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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23 <레볼루셔너리 로드> 충돌하는 욕망들 - Who is right? (4)
  2. 2008.11.06 <바디 오브 라이즈> 또 한 번의 복습
2009.03.23 11:30

<레볼루셔너리 로드> 충돌하는 욕망들 - Who is right?


<레볼루셔너리 로드> 충돌하는 욕망들 - Who is right?


U.S.; 2008; 119min; Drama; Color
Director: Sam Medes
Cast: Leonardo Dicaprio, Kate Winslet, Kathy Bates, Michael Shannon

 
1925년 발표된 버지니아 울프의 네 번째 장편 소설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영국의 중상층 사람들의 하루를 담고 있다. 파티를 준비하는 댈러웨이 부인의 시선에서 시작하는 소설 속 이야기는 그녀와 연결된 여러 인물들의 내면과 의식을 농밀하게 훑고 지나간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군상들이 바로 그들이다. 영광 못지 않게 많은 상처를 안겨준 전쟁은 그들의 '삶'에 있어 현실성을 극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전장에서 가까운 누군가를 잃어버린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다름 아닌 살아있음(생존)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숨을 쉬고,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있다는 사실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충분조건이 되는 것일까? 적어도 버지니아 울프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그녀가 당시의 소설 양식을 거부하고 선택한 <의식의 흐름>을 통해 그토록 인물의 내면에 침잠했던 이유는 분명 인물의 존재는 밖이 아닌 안을 통해야만 볼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댈러웨이 부인> 속의 인물들은 과연 어떤가? 버지니아 울프가 만들어 낸 인물들은 모두 그녀의 펜끝에 자신들도 미쳐 감지하지 못했던 의식의 깊은 곳까지 드러내게 된다. 활자로 옮겨진 그들의 내부는 겉모습과 닮아 있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한 가지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어느 누구도 '확신'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파티를 열고, 휘트브레드는 권력을 탐하고, 브래드쇼는 사람들의 존경을 구하고, 브랜튼 여사는 명예를 떠받들고, 샐리는 평범한 주부의 모습에 안주한다. 모두들 각자의 방법으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확신에 찬 듯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자신의 삶이 진정으로 원하는 곳으로 흘러가는가?' 의 질문 앞에서 그들은 모두 주저한다. 댈러웨이 부인, 샐리, 피터의 삶은 그들이 젊은 시절 욕망하고 꿈꿨던 것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중년에 접어든 그들은 어디를 가든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누군가가 되어 있을 뿐이다. 이들은 모두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못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겉모습과 달리 이들의 안(內)은 회의와 의심으로 가득차 있다.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과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대부분은 전자의 승리로 끝이 난다. 이들의 반대편에 셉티머스가 있다. 모순적이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삶을 포기한다. 정상인의 루트에서 벗어난 그래서 정신병자라고 낙인이 찍혀버린 그는 일반적인 욕망의 잣대들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견디지 못한다. 그가 창밖으로 몸을 던진 이유는 '타인의 욕망'에서 '자신의 욕망(존재)'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댈러웨이 부인이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는 셉티머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 마음이 동요하는 이유는 분명 그녀 역시도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현실적 욕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욕망들은 모두에게 공유되고 있는 것들이다.(그 욕망은 '수상'으로 요약된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타인을 바라보며 마음의 안도감을 얻는다. "내가 틀리지 않게 살고 있어..." 그 안도감은 댈러웨이 부인이 한없이 못마땅하면서도 그들을 파티에 불러 모으는 이유이다.
 

샘 멘더스의 새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한 중산층 가정의 위험하고도 위태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작 <아메리칸 뷰티>를 통해 미국 중산층 가정의 모순과 허위를 풍자적이면서도 극적으로 그려냈던 감독은 이번에도 역시 평화롭기만 해보이는 한 가정의 은밀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결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가 알고 알고, 모두가 갖고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순간 그 폭발력을 감당할 수 없어 평생을 없는 척 묻어둬야 하는 그런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솔직히 영화를 보면서는 <레볼루셔너리 로드> 역시 <아메리칸 뷰티>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 갇힌 사람들의 파국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일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생뚱맞은 생각도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담고 있는 엄청난 텍스트를 곱씹을수록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 계속해서 생각의 이곳저곳을 파고들었다. 앞에서 소설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길게 풀어쓴 이유이기도 하다. 

공간도 시대도 다른 두 텍스트가 오버랩되는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어쩌면 각각 1차 대전과 2차 대전 직후라는 상황적 유사성이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소설과 영화 속의 캐릭터와 그 인물들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이야기에 있다.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은 댈러웨이 부인을 닮아 있고,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피터와 리차드를 섞어놓은 듯하다. 존(마이클 새넌)은 셉티머스의 또 다른 모습이고, 그들을 둘러싼 이웃은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장에 모인 사람들과 연결된다. 이 인물들은 모두 욕망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욕망은 한 개인의 내부에서부터 충돌을 일으킨다. 하지만 결국 선택되고, 행동으로 옮겨지는 욕망은 사회가 허용하고 합의한 범주 내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공허하고 희망은 없더라도 최소한 다른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안도감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그 범주에서 벗어난 욕망을 시도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부러움을 느끼지만 그보다 더한 '공포'를 느낀다. 사람들이 정신병자로, 낙오자로, 부적응자로 그 이탈자를 낙인을 찍는 이유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인물들 역시 평범한 듯, 평화로운 듯 살아가지만 각자의 욕망을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욕망이 표출되었을 때 갈등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욕망

애이프럴(케이트 윈슬렛)은 특별하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직업과 이름을 묻는 대신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냐." 고 묻는다. 그리고 그와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동화 속에나 있을 법한 교외의 조용한 마을(Revolutionary road)에 살고 있는 그녀는 중산층이라면 누구가 꿈꾸는 부족함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욕망하는 바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재능이 없음에도 연극배우를 놓치 않는 것은 뭔가 다른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무대가 아니면 청소와 빨래, 육아로 정작 자신은 누구인지 잃어버리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사는 삶에 숨이 막힌다. 피터의 <영혼의 죽음>이라는 말이 댈러웨이 부인을 도망치게 했던 것처럼, 범부의 삶은 애이프럴에게 영혼이 없는 삶일 뿐이다. 애이프럴은 스스로 욕망을 이룰 방법을 잃어버렸을 때, 자신의 욕망을 남편을 통해 이루고자 한다. 모든 안락하고 보장된 환경을 뒤로하고 파리로 떠나고자 했던 것. 애이프럴은 파리가 남편의 진정한 삶을 찾아줄 수 있는 곳이라 믿었다. 하지만 사실 파리는 남편의 욕망이 아닌 그녀의 욕망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 욕망이 좌절됐을때 그녀는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다. 자신의 욕망을 좌절시킨 남편에 대한 실망과 뱃속의 아이에 대한 원망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만약 댈러웨이 부인이 리차드가 아닌 피터와 결혼을 했다면 그녀 역시도 애이프럴과 닮아 있지 않았을까? 

그의 욕망

애이프럴에게 파리로 가자는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프랭크는 비웃으며 "Great!!!"를 연신 외친다. 현실성 제로의 제안이 당황스럽고 황당했을 뿐이다. 하지만 평범한 회사원으로서의 공허한 일상과 희망이 없는 미래에 그 역시 지쳐가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탈이란 아내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아내의 계속된 설득에 프랭크 역시 파리에 대안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금씩 갖게 된다. 결국 그는 가족과 함께 파리에서 자신의 진정한 삶을 찾을 계획을 세운다. 한동안 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날 기대감으로 행복에 취해 있지만 일상의 욕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그를 포기하지 않는다. 회사의 승진 제안과 아내의 임신은 그가 '현실의 욕망'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리고 전혀 다를 수 있었던 삶을, 그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을 기회를 포기한다. 그에게는 "미래의 무엇"이 아무리 핑크빛일지라도 그것을 위해 현재의 모든 것을 내던질만큼의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누구나 탐을 낼만한 달콤한 현실의 욕망들이 있다. 문제는 "혁명적 길"을 포기한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와 존(마이클 새넌)의 시선이다. 프랭크는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려 하지만 아내와 존에게 자신은 그저 내면의 욕망에 애써 침묵하는, 또 한 명의 범부가 되려는 비겁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 시선을 견디기 힘들다. 그에게 파리는 처음부터 실현되지 않을 꿈이었을지 모른다. 그저 퇴근 시간 건물에서 우르르 몰려 나오는 직장인들이 술자리에서 희망 없이 내뱉는 레퍼토리처럼 말이다.


그리고 타인의 욕망

영화의 배경이 되는 레볼루셔너리 로드... 그곳은 미국의 안정적인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평화로운 곳이다. 미국인 누구라면 꿈을 꾸는 그런 곳이다. 그 곳에 프랭크 부부가 이사를 온다. 중개인 헬렌의 말처럼 마을에 가장 어울리는 부부일지 모른다. 비슷한 일상을 즐기고, 꿈을 공유하며,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 헬렌이 자신의 아들 존을 프랭크 부부에게 소개시켜주는 이유 역시 그들 부부에게서 '건전한 상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프랭크 부부가 파리행을 결정했을 때 그들의 기대는 무너진다. 앞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철없고 대책없다고 단정한다. 프랭크 부부가 모두가 공유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동이 자신들의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 두려워한다. "어리석은 짓이야." 남편 셉의 말 한 마디에 밀리는 눈물을 쏟아낸다. 아마도 그녀는 남편의 말에서 자신의 가정은 그런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레볼루셔너리 로드 사람들에게 일상은 절대적이고, '변화'는 두렵기만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비춘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허황되지 않은 건전한 욕망이라는 확신과 안심을 얻는다. 다른 욕망이 있더라도 절대 밝혀서는 안 된다. 아예 없던 것처럼 여기고 살아야 한다. (셉 캠벨은 애이프럴에 대한 욕망을 끝까지 함구한다.) 만약 누군가 그 확신에 돌을 던진다면 더 이상 좋은 이웃과 친구가 될 수 없다. 마치 "존"이 정신병자가 된 것처럼 말이다. <댈러웨이 부인>의 셉티머스와 닮아 있는 존 역시 끝없이 '전향'을 요구받는다. 그가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방법은 일상은 공허하지 않고, 그 곳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전향)이다. 하지만 셉티머스가 전향을 거부하고 창밖으로 몸을 던졌듯이, 그 역시 사회의 요구에 저항한다. 마음이 통할 것이라고 믿었던 프랭크 부부에게서 얻은 실망은 그래서 더욱 거칠게 폭발한다. 애이프럴의 욕망, 프랭크의 욕망,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타인의 욕망은 모두 다르다. 솔직히 그들 각자가 어떤 욕망들을 갖고 사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들이 평화를 유지하며 사는 방법은 그저 일상을 벗어나지 않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목표들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단지 나른한 봄날 어쩌다 한 번 씩 생각하는 달콤한 욕망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과연 누가 옳은가?

샘 멘더스의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리차드 예이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원작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감독은 영화에서 과연 누가 옳은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누가 옳은 것인가? 당신은 누구의 편에 서겠는가? 불필요한 욕망은 접어둔 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들은 내심 프랭크 부부의 성공적인 파리 안착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영화니까 가능하겠지..." 라는 생각을 갖으면서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애이프럴의 입장에서 그녀의 시도와 절망에 계속 마음이 쓰인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눈앞의 보장된 성공을 선택한 프랭크를 비겁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정확히 모른채 무작정 파리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 애이프럴의 욕망이었다. 가장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현실의 벽을 높게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주고자 헌신했지만 절망감에 아이를 스스로 포기한 애이프럴은 동정 받을 수 있을까? 그녀에게 도덕적, 윤리적 잣대만을 들이댄다면 절대 그럴 수 없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며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었던 그녀가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을 때 느꼈을 박탈감은 여전히 그녀는 보듬게 만든다. 그녀에게는 앞으로 '영혼이 없는 삶'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애이프럴에게는 의미 없는, 곧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이다.


이렇게 보면 누가 옳은가의 질문은 무의미하다. 어찌 보면 옳고 그름의 질문 자체를 봉쇄하는 것이 프랭크와 애이프럴, 그리고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회의와 염증을 가졌던 존은 정신병자가 됐고, 도전하고자 했던, 벗어나고자 했던 애이프럴에게 찾아온 것은 결국 비극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를 유지시킬 수 있는 욕망일 뿐이다. 다른 것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사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메리칸 뷰티>에서 통쾌한 일탈을 시도했던 래스터 번햄은 '비극적 해피엔딩'을 맡는다. 릭키의 말처럼 그의 죽음은 일면 아름답다. 하지만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결말은 수식어가 필요 없는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이 아직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현실이다. 미국이든, 대한민국이든 어디에도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P.S. 1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이젠 두말 할 필요가 없겠다. 솔직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은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더 어울린다.(<더 리더>에서의 연기가 더 못하다는 말이 아니다. <더 리더>는 한나의 이야기라기보다 마이클의 영화기이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선이 굵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디카프리오 역시 프랭크의 캐릭터를 잘 소화한다. 하지만 수염을 깍은 말쑥한 얼굴의 디카프리오는 너무 동안이다. 살을 찌워 몸은 자연스럽지만 같은 또래의 케이트 윈슬렛이 가지고 있는 원숙함이 그의 얼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애이프럴과 프랭크는 부부라는 느낌이 다소 들지 않는다. (어떤 때는 엄마와 아들 같기도 하다.) 동안도 배우에게는 꼭 좋은 것만은 아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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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6 20:57

<바디 오브 라이즈> 또 한 번의 복습

<Body of lies> 또 한 번의 복습
U.S.; 2008; 128min; 35mm
Director: Ridley Scott
Casting: Leonardo Dicaprio, Russell Crowe, Mark Strong

 
'중동(Middle East)'은 예전부터 이야기의 보고이자 원천이었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숱한 이야기의 배경이 된 곳이고, 세헤라자데가 천 하루 동안 죽지 않기 위해 왕에게 300편 가까운 이야기(아라비안 나이트)를 해준 땅이기도 하다. 그 밖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산문과 시가 그 땅에서 피어났다. 하지만 중동의 발견은 이미 '중동'이라는 말 자체가 보여주듯 스스로가 아닌 유럽에 의해서 이뤄졌다. 그래서 중동의 이야기는 언제나 유럽의 시각에서 출발하는 비극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에게 중동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가 미개와 정복의 영역이라면,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신비의 영역이었다. 전자가 그리스, 로마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유럽과 중동 사이의 전쟁의 역사에서 비롯됐다면, 후자는 기독교의 탄생지라는 종교적 의미에서 시작된 측면이 강하다. 이젠 학술 용어를 넘어 일상어처럼 쓰이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의 실체가 그것이다.

유럽에 의해 '타자'로 존재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중동. 실제 중동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숱한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손을 거치며 실체 없는 중동의 이미지와 이야기는 마치 진실이자 사실인양 현실에서 존재하게 됐다. 에드워드 사이드를 비롯한 학자들의 연구로 오리엔탈리즘의 허구성이 여실히 들어났음에도 한 번 '고정된 신화'는 여전히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오히려 현대로 오면서 수정과 개선 보다는 갈수록 고착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과거와 상대가 되지 않는 과학과 기술의 차이, 서구 통신사들이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엄청난 양의 기사들, 그리고 경제력의 차이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중동은 현재에도 여전히 타자로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이슬람을 믿고 아랍어를 쓰는 아랍 민족은 별다른 고민 없이 위험하고, 미개하고, 계몽이 필요한 대상으로 무한 재생산되고 있다.  

유럽 이후 중동을 주목한 것은 '미국'이었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관리 차원에서 또 다른 '적'이 필요했던 미국에게 중동은 안성맞춤의 지역이었다. 사람들의 기존 인식에 편승하여 미국은 중동 지역에서 막대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 땅을 요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질 않았지만 중동은 미국의 뜻대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랍인들의 민심을 자극하면서 중동을 전 세계의 새로운 화약고로 만들었다. 온갖 테러의 원산지가 되어 버린 중동, 그 곳은 미국이 지배하는 국제 질서에서 실제하는 '악의 축'으로 존재하게 됐다. 중동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새로운 '신화'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테러는 이야기의 블랙홀 <헐리우드>에게 역시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과거 이야기의 보고였던 그 땅은 헐리우드를 통해 다시 옛 명성을 되찾게 된 것이다. 물론, 과거와 지금 거대한 영화 공장에서 생산되는 이야기들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헐리우드에서 잔뼈가 굵은 한 명의 감독, 리들리 스콧이 중동에 손을 댔다. 2002년 <블랙 호크 다운>에서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전쟁를 다룬 적은 있었지만, 중동을 배경으로 테러를 소재로 한 것은 처음이다. 리들리 스콧에게 새로운 중동이야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부터 반신반의였다. 씨네필들의 입에 거품을 물게 하는 <블레이드 러너>, <에일리언> 등의 명작을 만들었음에도 중간중간 졸작들을 쏟아냈던 그의 부침이 심한 필모그래피에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근작이었던 <아메리칸 갱스터>를 봤을 때 상승세를 타고 있음이 분명하고, 대형 블럭버스터 전문 감독답게 재미는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있었다. 제목은 <Body of Lies>. '거짓의 실체' 정도로 옮길 수 있는 제목이 붙은 영화는 '과연 거짓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짓이 감추고 있는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를 기대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간단히 말하면 이 영화 상당히 아쉽다. 새로운 중동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변화는 커녕 현실 문제에 대한 고민조차 없어 보인다. 감독이 왜 이야기의 배경으로 중동을 선택했는지 당위성도 없다. 그렇다고 블럭버스터로서 굉장히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라크, 요르단, 시리아, 아랍에미리트 등 엄청난 물량을 퍼부어 거의 중동 전 지역을 무대로 하고 있음에도 이야기는 늘어지고 긴장감도 없다. 언제부턴가 리들리 스콧의 페르소나가 돼 버린 러셀 크로와 과거 꽃미남 이미지 던저버리고 CIA 요원으로 생고생 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포함한 등장 배우들의 호연이 아까울 정도다. 극장문을 나서서도 과연 거짓은 무엇이며 그 실체는 또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2시간 넘게 스크린만 보고 나온 기분이다. 새로운 이야기에도 실패하고, 블럭버스터로서 흥미까지 놓치고 있는 리들리 스콧의 <Body of Lies>.  

이야기 중심은 세계 전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중동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와 이에 공동대응하는 미국의 CIA와 아랍권 국가들의 갈등에 있다. 지극히 현실적이다. 9.11을 기점으로 이슬람의 보이지 않는 테러가 유럽을 비롯한 전 지역을 휩쓸었고, 이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미국을 포함한 서방세력들의 눈물나는 노력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중이다. 여기까지는 테러를 다룬 영화들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던 스토리다. 하지만 현실의 비극을 스크린으로 옮기면서 리들리 스콧은 미국과 중동 국가 사이의 미묘한 알력 싸움을 같이 다루고 있다. 아랍권에서 대표적인 친미 성향으로 알려진 요르단의 정보국과 CIA 간의 정보 싸움이 그것이다. 위성을 통해 골목골목까지 앉은 자리에서 훑어보고 있는 CIA와 내부첩자를 통해 조직의 붕괴를 노리는 요르단 정보국. 디지털과 아날로그로 대변되는 둘은 테러 조직의 척결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한다. 서구와 중동 사이의 불신은 현실의 아군을 뛰어넘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 비참하고 슬프다.

두 조직 사이에 극을 이끌어가는 CIA요원 페리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있다. 그는 냉철한 판단이 필요한 정보요원이지만 기본적으로 정많고 따뜻한 천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값싼 감정을 제외하고 작전 수행에 필요한 것만 생각할 것을 강요하는 CIA 직속상관 호프만(러셀 크로)과 사사건건 부딪힌다. 반대로 이슬람의 사람들은 아날로그적이다. 그래서 인간적인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르단 정보국의 수장 하니(마크 스트롱)는 정보 공유를 위해서페리스에게 아군 이전에 친구로서의 신뢰를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페리스는 힘겹게 하니와 친구가 되지만 테러집단 <알 살림>의 수장을 잡기 위한 공동작전을 시작한 미국와 요르단은 서로에 대한 불신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상대가 모르는 비밀스러운 작전을 수행한다. 그리고 페리스는 그 사이에서 희생양이 될 뿐이다. 영화의 제목이 말하고 있는 '비밀의 실체(body of lies)'는 곧 페리스가 처한 상황을 의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영화에서 테러조직의 이야기는 주변부로 밀려 있다. 핵심은 CIA와 요르단 정보국 사이의 두뇌 싸움이고, 그 가운데서 번뇌하고 희생하는 페리스이다. 그래서 영화의 최대 약점은 도대체 왜 CIA와 정보국이 서로한테 쉬쉬하면서 작전을 세우고, 머리를 굴리면서 '테러조직'을 없애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무모한 사람들을 죽이기 때문에? 혹은 아랍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복마전이기 때문에? 그것은 현실에서 이미 무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을 재현한 것일 뿐이다. 극에서 테러조직은 '공공의 적'이기 때문에 없애야 할 대상일 뿐이지, 여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흔적은 한 번도 보이지 않는다.(이런 점에서 <바디 오브 라이즈>는 전작 <아메리칸 갱스터>에 비해 후퇴한 측면이 분명하다.) 현실에서 굳어진 테러집단에 대한 이미지를 고스란히 빌려와 그저 영화 속 이야기 즉, CIA와 정보국이 싸울 구실 역할을 할 뿐이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절대 악인' 알 살림의 대장이 잡히고, 주인공 페리스가 죽기 전에 지옥과 같은 테러집단 아지트에서 살아남는 결말은 007시리즈의 어느 한 편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이 느껴진다. '중동'은 애초에 사라지고 헐리우드의 뻔한 이야기만 남았을 뿐이다.

다음은 캐릭터 구성의 실패다. 가장 심각한 것은 영화의 중심이 되는 페리스의 캐릭터가 겉도는 것이지만 레오의 호연덕에 그냥저냥 봐줄만하다. 봐주기 힘든 것은 CIA의 호프만과 요르단 정보국장 하니의 캐릭터다. 둘은 여러면에서 극단에 서 있는 인물들이다. 호프만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에게 중동과 중동 사람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 따위는 없다. 이슬람의 테러조직은 평화를 위해 없애야 할 사람이고, 그것을 위해 중동 사람 몇몇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슬람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도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호프만은 지극히 가정적인 사람이다. 일을 하는 순간에도 딸아이를 학교에 바려다주고 가족을 위해 몸바쳐 봉사한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은 상영 내내 쉼 없이 반복된다. 결국 "그래 토끼같은 자식과 여우같은 마누라를 평화롭게 살릴려면 저렇게 독하게 해야지." 하는 동정마저 들 정도이다.

하니는 정반대다. 그는 이슬람을 믿는 사람답게 호프만과 달리 신의와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에서도 이성보다는 페리스와의 감정적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겉모습과 달리 화면을 통해 비춰지는 그의 모습은 냉철하고 잔인하다. 테러조직에 첩자를 심고 그의 가족들을 이용해 조직을 배신하게 만든다. 배신자에 대한 폭력도 주저하지 않는다. 악을 잡기 위해 자신에게 신뢰를 보여준 페리스를 이용하는 것 역시 주저하지 않는다. 왠지 얄미우면서 정이 가는 호프만과 달리 하니는 뭔가 음흉하고 믿지 못할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호프만이 증동에 남기를 원하는 페리스를 풀어주는 장면에서 그의 모습은 '쿨'하기 까지 하다. 반대로 목적을 위해 페리스를 이용한 하니의 모습에서는 극도의 '잔인함'만이 남게 된다. 호프만과 하니의 대비되는 캐릭터는 미국(적어도 헐리우드)에서 현실문제에 대해 가지는 전형적이고 고정된 생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페리스와 로맨스를 담당하는 에이샤(골쉬테프 파라하니)는 더욱 애매모호하다. 이란 출신 간호사로 등장하는 에이샤는 그야말로 착하고 맑고 순수한 캐릭터다. 남자들의 온갖 더러운 추태가 벌어지는 전장에서 페리스에게 그녀의 존재는 오아시스와도 같다. 에이샤 역시 신분을 속이고 접근하는 페리스의 호감이 싫지 않다. 그녀는 페리스를 가족에게 소개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와 거리를 다닐 정도의 이슬람 신여성이다. 하지만 전장의 꽃처럼 그녀 역시 본의 아니게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하니가 그녀를 이용해 페리스가 스스로 테러집단에 미끼로 들어가게 만든 것. 그녀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다. 페리스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끝이다. 남자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그의 여자를 이용한다는 것. 얼마나 쉬운 이야기 흐름인가. 사실 에이샤가 등장할 때부터 이런 식의 뻔한 이야기 흐름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극에서 그녀의 역할이란 단지 페리스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그를 곤경에 빠뜨리는 부수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Body of Lies>는 기존 이슬람에게 부여된 지독히 이분법적인 신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뭔가 새롭게 보이기 위한 흔적들이 보이긴 하지만 깊게 고민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냉전 끝나고 악당이 없어 중동에서 새로운 목표를 발견한 제임스 본드를 보는 느낌? 그것도 리들리 스콧의 손에서 만들어진 제임스 본드. 이 때문인지 번잡한 시장에서 벌어지는 수 차례의 액션장면과 TV 뉴스에서 봄직한 테러조직의 인질 살해 장면은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하지만 왠지 씁씁하고 공허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리들리 스콧의 다음 영화를 기대해 봐야 겠다. 이럴 거면 중동에는 이제 손을 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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