뒷모습'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더 레슬러>의 카메라는 집요할만큼 랜디의 뒤를 쫓는다. 그가 링 위에 오를 때도, 경기가 끝나고 락커로 돌아올 때도, 일을 하기 위해 마트에 들어설 때도 언제나 보게 되는 건 그의 뒷모습이다. 그리고 뒷모습은 주름진 그의 얼굴보다도 더 랜디의 외로움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스테로이드가 만들어 준 근육과 어깨의 주름에는 영웅의 자리에서 내려온 중년의 외로움이 깊게 베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랜디 자신의 삶의 기록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의도적으로 느껴질만큼 랜디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과연 미키 루크가 얼마나 망가진 것인가.'를 확인하고 싶은 생각에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의 시작부터 심하게 흔들리는 카메라는 뒷모습만 비출 뿐이다. 간간히 보여지는 얼굴은 링 밖에서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싫은 랜디를 배려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내 기억이지만) 한 장면이 있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랜디의 모습이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랜디의 눈물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얼굴의 주름을 타고 흐른다. 그리고 뒷모습을 따르듯 카메라는 랜디의 얼굴을 응시한다. 처음으로 '영웅 랜디'가 아닌 '인간 람진스키'와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 눈물은 딸에게 아버지로서 책임을 못한 것에 대한 속죄이자, 외로움과 병든 몸 밖에 가진 것이 없는 자신에 대한 치유의 의미이다.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랜디는 익숙한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신과 많이 닮아 있는 스트리퍼 캐시디와 잊고 지냈던 딸 스테파니를 찾아간다. 혼자가 아닌 자신도 누군가의 연인이자, 누군가의 아빠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레슬링이 아닌 다른 걸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 익숙하지 않다. 한 번의 실수로 그의 눈물에 어렵게 마음을 열었던 딸에게 다시 버림을 받는다. 그리고 랜디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 자신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 끝을 알면서도 말이다.


<더 레슬러>를 대런 아노로프스키의 영화가 아닌 미키 루크의 <더 레슬러>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 만큼 미키 루크의 역할은 영화 속에서 절대적이다. 지금까지 영화의 메시지와 배우, 내용이 이 정도로 혼연일체를 이뤘던 작품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이다. <나인 하프 위크>, <와일드 오키드> 등 최고의 섹시 큐트 가이였던 그의 늙은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와 청년 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는 분명 자신을 비추는 영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난 그의 영화를 한 철이 지나 비디오 가게에서 아빠 이름 대고 몰래 빌려본 이후 세대이다. 그럼에도 킴 베이싱어와 침을 꼴깍이게 만들었던 그 베드신의 주인공이 미키 루크라는 사실만으로도 공감에는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랜디가 마트 정육코너의 랜디가 아닌 프로레슬러로서 랜디 였듯이, 사람들은 여전히 미키 루크의 이름에서 그의 지난한 과거보다도 1980년대 스크린 속에서 화려한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어렵게 스크린으로 돌아온 만큼 랜디의 우울하고 쓸쓸한 뒷모습이 아닌 미키 루크의 화려하고 당당한 뒷모습을 보게 될 수 있길 바란다. 

<더 레슬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마리사 토메이가 역할을 맡은 캐시디이다. 쉰을 넘긴 프로레슬러가 어색하듯 마흔이 넘은 애엄마 스트리퍼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 둘의 캐릭터는 어쩐지 닮아 있다. 스테로이드가 만든 랜디의 근육과 늘어지기 시작한 그녀의 몸이 닮아 있고, 그들의 얼굴 주름에 묻어나는 삶의 어두움이 닮아 있다. 그래서 랜디는 캐시디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갖는다. 캐시디도 랜디 앞에서는 '팸'이고 싶어하지만 아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그를 손님 이상으로 대하기 힘들다. 마리사 토메이는 자신과 비슷한 랜디에게 마음이 가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버거워하는 캐시디를 완벽하게 그려낸다. 미키 루트가 랜디였듯, 마리사 토메이 역시 영화 속에서 캐시디였다. 랜디의 이야기와 조화를 이루며 영화의 감정을 풍부하게 하고, 미키 루크가 이끌어 가는 절절한 감정에서 한 템포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실제 4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 스트리퍼의 역할에 도전한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공교롭게도 미키 루크와 마리사 토메이는 그들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줬음에도 모두 나란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물을 먹었다. 이 영화 속 루저들이 시상식에서나마 승자가 되는 모습을 보기를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현실에서도 루저들의 손은 들어주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꽝"이 나오면 꼭 따라 붙는 말이 있지 않은가. "다음 기회에" 그게 위로이든, 희망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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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4 10:35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제4회 블로거 상영회 후기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제4회 블로거 상영회 후기


Russia; 1989; 105min; Drama; B&W
Director: Vitali Kanevsky
Cast: Pavel Nazarov, Dinara Drukarova


지난 1월 31일 토요일 오후 8시 이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2009년 첫 블로거 상영회이자 네 번째 상영회가 있었습니다. 상영 영화는 투표 결과에 따라 러시아 출신 비탈리 카네프스키 감독의 1989년도 작품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였습니다. 솔직히 투표 참여 인원이 많지 않아 관객이 적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정말로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기우'라는 표현은 딱 이럴 때 쓰라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예정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상영관에 도착을 했는데, 그 때부터 매표소에 '매진'이라는 빨간 글씨가 떠 있더군요. (믿기지 않아 매표소에 몇 번이고 정말 매진이냐고 물어봤습니다.^^) 블로거 상영회가 네 번째 만에 드디어 매진을 기록했습니다!!! 역시 첫 회 때부터 느꼈지만 투표에서 1등을 한 영화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정해진 객석을 꽉 채우고, 보조의자를 놓고, 그것도 부족해 심지어 대기표까지 받아 서서 보시는 분들, 계단에 앉아서 보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죄송스럽고, 고마운 마음에 감정이 벅차더군요. 좋은 영화는 관객이 찾는다는 말은 다시 한 번 믿게 됐습니다. 워낙에 오래된 필름이고 보관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영상이 불안정하고 만족스럽지 않았음에도 영화를 보기 위해 오신 분들이 참 너무너무 사랑스러웠습니다.^^


감독이 55세의 나이에 만든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는 그에게 제 43회 칸느 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안겨준 작품입니다. '신인'이라는 말이 감독의 나이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그의 굴곡 많은 인생이 이 영화 이후 <눈오는 날의 왈츠>, <우리, 20세기의 아이들>로 이어지는 러시아 영상 미학의 '극'을 보여주는 3부작의 원형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감독의 <눈오는 날의 왈츠> 역시 '겨울'을 테마로 했던 이번 상영회의 후보작 중 하나였는데, 다음 상영회라도 꼭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7년 러시아의 극동 지방인 블라디보스토크의 스촨이라는 가난한 탄광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전후 스탈린의 서슬 퍼런 독재와 대중선동, 경직된 경제정책 등이 최고조에 이를 무렵 모든 것이 망가진 한 마을을 12살 발레르카와 갈리야라는 어린 아이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마을은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군대도 정상적인 작동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소련'을 환유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물론, 어린 발레르카는 감독 자신의 과거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짧게 영화를 평가한다면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는 전쟁 직후 국가의 폭력적 통제와 억압, 무능력이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고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상황에서 사람들의 이성은 어떻게 매몰되는지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핵심인 배급은 유명무실해지고, 군인과 경찰의 폭력은 제어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소련이 추구하는 공산주의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요원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제 막 말을 배운 어린 아이가 반역자는 죽여야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폭력과 절도, 살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등 사람들의 이성 역시 생존의 본능 앞에서 무참히 옅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감독은 이 시기 스탈린의 정책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은 듯 보입니다. 학교 화장실에 이스트를 넣는 행동을 통해 교육정책을 불신하고,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자행하는 군대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맥컬리 컬킨을 닮은 발레르카가 저지르는 철 없는 장난들이 상당한 유머와 위트를 던져주면서 영화를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희극'과 '비극'이 공존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감독이 삶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선인 것 같았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저는 왠지 영화를 보면서 갈리야가 발레르카의 실질적인 어머니 내지는 구원자처럼 보였습니다. 특히 발레르카가 도망친 곳까지 갈리야가 찾아오는 것을 보면서 더욱 확신이 들더군요. 그런 갈리야가 발레르카를 대신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합니다. 부상을 당한 발레르카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의 원제가 "얼음, 땡" 놀이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발레르카에게는 더 이상 "땡"을 해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되겠죠. 결국 감독은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역사의 한 현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영화가 비극이라고만 믿고 싶지 않습니다. 영화 제목이 주는 메타포도 있지만, 감독은 분명 그 비극적 상황에서도 "삶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를 영화 전체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저런 상황에서도 인간이 살아야 하는 것일까?" 영화를 보면서 계속 질문을 던지게 되지만 답은 항상 하나로 수렴이 되더군요. 그것이 꼭 희망적인 메시지나 영상을 통해 드러나지 않아도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유가 충분한 것 같습니다. 언젠가 부활하게 될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꼭 살아있어야겠죠...

(덧붙여, 영화의 음악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본인 포로들이 부르는 노래들이 배경음악으로 많이 흘러 나오는데 이국적이지만 왠지 영화의 분위기와 상당히 잘 맞아떨어지더군요. 감독이 어린 시절 많이 듣고 자라 익숙했겠지요.)





제 감상은 이 쯤 정리하고, 씨네토크에서 나왔던 의견들 역시 상당한 깊이가 있었습니다. 매진이 됐던 만큼 가장 많은 분들이 영화가 끝난 후 씨네토크 시간까지 함께 해 주셨는데요. (40분 가까이 씨네토크가 진행이 됐는데 끝나고 나서까지 열기가 식지 않더군요.^^) 기억을 열심히 되살려 짧게 정리해 보면...

1. 우선, 중년의 여성 분이 이번에 대학에 입학한 조카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 왔다고 하셨는데요. 조카분에게 어떻게 보셨는지 물어보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2. 많은 분들이 자신의 어린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됐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여성분은 자신이 광주에서 겪었던 일들을 전해주셨는데요. 어린시절 받은 상처들을 떠올리면서 깊은 공감과 울림을 받으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3. 특히, 영화가 비극적인지 희망적인지를 놓도 다소 다른 의견들이 오갔던 것 같습니다. 영화의 제목 때문에 희망적이라고 보시는 분들도 계셨고, 극 중의 비극적 결말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4. 씨네마테크에서 <미러>를 보고 오셨다는 분은 고전영화 애찬론을 피셨는데요. 카메라 워크가 화려하고 컷이 짧고 기교가 우선인 지금의 영화들보다 호흡도 느리고, 컷과 컷의 연결은 부자연스럽지만 사고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 고전영화의 매력이라고 하셨습니다. 

5. 지금 우리의 상황과 비교하면 더 마음이 무거워진다는 의견도 있었고요.

6. 제가 감독이 목소리를 통해 영화 속에 자주 개입하는 장면은 어떻게 보셨는지에 대해 물어봤었는데요. 영화가 허구가 아니라 사실임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 개입이었다는 감상이 있었습니다.

7. 마지막으로 한 여성 분이 제게 질문을 하셨는데요. 제가 말을 많이 하면 안 되는 자리라서 편하게 대답드리지 못한 것 같아 불편한 마음에 몇 자 적습니다. 광주에서 경험을 말씀하신 분의 말을 받아 제가 "좋은 영화는 특수한 상황을 영화 속에 그리고 있으면서도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라고 코멘트를 단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질문은 "광주의 상황이나 영화 속과 같은 상황을 경험해보지 못한 입장에서 제가 느낄 수 있었던 '보편적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지?"였던 것 같습니다.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보편적 메시지란 "삶에 대한 의지", "삶이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반복되어서는 안 될 비극"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위에서 설명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 경험을 하신 분들과 그렇지 못한 제가 느낀 감정이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 분들께 "얼마나 힘드셨어요. 제가 다 이해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주제넘은 짓이겠죠. 제가 말하는 바는 머리로 하는 '이해'의 차원이 아닌 '공감'의 차원입니다. 전 기본적으로 제가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는 모든 행동이 결국 '공감의 층'을 넓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경험하지 못했던, 갈 수 없는 역사와 세계에 대한 의식의 확장이죠.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과거의 상처는 치유되고,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현재의 우리가 경험해지 못해 공감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만큼 비극을 경험하신 분들께 죄스럽고 비극적인 일은 없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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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1 15:53

<로큰롤 인생> 극장판 전국노래자랑 - They stay alive.

<로큰롤 인생> 극장판 전국노래자랑 - They stay alive.

UK; 2007; 108min; Documentary; Color
Director: Stephen Walker
Cast: Bob Cilmon, Eileen Hall, Bob Salvini, Fred Knittle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로큰롤 인생>을 보고 왔습니다. 
많은 블로거 분들이 영화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셔서 저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뭐 워낙 음악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왠지 <로큰롤 인생>에 대한 감상은 그 동안 해왔던 장문의 딱딱하고 분석적인 글보다도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소소한 감정들을 일기처럼 그냥 술술 써내려가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한 번 해봅니다.

평일 오후 한가한 시간이었지만 로큰롤 인생의 상영관은 제법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들이었고요. 젊은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좀 힘들더군요. 기말고사의 탓도 있겠지만...

왜 영화를 볼 때 좋지 않은 편견이지만 그런거 있잖아요. <10세 미만 아이들과 나이 지긋한 어른들 옆자리, 앞자리는 무조건 피해라!!!> 저는 상당히 이런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이거든요.

아이들은 초단기 집중력 때문에 상영 시작 10분도 안 돼서 좌불안석이 시작되고, 앞자리 발로 차고, 엄마 아빠한테 질문폭격을 날리고... 하여간 근처에 있으면 영화에 집중하기가 좀 힘들죠. 가끔은 알밤을 한 대 쥐어박고 싶게 만들죠. ㅋㅋ 때문에 애니메이션도 아이들이 없는 늦은 밤 시간에 보는 습관도 생겼습니다.

어른들도 참 난감하죠. 영화에 상관 없이 도란도란 재미있게 담화를 나누시는 분들도 계시고, 코를 골며 숙면을 취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심지어는 전화기를 붙잡고 생중계를 하시는 분도 있고요.^^


<로큰롤 인생>도 어른들이 많아 참 걱정을 쫌 했습니다. 정말 어른들이 거의 70% 이상이더군요. 더구나 아트하우스 모모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양 옆과 앞자리 모두 '어른들'이었습니다. 사면초가였죠. 정말 오랜만에 "내가 여기서 젤 어리다.!!!"라고 외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93의 할머니의 독창으로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제 왼쪽 옆좌석부터 들썩이기 시작했습니다. 60대 후반 쯤의 할머니 두 분이셨는데 등을 의자에 기대지시도 못한 채, 박수를 치면서 장단도 맞추시고, 어깨도 들썩이시면서 말이죠...

시간이 흐를수록 박소소리도 웃음소리도 커지고, 나중에는 환호성까지 지르시더라고요.  순간 저 분들이 사실은 카트엘(카시오페아, 트리플S, 엘프)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웬 일일까요... 전혀 짜증스럽지가 않더군요. 평소같으면 '저 분들은 왜 저러실까...' 계속 싫은 눈길을 보냈을텐데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습니다.

참, 영화 자체를 즐기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좀 조마조마 했거든요. 밤새 안녕 하실지 모르는 고령의 어른들 - 오가다 사고나면 어쩌나, 고음 올라가다 혈압 올라가면 어쩌나, 피곤해서 기력 약해지시면 어쩌나 하여간 이런저런 불안함을 놓치 못하겠더라고요. 

그런데 오히려 어른들은 그런 걱정 없이 영화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재밌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아이들처럼 영앳하트의 주인공들과 웃고, 우는 감정을 함께 하면서 말이죠. 건방진 말처럼 들리지는 모르겠지만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죽음에 대해 점점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두려움은 있겠지만 그게 순리인 것을 받아들이는 거죠. 

영앳하트의 멤버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즐기고, 제 옆에 앉아 계셨던 어른들이 같이 호흡할 수 있었던 것도 제가 할 수 있는 사고의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에 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단순히 죽을 때가 됐으니까 인생을 좀 즐겨야겠다는 조바심이나 조급함이 아니라 당신의 근처 어딘가 가까이 있는 마지막을 인정하고서 진정으로 인생을 즐긴다고 해야 할까요. (They stay alive!!!) 저도 언젠가 나이를 먹어 그 분들처럼 되어 있다면 같이 느낄 수 있겠죠.^^ 친구들과 함께 봤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들을 경험하게 해준 어른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옆의 할머니들께 인사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 분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더군요. 그런데 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들 주위에서 영화를 같이 봤던 분들 모두 두 노인을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 한 분이 "덕분에 영화가 훨씬 재미있었습니다."라고 할머니의 손을 잡아주기도 하더군요. 영화를 보면서도 여러 번 눈물을 흘렸지만 그 모습에 가장 마음이 벅찬던 것 같습니다.

영화도 좋았지만 극장에서 사람들과 영화를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잊고 있었던 감정을 다시금 상기시켜준 시간이었습니다.



P.S. 갑자기 전국노래자랑이 생각나더군요. 아직도 고향의 부모님은 일요일 1시만 되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전국노래자랑을 기다리십니다. 예전에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말이죠. 그리고 일주일 동안 이거보다 재밌는 건 없었다는 모습으로 텔레비전에 폭 빠져 있죠.

"저게 뭐가 재밌을까?, 다 늙은 노인네들 나와서 박자도 못 맞추고 음정도 틀리는 노래 부르고, 어기적어기적 몸을 흔드는 저런게 뭐가 재밌을까?" 어른들을 보며 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채널에서는 더 재미있는 게 많이 하거든요.

뭔가 모르겠지만 <로큰롤 인생>을 보면서 전국노래자랑을 보고 있는 어른들이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유치하다고 느꼈던 부분들에는 분명 지금 제 나이에서 알 수 없는 것들이 녹아 있겠죠. 다음 주부터는 엄마손 잡고 전국노래자랑이나 같이 즐겨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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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6 01:11

<북극의 연인들> 우연과 운명 그리고 유한과 영원


<북극의 연인들> 우연과 운명 그리고 유한과 영원


Spain, France; 1998; 108min; 35mm; Color
Directing: Julio Medem
Casting: Najwa Nimri, Fele Martinez, Maru Valdivielso, Nacho Novo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눈의 여왕>이라는 작품이 있다. 국내에서는 <인어공주>, <미운오리새끼> 등에 비하면 그렇게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2006년 현빈과 성유리가 주연한 동명의 KBS 드라마에서 주된 소재로 사용되면서 유명세를 탔던 기억이 있다.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장미꽃을 유달리 좋아하는 두 어린 아이 - 게르다와 카이는 둘도 없는 친구사이이다. 평소처럼 장미꽃을 가지고 놀던 어느 날, 카이의 눈에 유리조각이 밖히는데 그 유리조각은 다름 아닌 악마가 모든 것을 추하게 보이도록 만든 거울이 깨지면서 생긴 파편이었다.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카이는 눈의 여왕의 마법에 걸려 그녀를 따라 나서고, 혼자 남은 게르다가 카이를 찾아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온갖 역경을 딛고,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게르다는 결국 눈의 여왕이 사는 성에 도착하지만 눈과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린 카이는 게르다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게르다의 눈물이 얼어버린 카이의 눈과 마음을 녹이고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참, 집으로 돌아왔을 때 게르다와 카이는 다 자란 숙녀와 청년이 되어 있다. 언뜻 보면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동화일수도 있지만,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사랑과 우정, 상처, 희생 등에 대한 풍부한 은유와 상징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북극의 연인들>에 대한 리뷰를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으로 시작한 이유는 단 하나. '라플란드' 때문이다!
게르다가 카이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의 여왕이 살고 있는 '얼음성'이다. 그녀의 성은 다름 아닌 '라플란드'... <북극의 연인들>에서 오토와 아나가 다시 재회하게 되는 곳 역시 '라플란드'이다. 실제로 유럽의 최북단 지역이면서, 북극권이 시작되는 곳... 우연처럼 네 명의 이야기는 이 얼음과 백야의 땅을 향하고 있다. 사실 훌리오 메뎀의 <북극의 연인들>과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은 그저 공간적 배경이 같을 뿐 큰 연결고리가 없을 수도 있다. 카이와 게르다는 오토와 아나의 이름처럼 회문(palindrome)의 이름도 아니고, 복잡하게 얽힌 가정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라플란드'가 은유하는 바도 그다지 비슷하게 형상화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북극의 연인'에게서 자꾸 카이와 게르다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오토와 아나가 라플란드로 향하는 '길(누군가를 찾아 떠나는 길)'이 닮았기 때문이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며 얻게 되는 때로는 격하고 때로는 소소한 감정과 경험들이 네 명이 걷게 되는 길 위에 있는 것이다. 물론 두 이야기의 결말은 너무도 다르지만...

이렇게 본다면 <북극의 연인들>은 사랑을 배우고, 이별을 경험하는 '멜로드라마'이자 '성장영화'의 틀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북극의 연인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처음은 오토와 아나가 처음 만나게 되는 어린 시절, 다음은 연인과 남매 사이에서 갈등을 경험하는 사춘기, 그리고 마지막은 어른이 된 이후의 그들이 이별과 재회를 하는 시기가 된다. 즉, 오토와 아나가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면서, 그들이 사랑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과 겪는 경험들에 카메라를 집중하고 있다. '라플란드'는 그 여정의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는 지점이 된다. 동시에 오토와 아나의 반복되고 순환되는 '우연'을 완성시켜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과연 라플란드에 이르는 길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느낄 수 있었을까? 쉽게 풀어 말하자면 오토와 아나, 카이와 게르다의 경험은 특별하지만, 그 감정은 '보편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성장하면서 한 번 쯤은 고민해봤을 사랑에 관한 문제들... 아니면 지금까지도 우리가 답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 숙제들... 오토와 아나가 보여주는 그 감정들은 바로 영원과 우연 그리고 영원과 유한의 문제들이다. 내 사랑이 운명인지, 그리고 영원할 것인지...

<운명과 우연>

<북극의 연인들>의 처음과 마지막은 같은 장면이다. 한 여인이 자동차에 부딪히고 지켜보던 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달려간다. 관객이 여인의 죽음을 예상할 때, 여인은 계단을 뛰어 올라 그녀가 조금 전의 그 남자를 만난다. 어느 것이 실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여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여인이 그 남자를 보고 있다는 것은 어느 경우가 됐든 '진실'이 된다. 그리고 플래시백... 그 여인과 남자의 과거가 시작된다. 시작부터 관객은 끝을 알고 있는 이야기를 보고, 듣게 된다. 하지만 감독은 관객이 이미 알고 있는 결말로 향하는 길을 숱한 '우연'들로 채우고 있다. 어린 오토는 축구공을 주우려 가다 어린 아나를 만나고, 아버지를 잃은 아나는 오토를 본 순간 그를 좋아하게 된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우연히 같은 차에 탄 오토의 아빠(알베로)와 아나의 엄마(올가)는 사랑을 하게 되고, 그들은 연인이 아닌 남매가 된다.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며 아나와 오토는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그들의 우연은 좀처럼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우연은 다른 우연들보다 슬프게 찾아왔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보는 그들의 운명적인 사랑은 우연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정해진 결말(운명)을 이루는 우연들... 우연과 운명은 어쩌면 한 얼굴의 다른 표정일지도 모른다. 2차 대전이 한창일 무렵 스페인의 한 마을, 오토의 할아버지와 독일 공군의 만남에서 출발하는 오토와 아나의 만남은 우연일수도, 운명일수도 있다. <오토의 아버지가 독일인과 결혼을 하고 / 오토가 독일식의 이름을 갖게 된 것도 / 아나의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도 / 오토의 부모가 이혼을 한 것도 / 혼자가 된 알베로와 올가가 비 오는 날 만난 것도 / 올가가 다른 알베로와 사랑에 빠진 것도 / 그 알베로의 아버지가 '오토'인 것>도 모두 예정에 없던 우연이다. 하지만 오토와 아나의 사랑은 이 모든 우연을 운명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기억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기 때문이다. 현재를 가능하게 한 과거의 어느 순간이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 의미 없이 흘려보냈을 다른 기억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나는 그들의 인연이 시작된 할아버지가 있는 라플란드에서 오토를 기다린다. '추운 곳에서는 모든 것이 빨리 일어나기 때문이다.' 오토는 그녀를 향하기 위해 라플란드로 향한다. 그들의 우연이 완성될 듯 보인다.

하지만 옛날 오토처럼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그들의 만남은 어긋난다. 그들이 '만남'을 그토록 기다렸을 때, 그 순간은 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오토와 아나의 경우처럼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에 우연한 만남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찾아온다. 우리가 그들의 만남을 우연이면서도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다.

<유한과 영원>

알베로는 8살 난 아들 오토에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계절도 영원하지 않고 연인의 사랑도 변하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를 떠난다. 하지만 오토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모두 엄마를 떠나는 아빠가 남긴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세상 무엇인가 영원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엄마에 대한 사랑만큼은 변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다. 하지만 오토는 아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면서,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 엄마를 떠난다. 그리고 엄마의 싸늘한 주검을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 오토는 엄마에 대한 사랑이 변했듯 아나에 대한 사랑 역시 언젠가는 변할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아나의 곁을 도망치듯 떠난다. 아나 역시 떠난 오토를 그리워하지만 곧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한다. 영원할 것 같은 그들의 열병같은 위험한 사랑도 아빠의 말처럼 '시간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나의 사랑도 짧게 끝이 났고, 올가와 알베로의 사랑도 차갑게 식었다. 인간이 유한하듯  영원한 것은 없는 듯 보인다.


오토는 라플란드와 스페인을 오가며 우편 배달을 한다. 그리고 아나는 오토를 만나기 위해 라플란드로 떠난다. '라플란드' - 얼음과 백야의 땅이다. 낮과 밤이 바뀌지 않고 해가 떠있는 곳이자, 모든 것이 눈으로 뒤덮힌 변하지 않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만큼은 그들의 사랑도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속 오토와 아나에게 변하지 않는 사랑의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오토가 아나를 찾으러 가지만, 비행기가 추락하고 아나가 반대로 오토를 찾아 나선다. 살아남은 오토가 다시 아나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몇 걸음을 앞두고 그들의 비극은 시작됐다. 영화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결말이 실제인지 확신할 수 없다.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는 아나가 실제인지, 오토를 만나기 위해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아나가 실제인지 분명하지 않다. 처음에 말했듯이 분명한 것은 아나의 눈에 눈물이 차고, 그 안에 오토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순간 아나의 삶과 죽음은 영원과 유한으로 자연스럽게 치환되지도 않고 대비되지도 않는다.
영화는 아나와 오토의 시선이 반복 교차되면서 전개된다. 그리고 마지막 '아나의 눈에 비친 오토'라는 제목처럼 둘의 시선이 처음으로 마주친다.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다. 끝일 수도 있지만 이제서야 그들의 사랑은 시작일지 모른다.

<눈의 여왕>에서 게르다가 눈물로 카이의 마음을 녹였을 때, 얼음조각이 떨어져 나오면서 얼음글자가 완성된다. 눈의 여왕이 카이를 만나기 전에 게르다에게 던졌던 문제의 답은 '영원'이었다. 오토와 아나, 게르다와 카이처럼 '영원'이 모두가 얻고자 하는 바라면 그것은 우리의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하지만 오토처럼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지금의 사랑에서 도망가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그저 현재의 사랑에 충실할 수 있다면 만족해야겠지... 그것이 운명이든 우연이든, 영원하든 변하든...


<북극의 연인들>은 1998년 영화다. 훌리오 메뎀의 다른 영화들처럼 굉장히 이미지가 강하고 회화적인 영상이 영화 전체을 이루고 있다. 10년이 넘은 영화지만 전혀 옛날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여기에 감독의 독특한 스토리 구성이 돋보인다. 시간의 순서대로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지만, 영화의 시작과 동일하게 구성하고, 그 안의 이야기를 오토와 아나의 시선으로 교차시키고 있다. 하나의 이야기가 그의 시선과 그녀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재구성되는 것이다. <렛 미 인>과 더불어 이번 겨울을 허전하지 않게 해줄 수 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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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1 11:15

<사과> 당신은 어떻게 사랑하고 이별하나요?


<사과> 당신은 어떻게 사랑하고 이별하나요?


Korea; 2005; 118min; 35mm; Color
Directing: 강이관
Casting: 문소리, 김태우, 이선균, 최형인, 강래연

 
<사랑과 전쟁>이 주는 텁텁한 교훈이기는 하지만 사랑은 사람을 취하게 만들고 결혼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고 언젠가 결혼이라는 목표지점에 다다른다. 그렇지 못하면 인간으로서 할 도리를 못하고 있는 듯 불안해 하는 이들도 있다. 한 스펙트럼에 나란히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양 극단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사랑과 결혼.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숱한 시인, 철학가, 예술가 등등이 나름 사랑과 결혼을 정의했지만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굳이 책 찾아보지 않아도 몸이 이미 알고 있고, 경험 못 해본 이라도 어깨너머로 들은 얘기, 본 얘기 종합하면 비슷하게 때려맞출 수 있다. 언뜻보면 각양각색 동방신기 노랫말처럼 사랑은 '뭐다뭐다 이미 수식어 레드오션'이지만 그 감정이란게 자신에게만 특별할 뿐이지 다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내 사랑이 영화같고, 내 결혼이 사연 많아보여도 툭 까놓고 보면 '방법론'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찌보면 그 방법론의 차이가 늘 사랑과 결혼을 다르게 포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전과는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나만의 것으로 말이다.

그렇담 왜 사람들은 나에게만 특별할 뿐 비등비등한 사랑과 결혼 이야기에 늘 오감을 집중하게 되는 걸까? TV를 켜도, 음악을 들어도, 그림을 봐도, 책을 열어도, 친구와 얘기를 해도 사랑과 결혼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 전혀 어색한 일은 아니다. 캐릭터도 비슷하고, 스토리도 차이 없고, 결말까지 뻔히 들여다 보이지만 두 가지 이야기는 '시장'에서 늘 수요와 공급이 넘쳐난다. 누군가는 현실과 다른 환타지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하고 결혼하는지"를 엿보고 싶은 관음증적 호기심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도저도 아니면 많고 많은 시간 하릴 없는 나같은 솔로들이 외로운 허벅지 찔러감서 설렜다가, 삐쳤다가, 꼬였다가, 다시 열렬히 사랑하는 그 소소한 감정들을 잊지 않기 위한 안쓰러운 노력일지도 모른다. 암튼 뭐가 됐든 정답은 정해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늘 세상은 사랑과 결혼 '이야기들'로 풍만하며, 언제나 잠시만 눈과 귀를 집중하면 어렵지 않게 이야기 몇 개 낚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또 하나의 사랑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낚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영화는 환타지도 아니고, 관음증적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솔로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저렴한 감정들에도 참 인색하다. 오히려 궁색하고 옹색하고 남루하고 측은한 마음까지 든다. 그러면서도 화장, 조명 다 없애고 현실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스크린에 나선 이 친구들을 한 번 안아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포장 다 벗겨내고 알몸으로 나온 사랑과 결혼이란 이 친구를... 강이관 감독의 <사과>가 얼마 전 개봉했다. 개봉관 코 앞까지 갔다가 거절당하기를 수십회, 불황 제대로 타는 충무로 영화시장에 맞춰 어느 언론사 헤드라인처럼 '창고영화 대방출' 시즌에 드디어 개봉관을 잡았다. 2005년에 만들어졌으니 꼭 3년이 흘렀다. 그 동안 영화제에 몇 번 소개되고, 상도 받아오면서 영화 자체에 대한 호기심은 적지 않았다. 드디어 뚜껑이 열렸다. 너무도 젊어 심지어 앳돼 보이기까지 하는 문소리, 김태우, 이선균을 스크린에서 보자마자 실소가 터지지만 결과적으로 <사과>는 확실히 다른 창고 영화들과 싸잡아 매대애서 팔리기에는 뭔가 자존감 상하는 구석이 있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사과>는 평범한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사랑과 결혼이야기이다. 지리멸렬하고 궁색하고 예뻐보일 것 없는 옆에서 보고 있으면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그런 사랑도 아니다. 그저 주변에 널린 그런 사랑이고 결혼이다. 사랑하는 것도 이별하는 것도 결혼하는 것도 심지어 사는 것도 우리 주변 누군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마저도 들지 않는다. 커피숍에 앉아 친구의 입을 통해 친구의 친구의 직장동료의 친척의 얘기를 듣고 있는 기분 정도.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엔딩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먹먹하고 꽉차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공유하는 진정성이 그 속에 담겨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문소리, 김태우, 이선균이 연기하는 현정, 상훈, 민석은 그래서 안쓰러우면서도 애틋하고 아프다. 그들이 마주하는 사랑과 결혼은 우리의 것들과 다르지 않다. 각자 우리 가까운 주변의 누군가를 대유하고 있는 이들,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같지만 그들의 방법은 모두 제각각이다. 우리도 그렇듯이.

현정(문소리) -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극을 이끌고 있는 현정, 평범한 여인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어색한 애교를 부리고, 7년 사귀고 무턱대고 헤어지자는 남자에게 적당히 매달릴 줄 아는 그런 여인. 그리고 또 찾아온 사랑 앞에서 잠시 주저하다 또 다시 자신을 던지는 사랑을 믿는 여자다. 현정의 사랑은 늘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결혼은 사랑에서 출발한 선 어딘가에 있다. 자신과는 너무도 다르게 살아온 상훈과의 결혼생활이 시작되고 현정이 상훈을 따라 구미로 내려가는 이유 역시 다르지 않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임신을 전하기 위해 구미에 내려와 그녀가 전한 말이다. 꽤 번듯한 직장에서 괜찮은 자리와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된 그녀에게 "함께 있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도 결혼도 일방적이었는지 모른다. 너무도 예의 없이 자신을 차버린 전 남자친구와 달리 '배려'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상훈을 현정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미운 마음이 생긴다. 남자들은 그녀에게 말할지도 모른다. "날 좀 이해해주면 안 되니!." 남자들이 늘 주머닛속에 넣어 다니는 말. 하지만 현정은 그런 사랑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상훈(김태우) - 사랑은 지켜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정을 지극히 사랑하는 상훈.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자들을 많이 닮은 인물이다. 그래서 가장 마음이 쓰인다. 마음에 둔 여자에게 수줍음, 쪽팔림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접근해 결국엔 사랑과 결혼에 골인하는 남자. 응당 남자라면 해야 하는 행동들이라고 통용되는 것들을 그는 교과서처럼 해냈다. 사랑하는 현정과 가정을 이루고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됐다. 그리고 동시에 가정과 아내를 지키는 것이 그의 사랑이 부여한 책임이자 의무가 됐다. 자신보다 벌이가 좋은 아내와 처갓집 등쌀을 싫은 내색 없이 받아주며 상훈은 자신보다 가장으로서의 삶에 충실한다. 하지만 그의 사랑 방법은 결국 그에게 자충수가 됐다. 현정에게 거짓말을 하고 구미로 내려가며 그는 그것이 멀리 보면 아내와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현정이 아이를 갖고 구미로 내려온 후 그의 초조함은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위기, 가족에게 닥친 위기 모두 가장으로서 그가 막아내야 할 것들이었고, 그의 우산 속에서 가정은 평화로울 수 있다고 상훈은 믿었다. 아내와 그의 십자가를 같이 나눌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애초 자리가 없었다. 결국 그의 사랑이 현정의 사랑을 차갑게 식혀 놓았다.  

민석(이선균) - 사랑은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7년을 만난 연인 현정을 보기좋게 차버리는,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한 번도 널 잊어 본 적이 없다."는 말과 함께 다시 현정 앞에 나타나는 민석. 그의 사랑은 현정과 상훈보다 훨씬 이기적이다. 현정과 상훈도 자신만의 사랑의 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둘은 기본적으로 사랑이 상대방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민석은 그렇지 않다. "너랑 있으면 내가 없어지는 것 같아." 헤어지는 이유를 알려달라는 현정에게 그가 던진 말이다. 20대 후반에 벌이 좋은 직장도 없이, 그럴 듯한 집안 배경 없이 불안하게 공부하는 민석이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너무도 배려와 예의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현정과 다시 만남을 시작할 때도 그랬다. 공부를 포기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민석은 그제서야 현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현정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서울로 올라온 현정도 민석을 다시 만나지만 그건 옛 사랑에 대한 추억이나 미련이기 보다 지금 사랑이 힘들고 고되기 때문이다. 헤어진 연인을 다시 떠올리는 모든 현재의 연인들이 그렇듯 말이다.  

 
제각각 사랑의 방식을 가진 현정, 상훈, 민석. 이들은 상대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상대의 사랑이 크지 않다고 의심할 수도 있다. 어찌보면 그것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인지도 모른다. 이제 세 명에게 남은 건 '이별'뿐이다. 사랑의 방식도, 성격도, 집안의 환경도 다른 이들이 만나 사랑을 했고, 결혼을 했다. 마지막 모습이 추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별을 앞에 두고 그간 그들이 했던 사랑을 존중하고, 마음에 감사할 필요가 있다. 민석처럼 애매모호한 말과 행동은 이별의 예의가 아니다. 모든 걸 상대의 탓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태도... 현정은 그런 민석의 태도 때문에 상훈에게 다른 방식으로 이별을 알렸을 것이다. "당신의 탓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탓"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현정이 상훈과 함께한 마지막은 그 간의 사랑에 대한 이별이자, 자신의 잘못에 대한 '사과'였다.


P. S. 리뷰를 다 쓰고 다시 읽어보니 마치 무슨 사랑학박사인양 적은 느낌이다. 아직 어린 나이 사랑을 해 본 경험도 적고, 사랑을 한 사람도 많지 않다. 그래서 현정, 상훈, 민석이 100% 이해되지도 않고, 100%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들의 사랑과 이별에 마음이 쓰일 뿐이다. 내 주변의 누군가의 이야기같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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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9 17:00

<나는 인어공주> 환타지가 불가능한 세상에서 꿈꾸는 환타지

<나는 인어공주> 환타지가 불가능한 세상에서 꿈꾸는 환타지

Russia;2007;118min;35mm;Color
Director: Anna Melikyan
Casting: Masha Shalaeva, Yevgeniy Tsyganov
 
한 번도 바다 위를 구경해 보지 못한 인어공주는 자신의 15번째 생일에 물 밖을 구경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바다 위 구경을 나선다. 공주는 마침 바다 위를 항해 중이던 왕자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때 폭풍이 일어 왕자가 탄 배는 침몰하고 공주가 정신을 잃은 왕자를 구해낸다. 인어공주는 왕자의 곁에 있고 싶어서 자신의 목소리를 마녀에게 주는 대신 사람의 몸을 얻어 왕궁에 들어가서 시녀가 된다. 그러나 왕자는 벙어리인 인어공주가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이웃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그녀의 형제들은 그녀가 다시 목소리를 찾고 인어공주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왕자의 피를 받는 것뿐이라는 걸 알려준다. 그리고 칼 한 자루를 그녀에게 건넨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사랑하는 왕자님을 죽이지 못하고 결국 바닷속으로 몸을 던져 물거품이 된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1873년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이 발표한 <인어공주>는 바닷속 인어공주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왕자님과의 사랑을 위해 목소리를 버리지만 바로 그 덫 때문에 왕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인어공주. 훗날 사람들이 이 작품을 안데르센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이 환타지와 같은 스토리에 잘 녹아든 극적인 비극성 때문일 것이다. <인어공주>가 지금 이 시기 2008년에 재현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것도 왕자님이 사는 왕궁이 아닌 사회주의를 막 끝내고 자본주의의 단맛에 한껏 젖어있는 러시아로 그녀가 환생한다면... 러시아의 여성감독 안나 멜리키얀은 자신이 살고 있는 환타지와 같은 세상으로 과거의 인어공주를 초대했다. 그녀의 이름은 '알리사'. 동화 속 아름다운 목소리와 외모를 가진 공주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 또래의 아이들만큼 귀엽고, 통통튄다. 너무 튀는 게 문제가 되긴 하지만. 과연 다시 태어난 인어공주는 Sad ending이 아닌 Happy ending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알리사는 과거 선배 인어공주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스토리의 삶을 산다. 동화 속 현실이 아닌 상식이 지배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에서 그녀는 나름 괴짜로 적응해가면서 살고 있다. 러시아의 한 바닷가에서 태어난 알리사. 그녀에게는 자신을 너무도 사랑해주는 아버님과 친절한 자매들이 없다. 아버지는 사고(?)로 자신을 만들어 놓고 떠나버렸고, 지금 그녀는 남자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괴팍한 엄마와 아직도 돌아가신 할아버지와의 로맨스에 빠져 살고 있는 할머니 뿐이다. 그녀의 꿈은 두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발레리나가 되는 것. 인어공주가 다리를 갖고 싶어하는 꿈이 현실적으로 적용된 듯 보인다. 알리사 역시 목소리를 대가로 꿈을 이룬다(발레 학원에 등록한다.). 다만 왕자님과의 사랑 때문에 목소리를 포기한 인어공주와 달리 딴 남자와 바람이 난 엄마에게 화가 나서 입을 닫기로 결정한다. 억지로 들어간 장애학교에서 뜻하지 않게 소원을 이루는 방법을 배운 그녀는 실수로 마을을 송두리째 날려 버린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은 인어공주가 뭍으로 나왔듯 바다를 떠나 도시로 나온다. 

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그녀에게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다. 당장 세 식구의 안녕을 위해 엄마는 대형 슈퍼마켓에서 일을 해야 하고, 알리사 역시 휴대전화가 됐든, 생맥주가 됐든 뭐든 뒤짚어 쓰고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사장은 늘 그녀에게 소리만 지르고 말도 되지 않게 빚만 떠안긴다. 노동자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없다. 인어공주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육지와 달리 도시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곳이 었다. 모스크바는 대도시다. 사람들에게 국가를 위해 헌신할 것을 종용하던 갖가지 혁명 문구들이 있던 자리를 이제는 소비에 충성할 것을 강요하는 화려한 광고들이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알리사의 가족이 사는 아파트도 대형 광고판으로 덮혀 있다. 때문에 그녀는 대낮에도 빛을 보기 힘들다.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히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학교를 가는 것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경쟁에서 탈락하면 알리사처럼 소원을 비는 수밖에 없다. 소원은 이루어진다. 다만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할 뿐이다. 내가 얻으면 누군가는 잃게 되는 제로섬 게임의 도시.

생산, 분배 위주의 시스템에서 소비, 경쟁이 지배하는 시스템으로 바뀐 도시. 사회주의이라는 이론을 현실에서 실험한 과거 속 전설의 국가는 그렇게 시장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흐름 속으로 빠르게 잠식되고 있다. 시스템이 변화면서 사람들의 가치도 변하고 철학도 바뀐다. 어느 사회가 우월하다는 것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다. 어디가 됐든 개인이 살아가기 좋은 환경은 아니다. 국가가 됐든, 자본이 됐든 무언가에는 충성하길 강요당하는 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지금 시점에서 두 사회 모두 '사람'이 주체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차이가 있다면 사회주의가 노골적이라면 자본주의가 상당히 문학적이라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본에 천천히 물들게 된다. 그 속에서 '객체화' 된 다른 사람들처럼 알리사 역시 역시 소비될 뿐이다. 휴대폰으로, 생맥주잔으로, 우주의 땅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미지의 소녀로 모습을 탈피하면서 소비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시에서 살아갈 수 없다. 알리사에게서 발레리나의 꿈은 흔적 없이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 알리사는 멋진 왕자님도 만나고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도 생긴다. 자본주의라는 변화된 시스템에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한 샤샤. 돈이 곧 도덕이자 윤리라는 철학은 '달의 땅을 판다'는 허무맹랑한 사업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대성공을 이룬다. 넘치는 돈을 그렇게라도 소비해야 하는 '부자'들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돈, 외모, 명예, 거기에 쭉쭉빵빵 여자친구까지 갖춘 샤샤는 항상 결핍을 느낀다. 그가 가진 것은 모두 돈이 만들어준 것일 뿐 진정성과 가치는 없다. 그가 아끼는 것이라곤 어항 속 물고기가 전부다. 그래서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으로 술만 취하면 강으로 뛰어든다. 바다에 빠진 왕자를 인어공주가 구했듯이 알리사 역시 샤샤를 구하고 왕자님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인어공주가 그랬듯 가정부가 돼서 그의 옆을 지킨다. <샤샤와 알리사> 왕자와 인어공주의의 관계는 삭막한 도시에서 서로에게 새로운 자극이자 '이상향'이다. 멈췄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존재이고, 소통이 가능한 타자가 된다. 그들의 외로움이 서로 만난다.


그리고 알리사는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연다. 말을 한다고 해서 소통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말만 쏟아내기 바쁜 도시에서 언어는 더욱 무의미하다. 알리사는 그 곳에서 애초에 누군가와 소통하길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샤샤는 알리사에게 다시 말을 찾아준다. 사춘기 괴짜 소녀에게 찾아온 사랑. 누구에게도 마음을 준 적이 없던, 심지어 밤을 함께 보내는 여자친구에게까지 까칠했던 왕자님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돼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긴다. 그녀를 위해 파인애플을 훔치고, 그녀를 웃기기 위해 공원에서 춤을 추며 괴성을 지른다. 이쯤되면 현대에 다시 태어난 인어공주는 과거와 달리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인어공주로서 알리사의 운명은 그녀를 다시 선택의 순간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인어공주로서의 운명에 충실한다.

행복한 삶을 살게 될 왕자님과 공주님, 물방울로 남은 인어공주. 제로섬 게임의 도시에서 알리사의 희생은 분명 누군가에게 기쁨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동화 속 인어공주와 달리 알리사의 표정은 그리 슬프지 않다. 그렇게 정해질 운명이었다는 듯, 모두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는 마지막 숨을 뱉는다. 알리사는 물방울이 됐을까? 바다가 아닌 대도시 어느 도로 아스팔트 위에서 쓰러진 또 한 명의 인어공주. 그녀는 몇 년 몇 월 몇 일 러시아의 교통사고 희생자 통계치를 하나 올려줄 뿐이다. 도시에서 그녀를 기억하는 건 그것이 전부이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희생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비극'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에게 슬픈 일이 아닌 늘상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어느 이름 모를 누군가의 희생으로 오늘의 값진 숨을 쉴 수 있는 게 아닐까? 마지막 알리사의 희생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안나 멜리키얀'이라는 생소한 러시아 감독의 두 번째 작품 <나는, 인어공주>는 굉장히 정치적이면서도, 동화 속 환타지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자본의 광풍이 휨쓸고 있는 도시인 모스크바의 곳곳을 카메라로 담담히 비추면서 그 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화려함 속에 가려진 외로운 이면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 사이사이 삽입된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화면은 극의 사실성을 높이면서도, 반대로 알리사의 상상 장면은 영화의 환타지적 느낌을 놓치지 않고 있다. 감독은 우울한 현실에서 알리사가 꿈구는 환타지를 기대하는지 모르겠다. 환타지가 불가능한 세계에서 꿈꾸는 환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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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6 23:20

<비몽> 김기덕식 경계 허물기

<비몽> 김기덕식 경계허물기

Korea;2008;95mim;35mm;Color
Director: 김기덕
Casting: 이나영, 오다기리 조, 박지아, 김태현, 장미희

김기덕의 영화에서 고정된 것은 없다. 인물도, 이미지도, 이야기도 모두 유동적이다.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정의 혹은 설명하는 것이 그의 영화에서는 부질없는 짓처럼 보인다. 확실한 것도 없다.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젊음과 늙음, 공간과 시간 등 현실세계에서 너무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개념과 가치들이 그의 영화에서는 알 수 없는 형체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난해하다. 영화를 봐도 스토리가 잡히지 않고, 캐릭터도 불분명하다. 현재 충무로 감독 중 가장 포스트모던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중반 그가 <악어>를 처음 가지고 한국영화계에 등장했을 때 그는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반감을 샀다. 영화적 언어로 정화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를 화면에 담고, 모호한 메시지로 일관된 그의 영화는 장르영화들이 터를 잡고 있던 충무로에 발 붙일 곳이 없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김기덕은 <악어>와 <야생동물보호구역>이 나오고 모 영화월간지를 통해 자신의 영화가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억울함을 호소한 적도 있다.

하지만 <파란 대문>부터 그는 천천히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이해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적 언어는 더욱 세련되어 졌고, 함축적이며 간결해졌다. 마치 스크린을 통해 그림을 보는 듯. 이후에도 <섬>과 <나쁜 남자>같은 초기작을 연상시키는 논란적인 영화를 만들기는 했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빈집>으로 이어지는 그의 필모그래피는 그가 끊임없이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과 그 안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을 쉬지 않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빈집> 이후 <시간>, <숨>,<비몽>은 김기덕 감독 개인 영화 역사의 화려한 2막을 이어가고 있다. 2006년 <시간> 공개 시점에서 한 번 거센 파도를 겪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넘치는 창작열로 1년에 한 편씩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또한 <아름답다>, <영화는 영화다>와 같이 제작에도 참여하며 영화 유학 없이 자신과 함께 영화 작업을 한 후배들이 성장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고 있다. 혹자의 평가처럼 이러다 영화계에 "김기덕 사단"이 나오는 날이 정말 올지도 모르겠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의 새로운 영화 한 편이 찾아왔다. 제목은 <비몽>. '슬픈 꿈'이란 의미의 영화는 김기덕 감독의 이전 작품과 달리 스타급 배우들의 캐스팅으로 제작 전부터 화제를 몰고 왔던 작품이다. <해안선>에 장동건이 출연을 한 적은 있지만 김기덕 감독 영화의 특성상 스타급 여배우의 캐스팅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이번 <비몽>의 이나영이라는 배우의 캐스팅은 파격적이었다. 더불어 국내에서 많은 고정팬을 확보하고 있는 일본배우 오다기리 조가 있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의 드니 라방, <숨>의 장첸 등 외국 배우들의 캐스팅이 있었지만 스타성에서 놓고 보자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나영과 오다기리 조의 만남. 김기덕 영화에서 일종의 파격이라고 부를 만큼의 캐스팅이다.(조재현, 주진모, 재희, 하정우 등도 출연 김기덕 감독의 영화 출연 당시에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과연 김기덕이라는 괴팍한 감독과 이 두 명의 스타급 배우들의 앙상블이 어떻게 전개될지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많은 호기심을 자아냈던 것이 사실이다.

<비몽>은 4명의 인물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이나영이 맡은 란, 오다기리 조가 맡은 진, 그리고 그들이 과거에 사랑했던 인물(박지아와 김태현)이다. 몽유병을 앓고 있는 란. 그녀는 그녀가 잠이 든 후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녀가 하는 실제 하는 행동은 진이 꿈 속에서 저지르는 일이다. 진이 꿈 속에서 옛 연인을 찾아가면 란이 실제로 옛 남자를 찾아간다. 진에게는 꿈 속에서의 일이 란에게는 현실이 된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둘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진은 과거의 여자를 잊지 못하지만, 란은 과거의 남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한 명이 꿈 속에 있으면, 한 명은 반드시 현실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둘이 지켜야 할 규칙이다. 잠을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쓰고, 심지어 수갑까지 채우지만 결국 진은 꿈 속에서 과거의 여인을 죽인다. 곧 현실에서 몽유병 상태의 란은 실제 과거의 남자를 살해한다. 그래서 진은 지독하고 처절할 정도로 괴로운 현실에 갇히고, 란은 정신병원에서 죽음을 통한 자유를 얻는다.

진이 꿈 속에서 하는 행동은 란이 몽유병 상태에서 실제 하는 행동이 된다. 때문에 진과 란은 동일한 인물이다. 동시에 꿈 속에서 진은 란의 옛 남자가 되고, 란은 진의 옛 여인이 된다. 두 명이 네 명도 되면서 동시에 한 명도 된다. 현실과 꿈,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인물 사이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고정되고 확실하던 개념들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무정형의 무언가 뿐이다. (란이 현실에서 옛 애인을 죽인 후 진의 옛 애인 조차 누가 그를 죽였는지 혼동한다.) 장미희가 연기하는 의사의 말처럼 흑과 백은 원래 한 가지 색이라는 말(黑白同色)처럼 극단에 서 있는 것들이 하나가 된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늘 강조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해체는 삶과 죽음 사이 경계의 해체이다. 살해 후 진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죽음과 같은 삶을 살고, 란은 정신병원 안에서 너무도 편안한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나비가 된 란의 죽음은 소멸이 아닌 또 다른 삶의 시작이 된다.  

이런 식의 해체는 이전 김기덕 영화(특히 최근작)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작업이다. 그는 전작들을 통해 '사랑'이라는 고정된 개념과 이미지,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갇혀 있는 통속적인 의미(선인과 악인, 성녀와 창녀 등)들을 해체해왔다. 그리고 <시간>에서는 시간의 연속성을 해체했고, <숨>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해체했다. 이분법적이고 근대적인 분류 체계에 대한 반기. <비몽> 역시 그 연장선에서 김기덕의 색깔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특히 진과 란, 그리고 둘의 옛 연인이 모두 등장하는 갈대밭은 영화의 핵심이자, 김기덕 영화에서 앞으로도 계속 언급될 명장면이다. 꿈과 현실이 모호해지고 네 명의 인물 사이 경계가 폭발되면서 해체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그는 어설프게 해체된 개념들을 자기 식대로 다시 조합하지 않는다. 그냥 해체된 상태에서 자유롭게 노닐도록 두고 있다.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 결말은 늘 열려 있고, 연속적이면서도 순환적이다.


<비몽>은 화면 역시 이야기를 뒷받침해준다. 사실 김기덕은 미술을 공부한 감독답게 전작들에서도 남다른 영상미를 보여준 감독이었다. 이번에 그가 선택한 것은 '한옥'. 가회동이나 삼청동 쯤으로 생각되는 지역을 주배경으로 촬영된 영화는 거의 모든 공간을 한옥으로 설정하고 있다. 심지어 경찰서 장면을 한옥에서 찍기 위해 종로구청을 경찰서로 꾸몄다고 한다. 혹자는 해외에서 더 인기가 높은 감독이 한국의 홍보 전략으로 한옥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하지만 감독은 겹겹이 쌓여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한옥의 이미지가 캐릭터들과 어울려 결정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 이어 전통적인 공간을 다시 한 번 무대로 등장한 한옥은 몽환적인 영화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면서 극의 분위기를 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색깔이다. <색감의 선명한 대비와 조화.> 의상과 관련된 일을 하는 이나영의 집에서는 다양한 색깔의 옷감을 활용해서 진과 란의 감정을를 효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진과 란이 한 명씩 번갈아 긴 천에 가려진 채 나누는 대화 장면은 마치 둘이 거울을 보고 이야기하는 듯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타인에게 이야기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효과를 얻은 것이다. 극에서 주로 란은 백색과 진은 흑색과 어울린다. 둘이 입고 있는 의상도 그렇고, 각각 위치하고 있는 공간도 그렇다.(진의 어두운 집과 란의 밝은 정신병원)  이 역시 흑과 백은 동색이라는 영화 속 메시지와 잘 맞아 떨어진다. 결국 진과 란이 서로 상극에 서 있지만 하나라는 메타포를 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리하자면 김기덕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충무로에서 어떤 장르나 흐름에 속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공간을 튼튼하게 만들어 온 감독이다. 그의 영화언어와 구성 방식 그리고 메시지까지 적어도 한국영화판에서는 비교의 대상을 찾기 힘들다. 누구도 하지 않는 작업과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독보적이다. 그 독보적인 특징이 수 많은 적을 만들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난 그의 작품들이 영화적으로 점점 세련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래서 난 그의 영화 작업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한국영화가 누릴 수 있는 호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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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1 19:42

<더 걸> 그냥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진실이 어떤 얼굴을 했는지

<더 걸> 그냥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진실이 어떤 얼굴을 했는지

Germany;1990;94min;color
Director:Michael Verhoeven
Cast:Lena Stolze, Hans Reinhard Müller

"가치와 무관한 학문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강의 시간에 무턱대고 선생님께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냥 큰 생각이 없이 한 질문에 선생님이 옳다구나 싶으셨는지 강의 내용보다도 여기에 대한 토론을 더 많이 한 기억이 있다. 아마도 공부를 하는 사람이면 학문의 가치 중립성에 대해 나름의 심각한 고민을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학문의 가치 중립성이라는 것이 그렇다. 사회과학은 그 성격상 언제나 '가치'에 노출되기 쉽다. 정치학은 정치인들에게 경제학은 경제인들에게 이리저리 뜯기기 마련이다. 가장 가치 중립적이라고 여겨지는 순수과학 조차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물리학을 연구한 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미사일, 핵개발에 이용될지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학문의 가치 중립성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가? 문제는 가치 중립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를 욕할 수 없다. 이를 전쟁 목적으로 이용한 정치인과 당시 전시 상황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가치 중립성은 결과가 아니라 연구 방법에서 찾아야 한다. 제대로 된 학자에게 연구 방법에 있어 가치 중립성은 최고로 추구해야 가치이다. 애초에 현실적인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학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해야 한다. 천리 밖을 내다볼 줄 아는 학자라서 자신의 연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어떤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을지 하나부터 열까지 예측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게는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그게 무서워 연구를 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학자가 아니다.

결론은 연구 과정과 방법에 있어 특별한 목적이 없어 순수성, 중립성을 추구하는 것이 학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특정한 정치적, 금전적 목적이 과정에 섞이지 않은 순수한 연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 하지만 현실은 학자에게 그다지 녹록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익이 달린 연구일수록 학자는 여기저기의 보이는, 보이지 않는 압력에 노출된다. 역사연구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가 된다. 특히 감추고 싶은 과거를 가질수록 이를 노리는 학자의 시선은 항상 견제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1990년에 독일의 미하일 페어회벤 감독의 <더 걸>은 한 여성의 순수한 학문적 욕구와 이를 방해하는 현실 사이의 갈등을 그리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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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걸>의 주인공 소냐는 독일의 안자 로스무스(Anja Rosmus)라는 실제 여성을 모델로 하고 있다. 70년대 파사우(Passau)라는 독일의 소도시에서 살았던 그녀는 2차세계대전 당시 마을이 숨기고 있던 추악한 과거를 폭로한다. 그녀는 누구를 공격하기 위해서, 누구를 띄워주기 위해서, 혹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담보한 채 연구를 진행한 것이다. 단지 '진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순수한 학자적 욕구가 그녀를 이끈 것이다. 영화는 그녀의 궤적을 필징이라는 가상의 마을에 살고 있는 소냐라는 인물이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소녀는 카톨릭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카톨릭 여학교에서 부모님과 선생님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한다. '유럽의 자유'를 주제로 전국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지만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여느 여학생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우연지 않은 기회에 그녀는 마을의 비일을 알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 마을'이라는 주제로 새로운 글짓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 동안 나치에 대항하고 유태인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고 알려진 지역신문 편집장과 신부의 추악한 과거를 알게 된 것. 마을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던 그들은 전쟁 당시 나치의 충복으로 유태인 탄압에 앞장섰던 이들이었다.

소냐는 자신들의 비밀을 철저히 감추려 하는 이들의 방해를 극복하고 진실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다. 하지만 소냐를 괴롭히는 것은 비단 당사자만이 아니다. 마을과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통념과 상식을 뒤엎으려는 그녀의 시도는 주민들의 눈총을 받게 되고 심지어 신나치주의자들에게는 테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를 옆에서 지켜주던 남편 역시 베를린으로 떠난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그녀가 계속 걷도로 만든 것은 진실을 알고 싶다는 연구자의 욕구였다. 그런 순수성이 없었다면 그녀는 아마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었을지 모른다.

그녀의 연구가 사실로 밝혀지고 전국적 인기를 얻게 되었을 때, 그녀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소냐를 영웅으로 대접한다. 그녀를 위한 흉상을 만들고 그녀의 업적을 칭송한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기쁘지 않다. 애초에 소냐는 대가를 바라고 연구를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앞으로 더 드러내야 할 진실에 목마를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의 연구를 방해한 사람들의 달콤한 칭찬은 위선이자 거짓으로 느껴질 뿐이다. 영화는 어찌보면 소냐의 영웅적인 모습을 그리기 보다는 한 소녀의 순수한 욕심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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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전혀 메시지가 없는 영화는 아니다. 일본에서도 저런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역사 의식이 부재한 바다 건너 일본을 원망하게 되지만 현재 우리에게도 날카롭게 던지는 물음이 있다. 우리의 멀지 않은 기억에 황우석 사건이 있다. 대한민국의 과학을 앞으로 책임지게 될 차세대 리더로서 그는 전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의 연구의 상당 부분이 문제가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PD수첩과 한 연구기관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대해 최초 사람들의 반응은 분노였다. 신이 되어 버린 과학자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에 상처를 낸 방송과 학자에 대한 원망이었다. 또 하나가 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 해방 후 아직까지 정리되지 못한 친일의 문제를 지금이라도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조직이다. 비슷한 스펙트럼에서 민족문제연구소도 있다. 이들의 친일행위자 규명은 어찌보면 정의를 위해 질서를 뒤엎겠다는 전복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다. 더 많은 사건들이 있겠지만 두 가지 사례에서 중요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소냐의 사례처럼 연구자들이 얼마나 순수한가의 여부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판단은 쉽게 내리지 않겠다. 다만 두 사건 모두가 우리에게 학문과 현실이 어떻게 관계맺음을 해야 하는지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학자의 순수성이 위협받고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현 지금 시점에서 <더 걸>은 그저 영화로만 넘기기 힘들게 느껴진다.

영화의 형식 역시 범상지 않다. 1990년에 만들어진 영화치고는 형식적으로 상당히 독특한 시도를 하고 있다. 마치 객석에 앉아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기분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배우들의 연기와 표정이 간간이 과장되고 갑작스러운 화면변화와 세트의 등장은 연극적 요소가 강하다는 느낌을 준다. 진지하고 무거운 내용을 다루면서도 간간히 유머와 위트는 극의 긴장을 효율적으로 조절한다. 소녀부터 3아이의 엄마까지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는 레나 스톨체라는 배우가 대단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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