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03 14:29

<무뢰한> 남자를 성장시키는 여자, 여자를 파괴시키는 남자

<무뢰한> 남자를 성장시키는 여자, 여자를 파괴시키는 남자 

Korea; 2015; 118min
Director: 오승욱
Cast: 전도연, 김남길, 박성웅, 곽도원

 

영화 ‘무뢰한’은 장르로서 하드보일드 느와르의 뼈대를 가지고 있지만 한 남자의 성장이야기에 가까운 듯하다. 감정에 인색하고, 소통에 젬병인 이 남자의 성장은 그를 스쳐간 여성들을 통해 이뤄진다. 재곤에게 몹쓸 취조를 당한 여인, 그의 전처, 황충남의 부인, 김혜경,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피를 흘리는 여인까지 그를 스쳐간 여인들은 유무형의 흔적을 그에게 남긴다. ‘기억하기 싫은 상처들’이겠지만 그 관계들은 재곤이 아주 천천히 자신이 가진 감정의 결들을 알아채고, 타인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드는 ‘사건’들이기도 하다. 황충남 부인의 페디큐어는 정사 중인 혜경의 붉은색 매니큐어와 연결되고, 김혜경이 가진 손목의 상처는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여인의 것과 맞물린다. 어찌 보면 재곤에게 이 여성들은 각기 다르지만 같은 혹은 연결된 의미를 가진 타자일 수도 있다.

흔들릴 준비가 되어 있던 재곤이 혜경을 상대로 시작한 게임은 처음부터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혜경과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그는 정재곤과 이영준의 경계에서, 참과 거짓의 경계에서, 사랑인지 뭔지 모를 감정의 경계에서 다른 차원의 질척이는 싸움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재곤이든 영준이든) 오롯이 혜경을 사랑했을까? 아니면 끝까지 그녀를 이용하고자 했을까? 영화는 양쪽 모두에 대한 단서를 던지며 관객마저도 그 질척이는 감정의 싸움판으로 끌어들인다. 확실한 것은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서 갈팡질팡하던 재곤에게 혜경은 또 하나의 기억하기 싫은 상처가 되겠지만 그 상처를 통해 남자는 다시금 느린 걸음의 성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피를 흘리는 피해자 여성에게 자신의 옷을 덮어 줄 수 있는 딱 그 만큼만.

이 남자의 맞은편에 김혜경이 있다. 느와르라는 장르적 한계 속에서도 굳건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는 이 여성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혼자서는 온전히 서 있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녀를 삶의 바닥까지 끌어내린 것은 남자들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남자를 통해(손님들), 남자에 기대(박준길) 삶을 이어간다. 그런 혜경이 남자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고자 할 때, 직업이 남긴 흔적이겠지만 그녀는 습관적으로 남자의 성기를 목표로 한다. 준길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할 때도, 민 상무의 협박을 달래고자 할 때도, 밀린 외상값을 받아내기 위해 남자를 으를 때도 혜경이 상대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남자들의 성기였다.

하루 종일 남자들과의 처절한 싸움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돌아온 집에서 혜경은 처음으로 재곤의 성기를 반복적으로 만진다. 재곤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감정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혜경의 이 행동은 언뜻 준길의 말대로 영준에게서 돈을 얻어내기 위한 전략처럼 보인다.(영준은 그녀의 손을 잡아 그의 가슴 위에 놓는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달리 영준에게 뱉는 말들에 거짓은 없다. 같이 살자는 영준의 말이 그녀는 분명 진심이길 바랐다. 그에게 기대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다는 찰나의 희망이 그녀의 얼굴에 스쳤다. 혜경은 영준을 진정 사랑했을까? 아니면 그녀 역시 그를 이용하려고만 했을까? 그녀의 행동과 말 모두 재곤처럼 그 사이 어딘가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혜경과 재곤 모두 감정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워 했지만 맡은 바 역할에 충실했다. 재곤은 박준길을 잡는데 성공했고, 혜경은 영준으로부터 돈을 얻어 준길에게 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다르다. 재곤이 여성들의 관계를 통해 조금씩 성장했던 것과 달리 혜경은 남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더욱 처절하게 파괴된다. 그녀를 거쳐 간 숱한 남자들이 그녀를 파괴했듯 재곤 역시 그녀를 파괴시킨다. 박준길의 죽음은 재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녀를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그 나락에서 재곤의 등장은 그녀를 또 (빚을 갚기 위해) 어떤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을 만들었다. 재곤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알리가 만무한 혜경은 재곤에게 다른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재곤은 이 상처를 기억하지 않음으로 그녀를 흔든 대가를 치렀다고 믿을지 모른다. 더디게 성장하지만 재곤은 여전히 감정에 서툴고 방법에 배려가 부족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재곤의 말은 진심일지언정 혜경에게는 공허하다. 영화의 마지막 재곤의 얼굴 위로 겹치는 ‘무뢰한’은 다름 아닌 혜경의 울부짖음일 수도 있다.

여자를 통해 성장하는 남자와 남자를 통해 파괴되는 여자의 등장은 장르 영화로서의 느와르의 공식에 대한 일종의 전복으로 보인다. 느와르 속의 팜므 파탈로 상징되는 여성의 캐릭터는 완전한 자기 세계를 구축한 듯 보이는 남성을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인물이었다. 하지만‘무뢰한’의 여성은 무너진다. 승자처럼 보이지만 남성의 성장 역시 극도의 고통을 동반한다. 이러한 변주는 결핍된 인물들이 엮어내는 극의 비장미를 더욱 짙게 만든다. 모든 것을 갖춘 듯한 남녀가 속고 속이는 게임을 벌이다 클라이맥스를 거쳐 한쪽은 모든 걸 얻고, 다른 한쪽을 모든 걸 잃는 장르의 전형성은 감정에 서툴고 나약한 무뢰한 속 인물들의 비극과 어울리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무뢰한’은 장르로서 느와르를 표방하지만 인물, 구성, 이야기 등 어느 것 하나 고정적인 장르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하드보일드 멜로’라는 타이틀을 붙이긴 했지만 이 영화를 어느 한 장르에 묶어 놓는 것은 영화가 가진 엄청난 상징과 은유를 오독하거나 놓칠 수 있는 행위이다.

선인지 악인지 모를 인물들, 사랑인지 뭔지 모를 인물들의 감정, 참인지 거짓인지 모를 표정, 행동과 말, 해질 무렵인지 새벽인지 모를 시간... 이 모든 것들이 결합되어 ‘무뢰한’의 매 순간은 의미의 범람을 일으킨다. 봉준호의 말마따나 그래서 ‘무뢰한’은 ‘영화다운 영화’다. 소설이 아닌, 시가 아닌, 영화.

그나저나 전도연은 ‘another level’이 아니라 ‘beyond leve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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