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말 특별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12.19 <라콤 루시앙> How can we judge him?
  2. 2008.12.07 <마음의 속삭임> 남자의 탄생
2008.12.19 16:27

<라콤 루시앙> How can we judge him?


<라콤 루시앙> How can we judge him?

France, Germany, Italy; 1974; 138min; 35mm; Color
Director: Louis Malle
Cast: Pierre Blaise, Aurore Clement, Holger Lewenadler

 
라콤 루시앙은 18살의  프랑스 남부의 작은 시골에 살고 있는 청년이다. 마을의 요양원에서 허드렛일하며 근근히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아빠와 형은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감옥에 들어갔고, 현재는 엄마와 함께 산다. 하지만 엄마의 새 남자친구 때문에 따로 나가 살아야 할 판이다. 18살이나 됐으니 혼자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알게 모르게 눈치를 주고 있다.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형처럼 레지스탕스가 되기로 한다. 눈치 안 보고 집에서 나갈 수도 있고, 왠지 멋있어 보인다. 엄마도 버릇처럼 형을 본받으라고 말해왔다. 그래서 운동을 주도하는 학교 선생님을 찾아간다. 하지만 선생님은 루시앙의 부탁을 받아주지 않는다. 하긴 그게 신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러다 우연히 독일 경찰들이 일을 하는 곳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레지스탕스와 정반대의 길이다. 그런데 이 곳이 더 멋있다. 학교 선생님에 대해 몇 가지 알려줬더니 술도 주고, 밥도 주고, 총도 주고, 옷도 주고, 잘 곳도 준다. 궁색하게 사는 것보다 이게 훨씬 좋을 거 같다. 집에 돈도 보내줄 수 있으니 감옥에 간 형에게 뒤질 것도 없다. 레지스탕스 잡으러 다니는 경찰 놀이도 토끼 사냥하는 것보다 재미 있다. 자기를 무섭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어깨 펴고, 고개 들고 다닐 수도 있다. 마음이 있는 여자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누구보다 더 강한 힘을 갖는 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 그래서 이 생활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냥도 잘 하고, 집안 일도 잘하는 순박한 시골 청년 라콤 루시앙은 그렇게 큰 고민 없이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됐다. 애초에 심각한 정치적 고려는 없었다. 아니 그런 걸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레지스탕스가 되든,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되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단지 부모를 벗어나 '살아갈 방법'이 필요했을 뿐이다. 만약 마을 선생님이 루시앙의 부탁을 들어줬다면, 그는 아마 형처럼 독일 경찰에 맞서는 멋진 레지스탕스가 됐을 것이다. 당장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풍족한 하루가 국가나 민족보다도 소중하다. 당연하다. 루시앙에게 찾아온 그 즉흥적인 순간, 그의 선택은 당연했다. 그저 배가 부르고, 잘 곳이 있었고, 폼이 났을 뿐... 당시의 상황을 보면 루시앙의 선택이 얼마나 '즉흥적'이었는지 이해가 간다. 영화의 배경은 1944년 봄을 맞은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괴뢰정부를 세우고 5년이 지난 후였다. 1944년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동맹국에 대한 연합국의 반격이 본격화되면서 독일은 점차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봄이 지나고 6월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8월 파리 해방으로 프랑스는 다시 온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루시앙이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면 그 봄날 스스로를 사지로 몰고갈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되고, 그 달콤함에 중독될 때까지 그는 '의지'가 없는 인물이었다. 단지'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최신식 양복을 빼 입고, 총을 차고, 사람들을 압도하는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루시앙에게 '의지'가 생긴 것은 알베르와 그의 딸 '프랑스'를 만난 이후부터이다. 숨어지내는 유태인 알베르 가족을 만나면서 그는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긴 것이다. 루시앙은 프랑스에 대한 애정이 커지고, 그들을 천천히 '가족'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아주 서툰 방법으로... 하지만 알베르와 프랑스는 그런 루시앙이 편하지 않다. 그에게 도움을 받고 있지만, 언제라도 자신들에게 총을 들이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아다. 생존을 위해 적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 알베르의 가족에게 루시앙은 자신의 '힘'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있기 위해서라도 그는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힘이 필요했다. 그가 힘을 가져야 할 '이유'와 '의지'가 생긴 것이다. 이 때부터 동료가 살해되고, 레지스탕스의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불안한 생활을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자신을 찾아온 알베르가 독일군에게 끌려갔을 때 그는 프랑스인으로 독일 경찰 노릇을 하고 있는 자신의 무력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이 프랑스와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고 떠난다. 아주 서툰 방법으로...

루시앙의 잠시 동안 화려한 생활도 봄과 함께 지나갔다.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전시 상황은 급변했다. 독일군이 수세로 몰리면서 그들은 퇴각을 준비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유태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진다.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독일군에게 미래의 적이기 때문이다. 알베로가 떠나고 남은 프랑스와 벨라도 예외는 아니다. 루시앙은 독일군 병사와 함께 그녀들을 데리러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루시앙은 다시 한 번 그녀들을 지키기 위한 위험한 선택을 한다. 프랑스, 벨라와 함께 산 속으로 몸을 피한 루시앙은 잠깐 동안이지만 그들과 평화로운 생활을 즐긴다. 프랑스와 사랑을 나누고, 그녀를 위해 토끼를 잡고, 집이 따뜻하도록 불을 지핀다. 하지만 불안한 평화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 불안은 어디에서 올지 모른다. 옆에 있는 프랑스로부터 올 수도 있고, 레지스탕스로부터 올 수도 있다. 아니면 퇴각하고 있는 독일군으로부터 올 수도 있다. 우리는 루시앙의 비극적 결말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 루시앙은 너무도 한가롭게 풀밭에 누워 있다. 그가 체포되고 처형이 됐다는 자막이 올라간다. 루시앙의 인생의 비극적 결말과 관계 없이 우리가 보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그가 시대에 휘말리기 전에 누렸던 '일상의 평화'였다.

사진의 인물이 정확하지 않지만 "당신은 그보다 프랑스인답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그런 사진에 루시앙은 총을 겨누고 있다. '개인'으로서 루시앙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자, 영화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출발한다. 루이 말은 불운한 시대를 살았던 한 개인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그의 인생이 실화인지 아닌지 정확히 확인은 되지 않지만 라콤 루시앙의 삶은 분명 당시의 분위기로 본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영화적 인물로 표현된 라콤 루시앙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감독은 그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루이 말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서 줄기차게 보편적으로 믿어지는 도덕과 윤리에 대해 거침 없는 메스를 들이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늘 '파격', '도발'과 같은 수식어를 동반했다. 우리가 1974년 작 <라콤 루시앙>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국가(혹은 민족)와 개인의 관계 관한 것일 수 있다. 프랑스는 전후처리를 가장 깔끔하게 했던 나라 중에 하나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친일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때마다 모범 사례로 꼽는 것이 프랑스이다. 그 만큼 프랑스는 괴뢰정부 5년 동안 독일 나치를 위해 복무한 이들에 대한 처벌을 명확히 했다. 그렇다면 그 처벌의 기준은 무엇일까? 단연코 그것은 개인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논리에 가깝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영화의 마지막 라콤 루시앙이 사형을 당했다는 사실의 근거도 역시 라콤이 개인의 안위를 위해 '반국가적',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국가'와 '민족'과 같은 거시적인 잣대가 개인의 행동을 판단하는 윤리적, 도덕적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이렇게 물어본다면 분명 문제는 달라진다. 질문의 답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부분이 될 수는 있어도 전체가 될 수 없다. 정치적 계산을 모르던 라콤에게는 더더욱이나 그렇다. 탈출에 성공한 뒤 라콤과 프랑스가 누리는 일상적인 행복처럼 라콤이 꿈꾸던 바도 그런 평범한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운한 시대'는 라콤을 그냥 두지 않았다. 분명 라콤 루시앙은 순박한 시골 청년이었고 정치적 의식도 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우연하지 않은 순간에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됐다. 라콤의 비극적 결말을 보자면 분명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즉흥적으로 라콤에게 찾아온 1944년 봄의 어느 날은 분명 그에게 너무 달콤한 기회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18살의 뜨거운 첫사랑을 하게 됐다. 그 생활이 아니었으면 만날 수 없었던 여인이다. 그녀는 또 그의 선택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경찰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이 옳을까? 라콤의 인생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행복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막'처럼 처벌을 받았어야 하는 것일까? 분명 시대가 개인을 속박하는 것은 비극이다. 시대 안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답안의 수는 줄어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라콤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시대'를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자기 앞에 놓인 시대를 살아간다. 그리고 그 시대와 함께 자신의 '선택' 역시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들이다. 모든 걸 시대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루이 말은 분명 불운한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순박한 청년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평화롭게 살았을 한 청년... 그렇다고 루시앙을 동정하거나 감싸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정말이지 시종일관 도저히 감정이 읽히지 않는 루시앙의 표정은 그에 대한 감정이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를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감독은 이런 라콤 루시앙의 캐릭터를 통해 상당히 공고한 이분법적인 국가와 개인의 틀에 대한 파괴를 시도했는지도 모르겠다. 영웅이 아니면 반역자가 되는 경계에 대한 파괴 말이다.

난 기본적으로 우리 역시 친일의 문제가 빨리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 이유는 앞에서 밝힌 반민족적이고 반국가적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힘든 상황을 함께 살아가고 있었던 다수의 사람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 차원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도 영웅과 반영웅의 굉장히 이분법적인 틀에 갖혀서 문제를 봤던 것 같다. 오히려 이런 답답한 관점이 과거사 문제의 해결을 더욱 요원하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씨네큐브에서 열리고 있는 루이 말 특별전의 두 번째 상영작 <라콤 루시앙 Lacombe Lucien, 1974>을 보고 왔다. <마음의 속삭임>이 1971년에 만들어졌으니, 꼭 3년이 걸려 루이 말이 선보인 그의 9번째 영화다. 비슷하게 성장영화로 읽히지만 루시앙은 <마음의 속삭임>의 로랑과 상당히 다른 캐릭터를 구현한다. 시대적 배경이 다를 뿐 아니라 가정 환경 역시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루시앙과 로랑은 닮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라콤 루시앙>의 매력적인 또 하나의 캐릭터는 루시앙이 사랑하는 여인 프랑스다.(이름이 '프랑스'인 것이 아이러니하다.) 31살의 오로르 클레망(unbelievable!!!)이 연기하는 프랑스는 자신을 살려준 루시앙과 살고 있지만 그에 대한 '원한'이 남아 있는 캐릭터이다. 그녀는 '적과 동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극적으로 보여준다. 툭히 영화의 마지막 독일군을 피해 달아난 산 속에서 루시앙에게 기대면서도 그에게 '돌'을 내리치려는 장면은 프랑스의 이중적인 고민을 임팩트있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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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7 01:17

<마음의 속삭임> 남자의 탄생


<마음의 속삭임 MurMur of the heart> 남자의 탄생

France, Italy, German; 1971: 117mln; 35mm
Directing: Louis Malle
Casting: Lea Massari, Benoit Ferreux
 
루이 말 감독의 <마음의 속삭임>을 봤다. 다리에 힘이 빠져 한참을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상영관을 빠져 나왔다. 솔직히 그의 작품은 내가 '아이'에서 '남자'로 넘어가던 시절, 야한 영화인 줄 알고 친구가 아빠 이름 대고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데미지>를 본 것이 처음이자 전부였다. 그 때는 내용이고, 파격이고, 불륜이고 뭐고 그저 친구들과 침을 꼴깍이며 끈적한 베드신에만 오감을 집중시키고 있을 때였다. 나중에 영화에 관심을 갖고 빠져들때 쯤, 이 영화가 '루이 말'이라는 프랑스 출신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왠지 거장의 작품을 눈요기로 즐겼다는 민망함이 생겼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동안 루이 말의 영화보다는 동시대의 프랑스 거장들이었던 알렝 레네 혹은 누벨 바그 감독들의 영화들에 관심을 뒀다. 사춘기 때의 원초적인 감정들을 애써 부인하려듯이 말이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이제 영화를 좀 봤으니까 뭔가 안답시고 그의 영화를 다시 보면서 애써 고상한 척 하고 있을 모습이 싫었다.

그러고보니 나중에라도 다시 그의 영화를 제대로 볼 기회조차 없었다. 1992년에 만든 <데미지>가 국내에 소개된 마지막 작품이니, 이후에 그의 영화가 스크린에 걸린 적이 있었나 싶다. 때문에 루이 말이 <데미지>를 통해 파격적인, 도발적인 감독이라는 대중적인 수식어를 얻었지만, 실상 그의 영화를 보면서 맞장구를 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늦었지만 좋은 기회가 생겼다. 사춘기 때 비디오 리모콘 빨리감기와 되감기를 누르며 만났던 루이 말을 정식으로 극장에서 제대로 만나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지금 광화문 씨네큐브와 이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루이 말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특별전이기는 하지만 국내 수입이 되지 않았던 예전 세 작품 <마음의 속삭임>, <라콤 루시앙>, <굿바이 칠드런>을 묶어 차례로 개봉하는 조촐하지만 의미 있는 상영회다. 각각 1971년, 1974년, 1987년에 만들어진 영화인 만큼 그의 영화 세계를 시간순으로 엮어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사족이 길었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스크린에 'FIN'이 뜨고 상영관을 빠져 나오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지경이 됐다. 오이디푸스의 금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뛰어넘는 대범함에 뒤통수와 앞통수를 한 번에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이다. 더구나 1971년에 만든 영화라니... 왠지 <마음의 속삭임>은 아기자기한 제목과 달리 루이 말과의 강한 '첫 만남'으로 기억될 영화가 될 것 같다.


<마음의 속삭임>은 1954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을 무렵 디종에 사는 15살 소년 로랑의 위험한 성장이야기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구김살 없이 자란 막내 아들... 학교에서 1등을 도맡아 할 정도의 우등생이고, 프로스트와 카뮈를 논할 정도로 인문학과 철학에도 관심이 깊다. 반전 모금운동을 할 만큼 사회 문제에 참여의식이 강하면서도, 재즈의 맛을 즐길 줄 아는 보기드문 소년이다. 여기까지가 주위에서 바라보는 로랑의 흐뭇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로랑 역시 사춘기의 문턱에 있다. 돈이 있으면서도 친구와 레코드 점에서 슬쩍하는 스릴을 즐기고, 어른들이 귀엽다고 엉덩이를 두들기는 것이 기분 나쁜 나이가 됐다. 방문을 잠근 채 19금 소설을 읽으며 하는 마스터베이션을 알고, 담배의 맛과 여자의 몸이 궁금한 호기심 가득한 나이... 몸이 변하고 세계관을 갖추는 것과 함께 사춘기 아이들이 풀어야 하는 숙제가 또 하나 있다. '가족'과의 관계... 가족에서 '나'의 위치와 역할을 찾고, 가족과 나의 거리를 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 숙제를 푸는데 모두의 상황은 다르다. 제각기 다른 상황에 따라 가족과 나의 관계의 모습 또한 천차만별 달라진다. 로랑의 상황은 어떠한가? 로랑의 가족은 아빠, 엄마, 두 명의 형 그리고 그를 어려서부터 돌본 유모가 전부이다. 잠깐 민망하지만 로랑을 이해하기 위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영화를 보면서 로랑이 참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단순히 사춘기를 겪는 모습이 아니라, 그가 가족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춘기를 지나며 내가 가족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갔던 모습과 로랑의 경험에서 공통점이 많이 묻어난다. 물론 난 15살에 인문학, 철학, 재즈에 문외한이었고 반전운동이 뭔지도 몰랐지만 로랑처럼 아빠와의 관계가 어려웠고, 자기들끼리 짝짜꿍이 잘 맞는 두 형과 그다지 어울리지 못했다. 때문에 난 엄마와 유독 친했다.(원래 아들 많은 집은 꼭 하나가 딸 노릇을 한다.) 사춘기가 훨씬 지나서도 엄마와의 스킨십과 장난이 불편하지 않았고, 엄마를 생각하면 왠지 뭉클해지는 애틋함이 있었다. 내 위치는 아빠의 다른 편에서 엄마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오히려 그 때는 아빠보다 내가 엄마와 더 가깝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엄마가 엄마였기에 가능했지, 엄마가 여자였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로랑은 나의 경험과 갈라진다. 그가 겪는 오이디푸스적인 고민들은 분명 그가 엄마를 '여자'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결정적이면서 직접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엄마의 '불륜'이다. 사실 로랑과 엄마의 가까운 관계는 어찌 보면 아빠와의 불편한 관계에 대한 반작용일 가능성이 크다. 형제들과 엄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가족에 대한 폭력적 전권을 휘두르는 아빠를 거부하고 로랑은 상대적으로 엄마에게 연민과 동정이 섞인 안정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아버지에게 절대적으로 소유당한 엄마에 대한 연민... 하지만 엄마의 불륜은 이런 아빠의 '절대성'을 '상대화'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아빠와 엄마를 분리시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마의 불륜을 알게 된 순간 로랑은 엄마를 '아빠에게 구속당한 엄마'가 아닌 '사랑을 할 수 있는 여자'로 이해하게 된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엄마와 로랑이 소통이 가능한 것 역시 모자 관계 이상의 관계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아빠는 이제 엄마를 절대적으로 소유한 사람이 아닌 엄마가 선택할 수 있는 대상 중의 하나이면서, 자연스럽게 자신과 대등한 경쟁자로서 위치지어진 것이다. 이 때부터 로랑은 엄마를 '여자'로 인식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엄마에 대한 감정들을 확인한다. 동시에 가족 내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다르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결국 로랑에게 있어 자신을 남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순간은 곧 엄마를 '여자'로 보는 순간이 된다. 그리고 엄마를 통해 세상에 나왔듯, 로랑은 다시 한 번 엄마를 통해 '남자'로 탄생하게 된다. 사실 로랑은 클라라와 관계를 맺기 이전 '불완전한 첫경험'으로 인해 남자로의 완전한 변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로랑은 형들의 손에 이끌려 첫경험을 하게 되지만, 형들의 장난 때문에 불완전하게 끝을 맺었다. 남자로서 로랑의 첫경험은 형들로 인해 '불완전하고 수치스러운 기억'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때부터 로랑이 '마음이 속삭이는 병'을 앓게 되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다. 로랑은 끊임없이 자신의 불완전한 첫경험을 극복 혹은 완성하려 한다. 그것이 자신이 아이에서 완전한 남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요양원에서 다프네와 엘렌에게 집요하게 접근하는 것도 이런 분명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 혁명기념일 저녁 엄마와의 '혁명과도 같은 일'은 로랑에게 있어 남자로 완전히 탄생되는 '혁명의 순간'이다. 자신 역시 엄마와 사랑을 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엄마 클라라는 로랑에게 "둘만 비밀을 지킨다면 서로에게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로랑은 엄마의 방을 빠져나와 개선장군처럼 엘렌의 방문을 두드린다. 완전한 남자로 태어난 로랑은 이전처럼 뭔가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를 거부하는 엘렌에게 태연한듯 다프네의 방이 어딘지를 물어보고 떠난다. 다프네와 하룻밤을 보내고, 여자친구의 방을 야밤에 급습한 남자들이 그러하듯, 로랑은 부모님 몰래 신발과 옷가지를 대충 챙겨 허겁지겁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침 일찍 요양소를 찾은 아빠와 두 형이 테이블에서 아침을 먹으며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않고 방에 들어온 로랑과 대면한다. 어젯밤 로랑과의 일을 기억하는 엄마도 곧 그 공간에 참여하게 된다. 다섯 명의 가족이 한 공간에 모였다. 로랑의 행색에 다들 겸연쩍어 하지만, 곧 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폭소를 터뜨린다. 막내아들, 막내동생의 '공식적'인 남자의 탄생을 축하하듯 말이다. 그렇게 영화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이다. 

루이 말은 이 마지막 한 장면을 통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로랑과 클라라는 먼 옛날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가 그랬듯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여 눈을 뽑거나, 목숨을 버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족은 성인이 된 로랑과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룰 듯한 기대마저 갖게 한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기념일 밤 있었던 일로 인한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고, 가족과 함께 지금까지 그랬듯 보기 좋은 '모자'의 모습을 "지켜나갈" 것이다. 그리고 엄마를 통해 남자로 태어난 로랑은 가족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만들 것이고, 다프네와 그랬듯 또 다른 여자와 평범한 사랑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감독은 자신과 사람들을 그토록 짓누르던 오래된 컴플렉스에 대해 이런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남자가 탄생하는 순간이라고..."

처음에 살짝 언급했지만 내가 루이 말의 이 영화 <마음의 속삭임>을 보고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던 것은 사실 로랑과 클라라의 모자 간의 충격적인 사랑이 아니라, 마지막 가족이 모이는 마지막 시퀀스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로랑이 겪는 위험한 사춘기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상황을 끌어가는 그의 대범함 때문이었다.(여기서 대범함이라는 단어 밖에 생각나지 않는 나의 어휘력이 한스럽다.) 솔직히 <마음의 속삭임>에 완전히 공감했다거나 전체를 이해했다는 말은 내게 허세에 가깝다. 하지만 영화가 내가 지금까지 '참'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에 파동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그 파동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모르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 모습만 본다면 누가 이 가족의 비밀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마음의 속삭임>은 루이 말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가장 많이 묻어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감독 스스로도 생전에 이 작품을 자신의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는 인터뷰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기사를 보고 갑자기 "감독 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감독은 로랑을 통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외에 많은 이야기들을 소품처럼 던지고 있다. 형들의 그림 장난을 통해 프랑스 부르주아 가정들의 실체 없는 허영을 비꼬기도 하고, 영화 속 표현대로 식민지를 정리하는 때에 인도차이나에서 식민지 전쟁을 벌이는 프랑스 정부를 비난하기도 한다. 또한 엄격한 듯 하지만 일탈을 일삼는 학교 교육을 조롱하고, 어른들의 이중적 가치관을 비웃기도 한다. 당시 사회적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어떻게 세계관을 완성하는 과정과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었는지 로랑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유머와 위트가 담긴 이 이야기들은 전체적인 극의 완급을 효율적으로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소소한 사건들과 함께 영화 전편에 흐르는 재즈를 듣는 것도 <마음의 속삭임>을 즐기는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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