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10.14 <Disgrace> 수치와 추락
  2. 2008.10.08 <13th PIFF> 1박 3일 방문기
2008.10.14 19:36

<Disgrace> 수치와 추락

<Disgrace> 수치와 추락

Australia, Republic of South Africa; 2008; 120m; 35mm; Color
Director: Steve Jacobs
Casting: John Malkovich, Eriq Ebouaney

1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작품 <Disgrace>. 영화제에서는 <수치>라고 번역되었지만, <추락>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된 J.M. Coetzee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존 쿳시는 이 작품으로 부커상을 2회 수상한 최초의 작가가 됐고, 4년 뒤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솔직히 영화를 보면서도 존 쿳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barbarrians>을 읽은 게 전부였으니. 영화가 끝난 후 한참 동안 극장 주변을 서성이다가 컴퓨터를 켰다. 존 말코비치를 제외하면 모두다 굉장히 낯설고 생소했지만 분명 어디선가 한 번 맛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존 쿳시의 <Disgrace>라는 소설이 원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었을 때의 충격과 혼란이 방금 봤던 영화에서 받은 이미지들과 중첩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영화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화제가 끝나고 서울로 올라와 바로 책을 샀다. 길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었을 때처럼 완독을 하는데 1주일을 보냈다. 책 중간중간 포스트잇이 끼워져 있고, 메모와 줄을 그었던 흔적들이 마치 전공책을 연상시킨다. 사실 그의 소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특수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공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쉽게 납득하기 힘든 구성를 가지고 있다. 그 안에서 눈물겹도록 고민하는 인물들까지 말이다. 독자까지도 주인공이 겪는 처절한 고민에 동참시키는 그의 글쓰기는 여러번의 인내와 고통을 감내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완전하지 않은 문장, 함축적인 이야기가 독자에게 친절한 글쓰기는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절대 책을 덮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존 쿳시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마력이다. 고통스럽고 괴로운면서도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왜"를 외치게 만드는 힘 말이다.

책을 읽고서야 영화를 보고 왜 그리 뒤가 개운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았다. 사실 존 쿳시의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기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이야기가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인물과 소통하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을 유도한다. 하지만 텍스트가 영상으로 옮겨졌을 때 이야기만 남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소멸될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것은 존 쿳시의 소설은 이야기가 아닌 그 '외'의 것들이 방점이 찍혀있다는 것이다. 컨텍스트(context), 즉 문맥 속의 함의를 읽지 못한다면 그의 이야기는 그저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고, 인물들은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인물들에 불과하다. 결국 줄거리만 따라가기 급급했던 영화가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에도 온갖 물음표만 남기고 끝난 이유다. (때문에 리뷰는 영화보다는 소설에 집중하겠다.)


그러면서도 왜 호주 출신의 감독이 그토록 멀리 떨어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가 쓴 이야기를 선택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남아공과 호주에 살고 있는 두 백인 작가. 한 명은 소설을 쓰고 한 명은 영화를 만든다. 남아공과 호주, 지리적으로 떨어진 그 두 나라에는 뭔가 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두 나라 모두 얼마 전까지 최고의 인종차별정책을 가진 국가였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와 백호주의(Australia Policy). 하나는 소수 백인이 다수의 유색인종들을 통치하기 위한 차별적 정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색인종의 이민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다. 표면적으로 남아공에서 흑인 대통령이 집권하고, 호주에서도 차별 방지 법률이 제정되면서 완전히 평등한 국가 형태를 갖췄다고 하지만 몇 백년을 거쳐 뿌리깊이 형성된 습관이 그렇게 칼로 무 썰듯 사라지지는 않는다. 식민주의의 낡은 유산이었던 차별 정책들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의식은 고스란히 남아 탈식민지시대를 살아가게 만들었다. 거기서 비롯된 문제들. 식민주의 의식을 깨끗이 버리지 못한 상황에서 탈식민주의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 처지. 모순과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스티브 제이콥스는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존 쿳시와 같은 고민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스크린으로 옮기고자 했을 것이다. 존 쿳시는 그 모순을 정확히 파고드는 작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난 백인 출신 작가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한계를 한 인물을 통해서 처절하게 고민한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흑인이 대통령이 되고,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정책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식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은 그 기저에 여전히 흐른다고 보고 있다. 그로 인해 아무리 탈식민주의의 시대가 왔다 해도 백인과 흑인은 원점에서 출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백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그들의 원죄. 그들의 약탈과 착취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피부색의 우월함을 쉽게 놓치 못한다. 모두에게 과거는 책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의식 속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존 말코비치(최고의 캐스팅이라고 생각한다.)가 연기하는 데이비드 루리 교수는 쿳시의 고민을 그대로 투영한 인물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대학 교수 루리.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남아공의 역사, 모순, 갈등 따위의 것들에 큰 관심이 없다. 그에게는 오직 머리를 즐겁게 해줄 고매한 '시'와 몸을 즐겁게 해줄 '여자'만이 있을 뿐이다. 학생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밝혀지는 순간에도 그는 떳떳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시인 바이런도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지만 학교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에서 농장을 하는 딸(루시)과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그의 고통스러운 고민은 시작된다. 흑인의 땅에 살고 있는 백인들. 도시가 아닌 시골. 사람들의 감정이 원초적으로 남아 있는 그 곳에서 딸과의 갈등, 주변 흑인들과의 갈등이 싹이 튼다. 딸과 대등한 관계에서 그녀와 거래를 하는 흑인 농부 페트루스, 그에게 의지해야만 그 곳에서 살 수 있는 딸의 처지, 받아들일 수 없는 아버지. 뭔가 쉽게 요약하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 설명될 수 없는 문제들이 실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존재하고 있다.

세 명의 흑인 침입자에게 윤간을 당하고, 그 중 하나의 아이를 낳고, 페트루스에게 땅을 내어 주고, 그의 세 번째 아내가 되는 것을 그 땅에 안전하게 살기 위한 대가로 생각하는 루시. 그녀는 얼마전까지 자신의 일을 봐주던 페트루스의 소작인이자 부인으로서의 삶을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루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않는다. 아버지로서 그는 루시가 하루 빨리 그 곳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던가 아니면, 그녀의 농장 주변을 철책으로 둘러싸고 외부인의 침입을 당장 막아야 한다고 딸을 설득한다. 하지만 루시는 그 중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다. 루시는 아버지에게 자세히 설명을 하지 않는다. 아니 자신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달라고만 한다. 정말 루리의 말처럼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과거의 역사에 대한 속죄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찌 보면 루시가 처한 환경과 그녀가 안고 있는 고민은 루리를 포함한 이전 세대들이 뿌려놓은 씨에서 자란 것일지 모른다. 식민주의 이후 세대들이 안고 가야할, 감당해야 할, 극복해야 할  문제. 루시는 그 안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 그 문제는 이전 세대들이 갖는 인식과 철학으로는 분명 해결될 수 없다.

루리는 그 전까지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흑인들에 대한 원초적인 적대감을 표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흑인들은 루리에게 원래 '그런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백인의 영역을 호시탐탐 넘보면서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 페트루스를 인간적으로 신뢰하면서도 그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 없는 루리. 그가 남아공이라는 공간에서 백인으로서 흑인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인식론적 한계이다. 작가는 아버지와 딸, 그리고 그 사이에 개입한 흑인들을 통해 현재 남아공에서 벌어지는 탈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백인들에게 보상받을 것이 있다고 믿는 흑인들, 자신들도 감지하지 못하지만 뿌리깊은 곳에 인종에 대한 의식을 가진 백인들, 그 한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래서 공존하고 싶은 사람들이 뒤엉켜 있다. 이들 사이의 갈등과 모순이 현재 남아공이 안고 있는 문제이고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야기는 베브의 동물보호센터에서 일을 돕는 루리가 자신이 마음을 쓰던 개를 안락사시키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난 당신이 이 개를 한 주 더 살려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개를 단념하시는 건가요." /  "그렇소, 단념하는 거요." 베브의 질문에 대한 루리의 마지막 반응은 거의 포기에 가깝다. 한 쪽 다리를 절룩이며 그의 음악을 좋아하던 개를 병원 침대로 데려가면서 그는 스스로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다.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포기였다. 존 쿳시의 <Disgrace>가 비극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루시의 입장에서 보면 시각은 다소 달라진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딸 루시의 행동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녀의 말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설명이 불가능할 수도 있고, 역자의 평가대로 쿳시의 글쓰기가 양자택일이나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아닌 가치의 회색지대를 보고 사유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루시는 아버지 루리와 다르게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강간한 사람의 아이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아니요."라고 답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이 싹틀 것이라고 그것에 관한 한 모성을 믿는다고 말한다. 상처까지도 감싸안을 수 있는 모성이 희망인 것이다. 루리와 루시의 차이는 책 속의 표현대로 "형기를 채우고 있는 늙은 죄수"와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이다.

책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에 대한 생각을 여러번 했다. 굵직한 사회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곳곳에서 원인을 찾기 급급하다. "식민주의 유산이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 "근대화를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냉전의 상흔이 치료되지 못했다." / "탈근대화라는 전지구적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다." 등등 수도 없이 많다. 그 이유는 우리 역시 식민주의, 근대화, 냉전, 탈근대 가운에 어느 것 하나 깔끔하게 해결되지 못한 채 모순과 갈등이 계속 쌓이고만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도 루시와 같은 '모성'이 필요한 것일까? 쿳시의 소설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공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보편성'을 놓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살면서 이 책을 두 세번은 더 읽게 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한 번을 읽고서는 잘 모르겠다. 지금 정치를 공부하고 있어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정치적인 메시지들 뿐이다. 하지만 쿳시의 소설에서 그것이 전부가 아님은 확실하다. 아마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나씩 더 느끼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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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18:30

<13th PIFF> 1박 3일 방문기

<13th PIFF> 1박 3일 방문기

<3일-내려가기>

개천절인 금요일 밤 11시 서울역에서 무궁화호에 올랐다. 가방에 노트북과 티셔츠와 가디건 한 장씩, 속옷과 양말만 대충 챙겨넣고 도망가듯 밤기차를 탔다. 5시간이 넘는 열차 여행은 4시 20분 목적지 부산역에서 멈췄다. "이제 햄들어서 무궁화 못 타겠다."고 투덜대며 열차를 빠져나왔다. 새벽임에도 열차는 꽤 많은 사람들을 토해냈고, 역사 안에도 꽤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두 나처럼 영화제를 찾은 사람들인가?"라는 생각에 3년 만에 부산영화제를 다시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물론 떨림과 두근거림과 함께.

친구와 부산행을 갑자기 정하고 내려왔기 때문에 예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티켓 예매는 물론 숙소까지. 내려오기 전, 잠깐 동안 해운대 근처의 호텔, 모텔에 전화를 했지만 "오늘은 해운대에서 방 구하기 힘들건데요."라는 말만 계속 들어야했다. "남포동은 그래도 하룻밤 묵을 곳이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택시를 잡았지만 그곳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한 시간 쯤을 헤맨 뒤에야 자갈치 시장의 짠 바다냄새가 고스란히 올라오는 한 모텔에서 겨우 방을 찾을 수 있었다. 긴 열차 여행과 방 잡으러 돌아다녔던 게 화근이었는지 친구와 그대로 쓰러져 점심을 훌쩍 넘겨 모텔을 기어나왔다.
 
<4일-돌아다니기>

야속하게도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남포동을 한 바퀴 훑어보고 해운대로 곧장 자리를 옮겼다. 예전에는 부산영화제하면 남포동이었는데 이제는 어쩐지 이전만큼 분위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 "썰렁하네." 기념품 부스에서 그나마 잠시 머무른 뒤 설렁탕 한 그릇을 허겁지겁 헤치우고 해운대에서 5시와 8시 영화를 골랐다. 어차피 티켓 남는 영화 아무거나(?) 보자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조바심은 없었는데 해운대 메가박스 매표소 앞에 세워진 상황판에 거의 모든 영화가 매진된 걸 보고서야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기왕 영화제 왔으니 그래도 영화 몇 편은 봐야지 않겠나. 다행히 티켓 교환 부스 앞을 서성이다 5시 영화 <워낭소리>와 8시 영화 <수치 disgrace> 티켓을 구했다. 힘겹게 구한 표를 들고 친구와 "우리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라며 쓰게 웃고는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국제영화제인데 영화들이야 검증됐겠지... "라고 자위하며.

<워낭소리>는 노부부와 그들이 키우는 소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풀어낸 인간극장류의 다큐멘터리다. 시작 전에 상영관 앞에서 손수건을 나눠줬는데 끝날 때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사의 마케팅이 적중한 듯. 영화가 끝난 후 진행된 GV에서도 노부부와 영화 제작에 대해서 질문들이 쏟아졌다. 누군가 너무 감정이입이 됐다고 지적을 했는데 꼭 다큐멘터리가 건조할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멘터리도 영화의 한 장르인데 굳이 그 외연을 한정지을 필요가 있을까? 아무튼 다음 영화가 남포동이었기 때문에 GV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거의 1시간을 걸려 아슬아슬하게 남포동 대영극장에 들어갔다.

다음 영화는 <수치 Disgrace>.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존 말코비치가 나왔다. "이 영화가 범상치 않겠다." 싶었는데 역시였다. 정말 많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포스트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에 대한 정치적 함의가 느껴졌고, 아버지(존 말코비치)의 성적 메타포가 강한 어떤 메시지들이 뚜렷하게 잡히지 않고 쏟아졌다. 극장을 나와서도 한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나 이 영화 잘 모르겠다."는 말로 매듭졌다. 올라와서 영화를 검색해 보고 알았는데 존 쿳시의 소설 추락(disgrace)를 원작으로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부터 애매모호하던 메시지들이 형체를 갖고 잡히기 시작했다.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었군." 존 쿳시의 책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밖에 보지 못했는데 왠지 존 말코비치는 최적의 캐스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따로 포스팅을 할 계획)

롯데시네마에서 영화를 보고 온 친구와 다시 만나 모텔 옆 자갈치 시장에서 꼼장어를 먹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음식은 아닌데 부산에 왔으면 꼭 먹어야 한다는 친구의 성화에 무작정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도 바닷바람 맞으면서 먹는 음식이라는게 서울에서는 경험하기 힘드니 분위기는 그럭저럭 좋았다. 손님을 게의치 않고 맛깔나는(?) 욕을 섞어가며 열심히 싸웠던 1번과 8번 가게 아주머니의 타이틀 매치를 보면서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숙소로 돌아왔다. TV에서 최진실의 삼우제를 보고 친구와 그녀에 대한 몇 마디를 나눴더니 벌써 2시가 가까웠다. 자야 한다면 침대에 누웠는데 친구가 예상에 없던 <연애불변의 법칙-커플 브레이킹>에 빠져 5시에야 잠이 들었다. 일찍 일어나서 11시 타임 영화봐야 하는데 말이다.

<5일-올라오기>

당연히 아침 11시 영화를 패스했다. 둘다 침대에 등짝이 달라붙어 버렸다. 그래도 오후에 서울로 짐 싸들고 올라와야 하니 2시 영화는 꼭 보겠다는 생각으로 모텔을 힘겹게 빠져나왔다. 예상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길. 편의점에서 우산 2개를 사고 남포동으로 나왔다. 그래도 사람들이 북적북적 우연히 아는 부부(?)를 만나 남포동 골목 깊숙이 숨어 있는 회국수 집에서 점심 요기를 대충하고 부산극장으로 갔다. 분명히 <순회상영>인 줄 알았는데 표를 보니 <이방인>이었다.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지. 뭐 아무거나 봐도 상관 없었지만 부산극장 2관과 3관이 붙어 있어 살짝 3관으로 들어가 인기작 중 하나였던 <신은 없다>를 봤다. 매진이라더니 제법 빈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신은 없다>는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허구성을 유머와 위트를 섞어 비꼬는 다큐멘터리였다. 중간중간 외국인들만 크게 웃는 바람에 덩달아 따라 웃긴 했지만 이런 문제에 있어서도 쿨(?)하게 넘기는 그들의 태도가 부럽긴 했다. 영화를 보고나서 국내에서는 절대 상영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둑 관람하길 잘한 듯. 원래 이 영화를 보고 서울로 올라올 예정이었으나 못내 뭔가 아쉬워 친구와 한 편 더 보기로 했다. 어렵게 티켓교환소에서 구한 영화는 스페인과 칠레의 합작 영화 <좋은 인생>. 칠레의 한 도시를 배경으로 다수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전개되는 영화였다. 각자 사연 많은 사람들이 서로서로 무심한 듯 살아가지만 결국 네트워킹 되어 있다는 소소한 진리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영화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영화가 끝나고 나니 집에 가는 일이 급해졌다. 기념부스에서 기념품 몇 개를 사고 노포동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내려올 때 무궁화에 너무 시달려 갈 때는 우등타고 편하게 가자 했지만 하늘은 그런 호사를 허락하지도 않았다. 매진된 우등을 피해 8시 15분 일반 버스를 타고 새로 놓인 부산-대구 고속도로를 탔다. 피곤했는지 타자마자 한 시간을 미친듯이 자고 휴게소에 들러 군것질거리들로 요기를 했다. 다시 출발한 버스 안에서는 거의 끝나가는 여행이 아쉬워 친구와 내내 수다를 떨었다. 이런저런 기억나지 않는 대화를 주고 받으며 12시 반이 가까운 시간에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줄지어 있는 택시를 같이 타고 친구를 내려놓고 집에 도착하니 1시가 조금 넘었다. 한 숨 한 번 길게 내뱉고 내일부터 또 어떻게 일주일을 시작하나 투덜대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여독풀기>

다음 날부터 미친듯이 수업 준비를 하면서 중간중간 1박 3일 짧은 여행을 떠올렸다. 즐겁고 유쾌했지만 왠지 예전에 느꼈던 감동들은 없었던 것 같다. 남포동 거리를 빼곡히 채웠던 영화 부스들이 사라졌고, 그 앞에서 기념품을 받기 위해 줄지어 있던 사람들의 부산스러움이 없었다. 부스들은 모두 해운대로 이동했지만 영화와 상관 없는 기업 부스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기업 홍보장이 된 것 같아 해운대에서는 쓸쓸한 기억 밖에 나지 않는다. 점점 영화제가 관객과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아직까지 입가를 씁쓸하게 적신다. 그럼에도 내년에도 또 가야지 생각하는 걸보면 참 나도 답이 없긴 하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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