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3.12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독일인의 사랑 (6)
  2. 2008.12.19 <라콤 루시앙> How can we judge him?
2009.03.12 12:30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독일인의 사랑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독일인의 사랑


German, U.S.; 2008; 123min; Drama; Color
Director: Stephen Daldry
Cast: Kate Winslet, Ralph Fiennes, David Kross, Bruno Ganz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법을 어겼다. 죄는 단지 법률에 어긋난 행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양심과 도덕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적법'한 절차를 통해 죄에 응당한 처벌을 받는 것 뿐이다. 그 결정은 물론 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법을 행사할 수 있는 힘(사법권)은 국가만이 독점할 수 있다. 이것이 법치주의이고,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총이나 칼을 들고 피의자를 단죄하는 '친절한 금자씨'와 같은 행동은 또 다른 단죄의 대상이 될 뿐이다. 사적인 집행은 법치의 논리에서 엄연한 위법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범죄자는 검찰의 기소와 법원의 재판을 거쳐 판사에 의해 '형'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적법한 절차가 과연 '범죄자의 속죄'를 담보하는 것일까? 범죄자에 대한 법 집행의 목적은 사회 질서의 유지를 위한 것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범죄자의 교화에도 있다. 죄를 뉘우치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거듭나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기능과 목표에 군더더기 남지 않는 설명이 어렵다면, 법의 집행은 그저 주어진 형을 채우는 것 외에는 큰 의미가 없다. <밀양>의 유괴자처럼 온전한 속죄는 법에 의해서가 아닌 하느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양심에만 기대야 하는 것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이런 복잡한 생각을 보기 좋게, 사용하기 편하게 정리한 것이 '법' 아닌가...) 

이건 분명히 개인의 수준이었다. '한 명'의 문제라면 그렇게 어렵지 않을수도 있다. 솔직히 우리가 살을 대고 같이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법원의 엄중한 판결이나 감옥에 가기 전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속죄하기 위한 무던한 노력을 할 것이다.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만약에 범죄의 대상이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집단의 기억, 집단의 행동은 개인에게 더할 나위 없는 면죄부가 되기 마련이다. "왜 나한테만 잘못했다고 그러는가. 숱한 사람들이 나와 같은 행동을 했다. 그 사람들을 모두 내 앞에서 나와 같이 처벌하라."고 목을 높인다면 그에 대한 깔끔한 대답은 무엇이 가능할까. 법원의 판사는 단지 "더럽게 운이 없게도 당신만 꼬리가 잡혔어요." 라며 증거가 될만한 것들을 피고 앞에 던져줄 수 있을 뿐이다. 만약에 '한 국가' 전체가 피의자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피해를 입은 이웃의 나라들이 현대식 무장을 하고 국경을 넘어 단죄를 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역사적으로 가장 간단하고 빠른 해결책은 그랬다. 그렇다면 이 집단의 피의자들은 타(他)국가들에 의해 부과된 형벌을 달게 받으며,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을 갖게 될까? 만약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들의 '속죄'는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이 속죄의 역사는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고민으로 가장 치열하게 20세기를 보낸 국가를 꼽으라면 단연 '독일'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20세기의 반토막을 통째로 전쟁통으로 몰아 넣은 이 무시무시한 국가가 행한 짓은 역사책에 기록하기도 죄스러울 정도였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집단의 광기가 얼마나 폭발적인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두고두고 후세 사람들에 경계시킬 수 있는 "모범적인 사례'를 남겼다.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가져온 이들에 대한 단죄는 물론 그들과 맞서 싸운 국가들에 이루어졌다. 독일은 프랑스에 영토를 할양했고,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네 토막으로 분열돼 감시하에 놓이게 됐다. 하지만 이런 전범 처리는 공식적인 것일 뿐이다. 과연 엄청난 만행과 그에 대한 조치들이 독일인들의 양심에 죄책감을 심어주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속죄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피의자로서의 역사는 후세대에 어떻게 기록되어야, 기억되어야 하는 것일까?  더 나아가 이들의 '치유'는 어떻게 가능할까?

독일인들에게 추악한 과거는 도망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공식적인 전후 처리는 끝났을지언정, 그들은 여전히 죄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독일의 총리는 때가 되면 이스라엘 국회에서 고개 숙여 사과를 하고(일본의 수상이 우리 국회에서 지난날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는 장면을 떠올린다면 이건 엄청난 일이다.), 나치의 광기가 재점화 되는 것에 대해 극도로 민감하게 대처하고 있다.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스스로 전쟁 시절 만행을 폭로해왔고, 이는 앞으로 국제사회의 평화를 지향하는 일원이 되겠다는 다짐이었다. (요즘 다시 나치들의 날뛰고 있긴 하지만) 독일에서 나치는 더 이상 영광의 역사가 아닌 치욕의 역사일 뿐이다. 씻을 수 없는 죄의식... 문제는 이제 '치유'의 수준이다. 죄인에게 절대 씻기지 않을 죄책감이면 됐지 무슨 치유가 필요하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들이 가지는 죄의식, 죄책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치유 없는 죄책감'이 잘못 됐을 경우 더 큰 폭력을 야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치유는 피해자 뿐만 아니라 피의자의 수준에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단지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죄인들의 잘못을 용서해줄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치유는 타자에 의해서가 아닌 그들 스스로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엄청난 광기의 시대를 숨죽이며 살았던 사람들과 그 이후 세대들이 짊어져야 했던 죄의식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빌리 엘리어트>와 <디 아워스>의 스티븐 달드리의 세 번째 장편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먼저 상영됐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효과 였는지 상영 때마다 매진이었다.) 베른하라트 슐링크의 1995년 소설을 토대로 한 <더 리더>는 원작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을 완벽하게 스크린으로 옮기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누구나 가질 법한 첫사랑의 알싸한 기억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결코 달달하게 끝낼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도덕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문제제기, '법'이 가질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한계, 인간과 집단의 죄의식, 그리고 치유를 위한 은유까지... <더 리더>는 나치가 범한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굉장히 지적인 서사를 풀어낸다. 그리고 이 서사는 이제껏 홀로코스트 관련 영화들이 미치지 못했던 경계를 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홀로코스트 영화들은 역사적 사실의 고발이나 폭로의 단계에 집중되어 있던 점이 사실이다. 물론, 그 시도 자체도 충분한 의미를 갖지만 <더 리더>는 이를 넘어 '속죄'나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법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영역'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굉장히 특이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그 메시지까지 독일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난 개인이든, 집단이든 '지울 수 없는 죄의식의 역사'를 가진 이들에게 공히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더 리더>의 이야기가 강렬하고 집요하게, 아름답고 따뜻하게 담아내고 있는 문제들은 분명 인간 보편의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열 다섯의 마이클이 비가 많이 내리는 이른 봄 열병을 앓는 것에서 시작한다. 온몸이 고열에 시달리는 병은 마치 사춘기 시절 강렬하게 시작되는 첫사랑과도 닮아 있다. 그리고 마이클은 우연처럼 그를 도와준 16살 연상의 전차 검표원 한나를 사랑하게 된다. 반듯한 모범생에 지나지 않았던 마이클은 무더운 여름 만큼 그녀와 진한 사랑을 나눈다. 그녀를 통해 남자가 되고, 아이가 아닌 어른이 된다. 하지만 책을 읽어주는 걸 유난히 좋아하던 한나는 어느 날 이유를 남기지 않고 그를 떠난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만난 곳은 8년 후 법정.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세미나에서 참관한 한 법정에서 피고인으로 앉아 있는 한나를 보게 된다. 그녀의 죄는 전쟁 시기 나치당원으로 유태인 홀로코스트에 가담했다는 것. 마이클은 첫사랑을 만났다는 기쁨보다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자신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너무도 참혹한 죄를 저지른 한나가 '적법'한 처벌을 받는 모습을 지켜볼지, '죄인'이라는 주홍글씨에서 그녀를 구해줘야 할지, 그녀의 비밀을 지켜줘야 할지... 마이클은 치열한 고민 끝에 결국 침묵을 지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이클은 '감정'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결혼을 했지만 아내에게도 심지어 딸에게까지 마음을 주지 못한다. 죄인을 사랑했던 기억, 지금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 그녀를 구하지 못한 미안함이 그에게 있어 하나의 죄의식으로 남아 있다. 그 죄의식과 함께 변호사가 된 지금 당시의 판단이 과연 옳았는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형체를 알 수 없게 얽혀 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공유할 수 없는 그 만의 '비밀'이 된 채 말이다. 마이클은 시간이 흘러 성장한 딸과 함께 찾은 고향집에서 한나와의 추억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가 한나에게 읽어줬던 책들... 마이클은 그 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기억하려 하지 않았던 과거로부터 현재 엉망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마이클은 다시 한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곧 자신의 과거 속에서 또렷하게 살아 있는 죄의식과 대화를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글을 익힌 한나로부터 편지가 오지만 그는 답장을 하지 않는다. 아직 그 죄의식의 실체와 대면할 준비가 안 된 듯 말이다. 다시 시간이 흘러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한나가 가석방을 앞두고 그에게 연락이 온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위해 일할 곳과 살 곳을 마련한다. 

석방을 일주일 앞두고 긴 세월을 돌아 다시 만나게 된 한나와 마이클. 하지만 그들의 변한 모습만큼이나 둘의 만남은 전혀 감격적이지 않다. 수감 기간 동안 배운 건 '글' 뿐이라는 한나의 모습은 마이클이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한나의 입을 통해 진정한 속죄와 치유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죄의식에서 가벼워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색하게 헤어지고 난 후 마이클은 한나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그녀가 남긴 건 짧은 편지와 수용소의 피해자들 몫으로 남긴 그녀의 전재산이다. 그리고 마이클은 미국으로 건너가 "한나 자신이 해야 했던 일"을 대신한다. 영화의 마지막, 마이클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비밀을 딸에게 들려준다.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듯 말이다.


마이클이 가진 죄의식의 실체는 한나이다. 자신보다 16살이나 많은 여자를 사랑한 것에 대한, 진한 에로티시즘에 빠진 것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너무도 참혹한 죄를 저지른 죄인이며, 그녀에게서 어떤 참회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마이클이 여전히 그런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생 그녀 아닌 누구도 마음에 담지 못할 만큼 그의 인생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한나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이 그녀가 행한 모든 행동들과 그녀를 사랑하는 마이클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곧 마이클이 가진 죄의식에 대한 치유는 한나를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리더>에서 마이클이 사랑하는 한나는 두 가지 은유를 갖는다. 하나는 '독일 그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나치에 복무했던 평범한 독일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이클이 평생을 떠안은 죄의식은 곧 사랑하는 모국 독일에 대한 죄의식이기도 하면서, 나치에 복무했거나 그에 침묵했던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죄의식이기도 하다. 법대 세미나 장면에서 교수와 학생들은 법정 판결을 두고 열띤 논쟁을 벌인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친구 볼커는 전쟁 시기 유럽에 수용소가 수 천개였으며, 그 곳에서 일한 셀 수 없는 나치들이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에게 한나와 같은 사람들은 최소한의 도덕적 양심마저 잃어버린 파렴치일 뿐이다. 마이클은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말을 내뱉는 마이클 마저도 그의 목소리에 힘을 실지 못한다. 그리고 '법의 한계'를 부르짖는 볼커의 거침없는 주장에 한 학생은 더 듣기가 괴로운 듯 강의실을 박차고 나간다. 그 역시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나치를 위해 일했던 누군가를 침묵한 채 살고 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죄의식을 가진 '또 하나의 마이클'이다. 이런 점에서 한나가 독일 내지는 나치를 위해 죄를 저지른 독일인들을 환유한다면, 마이클은 그들 때문에 평생 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독일 사람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이후 영화는 마이클이 자신의 죄의식과 직면하고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이는 곧 사랑하는 국가와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평생 죄의식에 시달렸던 평범한 독일 사람들을 위한 치유이기도 하다. 법정에서 처음 한나를 보고 그녀를 찾아 갔을 때, 마이클은 몇 걸음 앞에서 방향을 돌린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녀 앞에서 왜 마이클은 걸음을 돌렸을까? 그녀를 만나기 전 참혹한 홀로코스트 현장을 둘러보며 그는 '사랑하는 한나'가 아닌 '추악한 죄를 짓고 형무소에 갇힌 한나'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첫사랑의 존재이자, 죄의식의 실체였던 한나라는 모순적인 존재로 인해 편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긴 시간이 흘러 가석방을 앞둔 한나와 다시 만났을 때, 그는 한나에게 과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감옥에서 배운 게 무엇인지 묻는다. 이것은 마이클이 죄의식에서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수 있는 필요조건이다. 누차 말했듯이 마이클의 죄의식은 한나를 통해서만 덜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판사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느냐." 며 어쩔 수 없었던 입장을 호소하던 한나는 마이클을 만나고서야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에게 절대 지워지지 않을 상처와 죄책감을 남긴 것이다. (나치는 곧 독일인들이 갖는 죄의식의 실체이다.) 마이클이 돌아간 후 결국 한나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전 재산을 피해자들에게 전한다. 그것이 잘못된 선택에 대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죄인듯 말이다. 그리고 마이클은 그녀를 대신해 피해자에게 힘든 용서를 구한다. 그 용서에는 평생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함께 담겨 있다. 빗장에서 자유로워진 마이클의 비밀은 결국 그를 치유하는 시작이 됐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그는 '딸'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치 독일이 가진 죄의식의 역사가 앞으로 어떻게 기억되고, 기록되어야 하는지 암시하듯...


덧붙여 처음 얘기했듯이 <더 리더>가 홀로코스트라는 특수한 상황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 메시지는 보편적인 울림을 갖고 있다. 해방 후 15년과 20년 동안 각기 두 명의 지도자에 의해 독재를 경험한 우리에게도 마이클의 치유는 적지 않은 메시지를 던져 준다. 아직까지 이어지는 독재의 흔적들과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역사를 어떻게 기억해야할 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더 리더>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뜨거워지게 하는 영화를 만났다. Thak you...





P.S. 1 책과 영화가 나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치를 미화하는 작품이라는 비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효자동 이발사>가 박정희를 미화했다는 평가만큼이나 텍스트 자체를 통째로 오독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더 리더>는 한나를 이해해야 한다는 텍스트가 절대 아니다. 그녀 때문에 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마이클'이 스스로를 치유해가는 이야기이다. 그 치열한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때문에 케이트 윈슬렛이 미치도록 연기를 잘하는게 오히려 흠이 될 수도 있겠다.) <더 리더>와 <효자동 이발사> 모두 엄청난 광기의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영화이다. 단지 엄청난 힘에 눌려 그 시대를 침묵했던 약한 사람들을 그렸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비판은 설득력에 없어 보인다. 

P.S. 2 두 편의 영화가 생각났다. 한 편은 루이 말의 <라콤 루시앙>, 다른 한편은 코스타 가브라스의 <뮤직박스>이다. 많은 부분에서 한나는 루이 말의 '라콤 루시앙'을 닮아 있다. 우선, 정치적 목적이 아닌 먹고 살기 위해 나치에 복역하게 된 점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철저하게 감정의 이입을 막고 있는 캐릭터이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법적, 도덕적 판단의 기준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이클은 <뮤직박스>의 앤(제시카 랭)을 연상시킨다. 그녀 역시 변호사이면서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 나치에 복무한 혐의 때문에 법정에 서게 된 아버지를 변호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죄가 진실이었음을 알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캐릭터이다. 앤 역시 사랑하는 아들에게 치욕적인 죄의식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과연 아이에게 진실된 치유가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후회가 남지 않을 선택을 한다. 어쩐지 비밀을 공유하는 부녀의 뒷모습을 비추는 <더 리더>의 엔딩과 바닷가 벤치에 앉아 있는 모자의 뒷모습을 비추는 <뮤직박스>의 엔딩은 서로 무척이나 닮아 있다.

P.S. 3 배우들의 연기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케이트 윈슬렛은 두말 할 것도 없고, <다우트> 못지 않게 모든 배우들이 참 매력적이었다. 마이클의 어린시절을 연기한 데이비드 크로스는 이제 갓 19살인데도 한나로 인한 복잡한 감정들을 무리없이 소화한다. 그에게는 '용감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당할 것 같다.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나는 레나 올린은 1인 2역을 맡는다. 유태인 피해자 어머니와 딸의 역할을 동시에 소화하는데 감독이 의도한 바가 분명 있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갓 사우나를 한 것 같은 얼굴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랄프 파인즈 역시 인상적이다.



Trackback 3 Comment 6
2008.12.19 16:27

<라콤 루시앙> How can we judge him?


<라콤 루시앙> How can we judge him?

France, Germany, Italy; 1974; 138min; 35mm; Color
Director: Louis Malle
Cast: Pierre Blaise, Aurore Clement, Holger Lewenadler

 
라콤 루시앙은 18살의  프랑스 남부의 작은 시골에 살고 있는 청년이다. 마을의 요양원에서 허드렛일하며 근근히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아빠와 형은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감옥에 들어갔고, 현재는 엄마와 함께 산다. 하지만 엄마의 새 남자친구 때문에 따로 나가 살아야 할 판이다. 18살이나 됐으니 혼자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알게 모르게 눈치를 주고 있다.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형처럼 레지스탕스가 되기로 한다. 눈치 안 보고 집에서 나갈 수도 있고, 왠지 멋있어 보인다. 엄마도 버릇처럼 형을 본받으라고 말해왔다. 그래서 운동을 주도하는 학교 선생님을 찾아간다. 하지만 선생님은 루시앙의 부탁을 받아주지 않는다. 하긴 그게 신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러다 우연히 독일 경찰들이 일을 하는 곳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레지스탕스와 정반대의 길이다. 그런데 이 곳이 더 멋있다. 학교 선생님에 대해 몇 가지 알려줬더니 술도 주고, 밥도 주고, 총도 주고, 옷도 주고, 잘 곳도 준다. 궁색하게 사는 것보다 이게 훨씬 좋을 거 같다. 집에 돈도 보내줄 수 있으니 감옥에 간 형에게 뒤질 것도 없다. 레지스탕스 잡으러 다니는 경찰 놀이도 토끼 사냥하는 것보다 재미 있다. 자기를 무섭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어깨 펴고, 고개 들고 다닐 수도 있다. 마음이 있는 여자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누구보다 더 강한 힘을 갖는 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 그래서 이 생활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냥도 잘 하고, 집안 일도 잘하는 순박한 시골 청년 라콤 루시앙은 그렇게 큰 고민 없이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됐다. 애초에 심각한 정치적 고려는 없었다. 아니 그런 걸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레지스탕스가 되든,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되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단지 부모를 벗어나 '살아갈 방법'이 필요했을 뿐이다. 만약 마을 선생님이 루시앙의 부탁을 들어줬다면, 그는 아마 형처럼 독일 경찰에 맞서는 멋진 레지스탕스가 됐을 것이다. 당장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풍족한 하루가 국가나 민족보다도 소중하다. 당연하다. 루시앙에게 찾아온 그 즉흥적인 순간, 그의 선택은 당연했다. 그저 배가 부르고, 잘 곳이 있었고, 폼이 났을 뿐... 당시의 상황을 보면 루시앙의 선택이 얼마나 '즉흥적'이었는지 이해가 간다. 영화의 배경은 1944년 봄을 맞은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괴뢰정부를 세우고 5년이 지난 후였다. 1944년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동맹국에 대한 연합국의 반격이 본격화되면서 독일은 점차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봄이 지나고 6월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8월 파리 해방으로 프랑스는 다시 온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루시앙이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면 그 봄날 스스로를 사지로 몰고갈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되고, 그 달콤함에 중독될 때까지 그는 '의지'가 없는 인물이었다. 단지'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최신식 양복을 빼 입고, 총을 차고, 사람들을 압도하는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루시앙에게 '의지'가 생긴 것은 알베르와 그의 딸 '프랑스'를 만난 이후부터이다. 숨어지내는 유태인 알베르 가족을 만나면서 그는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긴 것이다. 루시앙은 프랑스에 대한 애정이 커지고, 그들을 천천히 '가족'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아주 서툰 방법으로... 하지만 알베르와 프랑스는 그런 루시앙이 편하지 않다. 그에게 도움을 받고 있지만, 언제라도 자신들에게 총을 들이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아다. 생존을 위해 적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 알베르의 가족에게 루시앙은 자신의 '힘'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있기 위해서라도 그는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힘이 필요했다. 그가 힘을 가져야 할 '이유'와 '의지'가 생긴 것이다. 이 때부터 동료가 살해되고, 레지스탕스의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불안한 생활을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자신을 찾아온 알베르가 독일군에게 끌려갔을 때 그는 프랑스인으로 독일 경찰 노릇을 하고 있는 자신의 무력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이 프랑스와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고 떠난다. 아주 서툰 방법으로...

루시앙의 잠시 동안 화려한 생활도 봄과 함께 지나갔다.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전시 상황은 급변했다. 독일군이 수세로 몰리면서 그들은 퇴각을 준비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유태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진다.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독일군에게 미래의 적이기 때문이다. 알베로가 떠나고 남은 프랑스와 벨라도 예외는 아니다. 루시앙은 독일군 병사와 함께 그녀들을 데리러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루시앙은 다시 한 번 그녀들을 지키기 위한 위험한 선택을 한다. 프랑스, 벨라와 함께 산 속으로 몸을 피한 루시앙은 잠깐 동안이지만 그들과 평화로운 생활을 즐긴다. 프랑스와 사랑을 나누고, 그녀를 위해 토끼를 잡고, 집이 따뜻하도록 불을 지핀다. 하지만 불안한 평화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 불안은 어디에서 올지 모른다. 옆에 있는 프랑스로부터 올 수도 있고, 레지스탕스로부터 올 수도 있다. 아니면 퇴각하고 있는 독일군으로부터 올 수도 있다. 우리는 루시앙의 비극적 결말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 루시앙은 너무도 한가롭게 풀밭에 누워 있다. 그가 체포되고 처형이 됐다는 자막이 올라간다. 루시앙의 인생의 비극적 결말과 관계 없이 우리가 보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그가 시대에 휘말리기 전에 누렸던 '일상의 평화'였다.

사진의 인물이 정확하지 않지만 "당신은 그보다 프랑스인답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그런 사진에 루시앙은 총을 겨누고 있다. '개인'으로서 루시앙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자, 영화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출발한다. 루이 말은 불운한 시대를 살았던 한 개인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그의 인생이 실화인지 아닌지 정확히 확인은 되지 않지만 라콤 루시앙의 삶은 분명 당시의 분위기로 본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영화적 인물로 표현된 라콤 루시앙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감독은 그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루이 말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서 줄기차게 보편적으로 믿어지는 도덕과 윤리에 대해 거침 없는 메스를 들이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늘 '파격', '도발'과 같은 수식어를 동반했다. 우리가 1974년 작 <라콤 루시앙>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국가(혹은 민족)와 개인의 관계 관한 것일 수 있다. 프랑스는 전후처리를 가장 깔끔하게 했던 나라 중에 하나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친일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때마다 모범 사례로 꼽는 것이 프랑스이다. 그 만큼 프랑스는 괴뢰정부 5년 동안 독일 나치를 위해 복무한 이들에 대한 처벌을 명확히 했다. 그렇다면 그 처벌의 기준은 무엇일까? 단연코 그것은 개인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논리에 가깝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영화의 마지막 라콤 루시앙이 사형을 당했다는 사실의 근거도 역시 라콤이 개인의 안위를 위해 '반국가적',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국가'와 '민족'과 같은 거시적인 잣대가 개인의 행동을 판단하는 윤리적, 도덕적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이렇게 물어본다면 분명 문제는 달라진다. 질문의 답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부분이 될 수는 있어도 전체가 될 수 없다. 정치적 계산을 모르던 라콤에게는 더더욱이나 그렇다. 탈출에 성공한 뒤 라콤과 프랑스가 누리는 일상적인 행복처럼 라콤이 꿈꾸던 바도 그런 평범한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운한 시대'는 라콤을 그냥 두지 않았다. 분명 라콤 루시앙은 순박한 시골 청년이었고 정치적 의식도 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우연하지 않은 순간에 독일 경찰의 끄나풀이 됐다. 라콤의 비극적 결말을 보자면 분명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즉흥적으로 라콤에게 찾아온 1944년 봄의 어느 날은 분명 그에게 너무 달콤한 기회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18살의 뜨거운 첫사랑을 하게 됐다. 그 생활이 아니었으면 만날 수 없었던 여인이다. 그녀는 또 그의 선택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경찰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이 옳을까? 라콤의 인생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행복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막'처럼 처벌을 받았어야 하는 것일까? 분명 시대가 개인을 속박하는 것은 비극이다. 시대 안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답안의 수는 줄어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라콤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시대'를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자기 앞에 놓인 시대를 살아간다. 그리고 그 시대와 함께 자신의 '선택' 역시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들이다. 모든 걸 시대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루이 말은 분명 불운한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순박한 청년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평화롭게 살았을 한 청년... 그렇다고 루시앙을 동정하거나 감싸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정말이지 시종일관 도저히 감정이 읽히지 않는 루시앙의 표정은 그에 대한 감정이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를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감독은 이런 라콤 루시앙의 캐릭터를 통해 상당히 공고한 이분법적인 국가와 개인의 틀에 대한 파괴를 시도했는지도 모르겠다. 영웅이 아니면 반역자가 되는 경계에 대한 파괴 말이다.

난 기본적으로 우리 역시 친일의 문제가 빨리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 이유는 앞에서 밝힌 반민족적이고 반국가적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힘든 상황을 함께 살아가고 있었던 다수의 사람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 차원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도 영웅과 반영웅의 굉장히 이분법적인 틀에 갖혀서 문제를 봤던 것 같다. 오히려 이런 답답한 관점이 과거사 문제의 해결을 더욱 요원하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씨네큐브에서 열리고 있는 루이 말 특별전의 두 번째 상영작 <라콤 루시앙 Lacombe Lucien, 1974>을 보고 왔다. <마음의 속삭임>이 1971년에 만들어졌으니, 꼭 3년이 걸려 루이 말이 선보인 그의 9번째 영화다. 비슷하게 성장영화로 읽히지만 루시앙은 <마음의 속삭임>의 로랑과 상당히 다른 캐릭터를 구현한다. 시대적 배경이 다를 뿐 아니라 가정 환경 역시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루시앙과 로랑은 닮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라콤 루시앙>의 매력적인 또 하나의 캐릭터는 루시앙이 사랑하는 여인 프랑스다.(이름이 '프랑스'인 것이 아이러니하다.) 31살의 오로르 클레망(unbelievable!!!)이 연기하는 프랑스는 자신을 살려준 루시앙과 살고 있지만 그에 대한 '원한'이 남아 있는 캐릭터이다. 그녀는 '적과 동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극적으로 보여준다. 툭히 영화의 마지막 독일군을 피해 달아난 산 속에서 루시앙에게 기대면서도 그에게 '돌'을 내리치려는 장면은 프랑스의 이중적인 고민을 임팩트있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Trackback 0 Comment 0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