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큐브'에 해당되는 글 20건

  1. 2009.08.08 어데로 가야할꼬...
  2. 2009.02.17 <소무> 거장의 탄생
  3. 2009.02.08 <24시티> 기록자으로서의 카메라
  4. 2009.02.03 <체인질링> 이스트우드 할아버지 손은 약손 (2)
  5. 2009.01.22 <워낭소리> 그들이 사는 세상
  6. 2008.12.19 <라콤 루시앙> How can we judge him?
  7. 2008.12.16 <북극의 연인들> 우연과 운명 그리고 유한과 영원
  8. 2008.12.07 <마음의 속삭임> 남자의 탄생
  9. 2008.11.21 <사과> 당신은 어떻게 사랑하고 이별하나요?
  10. 2008.11.09 2008 AISFF BEST 10 (6)
2009.08.08 17:08

어데로 가야할꼬...


어데로 가야할꼬...


가끔 "담임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살면서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놓일 때 특히 그렇다. 더구나 나이에 비례해 선택의 순간들은 점점 많아지고, 무게감 역시 육중해진다. 초, 중, 고 늘 옆에 있을 때는 그렇게 귀찮고 성가시기 그지없던 존재가 이제는 아쉽기만 하다. 12년 공교육이 이리도 사람을 타성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이거 해!!!" 라고 썩소를 날려줄 누군가가 필요한 건 어쩔 수 없다. 그토록 내 인생은 나 혼자 결정하고 이끌어갈 수 있다고 자부했건만 그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저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혹시 다른 변수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가만히 그냥 있는 게 좋을까..." 나이는 생각의 곁가지들만 무성하게 키웠을 뿐 결단력에는 물과 거름을 야박하게 준 것 같다.

궁시렁 대면서도 누군가의 말에 의지해 방향을 잡고 한 발 내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이제와 담임 선생님을 찾는 건 그 만큼 나이가 더할 수록 인생의 멘토를 찾기 어렵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순간부터 인생의 멘토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 주위의 누군가가 됐든, 역사 속의 인물이 됐든, 아니면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성공시대나 무릎팍 도사에 나올 누군가가 됐든 그건 개인의 선택이다. 내 그릇에 어울리는, 그래서 내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오늘부터 저 사람을 내 삶의 멘토로 삼겠어!" 떵떵거리고 선언하는 건 아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의식하게 될 때 그 누군가는 멘토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내게 있어 그런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니 누구일까?

부모님이라는 행사용 멘트는 차치하고 내가 지금까지 좇아왔던 멘토들은 책과 영화를 통해 만나왔던 것 같다. 박경리와 황석영... 그들이 살아온 삶과 상관없이 문장을 통해 그들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문장을 통해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고, 그 궤적을 훑어가는 과정에서 둘은 내 삶의 방향타로 자리를 잡았다. 조변석개하는 역사적 순간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생각과 행동, 문장을 일치시키고자 애쓴 흔적들이 마냥 멋있게 보였던 것 같다. 박경리가 지난 해 그토록 경외하던 '땅'의 부분이 되었고, 남은 건 황석영이었다. [오래된 정원]을 읽으며 뒤늦게 황석영의 작품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초기작까지 뒤져가며 거의 모든 작품들을 손에 잡았다. 네이버에 청년을 위한 소설 연재를 시작할 때도, 무릎팍 도사에서 예능에 어울릴 법한 과장된 몸동작을 보여줄 때도 여느 무게 잡는 작가들과 다른 그의 행적들을 응원했었다. 하지만 그가 얼마 전 '그 분'과 함께 중앙아시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모습은 내게 숱한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표 만을 남겼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는 믿을 수 없은 말들, 그리고 그에 대한 황석영 자신의 길고 긴 해명과 같은 글... 무엇이 진실이든 한쪽에서는 '변절자'로, 다른 한 쪽에서는 '첩자'로 전락한 그의 모습 자체가 내게는 상처였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의 글을 읽겠지만, 풀리지 않을 물음표들은 그를 예전처럼 대할 수 없게 만들 것 같다.

그리고 최근 신문기사에서 또 하나의 이름을 발견했다. 영화면이 아닌 국제면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문장을 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분명 문화부 기자였다면 그의 이름은 자장커가 아닌 지아장커라고 적었을 것이다. 페이지를 잘못 잡아 이름조차 낯선 그 이름이 그가 아니기를 바랐지만 우려는 현실이었다. 호주에서 열리는 멜버른 영화제에 중국 영화 감독들이 보이콧을 선언했고 그 가운데 지아장커가 있었다. 위구르 자치구 소요 사태의 배후로 지목 받은 레비야 카디르의 다큐멘터리(제프 다니엘스 감독)가 상영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중국의 해커들은 영화제 홈페이지를 급습했고, 지아장커 역시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물론 멜버른 영화제가 충분히 정치적인 의도에서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정치적인 쇼라면 꼭 정치적인 쇼로 답을 했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어느 쪽의 편을 들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지아장커라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대응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데뷔작 <소무>부터 시작해 최근작 <24시티>까지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영화를 난 좋아했다. 그리고 그 온기는 모두를 향해 있음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의 이름 앞에 하나를 추가시켰다. 그는 '중국인' 영화감독이었다. 이제 그가 어떤 따뜻한 영화를 만들어도 모두를 향한 '보편적 메시지'는 찾기 힘들 것 같다.

어찌 멘토가 사람만이 될 수 있을까. 물건이든 공간이든 마음을 붙일 수 있다면 충분한 자격 요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사이 멘토와도 같았던 공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화문 아트플러스 극장의 터줏대감 씨네큐브가 문을 닫을 지도 모른다는 소식... 백두대간이 10년 가까이 운영해 오던 씨네큐브에서 방을 뺀다고 한다. 흥국생명에서 단독으로 운영을 한다고 하니 정확히 말하면 당분간 씨네큐브가 문을 닫는 것은 아닌 듯하다. (물론 내년 3월 이후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음식맛이 좋았던 단골집도 주인이 바뀌면 이전만 못한 법이다. 20살 상경해서 지금까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숱한 기억과 추억이 그 곳에 있다. 해머링맨도, 씨네큐브도 그대로 있겠지만 이 친구들을 바라보는 나는 전과 같지 않을 것 같다. 술에 취한 주인을 실고 천관녀를 찾은 김유신의 말처럼 나 역시 광화문 사거리에서 무의식적으로 씨네큐브로 향할지 모를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이젠 여기가 아니야..." 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백두대간은 이대의 아트하우스 모모로 자리를 옮긴다고 한다. 부디 그곳을 통해서라도 오래된 친구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러가지 확인되지 않은 "썰"들이 난무하지만 무엇이 진실이든 인사는 해야할 것 같다. "그 동안 덕분에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씨네큐브!!!" 

여하튼 하 수상한 시절... 여러가지 방향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몸과 마음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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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7 16:36

<소무> 거장의 탄생


<소무> 거장의 탄생


China; 1997; 105min; Drama; Color
Director: Jia Zhang-ke
Casting: Wang Hong-Wei, Hao Hong-Jian

 
1997년, 향후 10년 간 중국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감독으로 기억될 지아장커는 자신의 고향을 담은 영화 <소무>로 세상에 첫 이름을 새겼다. 최근작 <스틸 라이프>와 <24시티>로 이어지는 작품을 통해 현대의 중국과 중국인을 가감없이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지아장커 영화의 뿌리는 다름 아닌 자신이 나고 자란 '샨시성' 마을과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그는 16mm의 거친 필름에 익숙한 삶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에 적응해야 했던 동시대 중국인들을 담았던 것이다.

지난 11일 막을 내린 씨네큐브 광화문의 지아장커 감독전에서 그의 데뷔작 <소무>를 봤다. 이 때가 아니면 극장에서 다시 보기 힘들 것 같은 다급한 마음에 아침부터 부랴부랴 극장을 찾았다. 마지막 상영이어서 그런지 평일 아침 이른 시각이었는데도 사람들이 꽤 많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이들도 일찍 집을 나섰으리라. 상영관에 불이 꺼지고 익숙하지 않은 색감의 16mm 필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적한 시골길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주인공 '소무'가 나타났다.


소무는 소매치기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부모와 형제들이 있지만 그는 일찌감치 '성공'을 위해 혈혈단신 도시로 나왔다. 하지만 배운 것도 없고, 밑천도 없는 소무가 생면부지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가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한 일은 다름 아닌 소매치기... 감옥에도 몇 번 다녀왔지만 여전히 버스와 시장 등지에서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경찰은 치안강화를 위해 범죄자를 엄하게 처벌할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지만 소무는 다른 대안이 없다. 사냥감을 쫓아 하루 종일 초원을 어슬렁거리는 야수처럼 그 역시 사냥감을 찾아 도시의 구석구석을 살필 뿐이다. 소무 주변의 사람들은 그런 그를 안쓰럽게 바라본다. 새로운 환경에 약삭빠르게 적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누군가의 주머니만 살피고 다니는 그가 어쩐지 한심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소무 입장에서는 그런 친구들이 있다는 게 고마울 뿐이다.

하지만 우연히 들른 친구의 가게에서 죽마고우 샤오닝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된다. 성공을 위해 같이 고향을 떠나 소매치기까지 같이 했던 친구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소무는 배신감마저 느낀다. 이제는 손을 씻고 TV에 나올 만큼 청년사업가로 성공한 샤오닝은 소무로 인해 자신의 불편한 과거가 드러날 것이 걱정이다.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소무는 자신에게 더 없이 냉랭한 샤오닝이 야속할 뿐이다. 어쩐지 새로운 환경에 발빠르게 적응하며 모든 것을 이룬 샤오닝에 대한 부러움도 있어 보인다. 없는 살림에 축의금까지 만들었지만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샤오닝은 이마저도 거절한다. 

답답하고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소무는 술집을 찾는다. 적당히 갈 곳도 없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노래를 잘 부르는 여종업원 메이메이를 만난다. 가수의 꿈을 안고 도시에 왔지만 가족에게 말도 못하고 술시중이나 들고 있는 그녀에게 소무는 이상하게 자꾸 마음이 쓰인다. 꼭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마음을 나누려 한다. 아주 서투르고 어설프지만 소무는 진심을 담았다. 그녀를 위해 생전 부르지 않던 노래도 배웠고, 그녀를 위해 반지도 샀다. 하지만 그녀는 곧 '부자'를 만나 타이위안으로 떠난다. 소무는 결국 시골의 가족을 찾아 가지만 그 곳 역시 그가 있을 곳은 아니다. '가족'은 이미 소무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로 올라온 소무는 다시 소매치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곧 경찰에 붙잡히고, 그는 거리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소무>는 영화의 형식적인 부분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 이후 전개되는 지아장커 영화들의 '원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이후의 작품들을 보고 난 이후 데뷔작을 처음 대하는 느낌은 '새로운 발견'이라기보다 '거장이 탄생하는 순간'을 즐기는 기분이었다.

지아장커의 언어들 - '거리두기'의 미학

움직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카메라 / 풍경화, 정물화, 인물화를 연상시키는 정중동의 화면 / 상하 움직임이 없는 좌우의 쉼 없는 트래킹 샷 / 화면과 분리된 사운드의 소격 효과 / 비전문 배우들의 캐스팅 등은 이미 <소무>에서부터 시작된 지아장커의 영화적 언어였다. 그리고 이런 장치들은 이후 그의 영화에서 더욱 정교하고 세련된 표현 수단으로 자리잡는다. 고정된 카메라는 변화의 중심에서 불안해 하는 중국인(소무)의 표정들을 오롯이 담아내고, 고다르의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롱 트랙킹 샷은 고단하게 삶을 이어가는 군상들을 담아낸다. 감정의 폭발 없이 '순간의 연속성'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장치들은 관객이 화면과 '거리두기'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과도한 감정이입으로 화면과 현실의 경계를 무마시키는 것보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실제'를 응시하는 듯한 사실적 이미지를 안기는 것이다. 비전문배우들의 캐스팅과 화면과 분리된 사운드 역시 거리두기의 효과를 돕는 장치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배우 경력이 없는 주인공 소무와 메이메이(이들은 이후 지아장커의 몇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리고 영화의 시작부터 음향이 제대로 맞춰졌는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사운드 역시 극에 대한 '몰입'보다는 '지켜보기'를 유도한다.

하지만 영화의 중간중간 이런 규칙이 깨지는 순간들이 있다. 주인공 '소무'의 시점으로 화면이 전개되는 부분에서 카메라는 지금까지의 워킹과 반대로 굉장히 역동적이고 화려한 움직임을 보인다. 노래방에서 만취한 소무, 샤오닝의 결혼식장에서 소동을 피우는 소무, 경찰에 잡혀 수갑을 차고 거리에 나선 소무는 모두 그의 시선에서 그려진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소무의 내면이 그대로 화면으로 옮겨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수갑을 찬 채 거리에 홀로 남겨진 소무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소무의 눈을 통해 보여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가장 극적으로 감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면이다.


지아장커의 메시지들 - 잊혀지는 것들에 대한 송사(送辭)

내용적인 면에서 2000년대 후반 작품들보다 사회성이 더욱 짙게 느껴진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소무>에는 지아장커가 그의 영화들에 담고자 했던 이야기의 원형이 담겨져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변화하는 세상에 살아가는 동시대 군상들의 면면(面面)이다. 그들의 피로와 불안, 아니면 희망이 고스란히 필름 속에 묻어 나는 것이다. 소무와 샤오닝은 여러가지로 대비되는 인물이다. 성공을 위해 도시로 나와 소매치기가 됐지만 소무는 여전히 길거리 소매치기로 살고 있고, 샤오닝은 청년사업가로서 단단한 입지를 굳히고 있다. "머리가 좋은 필요는 없다. 그냥 돈 냄새만 잘 찾아 다니면 된다."는 극중 인물의 대사처럼 샤오닝은 '돈'의 흐름을 쫓아 새로운 세상에 화려하게 안착했을 뿐이다. 샤오닝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샤오닝의 모습은 대부분 중국인들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반대로 소무는 그렇지 못하다. 새로운 세상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현재를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오늘을 살아가기가 다급한 상황이다. 그런 그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메이메이에게 연민인지 사랑인지 모를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쩐지 자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런 소무와 메이메이의 불안과 피로는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소무가 중국인들의 현재라면, 샤오닝은 그들이 모두 꿈꾸는 바이다. 소무와 같은 '웃음거리 괴물'이 되든가, 샤오닝과 같은 '영웅'이 되든가 그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1997년 중국인들의 모습이었다.

두 번째는 '해체'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다. 지아장커는 자본주의로 인한 도시의 성장, 그리고 도시로 향한 사람들의 '이주'가 가져오는 '가족의 해체'와 '공동체의 해체'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왔다. <세계>, <스틸 라이프>, <24시티>에서도 이주로 인해 해체된 가족과 공동체는 지아장커 이야기의 주된 테마였다. 모두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고향을 등진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샨샤댐 건설 현장에서 아내를 찾는 남편과 남편을 찾는 아내를 담은 <스틸 라이프>가 가장 대표적이다.) <소무>의 주인공 소무와 메이메이 역시 모두 가족을 떠나 도시로 나온 이주민들이다. 전통적인 가정에서 모여 살았던 그들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더 높은 꿈을 위해 도시로 나왔다. 하지만 부자를 꿈꾸던 소무는 소매치기일 뿐이고, 가수를 꿈꾸던 메이메이는 술집 여종업원일 뿐이다. 이들에게 가족은 언제나 돌아갈 수 있지만, 반대로 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돈'도 없고, 꿈도 이루지 못한 이들이 가족에게 짐이 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가족이 해체되고, 그 기능은 상실된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을 '복원'해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선동하지 않는다. 단지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현재의 모습을 통해 담담히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지아장커의 영화는 항상 '현재에 대한 기록'처럼 느껴진다.

13년이 지나고 처음 본 <소무>는 지아장커의 현재를 설명해 주는 그의 과거였다. 그리고 그 곳에는 지아장커가 구축해 온 영화적 언어와 이야기들의 원형이 숨 쉬고 있었다. 감독이 27살에 16mm 필름에 담아낸 영상이 다소 거칠고, 지금과 비교하면 조명과 촬영 등 튀는 부분도 있지만 거장이 탄생하는 순간 만큼은 벅찬 감동을 느끼게 만든다.


P.S. 지아장커의 영화에는 유독 '휴대전화'가 등장하는 화면이 많다. <세계>에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전달되는 장면을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는 등 그는 이 새로운 통신수단을 통한 사람들의 관계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휴대전화가 대중화 되기 전에 만들어진 <소무>에서는 '삐삐'가 중요한 메타포로 등장한다. 소무는 메이메이의 연락을 기다리기 위해 삐삐를 구입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기계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족들의 모습을 카메라는 비춘다. 뜬금 없지만 지아장커를 GV를 통해 만날 기회가 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당신 영화에서 휴대전화는 어떤 의미를 갖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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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8 04:37

<24시티> 기록자으로서의 카메라


<24시티> 기록자으로서의 카메라


China; 2009; 112min; Docu&Drama; Color
Director: Jia Zhang ke
Cast: Joan Chen, Zhao Tao, Jianbin Chen

 
'중국'은 괴물이다. 잠시 멋친 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황하에 물이 흐르고, 인간이 모여 살 때부터 중국은 주변을 압도하는 괴물이었다. 그들의 역사가 곧 제국의 역사이자, 정복의 역사였다. 그들의 무력은 주변국을 오랑캐 내지 제후국으로 만들었고, 그들의 문화와 학문은 '동아시아적 사고'의 거대한 뿌리를 이뤘다. 세계 어떤 제국도 과거 중국의 역사 만큼 무력을 넘어선 사상적, 문화적 제국이 되지는 못했다. 한족의 무대였던 이 거대한 땅을 무력으로 정복했던 몇몇 민족들도 그 거대하고 고고한 문화 앞에 결국 칼을 내려놨다. 세상의 중심, 곧 중화(中華)는 수 천 년에 걸친 중국 역사가 만들어 놓은 결정체였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이 콧대 높은 중국의 본격적인 비극은 근대의 시작과 함께 했다. 유럽의 서구 열강과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상처를 안겼다. 원료생산지, 시장이 되어 버린 황제의 땅은 생면부지의 차지가 되었고, 사람들은 비참하게 희생되고 죽어갔다. 이 핍박과 수탈의 역사에서 사들어 간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다름 아닌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는 크나큰 상처를 안긴 '자본주의'를 뛰어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사람들은 붉은기 아래 모여들었고, 마오은 중국을 다시 통일하고, 불완전한 주권을 되찾았다. 하지만 마오가 중국인들의 자존감을 부활시킬 수 있었지만, 그들을 가난에서 구제하지는 못했다. 중국은 부활했지만 근대 이후 역사에서 수 천 년간 그들을 빛나게 했던 화려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울한 근대사를 극복하고 중국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그 중심은 단연 '경제'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등샤오핑의 이른바 흑묘백묘론은 일단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임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고, 세계 인구의 1/5이 살고 있는 이 나라는 더 이상 몸짓만 큰 나라가 아니다. GDP만으로 미국과 일본 다음이고, 연 10%에 육박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중이다. 세계의 자본을 빨아들이는 투자의 중심이 됐고, 모든 글로벌 기업이 꿈꾸는 시장이 됐다. 중국에 가뭄이 들면 밀과 옥수수와 같은 주요 곡물의 가격이 오르고, 중국의 자동차와 공장이 많이 돌아가면 국제유가가 오른다. 일본을 제치고 최대 미국 국채 투자국이 됐고, 최고의 외환보유고를 기록하며 미국 경제마저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경제대국이 됐다. 미개하다고, 가난하다고 무시했던 유럽의 콧대 높은 강대국들조차 티벳 분리 운동 과정에서 보여주듯 쓴소리 제대로 한 번 하지 못했다. 그리고 중국은 보란듯이 올림픽도 치뤘다. 정치, 군사대국을 넘어 부자나라가 된 중국은 그렇게 새로운 국가발전의 성공 모델이 되고 있다. 중국은 자신의 '굴기'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것이다. '괴물'의 부활...


중국은 변화했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의 외형을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 시장자본주의를 끌어 안는데 성공한 유일무이한 국가, 중국... 그들의 변화에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이 시스템의 변화는 비단 제도나 정책 등의 외형만 바꿔 놓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국의 땅의 생김새를 바꿔놓았고,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 태도마저 변화시켰다. 동부 해안에서부터 시작된 서구식 도시의 성장은 점점 서쪽으로 확대되며 대지를 변화시켰고, 사람들은 역시 돈을 최대의 가치로 신봉하며 농촌을 떠나 더 낳은 벌이를 위해 도시로 향하고 있다. 중국의 '땅'과 '사람들은' 바로 중국의 변화된 역사를 고스란히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넓은 중국의 대륙과 그 곳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중국이 가진 파란만장한 역사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피사체'가 된다. 우리는 중국의 화려한 과거도, 슬픈 상처도, 그리고 기적같은 부활도 그 땅과 사람들을 통해 변화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과연 중국은 지금 어디 있으며, 사람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과거의 대국의 지휘를 회복하고 있는 현재 중국의 모든 장면, 순간들이 휘황찬랑하게 빛이 나고 있을까? 지금은 그 땅과 사람들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 것일까? 그 답은 바로 중국의 땅과 사람들의 표정에 있을 것이다.

지아장커의 새 장편영화 <24시티>가 개봉했다. 1997년 <소무>를 통해 장편영화에 대뷔한 지아장커는 <플랫폼>, <임소요>, <세계>, <스틸 라이프>, <동>, <무용> 등의 장편과 몇몇 단편을 통해 동시대 중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됐다. 그의 카메라는 항상 현재 중국의 어느 공간과 그 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향하고 있다. 그는 공간을 통해 지금의 중국을 이야기하고, 중국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과 그에 발빠르게 적응하는 사람들... 이는 <세계>와 <스틸 라이프>를 지나면서 더 분명해진다. 세계의 유명 관광지를 그대로 복원한 거대 놀이공원 세계공원을 무대로 한 <세계>, 그리고 세계 최대의 댐이 될 샨샤댐을 담은 <스틸 라이프>와 <동>은 지금의 변화된, 변화하는 중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다. 변화된 공간은 단지 물리적인 땅의 모양을 바꿔 놓은 것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가진 사고와 태도의 변화 역시 이끌었다. 그 공간들은 전혀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자본주의적인 공간이었으며, 발전의 결과였다. 자본의 총체였고, 더 많은 자본을 생산할 수 있는, 소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람들이 변화된 공간에 창조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역시 스스로를 위해 최대한 많은 자본을 만들어 내는 것 뿐이다.


<24시티>가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쓰촨성 도시 청두의 420 공장 역시 지아장커의 이전 영화들의 공간들이 상징하는 바와 닮아 있다. 1958년 중국의 1차 5개년 계획경제개발 당시 만약에 있을 적의 공격에 대비해 내륙 깊숙이 세워진 이 군수공장은 풍부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타지의 노동자들까지 흡수하면서 청두 안에 하나의 작은 도시가 됐다. 하지만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고, 중국이 시장경제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420 군수공장의 역할도 점점 자리를 잃어갔다. 결국 420공장을 운영하던 청파그룹은 대지를 넘기고, 5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던 공장은 '24시티'라는 이름의 초고층 아파트 단지로 바뀔 예정이다. 중국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건물이 가장 현대적인 공간으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마지막 인터뷰이 자오 타오의 말처럼 24시티의 최신식 아파트 한 채를 얻기 위해 엄청난 돈이 필요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임금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집... 그 집들이 50년 동안 수 많은 노동자들의 생계를 책임진 곳을 대체하려 한다. 이제 그 곳은 더 이상 노동의 공간이 아니라 자본의 공간이 된다. 이 때문에 24시티는 중국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지아장커는 420 공장의 마지막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카메라는 마지막 업무를 마친 노동자들이 탄 자전거거 회사 정문을 빠져 나오는 모습을 비춘다. 곧 50년을 지키고 있었던 공장의 팻말도 교체된다. 시끄럽게 돌아가던 기계와 사람들로 쉴 틈이 없었던 공장은 비워지고, 육중한 장비들이 차례차례 건물들을 부순다. 그리고 한 편에서 없어지는 공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사라지는 공장과 함께 자신의 과거 역시 묻고 있는 사람들이다. 감독의 카메라는 420 공장과 함께 이 사람들의 얼굴과 말에도 눈과 귀를 기울인다. 공장이 처음 생긴 순간부터 함께한 사람도 있고, 공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을 시작한 사람, 타지에서 일자리를 위해 청두로 이주한 사람, 공장이 싫어 떠난 사람 등 그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어떤 이는 420 공장을 통해 영광을 말하고, 어떤 이는 아픔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공장이 세워진 1958년부터 현재까지 공장의 한 순간을 기억한다. 여덟 명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자신들의 이야기이면서 곧 420 공장에 대한 이야기이고, 동시에 중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간 순서대로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곧 변화하는 중국의 한 순간들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기록인 것이다.


지아장커는 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을까? 답은 사람들의 '말'과 '표정' 그 자체에 있다. 영화 <24시티>에서 사라지는 공단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알듯 모를듯 애매하다. 개발이 가져올 화려한 미래에 들떠 있지도 않으면서도, 노동자의 생계를 끊어버리는 철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격렬한 환희도, 매서운 비판도 없다. 카메라는 그의 영화들이 그렇듯 한폭의 풍경화나 정물화를 연상시키듯 큰 움직임 없다. 도시에서 발생하는 이 거대한 소멸과 탄생이 역사의 순리인 것처럼 변화의 현장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50년 전 아무것도 없던 곳에 공장이 들어섰고, 시간이 흘러 다른 구조물이 공간을 대체하는 순간... 이제는 사라져 없어질 것을 기록하려는듯 카메라는 공장의 구석구석을 바라볼 뿐이다. 감독이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이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420 공장의 소멸은 단지 5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건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50년은 중국이 온전한 국가가 된 이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천안문사태, 개혁개방 등 파란만장한 중국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역사적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420 공장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감독은 이 공간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아장커에게 곧 없어질 구조물만 기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영혼이 부재한 허울에 불과하다. 때문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마치 건물에 숨을 불어넣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덟 명의 화자들은 '3세대'로 나눠 볼 수 있다. 우선, 이주로 인해 '이별'의 상처를 공유한 이들이 1세대에 해당한다. 420 공장에 청춘을 바친 노인은 공장을 목숨보다 소중히 아낀 자신의 스승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다른 노파는 이주정책에 따라 셴양에서 배를 타고 청두로 오던 중 잃어버린 아이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가족을 떠나 이주한 중년 여성은 실직 후 생계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고, 가족을 떠나고 싶어 청두로 온 여성은 여자로서 자신의 외로운 삶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들은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변화를 묵묵히 따랐고, 그들이 겪어야 할 상처들을 자신의 몫으로 돌렸다. 그들이 모두 흘린 '눈물'은 인내한 상처들에 대한 반증이다. 그리고 2세대가 있다. 이들은 420 공장에서 태어나고, 공장에서 학교를 다니고,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공장과 함께 성장하고 중년이 된 2세대는 1세대 만큼의 극적인 인생이 없다. 태어난 순간부터 진로는 이미 결정이 돼 있었고, 큰 변화 없이 그저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았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3세대가 있다. 공장에서 태어나 성장한 점이 전 세대와 같다면 다른 점은 그들은 변화된 세상의 흐름에 맞춰 전세대가 살았던 삶을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세대와 다른 가치과 사고를 가진 세대이다. 공장의 노동자가 되길 거부하고 아나운서로 변신한 남자와 폴크스바겐을 모는 멋진 사업가로 변한 여성이 그들이다. 두 인물은 모두 공통적으로 '24시티'를 꿈꾼다. 420 공장을 벗어난 그들에게 있어 성공은 당이나 군의 고위직이 아닌 모두가 부러워 할 '부(자본)'를 갖는 것이다. 그 현실적인 목표가 바로 24시티이다. 근대와 현대를 가로지르는 50년 중국의 변화는 이렇게 420 공장에서 살았던 3세대에게 오롯이 담겨 있는 것이다.


<24시티>에서 흥미로운 점은 8명의 인터뷰이가 모두 실제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4명은 실제 인물이고, 4명은 배우들이 연기한 가짜이다. 그래서 영화는 온전히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까. 지아장커가 장르의 경계를 붕괴한 것은 이번 만은 아니다. <세계>에서는 애니메이션이 삽입됐고, <스틸 라이프>에서는 다큐멘터리였던 <동>의 영상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24시티>는 부분적으로 이뤄지던 경계허물기를 영화 전체에서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가 있다. 감독이 인터뷰 한 130명 중에서 촬영을 거부한 경우도 있지만,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배우들에게 연기를 맡긴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어 보인다. (조안 첸, 자오 타오, 루 리핑, 지안빈 첸 등) 여기에 대한 답은 감독의 말에 있는 듯하다. "내게 역사란 사실과 상상의 혼합체이기에, 지난 반세기 동안의 중국 역사를 재연하기 위해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평행한 흐름 속에서 통합했다." 분명 역사는 사실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개인의 상상이 덧대지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24시티>는 분명 개개인의 '기억에 근거한 기록'인 것이다.




P.S. first
지아장커는 이미 거장이다. 난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과연 불혹도 되지 않은 감독이 만든 것인가.' 하는 놀라움을 경험한다. 그의 영화적 언어, 영상미학은 둘째 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가진 깊이가 놀랍다. 그리고 거기서 묻어나는 인간적 성숙도가 부럽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걸 보여주는 그의 카메라가 고마울 따름이다.

P.S. second
지아장커는 가끔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넌지시 희망을 얘기한다. <세계>에서 "이제부터 시작이야." 라고 읊조리는 자오 타오의 마지막 대사에서 느껴지듯 <24시티> 역시 그 희망의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지아장커의 페르소나가 되어 버린 자오 타오는 '수나'라는 이름으로 마지막에 등장한다. 그녀는 공장이 싫어 뛰쳐나왔고, 자연스레 부모와도 멀어진 인물이다. 곧 그녀는 '중국의 근대'를 부정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우연히 집에 들렸다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게 됐음을 말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부모의 인생을 그들의 입장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녀의 눈물은 중국의 근대와 현대 그리고 420 공장의 3세대가 갈등이 아닌 공존이 가능함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4시티>가 따뜻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P.S third
용산 철거 현장에서 벌이진 일로 많은 문제들이 한국 사회에 던져졌다. 원래 있는 문제들이 곪아터져 비극적 사건으로 나타났지만 아직도 문제가 뭔지 감을 잡고 있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24시티>를 보면서 문득문득 용산현장이 생각이 났다. 왜 우리는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근거 없는 장밋빛 청사진에 가려 그들의 목소리를 묻어버렸을가? 용산에서는 눈부신 미래를 위해 '지금'은 부정되어야 했다. 그리고 더 비극은 그 곳에 있던 사람들까지 덩달아 부정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분노는 여기서 시작됐다. 왜 그들의 인생을 존중하지 못하고 부정해야 했을까? 그것이 비단 용산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개발 현장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문제이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를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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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3 18:12

<체인질링> 이스트우드 할아버지 손은 약손


<체인질링> 이스트우드 할아버지 손은 약손


U.S.A; 2009; 141min; Drama; Color
Director: Clint Eastwood
Cast: Angelina Jolie, John Malkovich

 
요즘 들어 현실이 픽션보다 무섭고 비극적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다. 난민수용소와 아이들이 있는 학교를 무차별 폭격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세상이 무섭고,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철거민들이 부와 권력의 묵인 아래 새까맣게 재로 변하는 현실이 비극적이다. 살인, 유괴, 전쟁 등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 잔인한 범죄들이 공포의 원형질이었다면, 이제는 가난, 무지, 힘없음 등이 새로운 시대의 비극이자 공포가 됐다. 그래서일까? 2008년은 유달리 공포영화가 힘을 못쓴 한 해였다. 극장보다 현실에서 더 크게, 자주 느낄 수 있는 것이 '공포'였으니 말이다. <링>을 보고 텔레비전 마주하기가 두려워도, <추격자>를 보고 밤 길 걷기 무서워도 스크린이 아닌 현실의 어디에선가 그 보다 더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눈과 귀가 확인하는 순간 만큼 공포스럽지는 않다.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영화, 소설, 드라마도 '그래, 가짜니까.' 하고 놀란 마음을 쓸어 내릴 수 있다. 하지만 텔레비전 뉴스 앵커나 친구, 가족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을 때, 아니면 내 눈으로 직접 현장을 목도할 때 공포는 픽션이 아닌 정말이지 현실이 된다.

현실의 비극성과 공포 때문인지 주요 사건들은 '실화'라는 이름으로 자주 영화의 소재로 사용된다. 그 대상은 희대의 살인마부터 전쟁, 범죄조직, 정치인들의 비리, 불평등한 사회 구조 등에 이르기까지 제한이 없는 듯하다.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무너뜨려 이야기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겠다는 일종의 전략인 셈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 자막 한 줄로 관객은 스크린을 대하는 마음을 고쳐잡게 된다.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었든, 모르고 있었든 '실화'라는 사실만으로 영화 자체를 온전히 허구로만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혹 영화를 보고난 후 뒤늦게 실화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작품이 완전히 새롭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런 이유로 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조심스럽게 지켜야 할 '보여주기의 윤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 때, 그 일을 "왜" 지금 스크린에서 다시 봐야 하는지 '공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바란다면 어느 정도 '치유의 효과'까지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파급력이나 대중성을 고려한다면 이유는 더욱 분명해진다. 영화로 옮겨지는 사건들은 대부분 한 시대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일들이다. 위인의 이야기이든, 미담이든, 비극이든 당시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한 공간의 역사를 뒤바꿔 놓을만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대상이 된다. 때문에 직, 간접적으로 얽힌 사람들도 많고, 비극일 경우 다시는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자칫하면 영화가 시간에 묻혀 간신히 아물어가는 사람들의 상처를 다시 덧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지 영화로 만들기 좋아서, 관객동원 수치를 올리기 쉬워서 도구가 되는 것은 그야말로 '두 번 죽이는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 만족스러운 경우는 많지 않다. 스크린으로 옮기면서 이야기는 실제보다 과장되고, 인물들은 영화적 인물로 재탄생된다. 일련의 영화화 과정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여러 영화적 기교와 수단들이 사건 자체를 왜곡하고, 본질을 호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미지와 소리로 충격만 남기고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메시지만 던져놓고 끝나버리는 영화들처럼 말이다. 이런 영화들한테서 처음에 던졌던 "왜"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는 요원하기만 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새 영화 <체인질링>이 개봉했다. 이제 배우보다 감독이라는 타이틀이 더 잘 어울리는 거장은 새 영화를 위해 '실화'를 선택했다. '휴머니즘'에 있어서 동시대 최고의 만듦새를 자랑하는 감독의 선택은 화려하지도 기쁘지도 않은 현실의 가장 추악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20년대가 끝나갈 무렵 전 미국을 흔들었던 한 유괴사건과 그에 얽힌 연쇄살인범죄, 그리고 LA 경찰의 무능과 부패가 그 주인공...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많이 사라진 사건이지만 여든의 노장은 2009년 다시 그 이야기를 세상에 재생시켰다. 그는 왜 100년 가까이 지난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이 사건을 다시 스크린으로 옮겼을까?

1928년의 LA의 한 마을. 전화교환소 매니저로 일하는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는 혼자 아들 월터를 키우고 있는 직장여성이자 어머니이다. 아이에게는 좋은 엄마이고, 동료에게는 신뢰를 받는 친구이고, 그리고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만능의 여성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크리스틴은 원더우먼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깡마른 몸매와 말투나 행동, 손짓까지 아이를 혼자 키우는 억센 여자라기보다 순하고 착한 여성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평생을 주변사람, 세상과 조화롭게 호흡하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 그녀의 삶은 전혀 의도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곳으로 전락한다. 회사에서 급하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아들, 월터가 사라진 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찾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고, 경찰에 신고하는 일 뿐이었다. 불성실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찰에게도 큰 소리 한 번 내지 못한다. 그저 스스로 전국의 실종센터에 일일이 전화해가며 아들 월터의 생존을 확인할 뿐이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아이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일상을 힘들게 보내고 있는 그녀에게 '월터'가 돌아온다. 하지만 경찰의 손에 의해 넘겨진 아이는 월터가 아니었다. 월터처럼 말하지도 않았고, 키도 작았다. 경찰에게 월터가 아니라고 항의해보지만 공격을 당하는 건 오히려 크리스틴 자신이다. 경찰은 전문가까지 동원해서 크리스틴을 모성을 잃은 정신병 환자 취급을 하고, 일이 커져 경찰의 입장에 곤란해지는 것을 애초에 막고자 한다. 지금까지 순종적이었던 크리스틴은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가짜 아이 때문에 경찰이 진짜 월터를 찾는 일을 멈추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 그녀를 돕겠다고 한 사람이 나타난다. LA 경찰의 부패와 무능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을 해왔던 교회의 구스타브 목사(존 말코비치)가 그 주인공... 크리스틴은 그와 함께 경찰의 실수를 폭로하고, 진짜 월터를 찾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퇴로가 막힌 경찰은 크리스틴을 정신병원에 감금하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라고 끊임없이 압박을 가한다. 그러던 중 엄청난 유아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잡히고, 그 희생자 가운데 한 명이 크리스틴의 아들 월터임이 밝혀진다. 경찰의 무능과 부패, 폭력은 만천하에 드러나고, 경찰은 사회의 지탄과 법원의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월터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은 어떤 것도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어디선가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실낯같은 희망 하나로 크리스틴은 일상으로 돌아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수화기를 통해 전해질 '낭보'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실존 인물 크리스틴의 경험은 보통 사람의 이성과 감정으로 예상할 수 없는 고통이다. 유일한 혈육인 9살 난 아이가 없어지고, 경찰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을 당하고, 없어진 아이가 연쇄살인범에 의해 희생됐다는 사실은 국외자로서 '당신의 상처가 얼마나 클지 마음이 아프네요.'라고 말하는 것조차 죄스럽게 만든다. 보는 사람조차 숨이 멎도록 만드는 이 추악하고 비극적인 실제 사건은 여든의 노장 손에서 영화로 다시 태어났다. 영화는 '관객 여러분, 이런 충격적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정도의 보여주기에 그치지 않는다. '요정이 앗아간 예쁜 아이 대신에 두고 가는 못 생긴 아이'라는 의미의 <체인질링>은 감독이 이전에 만들었던 영화들처럼 장르영화로서 만족할만한 재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메시지에 충실한 영화이다. <체인질링>은 은아리영이나 구은재가 보여주는 한 많은 여자의 한풀이도 아니고, <밀양>의 신애처럼 '신'에 정면으로 맞서는 복수극도 아니다. 도식적으로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전자보다 진지하게 거시적인 담론을 이끌어낸다면, 후자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사건을 통해 극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체인질링>의 실화를 대하는 클린트 이스트우트의 시선은 어딘가 전작인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닮아 있다. 태평양 전쟁 도중 일어난 이오지마 전투를 미국과 일본의 시선에서 각각 영화화 했던 두 작품은 개인이 집단(더 정확히 말한다면 국가)의 논리에 의해 희생될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교과서처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분명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아버지의 깃발>보다 수작임에도 국내에서는 개봉하지 못했다.) 국가나 집단은 분명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고수해야 한다고 믿는 가치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는 것이 전체를 위해 '옳은 일'이라고 스스로 자위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이 항상 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국가의 윤리와 인간의 윤리가 항상 상충하는 이유이다. 이럴 때 역사적으로 국가는 항상 개인의 희생을 요구해왔다. 통상 사람들은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희생을 참아내지만, 그것이 '정도'를 지나쳤을 때 제동력을 잃은 공권력은 항상 사람들의 손에 의해 무너졌다. 그래서 국가는 정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항상 견제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국가로 대표되는 공권력에 대한 '비판'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그 힘에 고삐가 풀렸을 때 <체인질링>의 크리스틴이 겪는 고통은 평범한 누군가의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체인질링>은 유괴와 연쇄살인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중심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여기에 그렇게 많은 분량을 소비하지 않는다. 말로만 들어도 무서운 범죄보다도 이 영화의 실질적인 공포이자 비판의 중심은 오히려 사건과 인물을 대하는 LA 경찰로 환유되는 공권력이다. 악명 높았던 LAPD의 부패와 폭력에 맞서 여리기만 했던 크리스틴은 아이를 찾기 위해 '투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물에게 그녀를 지켜줘야 할 경찰이 오히려 더 큰 적이 됐을 때 크리스틴이 가지고 있던 인내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결국 여린 여성의 강한 모성 앞에 서슬 퍼런 공권력은 무릎을 꿇고 만다. 역사의 순리이다. 이 과정에서 크리스틴이 인간으로서 받게 되는 고통은 살인자로 인한 것에 비해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정신병원에서 크리스틴과 경찰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감금당한 여성들이 온전한 이성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인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보다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철저히 우리의 편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 의해서 벌어졌다면 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100년 가까이 지난 사건을 지금 재생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단지 한 많은 여성의 눈물 겨운 스토리가 아니라 공권력이 난무한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긴 크리스틴을 통해 과연 무엇이 소중한지를,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되짚어 주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크리스틴을 통해 여성들이 받은 상처를 세심하게 보듬고 있다. 치유와 동시에 그녀에게 희망을 남겨둔다. 크리스틴은 동료들과 아카데미 결과를 두고 내기를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일상으로 되돌아 왔지만 여전히 월터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희망이 크리스틴을 일상으로 돌아오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아이였지만 절망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 것 역시 아이에 대한 희망이었다. 아이는 크리스틴이 살아야 하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이것이 여든의 현자가 한 여자의 비극을 통해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P.S. first
씨네21에서 영화평론가 박평식은 <체인질링>을 두고 "시대 공기에 휘감기면 감동은 곱절"이라고 평했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너무도 먼 사건을 마주하면서 '시대의 공기'를 운운하게 되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분명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분명 쉽게 넘길 일은 아닌 듯하다. 공권력의 잘못을 지적하는 크리스틴은 정신이상자로 병원에 감금당한다. 법은 자위적으로 판단되고, 공권력을 위해 남용된다. 2009년 대한민국에서도 법은 사람들은 폭력적인 범법자로 만드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현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빨갱이 내지 국가의 정체성을 흔드는 폭도로 내몰았다. 과연 사람들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두고볼 일이다. 제발 역사가 만들어준 교훈에 집중하기를 바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절친 부시의 말년이 어땠는지만 기억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P.S. second
영화 속에서 제프리 형사로 대표되는 경찰의 태도는 흥미롭다. 만약 제프리 형사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속죄를 했을 때 그는 인간으로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가 경찰로서 저지른 악행들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때문에 그를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행동이 경찰로서, 공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옳은 일이었다고 스스로 믿게 만드는 것이었을 것이다. 살기 위한 자기 체면이고 세뇌의 과정이다. 하지만 제프리는 그 선택이 자신을 점점 사지로 내몰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토록 위하고자 했던 조직에게서도 버림을 받았다. 결국 제프리 역시 조직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속한 '개인'에 불과하다. 여차 하면 버려지고 교체될 수 있는... 이것 역시 우리가 배워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P.S. third
크리스틴을 연기한 안젤리나 졸리는 의외로 인상적이었다. <툼레이더>, <원티드>의 여전사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바짝 마른 몸과 수줍은 표정과 행동은 그야말로 여성스러웠고, 큰 눈에서 눈물이 맺힐 때는 아이를 잃은 엄마의 모습이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그녀의 섹시한 입술도 전혀 이질감을 주지 못했다. 더불어 간만에 정상인의 역할을 맡은 존 말코비치 역시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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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10:29

<워낭소리> 그들이 사는 세상


<워낭소리> 그들이 사는 세상


Korea; 2008; 78mm; HD; Documentary
Director: 이충렬
Cast: 최원균, 이삼순, 늙은소, 젊은소, 어린소

 
추운 계절이다. 예년 겨울에 비하면 그렇게 추운 날씨도 아니다. 근데 이래저래 돌아가는 상황들이 몸와 마음을 더 움츠려들게 만든다. 뉴스와 신문을 보면서 내뱉는 게 겨울날 입김같지는 않다.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세상 걱정하게 생겼냐고 스스로를 꾸짖어 보지만 말에 진심이 섞이지 않는다. 뭔가 답답하고 꽉 막힌 마음을 한 번에 녹여줄만한 그런 것이 생각난다. 손과 발이 얼어붙고 얼굴이 베일 것 같은 겨울, 포장마차에서 먹는 뜨거운 오뎅국물같은 그런 거 말이다. 문득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봤던 영화 한 편이 생각났다. 표를 구하지 못해 매표소 앞을 얼쩡거리다 "남는 표 아무거나 하나 주세요." 하고 본 영화였다. 아는 건 표에 적힌 제목 뿐이었다. 주인공이 누군지, 무슨 내용인지, 장르가 무엇인지 알아볼 겨를도 없이 표를 받자마자 시간에 쫓겨 상영관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상영관 앞에서 나눠주는 영화제목이 적힌 손수권을 받았다. 그것도 이유를 몰랐다. 영화가 끝날 때쯤에서야 이유를 알았다. 상영관 곳곳에서 손수권이 담긴 비닐팩을 뜯는 소리가 들렸다. 곧 이어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워낭소리>... 워낭소리는 그렇게 우연처럼 만났다. 얼마 전, 영화가 극장에서 정식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축년, 소의 해인만큼 독립영화치고는 꽤 여러 곳의 매체에서 소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개봉과 함께 최고의 관객점유율을 기록하며 '빵' 터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뿌듯했다. '그래도 내가 우연치고는 좋은 영화 골랐구나.' 정도의 만족감이었다. 왜 뜨거운 오뎅국물 어쩌구저쩌구 하다가 워낭소리가 생각났는지 모르지만, 그 때의 기억이 이 영화라면 그나마 허한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혼자 보는 영화가 익숙해졌지만 왠지 그러기 싫어 친구들을 불러냈다. 그냥 영화 끝나고 돌아가면 더 허전할 것 같았다. 있는대로 늘어지게 수다라도 한 판 떨어야지만 듣기 싫은 소리만 해대는 뉴스와 신문을 피할 수 있다.



<워낭소리>는 70대 노부부와 그들과 30년이 넘게 살아온 늙은 소의 마지막 1년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영화의 처음, 절에 가기 위해 겨울산을 오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걸음이 힘겹다. "소가 죽으니까 생각이 나니껴?' 할머니의 물음에 절을 마친 할아버지가 '그럼!' 하고 목소리를 높인다. 할아버지의 손에 들린 낡은 워낭도 주인을 그리워하는 듯 겨울공기만큼이나 맑은 소리를 낸다. 그리고 1년 전으로 돌아가 봄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집도 여느 시골집처럼 1년 농사를 시작하는 준비에 정신이 없다. 그 곁에 그들만큼이나 노한 소가 있다. 소가 보통 15년을 산다는데 이 소 나이가 사람으로 치면 불혹이다. 듬성듬성 빠진 털에 윤기가 없고, 뼈가 앙상하게 들어난 겉모습은 소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적지 않은 나이를 짐작하게 한다. 2~3년 등 따시고 배부르게 지내다 뼈와 살이 발라져 시장에 팔리는 소들에 비하면 천수를 누리는 셈이다. 근데 더 들여다보면 이 소의 팔자가 부러워할만큼 편한 것도 아니다. 할아버지 외양간에 처음 들어선 순간부터 소는 할아버지의 손이고, 발이였다. 고집스럽게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 때문에 지금까지 쉬는 날 없이 산으로, 들로, 논으로, 밭으로 쫓아다니며 일을 했다. 할머니 말처럼 말을 못해서 그렇지 일을 나갈 때마다 엄청 욕을 해댈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소는 묵묵히 할아버지를 태운 리어카를 끌고 평생을 오가던 길을 간다. 수의사가 살 날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지만 마지막까지 소는 봄에는 못자리를 만들고, 가을엔 벼를 실고, 겨울엔 나무를 해나를 것이다.

그 만큼 할아버지도 소에게 끔찍하다. 농약 좀 치자는 할머니의 지청구에도 그러면 소가 먹을 게 없다고 단칼에 자른다. 사료 사다 먹이면 편할 것을 엄청 먹어대는 소를 위해 새벽처럼 일어나 쇠죽을 만들고, 땡볕에 일해도 할머니 배고픈 것보다 소가 배 곯는 게 걱정이다. 다리가 불편하고, 두통에 괴로워도 워낭소리가 들리면 소한테 뭔 일있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 소 한 마리로 농사지어 9남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다 보냈다고 하니 할아버지가 애쓰는 게 짐작 못할 바도 아니다. 죽어나는 건 할머니 뿐이다. 매일 아프다고 골골거리면서 일하러 다니는 것도 성가시고, 나이 먹고 편하게 농사질 수도 있는데 기계, 농약 다 마다하는 것도 못마땅하다. 더구나 할아버지가 허구한 날 소만 보고 있으니 울화는 더 치민다. 할머니 말처럼 '싱싱한 남자' 못 만난 게 한 일수도 있겠다. 그래도 말 뿐이지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할머니는 영감 없이 혼자 살 게 벌써 걱정이다. 자식 눈칫법 먹고는 못 산다며, 따라 죽겠다는 말이 일일드라마에서 좋아 못 죽는 커플들의 빈 말처럼 들리지도 않는다. 외양간을 지키는 소한테도 그렇다. 30년 넘게 고생시킨 게 미안할 뿐이다. '너나 나나 영감 잘못 만나 고생이 많다.' 는 말처럼 어찌 보면 소는 할머니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벗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그리고 이름도 붙여주지 않은 소, 이렇게 셋은 30년이 넘게 그렇게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가족처럼 지내왔을 것이다. 마지막 1년도 다르지 않다. 셋은 마지막까지 평소처럼 하루하루를 보낸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하나... 외양간에 새주인이 들어왔다. 근데 새끼 낳고, 먹기만 잘 하지 일하는데는 영 젬병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늙은소한테만 정이 간다.

   
겨울이 되면서 소의 기력은 바닥을 드러낸다. 그래도 할머니 말처럼 추운 겨울 노인네들 춥지 않도록 마당을 꽉차게 나무를 해놓고 소는 눈 감을 준비를 했다. 할아버지는 누워서 일어날지 모르는 소를 두고 '에이씨, 에이씨'를 반복하면서도 연신 눈을 훔친다. 알았으면서도 아직 오랜 친구를 보낼 준비가 안 된 듯 보인다. 그런 할아버지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소는 밭은 숨을 내쉰다. 평생을 달고 있던 코뚜레와 워낭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소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더 이상 일어설 기력도 없는 자신을 보채며 연신 눈을 훔치는 할아버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평생의 벗을 잃은 건 할아버지와 할머니 뿐이 아니었으리라.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위해 일을 하면서도 노부부만 남기고 가는 길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평생 소가 일을 하러 다닌 밭 한 켠에 자리를 마련해준다. 마치 그게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을 위해 일만 해준 친구에 대한 예의이고, 고마움의 표시인 듯 말이다. <워낭소리>가 무엇보다 따뜻했던 이유는 이렇게 떠나는 자와 떠나보내는 자가 서로에 대해 전하는 배려와 예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워낭소리>는 한 마디로 따뜻하다. 감독이 카메라를 잡고 있는 손도 따뜻하고, 카메라의 시선도 따뜻하고, 소에 대한 할아버지의 마음도 따뜻하고, 할아버지에 대한 할머니의 푸념도 따뜻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살아있음이 따뜻하다. 아마도 이런 따뜻함 때문에 영화가 생각났는지도 모르겠다. 경상도 봉화의 한 마을에서 전해지는 그 온도는 많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소> 그들이 사는 세상의 '온도'가 무엇보다 그리웠다. 그리고 그들의 예의와 배려가 부러웠다. 추운 겨울 사람들이 편한 보일러 대신 촛불을 들었고, 공권력은 다시 그들을 향해 살수차를 뿌렸다. 2009년의 시작에서 2008년의 그 뜨거움이 재현될 징후들이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대의정치의 정당성을 스스로 자진납세한 국회부터 출발선을 끊었고, '법'을 가장한 폭력으로 무장한 경찰이 가속도를 붙였다. 앞으로 2월 임시국회와 청와대의 인사, 경제대책들이 얼마나 추진력을 달아줄지가 관건이다.

문제는 소통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2008년 출범과 함께 새정부는 '소통의 정부'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그 약속이 민망하기까지 하다. 과연 배려와 예의가 없는 관계에서 소통이 이뤄질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상대를 위한 따뜻한 온도 없이 이해가 가능한지 묻고 싶다. '법'은 지켜져야 하지만 그것이 유지해야 할 적정 온도와 조건들이 있다. 그것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법은 사람들을 범법자로 만들 뿐이다. 사람들은 법을 지켜야 할 이유와 목적을 잃어버린다. 지금의 문제를 푸는 열쇠는 획기적인 정책, 눈부신 성장, 제 2의 기적 이런 거시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평범한 우리들에 대한 높은 분들의 '예의'이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따뜻한 온도를 가진 배려다.

노희경이 쓰고, 표민수가 찍은 KBS의 <그들이 사는 세상>은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우리들이 사는 세상'을 담기 위해 현장을 뛰어 다닌다. 또 그것이 드라마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라고 믿는다. 하지만 막상 이 드라마가 끝날 때쯤 역으로 우리는 '그들이 사는 세상'이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난 할아버지와 할머니, 소가 사는 세상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조금만 더 따뜻해지면 된다. 그리고 그 온도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된다. 어렵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난 이것이 사람들이 다른 것도 아닌 '촛불'을 들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워낭소리>의 훈훈함 때문이었는지 엉겨붙은 마음이 좀 풀린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약간의 길이 생겼다는 느낌에 마음이 놓이는 것 같다. 가끔은 책에서도 찾지 못하는 길을 전혀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얻기도 한다.


P.S. <스튜디오 느림보>는 이제 그 만의 톡특한 스타일의 다큐멘터리 제작 노하우를 가진 제작사가 된 것 같다. (배급에 있어서도 그렇다.) 독이 될 수도 있지만, 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난 제작사의 전작인 <우리 학교>를 보면서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 <송환>이라는 입에 거품물 정도의 마스터피스를 본 직후에 봐서 그런지 몰라도 난 아이들을 향하는 카메라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꼭 필요한 시도였고, 좋은 의도를 가진 좋은 영화임은 확실했지만 감정선을 건드려 뭔가 강요하는 듯한 화면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어찌 보면 난 보다 칼 같은 카메라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워낭소리>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솔직히 <워낭소리>는 극장판이라기보다 인간극장류의 TV다큐의 분위기가 더 많이 난다.) 하지만 <우리학교>와 <워낭소리>를 묶어서 보면 약간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스스로 너무 장르의 외연을 좁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나의 장르 안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변주 역시 영화를 보는 재미니까 말이다. 앞으로도 <스튜디오 느림보>가 꾸준히 자신들만의 작품을 만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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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9 16:27

<라콤 루시앙> How can we judge him?


<라콤 루시앙> How can we judge him?

France, Germany, Italy; 1974; 138min; 35mm; Color
Director: Louis Malle
Cast: Pierre Blaise, Aurore Clement, Holger Lewenadler

 
라콤 루시앙은 18살의  프랑스 남부의 작은 시골에 살고 있는 청년이다. 마을의 요양원에서 허드렛일하며 근근히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아빠와 형은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감옥에 들어갔고, 현재는 엄마와 함께 산다. 하지만 엄마의 새 남자친구 때문에 따로 나가 살아야 할 판이다. 18살이나 됐으니 혼자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알게 모르게 눈치를 주고 있다.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형처럼 레지스탕스가 되기로 한다. 눈치 안 보고 집에서 나갈 수도 있고, 왠지 멋있어 보인다. 엄마도 버릇처럼 형을 본받으라고 말해왔다. 그래서 운동을 주도하는 학교 선생님을 찾아간다. 하지만 선생님은 루시앙의 부탁을 받아주지 않는다. 하긴 그게 신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러다 우연히 독일 경찰들이 일을 하는 곳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레지스탕스와 정반대의 길이다. 그런데 이 곳이 더 멋있다. 학교 선생님에 대해 몇 가지 알려줬더니 술도 주고, 밥도 주고, 총도 주고, 옷도 주고, 잘 곳도 준다. 궁색하게 사는 것보다 이게 훨씬 좋을 거 같다. 집에 돈도 보내줄 수 있으니 감옥에 간 형에게 뒤질 것도 없다. 레지스탕스 잡으러 다니는 경찰 놀이도 토끼 사냥하는 것보다 재미 있다. 자기를 무섭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어깨 펴고, 고개 들고 다닐 수도 있다. 마음이 있는 여자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누구보다 더 강한 힘을 갖는 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 그래서 이 생활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냥도 잘 하고, 집안 일도 잘하는 순박한 시골 청년 라콤 루시앙은 그렇게 큰 고민 없이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됐다. 애초에 심각한 정치적 고려는 없었다. 아니 그런 걸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레지스탕스가 되든,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되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단지 부모를 벗어나 '살아갈 방법'이 필요했을 뿐이다. 만약 마을 선생님이 루시앙의 부탁을 들어줬다면, 그는 아마 형처럼 독일 경찰에 맞서는 멋진 레지스탕스가 됐을 것이다. 당장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풍족한 하루가 국가나 민족보다도 소중하다. 당연하다. 루시앙에게 찾아온 그 즉흥적인 순간, 그의 선택은 당연했다. 그저 배가 부르고, 잘 곳이 있었고, 폼이 났을 뿐... 당시의 상황을 보면 루시앙의 선택이 얼마나 '즉흥적'이었는지 이해가 간다. 영화의 배경은 1944년 봄을 맞은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괴뢰정부를 세우고 5년이 지난 후였다. 1944년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동맹국에 대한 연합국의 반격이 본격화되면서 독일은 점차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봄이 지나고 6월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8월 파리 해방으로 프랑스는 다시 온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루시앙이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면 그 봄날 스스로를 사지로 몰고갈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되고, 그 달콤함에 중독될 때까지 그는 '의지'가 없는 인물이었다. 단지'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최신식 양복을 빼 입고, 총을 차고, 사람들을 압도하는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루시앙에게 '의지'가 생긴 것은 알베르와 그의 딸 '프랑스'를 만난 이후부터이다. 숨어지내는 유태인 알베르 가족을 만나면서 그는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긴 것이다. 루시앙은 프랑스에 대한 애정이 커지고, 그들을 천천히 '가족'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아주 서툰 방법으로... 하지만 알베르와 프랑스는 그런 루시앙이 편하지 않다. 그에게 도움을 받고 있지만, 언제라도 자신들에게 총을 들이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아다. 생존을 위해 적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 알베르의 가족에게 루시앙은 자신의 '힘'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있기 위해서라도 그는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힘이 필요했다. 그가 힘을 가져야 할 '이유'와 '의지'가 생긴 것이다. 이 때부터 동료가 살해되고, 레지스탕스의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불안한 생활을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자신을 찾아온 알베르가 독일군에게 끌려갔을 때 그는 프랑스인으로 독일 경찰 노릇을 하고 있는 자신의 무력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이 프랑스와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고 떠난다. 아주 서툰 방법으로...

루시앙의 잠시 동안 화려한 생활도 봄과 함께 지나갔다.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전시 상황은 급변했다. 독일군이 수세로 몰리면서 그들은 퇴각을 준비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유태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진다.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독일군에게 미래의 적이기 때문이다. 알베로가 떠나고 남은 프랑스와 벨라도 예외는 아니다. 루시앙은 독일군 병사와 함께 그녀들을 데리러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루시앙은 다시 한 번 그녀들을 지키기 위한 위험한 선택을 한다. 프랑스, 벨라와 함께 산 속으로 몸을 피한 루시앙은 잠깐 동안이지만 그들과 평화로운 생활을 즐긴다. 프랑스와 사랑을 나누고, 그녀를 위해 토끼를 잡고, 집이 따뜻하도록 불을 지핀다. 하지만 불안한 평화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 불안은 어디에서 올지 모른다. 옆에 있는 프랑스로부터 올 수도 있고, 레지스탕스로부터 올 수도 있다. 아니면 퇴각하고 있는 독일군으로부터 올 수도 있다. 우리는 루시앙의 비극적 결말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 루시앙은 너무도 한가롭게 풀밭에 누워 있다. 그가 체포되고 처형이 됐다는 자막이 올라간다. 루시앙의 인생의 비극적 결말과 관계 없이 우리가 보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그가 시대에 휘말리기 전에 누렸던 '일상의 평화'였다.

사진의 인물이 정확하지 않지만 "당신은 그보다 프랑스인답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그런 사진에 루시앙은 총을 겨누고 있다. '개인'으로서 루시앙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자, 영화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출발한다. 루이 말은 불운한 시대를 살았던 한 개인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그의 인생이 실화인지 아닌지 정확히 확인은 되지 않지만 라콤 루시앙의 삶은 분명 당시의 분위기로 본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영화적 인물로 표현된 라콤 루시앙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감독은 그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루이 말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서 줄기차게 보편적으로 믿어지는 도덕과 윤리에 대해 거침 없는 메스를 들이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늘 '파격', '도발'과 같은 수식어를 동반했다. 우리가 1974년 작 <라콤 루시앙>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국가(혹은 민족)와 개인의 관계 관한 것일 수 있다. 프랑스는 전후처리를 가장 깔끔하게 했던 나라 중에 하나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친일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때마다 모범 사례로 꼽는 것이 프랑스이다. 그 만큼 프랑스는 괴뢰정부 5년 동안 독일 나치를 위해 복무한 이들에 대한 처벌을 명확히 했다. 그렇다면 그 처벌의 기준은 무엇일까? 단연코 그것은 개인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논리에 가깝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영화의 마지막 라콤 루시앙이 사형을 당했다는 사실의 근거도 역시 라콤이 개인의 안위를 위해 '반국가적',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국가'와 '민족'과 같은 거시적인 잣대가 개인의 행동을 판단하는 윤리적, 도덕적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이렇게 물어본다면 분명 문제는 달라진다. 질문의 답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부분이 될 수는 있어도 전체가 될 수 없다. 정치적 계산을 모르던 라콤에게는 더더욱이나 그렇다. 탈출에 성공한 뒤 라콤과 프랑스가 누리는 일상적인 행복처럼 라콤이 꿈꾸던 바도 그런 평범한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운한 시대'는 라콤을 그냥 두지 않았다. 분명 라콤 루시앙은 순박한 시골 청년이었고 정치적 의식도 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우연하지 않은 순간에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됐다. 라콤의 비극적 결말을 보자면 분명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즉흥적으로 라콤에게 찾아온 1944년 봄의 어느 날은 분명 그에게 너무 달콤한 기회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18살의 뜨거운 첫사랑을 하게 됐다. 그 생활이 아니었으면 만날 수 없었던 여인이다. 그녀는 또 그의 선택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경찰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이 옳을까? 라콤의 인생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행복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막'처럼 처벌을 받았어야 하는 것일까? 분명 시대가 개인을 속박하는 것은 비극이다. 시대 안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답안의 수는 줄어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라콤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시대'를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자기 앞에 놓인 시대를 살아간다. 그리고 그 시대와 함께 자신의 '선택' 역시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들이다. 모든 걸 시대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루이 말은 분명 불운한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순박한 청년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평화롭게 살았을 한 청년... 그렇다고 루시앙을 동정하거나 감싸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정말이지 시종일관 도저히 감정이 읽히지 않는 루시앙의 표정은 그에 대한 감정이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를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감독은 이런 라콤 루시앙의 캐릭터를 통해 상당히 공고한 이분법적인 국가와 개인의 틀에 대한 파괴를 시도했는지도 모르겠다. 영웅이 아니면 반역자가 되는 경계에 대한 파괴 말이다.

난 기본적으로 우리 역시 친일의 문제가 빨리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 이유는 앞에서 밝힌 반민족적이고 반국가적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힘든 상황을 함께 살아가고 있었던 다수의 사람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 차원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도 영웅과 반영웅의 굉장히 이분법적인 틀에 갖혀서 문제를 봤던 것 같다. 오히려 이런 답답한 관점이 과거사 문제의 해결을 더욱 요원하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씨네큐브에서 열리고 있는 루이 말 특별전의 두 번째 상영작 <라콤 루시앙 Lacombe Lucien, 1974>을 보고 왔다. <마음의 속삭임>이 1971년에 만들어졌으니, 꼭 3년이 걸려 루이 말이 선보인 그의 9번째 영화다. 비슷하게 성장영화로 읽히지만 루시앙은 <마음의 속삭임>의 로랑과 상당히 다른 캐릭터를 구현한다. 시대적 배경이 다를 뿐 아니라 가정 환경 역시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루시앙과 로랑은 닮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라콤 루시앙>의 매력적인 또 하나의 캐릭터는 루시앙이 사랑하는 여인 프랑스다.(이름이 '프랑스'인 것이 아이러니하다.) 31살의 오로르 클레망(unbelievable!!!)이 연기하는 프랑스는 자신을 살려준 루시앙과 살고 있지만 그에 대한 '원한'이 남아 있는 캐릭터이다. 그녀는 '적과 동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극적으로 보여준다. 툭히 영화의 마지막 독일군을 피해 달아난 산 속에서 루시앙에게 기대면서도 그에게 '돌'을 내리치려는 장면은 프랑스의 이중적인 고민을 임팩트있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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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6 01:11

<북극의 연인들> 우연과 운명 그리고 유한과 영원


<북극의 연인들> 우연과 운명 그리고 유한과 영원


Spain, France; 1998; 108min; 35mm; Color
Directing: Julio Medem
Casting: Najwa Nimri, Fele Martinez, Maru Valdivielso, Nacho Novo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눈의 여왕>이라는 작품이 있다. 국내에서는 <인어공주>, <미운오리새끼> 등에 비하면 그렇게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2006년 현빈과 성유리가 주연한 동명의 KBS 드라마에서 주된 소재로 사용되면서 유명세를 탔던 기억이 있다.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장미꽃을 유달리 좋아하는 두 어린 아이 - 게르다와 카이는 둘도 없는 친구사이이다. 평소처럼 장미꽃을 가지고 놀던 어느 날, 카이의 눈에 유리조각이 밖히는데 그 유리조각은 다름 아닌 악마가 모든 것을 추하게 보이도록 만든 거울이 깨지면서 생긴 파편이었다.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카이는 눈의 여왕의 마법에 걸려 그녀를 따라 나서고, 혼자 남은 게르다가 카이를 찾아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온갖 역경을 딛고,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게르다는 결국 눈의 여왕이 사는 성에 도착하지만 눈과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린 카이는 게르다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게르다의 눈물이 얼어버린 카이의 눈과 마음을 녹이고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참, 집으로 돌아왔을 때 게르다와 카이는 다 자란 숙녀와 청년이 되어 있다. 언뜻 보면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동화일수도 있지만,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사랑과 우정, 상처, 희생 등에 대한 풍부한 은유와 상징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북극의 연인들>에 대한 리뷰를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으로 시작한 이유는 단 하나. '라플란드' 때문이다!
게르다가 카이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의 여왕이 살고 있는 '얼음성'이다. 그녀의 성은 다름 아닌 '라플란드'... <북극의 연인들>에서 오토와 아나가 다시 재회하게 되는 곳 역시 '라플란드'이다. 실제로 유럽의 최북단 지역이면서, 북극권이 시작되는 곳... 우연처럼 네 명의 이야기는 이 얼음과 백야의 땅을 향하고 있다. 사실 훌리오 메뎀의 <북극의 연인들>과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은 그저 공간적 배경이 같을 뿐 큰 연결고리가 없을 수도 있다. 카이와 게르다는 오토와 아나의 이름처럼 회문(palindrome)의 이름도 아니고, 복잡하게 얽힌 가정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라플란드'가 은유하는 바도 그다지 비슷하게 형상화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북극의 연인'에게서 자꾸 카이와 게르다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오토와 아나가 라플란드로 향하는 '길(누군가를 찾아 떠나는 길)'이 닮았기 때문이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며 얻게 되는 때로는 격하고 때로는 소소한 감정과 경험들이 네 명이 걷게 되는 길 위에 있는 것이다. 물론 두 이야기의 결말은 너무도 다르지만...

이렇게 본다면 <북극의 연인들>은 사랑을 배우고, 이별을 경험하는 '멜로드라마'이자 '성장영화'의 틀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북극의 연인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처음은 오토와 아나가 처음 만나게 되는 어린 시절, 다음은 연인과 남매 사이에서 갈등을 경험하는 사춘기, 그리고 마지막은 어른이 된 이후의 그들이 이별과 재회를 하는 시기가 된다. 즉, 오토와 아나가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면서, 그들이 사랑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과 겪는 경험들에 카메라를 집중하고 있다. '라플란드'는 그 여정의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는 지점이 된다. 동시에 오토와 아나의 반복되고 순환되는 '우연'을 완성시켜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과연 라플란드에 이르는 길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느낄 수 있었을까? 쉽게 풀어 말하자면 오토와 아나, 카이와 게르다의 경험은 특별하지만, 그 감정은 '보편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성장하면서 한 번 쯤은 고민해봤을 사랑에 관한 문제들... 아니면 지금까지도 우리가 답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 숙제들... 오토와 아나가 보여주는 그 감정들은 바로 영원과 우연 그리고 영원과 유한의 문제들이다. 내 사랑이 운명인지, 그리고 영원할 것인지...

<운명과 우연>

<북극의 연인들>의 처음과 마지막은 같은 장면이다. 한 여인이 자동차에 부딪히고 지켜보던 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달려간다. 관객이 여인의 죽음을 예상할 때, 여인은 계단을 뛰어 올라 그녀가 조금 전의 그 남자를 만난다. 어느 것이 실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여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여인이 그 남자를 보고 있다는 것은 어느 경우가 됐든 '진실'이 된다. 그리고 플래시백... 그 여인과 남자의 과거가 시작된다. 시작부터 관객은 끝을 알고 있는 이야기를 보고, 듣게 된다. 하지만 감독은 관객이 이미 알고 있는 결말로 향하는 길을 숱한 '우연'들로 채우고 있다. 어린 오토는 축구공을 주우려 가다 어린 아나를 만나고, 아버지를 잃은 아나는 오토를 본 순간 그를 좋아하게 된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우연히 같은 차에 탄 오토의 아빠(알베로)와 아나의 엄마(올가)는 사랑을 하게 되고, 그들은 연인이 아닌 남매가 된다.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며 아나와 오토는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그들의 우연은 좀처럼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우연은 다른 우연들보다 슬프게 찾아왔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보는 그들의 운명적인 사랑은 우연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정해진 결말(운명)을 이루는 우연들... 우연과 운명은 어쩌면 한 얼굴의 다른 표정일지도 모른다. 2차 대전이 한창일 무렵 스페인의 한 마을, 오토의 할아버지와 독일 공군의 만남에서 출발하는 오토와 아나의 만남은 우연일수도, 운명일수도 있다. <오토의 아버지가 독일인과 결혼을 하고 / 오토가 독일식의 이름을 갖게 된 것도 / 아나의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도 / 오토의 부모가 이혼을 한 것도 / 혼자가 된 알베로와 올가가 비 오는 날 만난 것도 / 올가가 다른 알베로와 사랑에 빠진 것도 / 그 알베로의 아버지가 '오토'인 것>도 모두 예정에 없던 우연이다. 하지만 오토와 아나의 사랑은 이 모든 우연을 운명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기억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기 때문이다. 현재를 가능하게 한 과거의 어느 순간이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 의미 없이 흘려보냈을 다른 기억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나는 그들의 인연이 시작된 할아버지가 있는 라플란드에서 오토를 기다린다. '추운 곳에서는 모든 것이 빨리 일어나기 때문이다.' 오토는 그녀를 향하기 위해 라플란드로 향한다. 그들의 우연이 완성될 듯 보인다.

하지만 옛날 오토처럼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그들의 만남은 어긋난다. 그들이 '만남'을 그토록 기다렸을 때, 그 순간은 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오토와 아나의 경우처럼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에 우연한 만남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찾아온다. 우리가 그들의 만남을 우연이면서도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다.

<유한과 영원>

알베로는 8살 난 아들 오토에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계절도 영원하지 않고 연인의 사랑도 변하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를 떠난다. 하지만 오토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모두 엄마를 떠나는 아빠가 남긴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세상 무엇인가 영원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엄마에 대한 사랑만큼은 변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다. 하지만 오토는 아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면서,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 엄마를 떠난다. 그리고 엄마의 싸늘한 주검을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 오토는 엄마에 대한 사랑이 변했듯 아나에 대한 사랑 역시 언젠가는 변할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아나의 곁을 도망치듯 떠난다. 아나 역시 떠난 오토를 그리워하지만 곧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한다. 영원할 것 같은 그들의 열병같은 위험한 사랑도 아빠의 말처럼 '시간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나의 사랑도 짧게 끝이 났고, 올가와 알베로의 사랑도 차갑게 식었다. 인간이 유한하듯  영원한 것은 없는 듯 보인다.


오토는 라플란드와 스페인을 오가며 우편 배달을 한다. 그리고 아나는 오토를 만나기 위해 라플란드로 떠난다. '라플란드' - 얼음과 백야의 땅이다. 낮과 밤이 바뀌지 않고 해가 떠있는 곳이자, 모든 것이 눈으로 뒤덮힌 변하지 않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만큼은 그들의 사랑도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속 오토와 아나에게 변하지 않는 사랑의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오토가 아나를 찾으러 가지만, 비행기가 추락하고 아나가 반대로 오토를 찾아 나선다. 살아남은 오토가 다시 아나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몇 걸음을 앞두고 그들의 비극은 시작됐다. 영화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결말이 실제인지 확신할 수 없다.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는 아나가 실제인지, 오토를 만나기 위해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아나가 실제인지 분명하지 않다. 처음에 말했듯이 분명한 것은 아나의 눈에 눈물이 차고, 그 안에 오토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순간 아나의 삶과 죽음은 영원과 유한으로 자연스럽게 치환되지도 않고 대비되지도 않는다.
영화는 아나와 오토의 시선이 반복 교차되면서 전개된다. 그리고 마지막 '아나의 눈에 비친 오토'라는 제목처럼 둘의 시선이 처음으로 마주친다.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다. 끝일 수도 있지만 이제서야 그들의 사랑은 시작일지 모른다.

<눈의 여왕>에서 게르다가 눈물로 카이의 마음을 녹였을 때, 얼음조각이 떨어져 나오면서 얼음글자가 완성된다. 눈의 여왕이 카이를 만나기 전에 게르다에게 던졌던 문제의 답은 '영원'이었다. 오토와 아나, 게르다와 카이처럼 '영원'이 모두가 얻고자 하는 바라면 그것은 우리의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하지만 오토처럼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지금의 사랑에서 도망가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그저 현재의 사랑에 충실할 수 있다면 만족해야겠지... 그것이 운명이든 우연이든, 영원하든 변하든...


<북극의 연인들>은 1998년 영화다. 훌리오 메뎀의 다른 영화들처럼 굉장히 이미지가 강하고 회화적인 영상이 영화 전체을 이루고 있다. 10년이 넘은 영화지만 전혀 옛날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여기에 감독의 독특한 스토리 구성이 돋보인다. 시간의 순서대로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지만, 영화의 시작과 동일하게 구성하고, 그 안의 이야기를 오토와 아나의 시선으로 교차시키고 있다. 하나의 이야기가 그의 시선과 그녀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재구성되는 것이다. <렛 미 인>과 더불어 이번 겨울을 허전하지 않게 해줄 수 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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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7 01:17

<마음의 속삭임> 남자의 탄생


<마음의 속삭임 MurMur of the heart> 남자의 탄생

France, Italy, German; 1971: 117mln; 35mm
Directing: Louis Malle
Casting: Lea Massari, Benoit Ferreux
 
루이 말 감독의 <마음의 속삭임>을 봤다. 다리에 힘이 빠져 한참을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상영관을 빠져 나왔다. 솔직히 그의 작품은 내가 '아이'에서 '남자'로 넘어가던 시절, 야한 영화인 줄 알고 친구가 아빠 이름 대고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데미지>를 본 것이 처음이자 전부였다. 그 때는 내용이고, 파격이고, 불륜이고 뭐고 그저 친구들과 침을 꼴깍이며 끈적한 베드신에만 오감을 집중시키고 있을 때였다. 나중에 영화에 관심을 갖고 빠져들때 쯤, 이 영화가 '루이 말'이라는 프랑스 출신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왠지 거장의 작품을 눈요기로 즐겼다는 민망함이 생겼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동안 루이 말의 영화보다는 동시대의 프랑스 거장들이었던 알렝 레네 혹은 누벨 바그 감독들의 영화들에 관심을 뒀다. 사춘기 때의 원초적인 감정들을 애써 부인하려듯이 말이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이제 영화를 좀 봤으니까 뭔가 안답시고 그의 영화를 다시 보면서 애써 고상한 척 하고 있을 모습이 싫었다.

그러고보니 나중에라도 다시 그의 영화를 제대로 볼 기회조차 없었다. 1992년에 만든 <데미지>가 국내에 소개된 마지막 작품이니, 이후에 그의 영화가 스크린에 걸린 적이 있었나 싶다. 때문에 루이 말이 <데미지>를 통해 파격적인, 도발적인 감독이라는 대중적인 수식어를 얻었지만, 실상 그의 영화를 보면서 맞장구를 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늦었지만 좋은 기회가 생겼다. 사춘기 때 비디오 리모콘 빨리감기와 되감기를 누르며 만났던 루이 말을 정식으로 극장에서 제대로 만나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지금 광화문 씨네큐브와 이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루이 말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특별전이기는 하지만 국내 수입이 되지 않았던 예전 세 작품 <마음의 속삭임>, <라콤 루시앙>, <굿바이 칠드런>을 묶어 차례로 개봉하는 조촐하지만 의미 있는 상영회다. 각각 1971년, 1974년, 1987년에 만들어진 영화인 만큼 그의 영화 세계를 시간순으로 엮어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사족이 길었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스크린에 'FIN'이 뜨고 상영관을 빠져 나오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지경이 됐다. 오이디푸스의 금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뛰어넘는 대범함에 뒤통수와 앞통수를 한 번에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이다. 더구나 1971년에 만든 영화라니... 왠지 <마음의 속삭임>은 아기자기한 제목과 달리 루이 말과의 강한 '첫 만남'으로 기억될 영화가 될 것 같다.


<마음의 속삭임>은 1954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을 무렵 디종에 사는 15살 소년 로랑의 위험한 성장이야기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구김살 없이 자란 막내 아들... 학교에서 1등을 도맡아 할 정도의 우등생이고, 프로스트와 카뮈를 논할 정도로 인문학과 철학에도 관심이 깊다. 반전 모금운동을 할 만큼 사회 문제에 참여의식이 강하면서도, 재즈의 맛을 즐길 줄 아는 보기드문 소년이다. 여기까지가 주위에서 바라보는 로랑의 흐뭇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로랑 역시 사춘기의 문턱에 있다. 돈이 있으면서도 친구와 레코드 점에서 슬쩍하는 스릴을 즐기고, 어른들이 귀엽다고 엉덩이를 두들기는 것이 기분 나쁜 나이가 됐다. 방문을 잠근 채 19금 소설을 읽으며 하는 마스터베이션을 알고, 담배의 맛과 여자의 몸이 궁금한 호기심 가득한 나이... 몸이 변하고 세계관을 갖추는 것과 함께 사춘기 아이들이 풀어야 하는 숙제가 또 하나 있다. '가족'과의 관계... 가족에서 '나'의 위치와 역할을 찾고, 가족과 나의 거리를 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 숙제를 푸는데 모두의 상황은 다르다. 제각기 다른 상황에 따라 가족과 나의 관계의 모습 또한 천차만별 달라진다. 로랑의 상황은 어떠한가? 로랑의 가족은 아빠, 엄마, 두 명의 형 그리고 그를 어려서부터 돌본 유모가 전부이다. 잠깐 민망하지만 로랑을 이해하기 위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영화를 보면서 로랑이 참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단순히 사춘기를 겪는 모습이 아니라, 그가 가족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춘기를 지나며 내가 가족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갔던 모습과 로랑의 경험에서 공통점이 많이 묻어난다. 물론 난 15살에 인문학, 철학, 재즈에 문외한이었고 반전운동이 뭔지도 몰랐지만 로랑처럼 아빠와의 관계가 어려웠고, 자기들끼리 짝짜꿍이 잘 맞는 두 형과 그다지 어울리지 못했다. 때문에 난 엄마와 유독 친했다.(원래 아들 많은 집은 꼭 하나가 딸 노릇을 한다.) 사춘기가 훨씬 지나서도 엄마와의 스킨십과 장난이 불편하지 않았고, 엄마를 생각하면 왠지 뭉클해지는 애틋함이 있었다. 내 위치는 아빠의 다른 편에서 엄마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오히려 그 때는 아빠보다 내가 엄마와 더 가깝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엄마가 엄마였기에 가능했지, 엄마가 여자였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로랑은 나의 경험과 갈라진다. 그가 겪는 오이디푸스적인 고민들은 분명 그가 엄마를 '여자'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결정적이면서 직접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엄마의 '불륜'이다. 사실 로랑과 엄마의 가까운 관계는 어찌 보면 아빠와의 불편한 관계에 대한 반작용일 가능성이 크다. 형제들과 엄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가족에 대한 폭력적 전권을 휘두르는 아빠를 거부하고 로랑은 상대적으로 엄마에게 연민과 동정이 섞인 안정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아버지에게 절대적으로 소유당한 엄마에 대한 연민... 하지만 엄마의 불륜은 이런 아빠의 '절대성'을 '상대화'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아빠와 엄마를 분리시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마의 불륜을 알게 된 순간 로랑은 엄마를 '아빠에게 구속당한 엄마'가 아닌 '사랑을 할 수 있는 여자'로 이해하게 된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엄마와 로랑이 소통이 가능한 것 역시 모자 관계 이상의 관계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아빠는 이제 엄마를 절대적으로 소유한 사람이 아닌 엄마가 선택할 수 있는 대상 중의 하나이면서, 자연스럽게 자신과 대등한 경쟁자로서 위치지어진 것이다. 이 때부터 로랑은 엄마를 '여자'로 인식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엄마에 대한 감정들을 확인한다. 동시에 가족 내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다르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결국 로랑에게 있어 자신을 남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순간은 곧 엄마를 '여자'로 보는 순간이 된다. 그리고 엄마를 통해 세상에 나왔듯, 로랑은 다시 한 번 엄마를 통해 '남자'로 탄생하게 된다. 사실 로랑은 클라라와 관계를 맺기 이전 '불완전한 첫경험'으로 인해 남자로의 완전한 변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로랑은 형들의 손에 이끌려 첫경험을 하게 되지만, 형들의 장난 때문에 불완전하게 끝을 맺었다. 남자로서 로랑의 첫경험은 형들로 인해 '불완전하고 수치스러운 기억'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때부터 로랑이 '마음이 속삭이는 병'을 앓게 되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다. 로랑은 끊임없이 자신의 불완전한 첫경험을 극복 혹은 완성하려 한다. 그것이 자신이 아이에서 완전한 남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요양원에서 다프네와 엘렌에게 집요하게 접근하는 것도 이런 분명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 혁명기념일 저녁 엄마와의 '혁명과도 같은 일'은 로랑에게 있어 남자로 완전히 탄생되는 '혁명의 순간'이다. 자신 역시 엄마와 사랑을 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엄마 클라라는 로랑에게 "둘만 비밀을 지킨다면 서로에게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로랑은 엄마의 방을 빠져나와 개선장군처럼 엘렌의 방문을 두드린다. 완전한 남자로 태어난 로랑은 이전처럼 뭔가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를 거부하는 엘렌에게 태연한듯 다프네의 방이 어딘지를 물어보고 떠난다. 다프네와 하룻밤을 보내고, 여자친구의 방을 야밤에 급습한 남자들이 그러하듯, 로랑은 부모님 몰래 신발과 옷가지를 대충 챙겨 허겁지겁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침 일찍 요양소를 찾은 아빠와 두 형이 테이블에서 아침을 먹으며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않고 방에 들어온 로랑과 대면한다. 어젯밤 로랑과의 일을 기억하는 엄마도 곧 그 공간에 참여하게 된다. 다섯 명의 가족이 한 공간에 모였다. 로랑의 행색에 다들 겸연쩍어 하지만, 곧 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폭소를 터뜨린다. 막내아들, 막내동생의 '공식적'인 남자의 탄생을 축하하듯 말이다. 그렇게 영화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이다. 

루이 말은 이 마지막 한 장면을 통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로랑과 클라라는 먼 옛날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가 그랬듯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여 눈을 뽑거나, 목숨을 버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족은 성인이 된 로랑과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룰 듯한 기대마저 갖게 한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기념일 밤 있었던 일로 인한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고, 가족과 함께 지금까지 그랬듯 보기 좋은 '모자'의 모습을 "지켜나갈" 것이다. 그리고 엄마를 통해 남자로 태어난 로랑은 가족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만들 것이고, 다프네와 그랬듯 또 다른 여자와 평범한 사랑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감독은 자신과 사람들을 그토록 짓누르던 오래된 컴플렉스에 대해 이런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남자가 탄생하는 순간이라고..."

처음에 살짝 언급했지만 내가 루이 말의 이 영화 <마음의 속삭임>을 보고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던 것은 사실 로랑과 클라라의 모자 간의 충격적인 사랑이 아니라, 마지막 가족이 모이는 마지막 시퀀스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로랑이 겪는 위험한 사춘기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상황을 끌어가는 그의 대범함 때문이었다.(여기서 대범함이라는 단어 밖에 생각나지 않는 나의 어휘력이 한스럽다.) 솔직히 <마음의 속삭임>에 완전히 공감했다거나 전체를 이해했다는 말은 내게 허세에 가깝다. 하지만 영화가 내가 지금까지 '참'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에 파동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그 파동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모르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 모습만 본다면 누가 이 가족의 비밀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마음의 속삭임>은 루이 말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가장 많이 묻어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감독 스스로도 생전에 이 작품을 자신의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는 인터뷰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기사를 보고 갑자기 "감독 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감독은 로랑을 통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외에 많은 이야기들을 소품처럼 던지고 있다. 형들의 그림 장난을 통해 프랑스 부르주아 가정들의 실체 없는 허영을 비꼬기도 하고, 영화 속 표현대로 식민지를 정리하는 때에 인도차이나에서 식민지 전쟁을 벌이는 프랑스 정부를 비난하기도 한다. 또한 엄격한 듯 하지만 일탈을 일삼는 학교 교육을 조롱하고, 어른들의 이중적 가치관을 비웃기도 한다. 당시 사회적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어떻게 세계관을 완성하는 과정과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었는지 로랑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유머와 위트가 담긴 이 이야기들은 전체적인 극의 완급을 효율적으로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소소한 사건들과 함께 영화 전편에 흐르는 재즈를 듣는 것도 <마음의 속삭임>을 즐기는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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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1 11:15

<사과> 당신은 어떻게 사랑하고 이별하나요?


<사과> 당신은 어떻게 사랑하고 이별하나요?


Korea; 2005; 118min; 35mm; Color
Directing: 강이관
Casting: 문소리, 김태우, 이선균, 최형인, 강래연

 
<사랑과 전쟁>이 주는 텁텁한 교훈이기는 하지만 사랑은 사람을 취하게 만들고 결혼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고 언젠가 결혼이라는 목표지점에 다다른다. 그렇지 못하면 인간으로서 할 도리를 못하고 있는 듯 불안해 하는 이들도 있다. 한 스펙트럼에 나란히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양 극단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사랑과 결혼.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숱한 시인, 철학가, 예술가 등등이 나름 사랑과 결혼을 정의했지만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굳이 책 찾아보지 않아도 몸이 이미 알고 있고, 경험 못 해본 이라도 어깨너머로 들은 얘기, 본 얘기 종합하면 비슷하게 때려맞출 수 있다. 언뜻보면 각양각색 동방신기 노랫말처럼 사랑은 '뭐다뭐다 이미 수식어 레드오션'이지만 그 감정이란게 자신에게만 특별할 뿐이지 다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내 사랑이 영화같고, 내 결혼이 사연 많아보여도 툭 까놓고 보면 '방법론'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찌보면 그 방법론의 차이가 늘 사랑과 결혼을 다르게 포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전과는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나만의 것으로 말이다.

그렇담 왜 사람들은 나에게만 특별할 뿐 비등비등한 사랑과 결혼 이야기에 늘 오감을 집중하게 되는 걸까? TV를 켜도, 음악을 들어도, 그림을 봐도, 책을 열어도, 친구와 얘기를 해도 사랑과 결혼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 전혀 어색한 일은 아니다. 캐릭터도 비슷하고, 스토리도 차이 없고, 결말까지 뻔히 들여다 보이지만 두 가지 이야기는 '시장'에서 늘 수요와 공급이 넘쳐난다. 누군가는 현실과 다른 환타지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하고 결혼하는지"를 엿보고 싶은 관음증적 호기심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도저도 아니면 많고 많은 시간 하릴 없는 나같은 솔로들이 외로운 허벅지 찔러감서 설렜다가, 삐쳤다가, 꼬였다가, 다시 열렬히 사랑하는 그 소소한 감정들을 잊지 않기 위한 안쓰러운 노력일지도 모른다. 암튼 뭐가 됐든 정답은 정해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늘 세상은 사랑과 결혼 '이야기들'로 풍만하며, 언제나 잠시만 눈과 귀를 집중하면 어렵지 않게 이야기 몇 개 낚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또 하나의 사랑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낚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영화는 환타지도 아니고, 관음증적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솔로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저렴한 감정들에도 참 인색하다. 오히려 궁색하고 옹색하고 남루하고 측은한 마음까지 든다. 그러면서도 화장, 조명 다 없애고 현실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스크린에 나선 이 친구들을 한 번 안아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포장 다 벗겨내고 알몸으로 나온 사랑과 결혼이란 이 친구를... 강이관 감독의 <사과>가 얼마 전 개봉했다. 개봉관 코 앞까지 갔다가 거절당하기를 수십회, 불황 제대로 타는 충무로 영화시장에 맞춰 어느 언론사 헤드라인처럼 '창고영화 대방출' 시즌에 드디어 개봉관을 잡았다. 2005년에 만들어졌으니 꼭 3년이 흘렀다. 그 동안 영화제에 몇 번 소개되고, 상도 받아오면서 영화 자체에 대한 호기심은 적지 않았다. 드디어 뚜껑이 열렸다. 너무도 젊어 심지어 앳돼 보이기까지 하는 문소리, 김태우, 이선균을 스크린에서 보자마자 실소가 터지지만 결과적으로 <사과>는 확실히 다른 창고 영화들과 싸잡아 매대애서 팔리기에는 뭔가 자존감 상하는 구석이 있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사과>는 평범한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사랑과 결혼이야기이다. 지리멸렬하고 궁색하고 예뻐보일 것 없는 옆에서 보고 있으면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그런 사랑도 아니다. 그저 주변에 널린 그런 사랑이고 결혼이다. 사랑하는 것도 이별하는 것도 결혼하는 것도 심지어 사는 것도 우리 주변 누군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마저도 들지 않는다. 커피숍에 앉아 친구의 입을 통해 친구의 친구의 직장동료의 친척의 얘기를 듣고 있는 기분 정도.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엔딩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먹먹하고 꽉차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공유하는 진정성이 그 속에 담겨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문소리, 김태우, 이선균이 연기하는 현정, 상훈, 민석은 그래서 안쓰러우면서도 애틋하고 아프다. 그들이 마주하는 사랑과 결혼은 우리의 것들과 다르지 않다. 각자 우리 가까운 주변의 누군가를 대유하고 있는 이들,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같지만 그들의 방법은 모두 제각각이다. 우리도 그렇듯이.

현정(문소리) -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극을 이끌고 있는 현정, 평범한 여인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어색한 애교를 부리고, 7년 사귀고 무턱대고 헤어지자는 남자에게 적당히 매달릴 줄 아는 그런 여인. 그리고 또 찾아온 사랑 앞에서 잠시 주저하다 또 다시 자신을 던지는 사랑을 믿는 여자다. 현정의 사랑은 늘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결혼은 사랑에서 출발한 선 어딘가에 있다. 자신과는 너무도 다르게 살아온 상훈과의 결혼생활이 시작되고 현정이 상훈을 따라 구미로 내려가는 이유 역시 다르지 않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임신을 전하기 위해 구미에 내려와 그녀가 전한 말이다. 꽤 번듯한 직장에서 괜찮은 자리와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된 그녀에게 "함께 있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도 결혼도 일방적이었는지 모른다. 너무도 예의 없이 자신을 차버린 전 남자친구와 달리 '배려'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상훈을 현정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미운 마음이 생긴다. 남자들은 그녀에게 말할지도 모른다. "날 좀 이해해주면 안 되니!." 남자들이 늘 주머닛속에 넣어 다니는 말. 하지만 현정은 그런 사랑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상훈(김태우) - 사랑은 지켜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정을 지극히 사랑하는 상훈.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자들을 많이 닮은 인물이다. 그래서 가장 마음이 쓰인다. 마음에 둔 여자에게 수줍음, 쪽팔림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접근해 결국엔 사랑과 결혼에 골인하는 남자. 응당 남자라면 해야 하는 행동들이라고 통용되는 것들을 그는 교과서처럼 해냈다. 사랑하는 현정과 가정을 이루고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됐다. 그리고 동시에 가정과 아내를 지키는 것이 그의 사랑이 부여한 책임이자 의무가 됐다. 자신보다 벌이가 좋은 아내와 처갓집 등쌀을 싫은 내색 없이 받아주며 상훈은 자신보다 가장으로서의 삶에 충실한다. 하지만 그의 사랑 방법은 결국 그에게 자충수가 됐다. 현정에게 거짓말을 하고 구미로 내려가며 그는 그것이 멀리 보면 아내와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현정이 아이를 갖고 구미로 내려온 후 그의 초조함은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위기, 가족에게 닥친 위기 모두 가장으로서 그가 막아내야 할 것들이었고, 그의 우산 속에서 가정은 평화로울 수 있다고 상훈은 믿었다. 아내와 그의 십자가를 같이 나눌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애초 자리가 없었다. 결국 그의 사랑이 현정의 사랑을 차갑게 식혀 놓았다.  

민석(이선균) - 사랑은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7년을 만난 연인 현정을 보기좋게 차버리는,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한 번도 널 잊어 본 적이 없다."는 말과 함께 다시 현정 앞에 나타나는 민석. 그의 사랑은 현정과 상훈보다 훨씬 이기적이다. 현정과 상훈도 자신만의 사랑의 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둘은 기본적으로 사랑이 상대방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민석은 그렇지 않다. "너랑 있으면 내가 없어지는 것 같아." 헤어지는 이유를 알려달라는 현정에게 그가 던진 말이다. 20대 후반에 벌이 좋은 직장도 없이, 그럴 듯한 집안 배경 없이 불안하게 공부하는 민석이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너무도 배려와 예의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현정과 다시 만남을 시작할 때도 그랬다. 공부를 포기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민석은 그제서야 현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현정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서울로 올라온 현정도 민석을 다시 만나지만 그건 옛 사랑에 대한 추억이나 미련이기 보다 지금 사랑이 힘들고 고되기 때문이다. 헤어진 연인을 다시 떠올리는 모든 현재의 연인들이 그렇듯 말이다.  

 
제각각 사랑의 방식을 가진 현정, 상훈, 민석. 이들은 상대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상대의 사랑이 크지 않다고 의심할 수도 있다. 어찌보면 그것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인지도 모른다. 이제 세 명에게 남은 건 '이별'뿐이다. 사랑의 방식도, 성격도, 집안의 환경도 다른 이들이 만나 사랑을 했고, 결혼을 했다. 마지막 모습이 추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별을 앞에 두고 그간 그들이 했던 사랑을 존중하고, 마음에 감사할 필요가 있다. 민석처럼 애매모호한 말과 행동은 이별의 예의가 아니다. 모든 걸 상대의 탓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태도... 현정은 그런 민석의 태도 때문에 상훈에게 다른 방식으로 이별을 알렸을 것이다. "당신의 탓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탓"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현정이 상훈과 함께한 마지막은 그 간의 사랑에 대한 이별이자, 자신의 잘못에 대한 '사과'였다.


P. S. 리뷰를 다 쓰고 다시 읽어보니 마치 무슨 사랑학박사인양 적은 느낌이다. 아직 어린 나이 사랑을 해 본 경험도 적고, 사랑을 한 사람도 많지 않다. 그래서 현정, 상훈, 민석이 100% 이해되지도 않고, 100%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들의 사랑과 이별에 마음이 쓰일 뿐이다. 내 주변의 누군가의 이야기같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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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9 17:14

2008 AISFF BEST 10

2008 AISFF BEST 10

올해로 6회를 맞은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AISFF)가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열리고 있다. 많고 많은 영화제가 국내에 있지만 그래도 '경쟁' 영화제를 타이틀로 달고 있는 유일한 영화제이다. 그것도 단편영화제라는 타이틀을 달고 지금까지 왔으니 참 기특하고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양질의 단편 영화를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는 8개의 국제경쟁 섹션과, 감독열전, 나이트메어, 믹스 플래닛1, 2(프랑스 단편영화 특집)를 포함해 총 12개 섹션에서 영화들이 상영됐다. 69개국에서 1743편의 영화가 접수됐던 국제경쟁에서는 30개국 52편의 영화가 선정됐다. AISFF가 국제경쟁영화제인 만큼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바로 8개의 경쟁섹션. 이미 이름이 알려진 단편 감독들부터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신인감독들까지 전 세계 단편영화의 흐름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올해는 어떤 나라의 어떤 감독이 어떤 영화로 기쁘게 해줄지...

어김 없이 2008 AISFF에서도 '노동'을 하듯 영화를 봤다. 3일 동안 8개 경쟁 섹션의 영화들을 봤다. 몸도 지치고, 배도 고프고 "이러면서까지 영화를 봐야 하나." 싶은데 그래도 즐겁고 행복한 경험이다. 그 순간이 아니면 즐길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번 영화제에는 작년과 달리 종교, 정치, 전쟁과 같은 거시적인 문제들을 다룬 영화들이 많이 소개됐다. 그 만큼 세계 곳곳이 큰 틀에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52편의 경쟁 섹션 작품 중에 10개 부문에 걸쳐 수상이 이뤄진다고 한다. 작년에는 이창동 감독이 심사위원자을 맞았는데 올해는 일본의 오구리 코헤이 감독이 맞아 심사가 진행된다. 수상과는 별개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서 올해 AISFF 최고의 영화들을 뽑아봤다. 한국 단편 영화들이 다소 아쉬웠지만 다들 재기발랄하고 앞으로가 기대되는 감독들의 작품이었기에 다 소개하지 못함이 미안하다. (무순위 소개)




Northern Highway

Director:Ruben Rojo Aura
Mexico; 2008;10min; 35mm; color;fiction

미국으로 통하는 멕시코의 한 고속도로. 주변을 둘러봐도 메마르고 황량한 땅밖에 보이지 않는다. 시선조차도 갈증을 느끼게 만든다. 그 고속도로와 사막의 경계에 한 가족(아빠, 엄마, 아들, 갓난아이)이 있다. 도로 위를 지나는 차를 세워 물건을 판다. 그들이 파는 것은 독수리, 뱀, 뱀껍질. 도무지 팔릴 것 같지 않은 물건들이다. 메마른 땅처럼 그들 가족 역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조차도. 하지만 하루 장사를 허탕치고 짐을 부리던 중 그들앞에 검은 색 차 한대가 멈춰선다. 차가 떠나고 그들 손에는 생전 만져 보지 못했을 큰 돈이 들려 있다. 물론, 그들과 함께 있었던 무언가가 사라졌지만.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한 가정은 현재 멕시코의 현실을 환유하고 있다. 감독은 삶이 유일한 목적인 그들에게 윤리와 도덕이라는 문제가 과연 무엇인지, 가족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1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시선의 이동 없이 한 공간에서 이뤄지는 이야기를 함축적이면서도 긴장감 있게 전개시키면서, 관객들에게 마지막 한 순간 충격을 경험하게 한다. 메시지, 이야기의 구성방식과 더불어 시각과 청각 등 감각적 장치들의 활용 역시 독보인다. 시종일관 붉고 노란 사막의 배경은 인물들의 감정과 어울려 극의 분위기를 이끌고, 결코 끝나지 않을 법한 그들의 가난을 예고하는 듯 보인다. 결과적으로 멕시코에서 온 이 영화는 단편영화가 가지고 있는, 아니 가져야 할 미덕을 고루 갖추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왜냐고 묻는다면 Why we`re doing it

Direcor: Thierry Bouffard
Canada; 2007; 7min; Beta SP; color; fiction

설원에서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카메라는 다급하게 전개되는 전장에서 고립된 한 부대를 사실감 있게 비추고 있다. 그들은 추위에 떨고, 식량이 부족하고, 현지 사정을 모르는 본부와 공격 시기를 놓고 실강이를 한다. 과연 무슨 전쟁일까? 유심히 스크린을 지켜보고 있을 때 관객들을 향한 영화의 메가톤급 반격이 시작된다.
"영화 촬영을 비유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전쟁터이다."라는 브레송의 말 한 마디를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왜냐고 묻는다면>은 이번 AISFF 국제경쟁 상영작 중 가장 재기발랄한 작품이다. 무슨 전쟁인지, 왜 싸우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 없이 병사들은 설원에서 생사를 걸고 싸운다. 하지만 난무하는 총탄에 피를 흘리는 사람도 없고 적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곧 단지 영화가 좋다는 이유로 추위와 싸우고, 배고픔을 이기고, 제작자와 다투는 '영화인'들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냐고 묻는다면?"은 장편영화가 아닌 척박한 단편영화의 촬영장에서 그 현장을 사랑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영화인들의 자기애가 묻어나는 작품이다. 설원에서의 아름다운 장면 한 컷을 위해 고생을 감수하는 이들의 자기 연민. 모두들 힘내서 계속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길...




밀란 Milan

Director: Michaela Kezele
Germany/Serbia; 2007; 23min; Beta SP; color; fiction

1999년 나토의 공습이 이루어지던 유고슬로비아의 한 마을. 여느 가족처럼 티격태격하면서 그닥 사이가 좋아보이지는 않는 모습이지만 서로에 대한 애잔한 사랑이 묻어나는 한 가정이 있다.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주인공 밀란. 이들은 한가롭게 농장일과 집안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을 둘러싼 상황은 엄청난 공포와 참혹이 생산되는 전쟁이다. 그렇지 않다면 평생을 그렇게 오순도순, 티격태격 하며 사이좋게 지냈을 이 가족은 결국 의도하지 않게 전쟁의 한가운데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분명 여자감독일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나이가 어릴 것이라는 짐작은 하지 못했다. 분명 나이가 지긋하게 먹은 감독의 손때가 묻어났기 때문. 의외로 이 영화는 독일에서 1975년에 태어난 여성감독의 작품이었다. 그것도 배우출신으로 몇 편 찍어본 경험이 없는 감독이 이 정도의 영화를 만들었다는데 놀랐다. 영화는 유고슬로비아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전쟁'이 어떻게 한 나라, 한 사회를, 한 가족을, 그리고 한 개인을 철저하게 파괴시킬 수 있는지 극적인 이야기와 함께 보여주고 있다. 전쟁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것 뿐만 아니라 도덕과 윤리를 마비시키고 내면과 정신을 병들게 하는 치명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이(밀란)의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야기는 1999년 유고슬로비아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올드 랭 사인 Auld rang syne

Director: 소준문
Korea; 2007; 26min; HD; color; fiction

배식줄이 길게 늘어선 종로의 탑골공원. 오늘도 그 곳에서 하루를 보내기 위해 나온 노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그곳에 창식과 성태가 있다. 이들의 40년 만의 만남. 이들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젊은 시절 게이 커플이었던 창식과 성태. 둘은 모두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고 다시 만났다.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사랑을 만나 가슴이 떨린다. 그리고 옛추억과 함께 마지막이 될 하룻밤을 보낸다.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는 노인들의 사랑, 아니 정확히 섹스를 얘기했다. 타인에 눈에 이미 성이 제거된 사람들도 비춰지는 이들도 여전히 가슴이 뛰고 사랑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감정은 나이와 함께 비례해서 무뎌지지 않기 때문이다. 감독의 말처럼 사랑은 평등하다. 젊은 사람에게나, 나이를 든 사람에게나, 이성애자에게나, 동성애자에게나. 극 중에서 창식과 성태 역시 그렇다. 게이였던 그들도 사회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평범한 남자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자신을 끝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들이 노인이 되어 다시 만났을 때, 서로에 대한 원망과 한이 쌓여있지만 짧은 하룻밤은 그들이 서로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데 짧지 않다. 영화가 순간순간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지만 '사랑'의 다르지만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는 경험이다.




릴라의 책 Lila's book

Director: Eve Martin
Beligum; 2007; 14min; 35mm; color; fiction

오빠와 여동생이 침대에 앉아 있다. 여동생은 오빠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려 하지만 오빠는 싫은 듯 자신의 귀를 틀어 막는다. 하지만 곧 오빠 루카스는 릴라의 동화속으로 뛰어들고 둘의 환상적인 환타지가 시작된다.
벨기에의 여성 감독이 만든 <릴라의 책>은 사실 스토리가 몇 줄로 간단하게 정리될 뿐 이야기가 극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영화는 릴라와 루카스가 숲 속을 헤매며 겪는 환타지와 그것이 현실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감각적으로 보여주는데 중심이 있다. 순간순간의 강한 이미지와 소리가 보여주는 상징들, 그리고 아기자기한 특수효과들이 짧은 시간 동안 이야기가 없음에도 눈과 귀를 떼지 못하게 한다. 굉장히 무거운 주제들이 많았던 영화들 속에서 동심을 떠올리며 즐겁게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의 마지막 비극적 결말까지도 슬픈 동화을 연상키시면서 상영이 끝난 후에도 잔잔하게 계속 마음을 울린다.




농부와 딸 Ground Work
 
Director: Maud Alpi
France; 2007; 20min; 35mm; color; fiction

루카스는 아침에 일어나 먼지가 수북히 쌓인 와인을 꺼낸다. 와인에는 딸의 25살 생일을 축하하는 딱지가 붙어 있다. 오늘 딸의 생일을 맞아 25년을 묵힌 와인을 개봉하려는듯 루카스는 와인병을 정성스레 닦는다. 그리고 늘 그렇듯 자신의 농장에 나가 일을 시작한다. 그 때 누군가 그를 찾아온다. 종묘회사의 직원으로 보이는 그녀는 루카스에게 이 제품, 저 제품을 소개하며 영업에 열심히다. 알고보니 그녀는 오늘 생일을 맞은 딸의 옛날 친구였다. 그리고 등장하는 루카스의 작은 딸 뤼디빈.그녀는 뭔가 모르지만 아빠의 행동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보며 웃기도 하지만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아빠를 아끼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태도다. 비밀은 곧 밝혀진다. 언니의 죽음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빠. 아빠는 멀리 알래스카에 죽은 딸이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뤼디빈은 그런 아빠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애써 루카스가 죽은 딸의 친구에게 사실을 털어놓으려는 순간 뤼디빈은 아빠와의 비밀을 지켜주기로 한다.
<가족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빠와 아빠를 너무 아끼지만 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는 작은 딸. 이들은 죽은 이의 25번째 생일을 맞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낸다. 그리고 찾아온 종묘회사의 직원. 아빠와 딸은 서로의 비밀을 간직한 채 그녀에게 죽은 딸의 생일을 같이 축하하자고 제안한다. 아마도 셋은 또 하나의 가족이 될 것이 분명하다. 끝이 없을 듯한 땅에서 사람은 존재조차도 희미해진다. 하지만 그 티끌같은 존재들은 그 땅을 일군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갖고 있기도 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리고 그 땅에서 다시 태어난다. 소멸과 탄생이 그 땅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여인들 Four

Director: Ivana Sebestova
Slovakia; 2007; 15min; 35mm; color; animation

이번 경쟁 섹션에 소개된 영화들의 특징 중 하나는 예년에 비해 여성감독들의 작품의 수가 상당히 늘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8편의 애니메이션 작품의 수준이 해가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는 삶에 대한 아기자기한 성찰이 묻어나는 애니메이션이 주를 이뤘다. 현대인의 몰개성을 풍자적으로 빗댄 스웨덴의 <첵쿠>, 가난한 멕시코 가정에서 걷지 못하는 소년의 날고 싶은 꿈을 비극적으로 그린 <날개>, 그리고 한국의 <스탑>과 <웨이 홈>이 그렇다. 반면에 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난 여성감독의 절지 애니메이션 <여인들>은 위의 작품들처럼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삶의 우연성과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한 공간에서 서로 알지 못하는 항공사, 우편배달부, 과일장수, 인기가수 4명의 여인들이 어떻게 우연적인 만남을 이루는지 그리고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유쾌하고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다. 올해 경쟁 섹션 영화 중 가장 야한(?) 영화로 기억될 만큼 종이로 만든 사람들의 동작은 자연스러웠고 여인들의 날리는 머릿결은 십점만점의 십점이었다.
 



썸타임즈 Sometimes

Director: Mahmood Spliman
Egypt; 2008; 15min; Digi Beta; color; fiction

이번 AISFF 경쟁 섹션에 소개된 가장 애매모호하고 낯설고 정체 불명의 영화를 선택하라면 이집트에서 단연 건너온 Sometimes이다. 촬영도 자연스럽지 않고, 후시녹음도 맞아 떨어지지 않는 이 어색하고 낯선 코미디 단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이유는 아마도 이야기와 인물, 그리고 상황이 상징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집트의 한 마을에서 버스 기사가 승객들을 재촉한다. 한 남자가 오토바이를 끌고 여자에게 가지 말 것을 애원하지만 여자는 버스에 오르고 차는 출발한다. 이 때부터 버스 안에 탄 황당한 승객들과 함께 이상한 로드무비가 시작된다. 이유는 모르지만 빚쟁이에게 쫓기는 운전기사를 시작으로 채무자, 변태, 동성애자, 주술사, 의사, 종교인, 백인, 아랍인 등등 각양각색의 승객들은 도무지 버스 안을 조용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 때마다 버스는 멈춰서고 문제를 일으킨 승객들은 사막 가운데 버려진다. 남은 사람들은 버스가 급정거 할 때 다쳐 피를 흘리며 붕대를 감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이 정신 없이 한 편으로 유머러스하게 진행된다. 영화 속 많은 인물들, 그들이 처한 상황은 현재 이슬람 국가 가운데 나름대로 잘 나가는 나라로 손꼽히는 이집트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갈등을 풍부하게 은유하고 있다. 곧 버스는 국가이고 승객들은 국가의 다양한 구성원이다. 직업도 다양하고, 종교도 다양하고, 피부색도 다양한 그들 사이의 소통은 불가능하고 서로서로를 철저하게 배제시킨다. 한 국가 내에서 다양한 구성원이 겪는 소통의 단절을 냉소적이면서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는 수작이다.




파세오 Paseo
Director: Arturo Ruiz Serrano
Spain; 2008; 12min; 35mm; color; fiction
스페인의 어디라는 것만 알 뿐 시대와 장소를 알 수 없는 폐허가 된 유적지와 같은 어느 곳에 세 명의 남자가 있다. 한 명의 백발의 시인이고 한 명은 젊은 군인, 그리고 한 명은 노동자처럼 보인다. 세 인물이 처한 상황은 정확히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아주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 뿐. 젊은 군인이 자신은 한 번도 사랑을 고백한 적이 없다며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시인은 세 명 만의 조촐한 연극을 시작한다. 라이타 하나에 여자 역할을 맡은 노동자와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젊은 군인, 시인은 연출자다. 젊은 군인의 고백에 노동자는 자신이 평생 아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며 울음을 터뜨린다. 이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말이 됐었다며 더 구슬피 운다. 이 때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답답한 카메라의 앵글이 넓어지면서 그들을 뒤따르는 무장군인들이 보인다.
총살 당하기 직전 삶의 마지막 순간 세 남자는 그렇게 마지막을 아름답게 정리한 것이었다. 영화는 스페인 내전 당시 이유 없이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의 마지막을 그리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 순간에 이른다. 그 순간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할지 누구도 모른다. 노동자처럼 그 순간에도 이제 필요없을 라이타에 욕심을 내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릴 수도, 하지 못했던 일을 후회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죽음은 슬프지만 그 사람들의 인생은 각자 모두 소중하고 아름답다. '소풍'이라는 말의 스페인 영화 파세오(Paseo)는 그래서 왠지 천상병 시인의 '귀천'과 많이 닮아 있다.




캐빈 맨 Cabin man

Director: Ashish Pandey
India; 2007; 7min; Digi Beta; color; fiction

한 노인이 있다. 남루한 옷차림과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 살고 있는 그는 시계를 보고 때가 된 듯 이것저것을 챙겨 밖으로 나간다. 그가 도착한 곳은 철도 앞. 그리 많은 기차가 다니는 길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는 철도에 기름칠을 하고 닦고 조인다. 기차가 들어올 때쯤 그는 다시 그가 있던 오두막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녹색 깃발과 붉은색 깃발을 번갈아 휘든다. 하지만 기차가 그를 바라보지는 않는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카메라가 노인이 살고 있는 오두막을 비춘다. 폐까 (Abondoned)라고 붉게 칠해진 오두막 위에 그는 열심히 깃발을 흔들고 있다.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도 보지 않는 그 곳에서 그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버려진 폐가처럼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노인을 통해 감독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기차를 향해 깃밧을 흔들면서 아마도 바라보지 않지만 해맑게 웃는 그의 모습에서 왠지 인도인들의 철학이 느껴진다.

이 밖에도 이란 여성감독의 친구와 적(Friend's Place and Enemy's Place), 멕시코의 감독의 애니메이션 날개(The boy who flew), 영국의 재치있는 반전이 인상적이었던 섹션 44(Section44)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약속해놓고 오지 않은 루이 가렐이 괘씸하기도 그의 영화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아쉽지는 않다. 포스팅을 해놓고 힘들지만 감독열전 챙겨보러 나가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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