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16 06:38

<인물사진의 거장 카쉬展> 시대의 얼굴들


<인물사진의 거장 카쉬展> 시대의 얼굴들


장소: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일반:8000)
기간: 2009년 3월 4일~2009년 5월 8일
시간: 11:00~20:00(화~일), 13:00~20:00(월)

 
지금도 그렇지만 난 어렸을 때 위인전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국어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위인들의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백과사전, 동화전집과 함께 책꽂이 트로이카를 이루고 있었던 위인전집 역시 기피 대상 1호였다. 그 때는 그냥 그 인물들을 따라 살아야지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내게 강요를 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렇게 크게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원인을 찾아 들어가면 책 속의 인물들에게 '인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 때 교과서 속의 위인들은 현실적인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기보다 하나같이 초현실적인 영웅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난을 이겨내고,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고민이나 한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원래부터 그렇게 태어난 '영웅'들이었다. 장군들은 어린 시절에 모두 호랑이를 때려잡았고, 대학자들은 모두 사서삼경을 걸음마 전에 독파했으며, 훌륭한 임금은 어려서부터 백성의 안위와 나라의 안보를 걱정했다. 그들에게는 모두 '인간적인 이야기'가 결핍되어 있었다. (몇 년 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어린 시절을 겁쟁이로 묘사했다가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은 일화를 보라. 위인은 그 정도로 우리에게 초현실적인 존재들이다.) 

반 고흐의 <영혼의 편지>를 읽으면서 받았던 충격은 그래서 신선하고 오래 남는 울림을 남겨주었다. 동생 테오와 주고 받은 편지에서 느껴지는 화가 반 고흐는 위인전 속에 살고 있는 무오류의 식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당장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그림을 팔아야 하는 처지의 인간이었고, 타인과의 관계에 괴로워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에 빠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위인이기 이전에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천재는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소소한 진실이 페이지 곳곳에 담겨 있엇다. 숱한 위인전을 접하며 느꼈던 목마름을 두 형제가 주고 받은 편지의 문맥에서 배어나오는 인생의 진물을 마시며 해결할 수 있었다. 그 뒤로 고흐의 그림을 더욱 좋아하게 됐다. 천재 고흐가 아닌 인간 고흐의 그림을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간으로서 위인들을 만나는 기회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항상 "something special"을 원하는 매스컴을 통해 비춰지는 인물들은 점점 현실에 활착한다기 보다 점점 멀어지고 있다. 나와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되는 것이다.


요즘 다시 책 속의 위인이 아닌 '인간의 얼굴을 가진 위인들'을 만날 기회가 마련됐다. 3월부터 시작된 유섭 카쉬(Yousuf Karsh)의 인물사진展이 그 주인공이다. 솔직히 사진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인물 사진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는 것이 없다. '유섭 카쉬'라는 인물 역시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디지털 현상이 아닌 오리지널 빈티지프린트라는 홍보도 사실 처음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처럼 무지함에도 전시를 찾은 이유는 단 하나. 버스를 타고 오가는 길에 마주친, 예술의 전당 정면에 붙어 있는 오드리 햅번의 눈부신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바라는 바는 오직 하나였다. "저 빛나는 아름다움을 가슴에 품고 오리라!!!" 금요일 저녁, 일부러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때를 골라 전시장을 찾았다. 전시장 안은 예술의 전당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만큼 한가했다. 나처럼 때를 잘 맞춘 몇몇 사람만이 전시장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있었다. 

<Faces of Our Times>라는 부제답게 오드리 햅번 말고도 카쉬가 작업을 했던 많은 명사들의 인물사진이 전시중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이력이 스쳐지나가는 인물도 있었고, 처음 만나는 생소한 인물들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르게는 20년대 후반부터 늦게까지는 80년대 후반까지 그의 카메라에 담긴 인물들은 윈스턴 처칠, 아이젠하워, 소피아 로렌, 아인슈타인, 파블로 피카소, 헤밍웨이, 장 시벨리우스, 제시 노먼 등 정치인에서, 과학자, 작가, 미술가, 음악가, 배우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초월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 영역이 달랐음에도 카쉬의 카메라에 잡힌 얼굴들에서는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모두 자신의 영역에서 잠시 벗어나 '인간의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한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뤘거나,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친 존재들이었지만 프레임 속의 그들의 표정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다. 카메라 앞에선 그들은 근엄하면서도 익살스러웠고, 자신감에 찬 듯 하면서도 어딘가 두려운 듯한 어색함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배우가 아닌 인물들의 사진이 더욱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아마도 실제 그들을 만났다면 꼭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 같았다.

사진과 함께 한켠에 마련된 에피소드들은 사진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단지 인물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 아닌 피사체와 어떤 정서적인 교감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소통하고자 했던 카쉬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는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그 교감 때문이었는지 사진들은 유명한, 천재적 '인물'로서 머리를 울리기 보다는, '인간'으로서 가슴에 먼저 와 닿았던 것 같다. 하얀색 캠버스 위의 마치 그림 같았던 오드리 햅번의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 때문에 더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스탈린이 죽고 난 후 그를 비판하며 정권을 잡았던 흐루시초프의 장난기 가득한 사진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정치인 이전의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헤밍웨이의 땀이 느껴지는 얼굴도, 피카소의 익살기가 묻어나는 얼굴도 작가, 화가라고 부르기 전의 인간의 표정이었다. 제시 노먼의 눈 밑 상처가, 테레사의 가득한 주름이 오드리 햅번의 미소만큼이나 아름다웠던 이유이기도 하다.


카쉬는 조명에서부터 배경, 소품까지 그 인물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도록 철저하게 구성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진 속의 모든 장치들은 인위적인 느낌이라기보다 인물과 함께 살아있는 듯 자연스러워보인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해 그대로 박제해버리는 예술이다. 그래서 사진은 영원하지만, 살아있는 것 같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그 박제된 사진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과 그 앞에 있는 피사체와의 '이야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의 옛 사진을 보면서 절대 '죽은 사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진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다. 때로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태평양의 어느 아름다운 섬의 사진보다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어린 시절 마을 사진이 더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법이다. 그렇듯 사진은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살아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카쉬의 인물사진에서 이런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이유 역시 그것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따뜻한 이유는 인물들이 '무엇인 척' 하지 않는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을 나오며 뒤를 돌아봤을 때 윈스턴 처칠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귀여웠던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P.S.1
카쉬의 인물 사진과 더불어 그의 초기 작업들, 캐나다의 산업화 시기를 담은 사진들도 함께 전시중이었다. 카쉬의 전체 작품 세계를 조망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이 많지 않아 다소 아쉬운 감이 있다. 근데 공장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 노동자일까? 아무래도 얼굴과 몸을 봤을 때 모델들을 데려다 찍은 것 같다. ^^

P.S.2
임응식, 육명심, 박상훈, 임영균, 김동욱 등 다섯 명의 한국 인물 사진 작가들의 작품도 딱 맛만 볼 수 있을 만큼 전시돼 있다. 물론, 턱없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 (임영균이 찍은 유섭 카쉬의 인물사진이 눈길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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