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하우스 모모'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12.29 제3회 블로거 영화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후기
  2. 2008.12.07 <마음의 속삭임> 남자의 탄생
2008.12.29 01:20

제3회 블로거 영화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후기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1974년 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27일 토요일 아트 하우스 모모에서 세 번째 블로거 영화제가 열렸다. 첫 회 '과연 이게 될 것인가' / '관객들이 찾아 올 것인가' / '평론가와 감독 없는 씨네토크가 가능할 것인가' / '상영 후 남아서 관객들이 손 들고 자기 생각을 얘기 할 것인가' 여러 고민들이 참 많았던 것 같다. 그런 걱정들을 껴안고 석 달이 지나 세 번째 상영을 마치고 나니 그래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한 일은 다른 블로거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이런 뜻깊은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뿌듯하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말이다. 

이 번 상영작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1974년도 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감독도 유명하지만 영화보다 제목이 더 유명한 작품이다. 지난 달에 아깝게 <쥴 앤 짐>에 밀려 2등을 했었는데, 이번 달에는 반대로 아슬아슬하게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이기고 1등이 됐다. 처음에는 크리스마스도 있고 해서 분위기 좋은 사랑영화로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왠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우울한 분위기가 걸림돌이 될 것 같았기 때문에... 하지만 씨네아트 블로그의 독자들의 1등으로 꼽은 영화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더풀 라이프>도 그랬고 <쥴 앤 짐>도 그랬다.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고, 또 적지 않은 분들이 시네토크에 함께 하셨다.  


개인 사정상 두 번째 상영회였던 <쥴 앤 짐>에 참석하지 못해서 그런지 이번 세 번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상영회 때는 다소 놀란 부분들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관객들의 수가 첫 회보다는 눈에 띄게 늘었고, 씨네토크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에 남아 계신 분들도 많았다는 점이다. 이런 저런 약속이 많은 연말에 그것도 황금 같은 토요일 오후... 사람이 적으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듬성듬성 빈 자리가 보이기는 했지만 좌석도 얼추 차 있었다. 씨네토크 때도 정말 많은 분들이 자리를 지키고 함께 했다. 물론 처음에는 다들 쑥스럽게 앉아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지만 한 분 한 분 입을 트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에 대한 다양한 느낌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역시 블로거 영화제 만의 매력이라고 한다면 영화에 대한 아무 생각이나 스스럼 없이 교감할 수 있는 이 자리가 아닌가 한다.

극장의 다음 상영 스케쥴 때문에 30분 정도의 시네토크를 마쳤다. 열 분 정도의 관객분들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던져주셨다. 기억에 남는 얘기는 '엔딩'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결말에 어떤 분들은 희망을 봤고, 또 다른 분들은 아픔을 느꼈다. 위궤양에 걸린 알리과 그의 옆을 지키는 에미의 모습은 분명 갈등을 겪고 난 연인이 다시 사랑하게 되는 회복의 이미지였지만, 반대로 그들의 아픔이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슬픈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귀가 따갑도록 듣고 하는 말이지만 정답은 없다. 개인적으로 느낄 뿐이니까...

또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의미에 대해 독특한 해석을 한 분도 있었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알리 같은 차별 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불안을 없애기 위해 동료들과 무리를 지어 살고 있다. 그렇게 하면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불안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복하지는 않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 그 무리를 뛰어 나가면 반대로 행복은 얻을 수 있지만 불안은 커지게 된다. 알리가 무리를 뛰쳐나가 에미를 선택했을 때, 알리는 행복을 얻었지만 그 만큼의 불안 역시 갖게 된 것이다. 그 불안이 결국 알리 스스로를 잠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관객의 말을 듣고 보니 "너무 행복해서 불안하다."는 극중에서 에미의 말이 뒤늦게 머릿속을 울리는 것 같았다.

소외 당한 사람들의 러브 스토리에 대한 감상도 있었고, 다른 외국인을 차별하는 에미와 다른 여자를 찾는 알리의 이중적 태도에서 그들의 한계를 지적한 분도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이가 어린 관객과 비교적 중년의 여성 관객이 다른 영화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한 점이다. 젊은 여성분은 에미의 행동이나 말투에서 그리고 에미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돌아온 알리를 다시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단지 '애정'이 아닌 '모성애'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 반면에, 중년의 여성분은 국적, 피부색, 나이와 상관 없이 알리와 에미에게서 진정한 남녀 간의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이에 따라서 영화가 주는 느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라는 생각에 마이크를 잡고 잠시 멍해 있었다. ^^

재미있는 얘기들과 반응도 많이 나왔다. 한 분은 알리가 극 중에서 먹고 싶어 하는 쿠스쿠스는 한국 사람에게 치면 김치와 마찬가지인데 그걸 못 먹게 했으니 알리가 화가 날 만하다고 해서 큰 웃음 주셨다. 또  극 중에서 알리가 동성애자인 파스빈더의 실제 남친이라는 사실과 에미의 사위로 나오는 사람이 실제 파스빈더였다는 사실에 관객분들은 꽤나 놀라시는 눈치였다. 이 밖에도 영화가 1974년 독일에서 만들어진 영화지만 현재의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물음을 던져주는 영화라는 소감도 있었다. 정말이지 회가 거듭될수록 영화에 대한 관객분들의 시선의 깊이와 넓이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앞으로도 블로거 상영회가 계속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적인 기대가 생기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번 상영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내가 추천한 영화였기 때문에 진행을 맡았다. 점심에 결혼식이 있어서 부랴부랴 갔는데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이크를 잡고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쓸데 없는 소리를 하지 않았는지 아직도 불안하다. 점점 잠식 당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ㅋ  그래도 다른 블로거 분들이 도와주시고 관객분들이 적극 참여해주셔서 큰 문제 없이 잘 끝난 것 같아 안심은 된다. 아마 다음 상영회에서 마이크를 잡으시는 분이 더 잘해 주실 듯^^

이렇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로 2008년의 블로거 상영회는 막을 내렸다. 2009년 1월 상영회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있는데 조만간 포맷이 정해질 것 같다. 한 살 더 먹는 만큼 뭔가 더 좋아져야 할 텐데...


시네아트 블로그 홈페이지 cineart.tistory.com


p.s. 제 블로그를 통해 3분이 신청을 하셨는데 두 분은 참석을 하셨더군요... 영화를 재밌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토요일 오후 좋은 시간이셨어야 할텐데 말이죠. 두 분도 그리고 못 오신 분도 다음 상영회 때는 꼭 뵙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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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7 01:17

<마음의 속삭임> 남자의 탄생


<마음의 속삭임 MurMur of the heart> 남자의 탄생

France, Italy, German; 1971: 117mln; 35mm
Directing: Louis Malle
Casting: Lea Massari, Benoit Ferreux
 
루이 말 감독의 <마음의 속삭임>을 봤다. 다리에 힘이 빠져 한참을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상영관을 빠져 나왔다. 솔직히 그의 작품은 내가 '아이'에서 '남자'로 넘어가던 시절, 야한 영화인 줄 알고 친구가 아빠 이름 대고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데미지>를 본 것이 처음이자 전부였다. 그 때는 내용이고, 파격이고, 불륜이고 뭐고 그저 친구들과 침을 꼴깍이며 끈적한 베드신에만 오감을 집중시키고 있을 때였다. 나중에 영화에 관심을 갖고 빠져들때 쯤, 이 영화가 '루이 말'이라는 프랑스 출신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왠지 거장의 작품을 눈요기로 즐겼다는 민망함이 생겼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동안 루이 말의 영화보다는 동시대의 프랑스 거장들이었던 알렝 레네 혹은 누벨 바그 감독들의 영화들에 관심을 뒀다. 사춘기 때의 원초적인 감정들을 애써 부인하려듯이 말이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이제 영화를 좀 봤으니까 뭔가 안답시고 그의 영화를 다시 보면서 애써 고상한 척 하고 있을 모습이 싫었다.

그러고보니 나중에라도 다시 그의 영화를 제대로 볼 기회조차 없었다. 1992년에 만든 <데미지>가 국내에 소개된 마지막 작품이니, 이후에 그의 영화가 스크린에 걸린 적이 있었나 싶다. 때문에 루이 말이 <데미지>를 통해 파격적인, 도발적인 감독이라는 대중적인 수식어를 얻었지만, 실상 그의 영화를 보면서 맞장구를 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늦었지만 좋은 기회가 생겼다. 사춘기 때 비디오 리모콘 빨리감기와 되감기를 누르며 만났던 루이 말을 정식으로 극장에서 제대로 만나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지금 광화문 씨네큐브와 이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루이 말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특별전이기는 하지만 국내 수입이 되지 않았던 예전 세 작품 <마음의 속삭임>, <라콤 루시앙>, <굿바이 칠드런>을 묶어 차례로 개봉하는 조촐하지만 의미 있는 상영회다. 각각 1971년, 1974년, 1987년에 만들어진 영화인 만큼 그의 영화 세계를 시간순으로 엮어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사족이 길었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스크린에 'FIN'이 뜨고 상영관을 빠져 나오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지경이 됐다. 오이디푸스의 금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뛰어넘는 대범함에 뒤통수와 앞통수를 한 번에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이다. 더구나 1971년에 만든 영화라니... 왠지 <마음의 속삭임>은 아기자기한 제목과 달리 루이 말과의 강한 '첫 만남'으로 기억될 영화가 될 것 같다.


<마음의 속삭임>은 1954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을 무렵 디종에 사는 15살 소년 로랑의 위험한 성장이야기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구김살 없이 자란 막내 아들... 학교에서 1등을 도맡아 할 정도의 우등생이고, 프로스트와 카뮈를 논할 정도로 인문학과 철학에도 관심이 깊다. 반전 모금운동을 할 만큼 사회 문제에 참여의식이 강하면서도, 재즈의 맛을 즐길 줄 아는 보기드문 소년이다. 여기까지가 주위에서 바라보는 로랑의 흐뭇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로랑 역시 사춘기의 문턱에 있다. 돈이 있으면서도 친구와 레코드 점에서 슬쩍하는 스릴을 즐기고, 어른들이 귀엽다고 엉덩이를 두들기는 것이 기분 나쁜 나이가 됐다. 방문을 잠근 채 19금 소설을 읽으며 하는 마스터베이션을 알고, 담배의 맛과 여자의 몸이 궁금한 호기심 가득한 나이... 몸이 변하고 세계관을 갖추는 것과 함께 사춘기 아이들이 풀어야 하는 숙제가 또 하나 있다. '가족'과의 관계... 가족에서 '나'의 위치와 역할을 찾고, 가족과 나의 거리를 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 숙제를 푸는데 모두의 상황은 다르다. 제각기 다른 상황에 따라 가족과 나의 관계의 모습 또한 천차만별 달라진다. 로랑의 상황은 어떠한가? 로랑의 가족은 아빠, 엄마, 두 명의 형 그리고 그를 어려서부터 돌본 유모가 전부이다. 잠깐 민망하지만 로랑을 이해하기 위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영화를 보면서 로랑이 참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단순히 사춘기를 겪는 모습이 아니라, 그가 가족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춘기를 지나며 내가 가족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갔던 모습과 로랑의 경험에서 공통점이 많이 묻어난다. 물론 난 15살에 인문학, 철학, 재즈에 문외한이었고 반전운동이 뭔지도 몰랐지만 로랑처럼 아빠와의 관계가 어려웠고, 자기들끼리 짝짜꿍이 잘 맞는 두 형과 그다지 어울리지 못했다. 때문에 난 엄마와 유독 친했다.(원래 아들 많은 집은 꼭 하나가 딸 노릇을 한다.) 사춘기가 훨씬 지나서도 엄마와의 스킨십과 장난이 불편하지 않았고, 엄마를 생각하면 왠지 뭉클해지는 애틋함이 있었다. 내 위치는 아빠의 다른 편에서 엄마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오히려 그 때는 아빠보다 내가 엄마와 더 가깝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엄마가 엄마였기에 가능했지, 엄마가 여자였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로랑은 나의 경험과 갈라진다. 그가 겪는 오이디푸스적인 고민들은 분명 그가 엄마를 '여자'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결정적이면서 직접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엄마의 '불륜'이다. 사실 로랑과 엄마의 가까운 관계는 어찌 보면 아빠와의 불편한 관계에 대한 반작용일 가능성이 크다. 형제들과 엄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가족에 대한 폭력적 전권을 휘두르는 아빠를 거부하고 로랑은 상대적으로 엄마에게 연민과 동정이 섞인 안정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아버지에게 절대적으로 소유당한 엄마에 대한 연민... 하지만 엄마의 불륜은 이런 아빠의 '절대성'을 '상대화'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아빠와 엄마를 분리시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마의 불륜을 알게 된 순간 로랑은 엄마를 '아빠에게 구속당한 엄마'가 아닌 '사랑을 할 수 있는 여자'로 이해하게 된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엄마와 로랑이 소통이 가능한 것 역시 모자 관계 이상의 관계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아빠는 이제 엄마를 절대적으로 소유한 사람이 아닌 엄마가 선택할 수 있는 대상 중의 하나이면서, 자연스럽게 자신과 대등한 경쟁자로서 위치지어진 것이다. 이 때부터 로랑은 엄마를 '여자'로 인식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엄마에 대한 감정들을 확인한다. 동시에 가족 내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다르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결국 로랑에게 있어 자신을 남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순간은 곧 엄마를 '여자'로 보는 순간이 된다. 그리고 엄마를 통해 세상에 나왔듯, 로랑은 다시 한 번 엄마를 통해 '남자'로 탄생하게 된다. 사실 로랑은 클라라와 관계를 맺기 이전 '불완전한 첫경험'으로 인해 남자로의 완전한 변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로랑은 형들의 손에 이끌려 첫경험을 하게 되지만, 형들의 장난 때문에 불완전하게 끝을 맺었다. 남자로서 로랑의 첫경험은 형들로 인해 '불완전하고 수치스러운 기억'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때부터 로랑이 '마음이 속삭이는 병'을 앓게 되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다. 로랑은 끊임없이 자신의 불완전한 첫경험을 극복 혹은 완성하려 한다. 그것이 자신이 아이에서 완전한 남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요양원에서 다프네와 엘렌에게 집요하게 접근하는 것도 이런 분명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 혁명기념일 저녁 엄마와의 '혁명과도 같은 일'은 로랑에게 있어 남자로 완전히 탄생되는 '혁명의 순간'이다. 자신 역시 엄마와 사랑을 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엄마 클라라는 로랑에게 "둘만 비밀을 지킨다면 서로에게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로랑은 엄마의 방을 빠져나와 개선장군처럼 엘렌의 방문을 두드린다. 완전한 남자로 태어난 로랑은 이전처럼 뭔가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를 거부하는 엘렌에게 태연한듯 다프네의 방이 어딘지를 물어보고 떠난다. 다프네와 하룻밤을 보내고, 여자친구의 방을 야밤에 급습한 남자들이 그러하듯, 로랑은 부모님 몰래 신발과 옷가지를 대충 챙겨 허겁지겁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침 일찍 요양소를 찾은 아빠와 두 형이 테이블에서 아침을 먹으며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않고 방에 들어온 로랑과 대면한다. 어젯밤 로랑과의 일을 기억하는 엄마도 곧 그 공간에 참여하게 된다. 다섯 명의 가족이 한 공간에 모였다. 로랑의 행색에 다들 겸연쩍어 하지만, 곧 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폭소를 터뜨린다. 막내아들, 막내동생의 '공식적'인 남자의 탄생을 축하하듯 말이다. 그렇게 영화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이다. 

루이 말은 이 마지막 한 장면을 통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로랑과 클라라는 먼 옛날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가 그랬듯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여 눈을 뽑거나, 목숨을 버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족은 성인이 된 로랑과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룰 듯한 기대마저 갖게 한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기념일 밤 있었던 일로 인한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고, 가족과 함께 지금까지 그랬듯 보기 좋은 '모자'의 모습을 "지켜나갈" 것이다. 그리고 엄마를 통해 남자로 태어난 로랑은 가족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만들 것이고, 다프네와 그랬듯 또 다른 여자와 평범한 사랑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감독은 자신과 사람들을 그토록 짓누르던 오래된 컴플렉스에 대해 이런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남자가 탄생하는 순간이라고..."

처음에 살짝 언급했지만 내가 루이 말의 이 영화 <마음의 속삭임>을 보고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던 것은 사실 로랑과 클라라의 모자 간의 충격적인 사랑이 아니라, 마지막 가족이 모이는 마지막 시퀀스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로랑이 겪는 위험한 사춘기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상황을 끌어가는 그의 대범함 때문이었다.(여기서 대범함이라는 단어 밖에 생각나지 않는 나의 어휘력이 한스럽다.) 솔직히 <마음의 속삭임>에 완전히 공감했다거나 전체를 이해했다는 말은 내게 허세에 가깝다. 하지만 영화가 내가 지금까지 '참'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에 파동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그 파동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모르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 모습만 본다면 누가 이 가족의 비밀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마음의 속삭임>은 루이 말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가장 많이 묻어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감독 스스로도 생전에 이 작품을 자신의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는 인터뷰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기사를 보고 갑자기 "감독 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감독은 로랑을 통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외에 많은 이야기들을 소품처럼 던지고 있다. 형들의 그림 장난을 통해 프랑스 부르주아 가정들의 실체 없는 허영을 비꼬기도 하고, 영화 속 표현대로 식민지를 정리하는 때에 인도차이나에서 식민지 전쟁을 벌이는 프랑스 정부를 비난하기도 한다. 또한 엄격한 듯 하지만 일탈을 일삼는 학교 교육을 조롱하고, 어른들의 이중적 가치관을 비웃기도 한다. 당시 사회적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어떻게 세계관을 완성하는 과정과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었는지 로랑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유머와 위트가 담긴 이 이야기들은 전체적인 극의 완급을 효율적으로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소소한 사건들과 함께 영화 전편에 흐르는 재즈를 듣는 것도 <마음의 속삭임>을 즐기는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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