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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11 < 더 킹> 이제 당신이 나를 용서할 차례... (2)
  2. 2007.02.28 Babel by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2)
2008.06.11 01:52

< 더 킹> 이제 당신이 나를 용서할 차례...

이제 당신이 나를 용서할 차례...

제임스 마쉬's The King in CineC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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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킹>은 엘비스(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해군 전역 장면으로 시작한다. 동료에게는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당연한 듯 말하지만, 그의 귀향이 편안하지 않을 것임은 따로 챙긴 라이플에서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함께 살던 곳이 아닌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아버지를 찾아 텍사스의 작은 마을로 길을 잡은 엘비스. 사창가를 찾아 욕정을 해결하고, 웬만큼 굴러갈 중고 자동차를 끌고 아버지가 목사로 있는 교회를 찾아간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에 충실한 엘비스와 철저히 기독교적 가치관에 취해 있는 아버지 데이빗(윌리엄 허트)와의 만남. 시작부터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둘의 만남은 이후 한 가정과 개인을 파멸로 이끄는 단초가 된다.

아버지는 엘비스를 보자마자 그의 존재를 부정한다. 신망 높은 교회의 목사이자 단란한 가정의 가장으로 과거의 방탕한 생활은 도덕적 삶의 치명적 약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비스는 잊고 싶은 과거를 현재까지 이어주는 존재였다. 아버지의 냉대에 실망한 엘비스의 시선은 이복동생인 말라리(펠 제임스)에게 향한다. 독실한 크리스찬 집안에서 탈 없이 자란 16살 소녀는 그의 존재를 모른 채 위험한 첫사랑에 뛰어든다. 특별한 의미 없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왔던 말라리는 엘비스를 통해 자신의 '여성'을 알게 되고, 가족과 학교, 교회 밖에서의 삶을 사직한다.  

하지만 오빠 폴(폴 다노)은 아버지의 연장선에 있다. 졸업을 앞둔 학교에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 강의를 개설해 줄 것을 요구하고 목회자인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신학대학에 진학할 만큼 충실한 기독교인이다.(폴 다노는 '데어윌비블러드' 때부터 목회자 역할에 참 잘 어울린다. 전작에 비하면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로 나오지만) 그만큼 가족 역시 지켜야 할 중요한 대상이었다. 하지만 엘비스와 멜라리의 '부정한 관계'를 끊기 위한 폴의 노력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몬다. 본능에 충실한 엘비스는 돌발적으로 폴을 죽이지만 아이러니하게 그것이 엘비스에게는 기회가 된다.

영화는 정확히 이 지점부터 인물들이 감추고 있었던 본심을 홍미 있게 그려낸다. 아버지의 냉대에 대한 증오, 그에 대한 복수심으로 저지른 근친상간과 우발적 살인은 결국 엘비스가 얼마나 한 가정의 일원이 되고 싶어했는 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저녁 식사 후 텔레비전 앞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새어머니를 위해 정원을 가꾸는 엘비스는 결국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오빠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는지 모른다.

데이빗 역시 폴의 실종 이후 강한 '종족 유지'의 습성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며 신도들에서 엘비스를 소개하는 데이빗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엘비스와 데이빗을 통해 감독은 종교 역시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삶을 포장하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도발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지도 모른다. 구원과 용서는 결코 절대자에 의해서가 아닌 개인적 생존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종교와 구원, 그리고 인간의 관계에 대한 감독의 문제의식은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연상시키지만 <더 킹>은 <밀양>보다 더 비극적 답을 선택한다. 말라리는 평범한 오빠가 되길 선택한 엘비스에게 실망하고, 그의 아이를 가진 사실을 어머니 트윌라에게 말한다. 하지만 엘비스는 자신의 도덕적 안락한 삶을 방해하는 그녀들까지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 교회로 간다.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 있지 않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는 근친상간과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었고, 데이빗에게는 아들이자 가족을 파멸로 이끈 원수였다.

"이제 당신이 나를 용서할 차례입니다." 영화는 아내와 딸의 피가 묻은 손을 데이빗에게 내밀며 엘비스가 뱉은 짧은 말로 끝난다. 하느님은 아버지의 과거를 용서했고, 엘비스는 아버지를 용서했다.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용서만을 바라왔던 데이빗은 과연 구원과 용서를 선택할 수 있을지, 과연 목회자로서의 본분과 개인적 증오와 욕심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게 될 지... 데이빗이 어떤 것을 선택하든 비극적 결과가 될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언뜻 보면 사랑과 전쟁의 스토리 몇 가지를 뒤섞어 놓은 듯 하고, 중간중간 <밀양>, <리플리>, <매치포인트> 등의 영화를 떠오르게 한다. 복수, 구원, 종교, 인간, 근친상간, 살인 등 자극적이고 논쟁적인 내용이지만 <몬스터볼>의 작가 '밀로 애디카'는 과도하게 힘을 주거나 반대로 맥빠지지 않게 관객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고려하는 배려를 한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와 윌리엄 허트의 이름값 하는 연기 역시 눈여겨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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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8 11:55

Babel by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내가 2년 2개월 간 군복무를 한 곳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모두가 부대 근처의 영세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였는데 대부분 가구제작이나 합성수지, 플라스틱 제조 등 단순 노동을 필요로 하는 공장이었기 때문에 노동비 절감의 차원에서 동남아시아 쪽의 외국인을 많이 고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난 업무상 특성 때문에 업무상 바깥 출입이 잦았고 자연스레 동네사정에 눈이 익숙해 질 수밖에 없었다. 半민간인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그 생활이 즐겨웠던 이유는 '사제밥'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식판에 담긴 밥이 아닌 '공기밥'에 지글지글 맛있게 끓인 찌게를 즐길 수 있었다. 밖에 있었다면 그리 군침 흘릴 음식들은 아니었지만 먹성 좋은 군인인지라 그 때만큼은 식당밥도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못지 않은 기쁨이었다.

한날은 이런 일이 있었다. 간부와 함께 인근의 부대찌게 집을 찾았고, 평소 좋아하던 음식은 아니지만 모처럼 먹는 사제밥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늦은 저녁이었기 때문에 시장이 반찬이라 음식이 나오길 애가 타게 기다렸지만, 음식이 나오는 순간 눈에 익지 않은 장면에 순간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공장에서 봤음직한 외국인이 찌게와 반찬이 담긴 쟁반을 들고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나와 다른 피부를 가진, 털이 덥수룩히 난 사람의 손을 통해 식탁에 내려놓은 김치를 본 순간 허기가 만들어 놓은 내 식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김치와 동남아인의 손이라는 기표가 가지고 있는 기의의 충돌이 나의 식욕을 갈가리 찢어놓은 것이다.

편하지 않은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걸어 나오며 많은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적어도 나 만큼은 '속좁은 대한민국 남자'가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며 정치의 부조리, 경제적 불평등, 부도덕한 국제관계들을 통렬히 비판했고, 사회의 구조적 한계로 약자가 되어린 사람들을 가슴으로 모두 감싸안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난 깨였고, 쿨하고, 열린 생각을 가진 바람직한 청년이어야 했고 진정으로 난 그런 사람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책이 만들어 준 지식에 불과했다. 식욕의 제거는 나 역시도 동남아시아인을 톱밥 먼지를 뒤집어 쓰고, 이런저런 기계의 기름칠에 찌든 옷을 입은 사람들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아닌 머리를 뜨겁게 만들었던 지식들은 식당에서 찰나의 경험을 통해 불씨를 잃어버린 싸늘한 재처럼 식어있었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더 굳어진 것도 그 일을 통해서였다. 어줍잖은 지식은 오히려 무지보다 더 큰 위선과 교만을 배태할 수 있었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그들과 소통을 이루기 위해, 내 눈에 덮힌 만겁의 위선을 씻어버리기 위해 가슴까지 뜨겁게 할 수 있는 공부가 필요했던 것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세 번째 영화 <바벨>은 필름이 다 돌아간 과거의 기억을 다시 재생시켜 놓았다. 전작 <21그램>을 통해 3차원적 '시간'의 연속성을 거부하고  천피스 퍼즐처럼 조각난 순간들을 스크린에 던져 놓았던 감독은 선택이 아닌 운명으로써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원인과 결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버거운 21그램에 주목했다. 감독은 <바벨>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공간'에서 풀어가고 있다. 미국, 멕시코, 일본, 모로코... 세계지도에서도 손끝을 따라 한참을 여행해야 하는 이 네 공간에서 벌어지는 네 가지 이야기는 전혀 다를 듯 보이지만 나비의 날개짓과도 같은 작은 인연이 타인의 삶을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릴 폭풍과도 같은 시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살한 아내와 언어장애를 가진 딸과의 관계에 갈증을 느끼는 일본인은 아프리카 사냥 여행에서 현지 가이드에게 총을 선물하고, 가이드는 몇 푼의 돈과 몇 마리의 염소에 그 총을 친구에게 되판다. 주인을 옮긴 총은 아이들의 내기에 의해 모로코를 여행하고 있던 미국인 부부를 위기로 내모는 무기가 되고, 그 위기는 바다 건너 보모의 멕시코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결국 개인에게 닥친 고통은 절대 나로 인한 것이 아닌 인연이라는 인과관계의 부산물인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온전히 내것이 될 수 없는 타인과의 선택할 수 없는 운명과 매듭지어 있기 때문이다.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작가 김연수가 말하듯 '그 누구의 슬픔도 될 수 없는' 우연적 존재가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 슬품들은 결국 외딴섬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인연 속에서 허덕이는 인물들이 심하게 가슴을 두드리는 이유는 '소통의 부재'를 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바벨>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보여주듯 지도 위의 거리 만큼이나 인물들 간의 소통은 아득하기만 하고, 이해를 위한 과정이 아닌 괴로움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 이는 비단 언어의 같고 다름이라는 단순한 문제에 의한 것이 아니다. 같은 공간과 같은 언어가 소통의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소통은 귀로 듣고, 눈으로 확인하는 이해의 과정이기보다 받아드림이라는 감정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이 소통의 부재로 사람들은 운명처럼 짊어져야 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법 역시 '소통'에 있다. 때문에 사람들은 치에코처럼 자신을 발가벗겨서라도 소통의 대상을 찾기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안아줄 사람을 말이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듯 소통의 부재는 개인의 문제로만 단정지을 수 없다. 그 문제는 결국 국가를 넘어서는 국제 정치, 경제라는 구조 속에서 부추김을 당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에서 미국경찰과 멕시코인 사이에 이어지는 끊임없는 긴장과 미국인 관광객이 모로코 주민들에게서 자신들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는 위협을 느끼는 것은 언어와 인종의 차이를 넘어 정치, 경제적 경험이 더 큰 원인인 것이다. 내가 외국인 노동자의 손에서 느낀 감정 역시 정치, 경제적 경험에 의한 소통의 부재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소통을 위해 개인이 벗어나야 할 이러한 중층의 장애는 가능성 제로의 도전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 틀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하기를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틀을 깨기 위해 발버둥치는 내가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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