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에 해당되는 글 98건

  1. 2015.06.03 <무뢰한> 남자를 성장시키는 여자, 여자를 파괴시키는 남자 (10)
  2. 2010.01.12 세뼘왕자's CHOICE in 2009 (4)
  3. 2009.11.01 <더 클래스> 외면하거나 혹은 인정하거나 (3)
  4. 2009.07.17 <한 여름 밤의 꿈> 장맛비에 낚이다.
  5. 2009.04.23 <똥파리> 무쓸모의 존재감 (8)
  6. 2009.04.16 <인물사진의 거장 카쉬展> 시대의 얼굴들 (2)
  7. 2009.04.06 <해피 투게더> 장국영을 추억하다. (5)
  8. 2009.04.03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달콤 쌉싸름한 무대 (2)
  9. 2009.03.23 <레볼루셔너리 로드> 충돌하는 욕망들 - Who is right? (4)
  10. 2009.03.15 <어떤 개인 날> Listen to Her Stories (7)
2015.06.03 14:29

<무뢰한> 남자를 성장시키는 여자, 여자를 파괴시키는 남자

<무뢰한> 남자를 성장시키는 여자, 여자를 파괴시키는 남자 

Korea; 2015; 118min
Director: 오승욱
Cast: 전도연, 김남길, 박성웅, 곽도원

 

영화 ‘무뢰한’은 장르로서 하드보일드 느와르의 뼈대를 가지고 있지만 한 남자의 성장이야기에 가까운 듯하다. 감정에 인색하고, 소통에 젬병인 이 남자의 성장은 그를 스쳐간 여성들을 통해 이뤄진다. 재곤에게 몹쓸 취조를 당한 여인, 그의 전처, 황충남의 부인, 김혜경,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피를 흘리는 여인까지 그를 스쳐간 여인들은 유무형의 흔적을 그에게 남긴다. ‘기억하기 싫은 상처들’이겠지만 그 관계들은 재곤이 아주 천천히 자신이 가진 감정의 결들을 알아채고, 타인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드는 ‘사건’들이기도 하다. 황충남 부인의 페디큐어는 정사 중인 혜경의 붉은색 매니큐어와 연결되고, 김혜경이 가진 손목의 상처는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여인의 것과 맞물린다. 어찌 보면 재곤에게 이 여성들은 각기 다르지만 같은 혹은 연결된 의미를 가진 타자일 수도 있다.

흔들릴 준비가 되어 있던 재곤이 혜경을 상대로 시작한 게임은 처음부터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혜경과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그는 정재곤과 이영준의 경계에서, 참과 거짓의 경계에서, 사랑인지 뭔지 모를 감정의 경계에서 다른 차원의 질척이는 싸움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재곤이든 영준이든) 오롯이 혜경을 사랑했을까? 아니면 끝까지 그녀를 이용하고자 했을까? 영화는 양쪽 모두에 대한 단서를 던지며 관객마저도 그 질척이는 감정의 싸움판으로 끌어들인다. 확실한 것은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서 갈팡질팡하던 재곤에게 혜경은 또 하나의 기억하기 싫은 상처가 되겠지만 그 상처를 통해 남자는 다시금 느린 걸음의 성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피를 흘리는 피해자 여성에게 자신의 옷을 덮어 줄 수 있는 딱 그 만큼만.

이 남자의 맞은편에 김혜경이 있다. 느와르라는 장르적 한계 속에서도 굳건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는 이 여성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혼자서는 온전히 서 있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녀를 삶의 바닥까지 끌어내린 것은 남자들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남자를 통해(손님들), 남자에 기대(박준길) 삶을 이어간다. 그런 혜경이 남자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고자 할 때, 직업이 남긴 흔적이겠지만 그녀는 습관적으로 남자의 성기를 목표로 한다. 준길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할 때도, 민 상무의 협박을 달래고자 할 때도, 밀린 외상값을 받아내기 위해 남자를 으를 때도 혜경이 상대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남자들의 성기였다.

하루 종일 남자들과의 처절한 싸움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돌아온 집에서 혜경은 처음으로 재곤의 성기를 반복적으로 만진다. 재곤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감정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혜경의 이 행동은 언뜻 준길의 말대로 영준에게서 돈을 얻어내기 위한 전략처럼 보인다.(영준은 그녀의 손을 잡아 그의 가슴 위에 놓는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달리 영준에게 뱉는 말들에 거짓은 없다. 같이 살자는 영준의 말이 그녀는 분명 진심이길 바랐다. 그에게 기대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다는 찰나의 희망이 그녀의 얼굴에 스쳤다. 혜경은 영준을 진정 사랑했을까? 아니면 그녀 역시 그를 이용하려고만 했을까? 그녀의 행동과 말 모두 재곤처럼 그 사이 어딘가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혜경과 재곤 모두 감정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워 했지만 맡은 바 역할에 충실했다. 재곤은 박준길을 잡는데 성공했고, 혜경은 영준으로부터 돈을 얻어 준길에게 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다르다. 재곤이 여성들의 관계를 통해 조금씩 성장했던 것과 달리 혜경은 남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더욱 처절하게 파괴된다. 그녀를 거쳐 간 숱한 남자들이 그녀를 파괴했듯 재곤 역시 그녀를 파괴시킨다. 박준길의 죽음은 재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녀를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그 나락에서 재곤의 등장은 그녀를 또 (빚을 갚기 위해) 어떤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을 만들었다. 재곤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알리가 만무한 혜경은 재곤에게 다른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재곤은 이 상처를 기억하지 않음으로 그녀를 흔든 대가를 치렀다고 믿을지 모른다. 더디게 성장하지만 재곤은 여전히 감정에 서툴고 방법에 배려가 부족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재곤의 말은 진심일지언정 혜경에게는 공허하다. 영화의 마지막 재곤의 얼굴 위로 겹치는 ‘무뢰한’은 다름 아닌 혜경의 울부짖음일 수도 있다.

여자를 통해 성장하는 남자와 남자를 통해 파괴되는 여자의 등장은 장르 영화로서의 느와르의 공식에 대한 일종의 전복으로 보인다. 느와르 속의 팜므 파탈로 상징되는 여성의 캐릭터는 완전한 자기 세계를 구축한 듯 보이는 남성을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인물이었다. 하지만‘무뢰한’의 여성은 무너진다. 승자처럼 보이지만 남성의 성장 역시 극도의 고통을 동반한다. 이러한 변주는 결핍된 인물들이 엮어내는 극의 비장미를 더욱 짙게 만든다. 모든 것을 갖춘 듯한 남녀가 속고 속이는 게임을 벌이다 클라이맥스를 거쳐 한쪽은 모든 걸 얻고, 다른 한쪽을 모든 걸 잃는 장르의 전형성은 감정에 서툴고 나약한 무뢰한 속 인물들의 비극과 어울리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무뢰한’은 장르로서 느와르를 표방하지만 인물, 구성, 이야기 등 어느 것 하나 고정적인 장르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하드보일드 멜로’라는 타이틀을 붙이긴 했지만 이 영화를 어느 한 장르에 묶어 놓는 것은 영화가 가진 엄청난 상징과 은유를 오독하거나 놓칠 수 있는 행위이다.

선인지 악인지 모를 인물들, 사랑인지 뭔지 모를 인물들의 감정, 참인지 거짓인지 모를 표정, 행동과 말, 해질 무렵인지 새벽인지 모를 시간... 이 모든 것들이 결합되어 ‘무뢰한’의 매 순간은 의미의 범람을 일으킨다. 봉준호의 말마따나 그래서 ‘무뢰한’은 ‘영화다운 영화’다. 소설이 아닌, 시가 아닌, 영화.

그나저나 전도연은 ‘another level’이 아니라 ‘beyond leve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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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2 14:53

세뼘왕자's CHOICE in 2009


세뼘왕자's CHOICE in 2009




<한국영화>

1. 마더 : 2000년대 한국영화의 중심에 선 감독, 다가오는 10년대 역시 그 중심의 역할을 놓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다.
2.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점점 하나로 덩어리지는 그의 영화, 그 덩어리가 어떤 모습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빠져든다.
3. 차우 : 누가 뭐라든 올해 최고의 괴수, 오락영화
4. 불신지옥 : 한국 호러의 질긴 숨통은 결국 2009년 이 영화를 만들어냈다.
5. 호우시절 : 언제나 기본은 하는 허진호, 죽은 배우 되살려내기 1인자 허진호
    어떤 개인 날 : 꼭 이렇게 만들어졌어야 할 그녀들의 솔까말

< 외국영화>

1. 그랜 토리노 :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개인적 체험'이 시대를 아우르고 세대를 뛰어넘어 감동을 선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 엘라의 계곡 : 이라크전을 부지런히 영화화하기 시작한 헐리우드. 이제서야 헐리우드도 제대로 된 '성찰'을 하기 시작했다. 
3. 바더 마인호프 : 역사를 기록, 기억하는 영화들이 반드시 보고 배워야 할 감독의 자세
4. 24시티 : 3대를 어울러 시대를 관통한다. 중국의 현대사를 오롯이 담아내다.
5. 더 리더 : 매너리즘에 허덕이던 홀로코스트 영화가 새로운 미답지를 열기 시작했다.
    번 애프터 리딩 : 코엔 형제가 완벽하게 부활했음을 보여준다. 비슷하면서도 새로운 New Coen's world

<올해의 영화제 영화>

1. 더 클래스(메가박스 유럽영화제) : "무엇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어떻게" 말하는 가도 중요하다.

<올해의 다큐멘터리>

1. 워낭소리 : "송환"이 질적으로 한국 다큐를 끌어올렸다면 "워낭소리"는 양적으로 최대치를 이뤄냈다.

<올해의 독립영화>

1. 똥파리 : 무쓸모의 존재감, 거칠어도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다.

<올해의 애니메이션>

1. UP : 재주 많은 미스터 폭스도 풍선달고 하늘 나는 집보면 두 손 들 듯...

<올해의 재상영>

1. 알제리 전투(재개봉이 맞나?) : 40년이 넘어 전설을 확인하는 벅참.  




<올해의 뮤지컬>

1. 스프링 어웨이크닝 : 재미없다면 현실이 그럴 것이고, 우울하다면 현실이 그럴 것이다.

<올해의 전시>

1. 카쉬전 : 프레임이 기록한 인물과 시대, 그리고 분위기에 취하다.

<올해의 콘서트>

1. 빅뱅 콘서트 : 아이돌 콘서트를 급습한 29살 청년의 무아지경

<올해의 연극>

1.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 1권 : "본다는 것"의 새로운 정의를 이끌어 낸다.
    버자이너 모놀로그 : 전수경, 최정원, 이경미의 말 그대로 "버자이너 모놀로그"
    39계단 : 히치콕의 미스테리가 유쾌한 코디미로 다시 태어난다. 이 쯤해야 '전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

<올해의 드라마>

1. 선덕여왕 : 모처럼 만에 만나는 웰메이드 정치 드라마. "선덕여왕'은 앞으로 나올 드라마들의 원형이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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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1 17:02

<더 클래스> 외면하거나 혹은 인정하거나


<더 클래스> 외면하거나 혹은 인정하거나


France; 2008; 128min; Drama; Color
Director: Laurent Cantet
Cast: Francois Begaudeau




로랑 캉테의 네 번째 장편이자 200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더 클래스 Entre les murs>는 영화의 거의 대부분이 인물들의 클로즈업으로 채워져 있다. 선생님들이 모여 있는 교무실에서도,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있는 교실에서도 카메라는 전체가 아닌 말을 하거나 듣고 있는 누군가의 표정을 집요하리라만큼 놓치지 않는다. 화면을 꽉 채운 인물들의 모습에 관객들은 시선의 자유로운 이동을 애초에 포기해야 한다. 오로지 인물의 얼굴에 집중할 뿐이다. 더구나 간혹 달아날 기회 조차 로랑 캉테는 "쉼 없는 대화"로 철저하게 봉쇄시킨다. 화면에서 "말"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화면을 인물과 대화로 꽉 채워넣음으로써 관객을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의 문제에 철저하게 가둬놓는 것이다. 관객이 한 숨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운동장이라고 하기에 민망한 학교 건물 사이의 공터 뿐이다. 쉬는 시간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이 공간에서만 감독은 클로즈업이 아닌 한 발 물러서 카메라를 위치시킨다. 또한 이 공간에는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소음만 있을 뿐 뚜렷한 대화도 들리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이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이 곧 관객에게 동등하게 허락된 "쉬는 시간"이다.

이렇듯 감독은 관객이 영화의 스토리에 몰입되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그보다 인물의 표정과 그들이 내뱉는 말을 짜증스러울만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감정이입이 아닌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여기에 비전문 배우의 기용, 단조로운 카메라 워크 등은 영상 매체의 가공 흔적을 최대한 자제함으로써 마치 다큐멘터리가 그러하듯 프랑스 한 학교의 교실을 "보여주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를 형식적으로 완성시킨다. 관객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자리를 박차고 선생님과 학생 사이의 벌어진 문제를 외면하거나, 아니면 2008년 프랑스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를 현실적인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로랑 캉테의 이런 형식은 데뷔작인 <인력자원부 Human Resourses, 1999>에서 부터 두드러졌다. 프랑스의 한 소도시 공장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경영진과 노조, 노동자의 이해관계" 더불어 그 속에 얽힌 "블루칼라 아버지와 화이트칼라 아들의 미시사"를 감독은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고 보여주기에 주력한다.(<더 클래스>는 <인력자원부>보다도 훨씬 건조한다.) 로랑 캉테에게 있어 이러한 영화적 형식은 그가 영화라는 매체를 사용하면서 내용의 메시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선택한 결과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붙은 "프랑스의 켄 로치"라는 별명은 어울리면서도 꽉 채워지지는 않는 무언가를 남긴다. 두 감독 마찬가지로 현실 참여적 성격이 강한 영화를 만들지만, 로랑 캉테의 영화에서는 켄 로치의 영화에서 내내 감지되는 강한 문학적 감수성은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로랑 캉테는 켄 로치에 비해 훨씬 건조한 영화적 형식을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로랑 캉테가 이런 식으로 관객을 괴롭히는 형식을 추구하면서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더 클래스>의 주 공간이 되는 학교는 우리로 치면 일종의 대안학교 쯤으로 여겨진다. 정규학교에서 교육을 받기 힘든 아이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이 섞여 있는 교실은 마치 현재 프랑스의 상황을 환유하는 듯 하다. 이 공간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작게는 프랑스, 크게는 유럽 전체 사회가 안고 있는 내부적인 모순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 통합을 거쳐 정치적 단일체로 나아가려고 하는 유럽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유럽 헌법을 통과시키고, 관세의 장벽을 허물고, 화폐를 통합하는 등의 테크니컬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곧 사람들의 기저에 깔린 편견과 고정관념을 허무는 일이다. 노동력을 위해 동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통해 유입된 다양한 인종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제들, 그들을 바라보는 프랑스 인들의 멸시에 가득찬 시선, 사회 안전망이 미치지 못하는 하층부를 채우며 유럽사회에 부적응한 이들이 야기하는 갖가지 사회 문제들은 "교실 속 아이들과 선생님의 관계"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단지 "축구" 문제로 감정에 불이 붙는 아이들처럼 통합은 제도의 완성일 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 사람 사이의 경계를 성공적으로 해체하고 다시 봉합하는 일이다. 자신의 신체적, 생래적 고향을 떠나 새롭게 유럽에 뿌리 내린 이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개인의 몫을 넘어 전체가 공유해야 할 문제이다. 자신은 프랑스에 살고 있으니 프랑스를 응원한다는 아이와 아프리카의 국가팀을 응원하는 아이의 말다툼은 다민족, 다인종, 다국적의 사회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정체성은 무엇이며, 그것을 개개인에게 어떻게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에서 최근 몇 년 간 벌어진 소요사태나 유럽 국가 사이에서의 이슬람과의 갈등, 그리고 곳곳에서 감지되는 파시스트적 움직임은 결국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건강한 통합이 요원하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사례일 것이다. 외면한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로랑 캉테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결국 모두의 미래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통합을 부르짖고 있지만 당장 현실적으로 곪고 있는, 치료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몸 전체로 퍼질 상처였을 것이다.

선생님들을 대하는 아이들의 비뚤어진 태도도 어찌 보면 그 동안 그들이 받은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고, 여학생에게 내뱉는 선생님의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자신의 위치에서 한계에 부딪힌 표현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순간 프랑스인 선생님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이민자 아이들은 아이들의 입장에서 뭉치고 서로에게 반목한다. 모두의 입장을 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또 일면 받아들이기 힘들다. 결국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의 문제는 아니다. 서로를 극으로 소비시키고 있는 현실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각기 다른 하나 하나를 연결시켜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감독이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는 한 학생의 말이 어느 때보다 선생님의 표정을 어둡게 만든 것에서 이 질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이 영화의 마지막 묵직하게 다가온다.


결코 남의 얘기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이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국내외의 공식 문건을 예로 들지 않아도 더 이상 이 공간은 우리만의 공간이 아니다. 도시의 이주노동자들, 농촌의 이주여성들, 그리고 그들의 2세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점점 드러나고 있다. 문제가 없다는 우를 범하기 보다 건강한 방법을 그들과 함께 모색하는 것이 그토록 국가발전을 외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관심을 두어야 할 대상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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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7 16:16

<한 여름 밤의 꿈> 장맛비에 낚이다.

<한 여름 밤의 꿈> 장맛비에 낚이다.


원작 : 윌리엄 세익스피어
번역, 연출 : 최형인
출연 : 김효진, 최진영, 안내상, 최용민, 김보영 외

 
확실히 비는 사람을 묘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뭔가 굉장히 큰 일이 일어날 것을 알려주는 전주곡... 그게 무엇일까 두려워 자꾸 안으로만 파고 들게 만드는, 숨을 죽이고 내리는 빗줄기와 빗소리를 그저 바라보고 들을 수밖에 없이 만드는 자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눈'과는 분명 다른 어떤 것이다. 눈은 소리가 없고, 촉각이 없다.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시각 뿐이다. 하지만 비는 오감 전체를 자극한다. 눈으로 보고, 소리로 듣고, 몸에 닿음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거칠고 강한 비일수록 오감은 크게 동요하고, 감정은 제멋대로 휘둘린다. 구멍난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보게 만드는 장마... 장마가 되면 사람들은 그래서 가끔 이성이 아닌 철저하게 감정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된다.




14일 정말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잦아들때쯤 다시 퍼부었고, 이제 그쳤겠거니 하는 생각에 뒤통수 맏기가 일쑤였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세상 소음 다 잡아먹는 빗소리만 듣고 있었더니 오감이 다 지친듯했다. 만나기로 했던 친구와의 약속도 빗줄기에 깨져버렸고, 그냥 집에 가면 한없이 까라질 것 같아 버스에서 내려 무작정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전시가 됐든, 공연이 됐든 아무거나 보자." 라는 생각으로...  우산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였고, 홀딱 젖은 걸음을 공연장에 들여놓자 <한 여름 밤의 꿈> 공연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8시 공연 시작. 한 시간 하고도 30분이 남았다. 근데 매진이란다. 이 비를 뚫고 여기까지 이거 보려고 오는 사람이 이리도 많다니... 혹시 취소표가 나올 수 있다는 티켓박스 직원의 말만 믿고 기다리다 공연 시작 5분을 남기고 티켓 한 장을 손에 쥐었다. 세상에!!! 아무리 소극장이지만 사람들로 꽉차 있는 공연장을 보니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나처럼 그냥 집에 가기 싫어 한 평도 안 되는 우산에 몸을 맡기고 온 것 같았다. Great Korean!!!

어쨌든 장맛비에 낚여 계획에 없이 공연장을 찾았지만 마음은 좋았다. 소극장 공연이 오랜만이어서 반가웠고,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세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이라서 더 그랬다. 편견이겠지만, 난 왠지 "오~~~" 로 시작해 뜻 모를 말만 마구 쏟아내는 클래식한 고전연극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날씨 탓이었는지, 기분 탓이었는지 (무대에서 처음 보는 작품이라서 예전 공연, 누구의 공연과 비교해 이렇다 저렇다 평을 할 수는 없지만) 공연은 충분히 즐길만 했다. TV에서 낯익은 배우들의 연기가 무대에서 다소 이물감을 들게했음에도 여러 인물들이 많들어 내는 촌극에 다른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세익스피어의 4대 희극이라고는 하지만 뭐 그렇게 거창한 의미를 두고 공연을 본 건 아니었기에 부담감도 제로였다. Just Enjoy!!!

방향 감각을 잃은 연인들의 갈지자의 사랑. 오늘을 죽고 못사는 열정이 내일의 지긋지긋한 이별만 못한 것이 사랑이란 것이다. 그 변화무쌍함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세익스피어는 인간이 아닌 요정의 장난질 정도로 사랑을 생각했던 것 같다. 요정의 장난으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 제자리를 찾은 그들의 사랑도, 운명을 읊조리는 달콤한 말과 오감을 저리게 만드는 손짓들도 어쩌면 제목처럼 모두 '한 여름밤의 꿈'과 같은 것일 수 있겠다.

공연이 끝나고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2시간 전까지만해도 땅을 파고 들어갈듯한 기세였던 빗줄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이것 역시도 요정들의 장난질이었을까 아니면 한 여름밤의 꿈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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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3 10:30

<똥파리> 무쓸모의 존재감


<똥파리> 무쓸모의 존재감


Korea; 2008; 130min; Drama
Director: 양익준
Cast: 양익준, 김꽃비, 이환, 정만식


 
시간을 뛰어넘어 2009년 연말로 가서 한 해 영화계를 정리할 때, 그 리스트에 "독립영화의 약진"이라고 적어놔도 쉽게 이의를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워낭소리>가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잭팟을 터뜨린 이후 <낮술>, <할매꽃> 등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여름의 시작과 함께 또 한 편의 독립영화가 수상한 세를 모으고 있다. 연이은 국제영화제 수상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극장 개봉에 성공한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가 그 주인공.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감독, 각본, 주연까지 혼자 1인 3역을 도맡은 신인 감독의 영화에 쏠리는 관심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제목부터 범상하지 않다. 여름이면 모기와 함께 찾아오는 무쓸모의 양대산맥이 "똥파리"다. 과연 영화 <똥파리>는 어떤 존재감을 갖고 있을까? 여러가지 기대감으로 극장을 찾았다. 영화가 시작하고 2시간 10분이 지나서 다시 상영관에 불이 들어왔다. 다소 긴 러닝타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스토리는 흥미로웠고, 구성은 찰졌다. 짧게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우리 이전 세대 아버지들의 권위주의적 폭력에 '안녕'을 고하는 영화"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거친 제목과 달리 영화는 따뜻하고, 인간적이었다. 감독의 자기고백적 느낌이 강하지만, 누구나 한 번 쯤 품었을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래서 왠지 많은 사람에게 깊은 울림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폭력의 시작

늦은 밤, 한적한 동네 사거리에서 한 남자가 여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질을 하고 있다. 잠시 후 상훈이 앵글 안으로 들어온다. (상훈은 '주먹'을 통해 처음 영화 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남자는 상훈에 의해 폭력의 가해자에서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폭력에 더 큰 폭력으로 남자를 응징한 상훈에게서 관객들은 묘한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상훈은 돌아서 매를 맞던 여자에게 뺨을 날리고 침을 뱉는다. 방금 전의 쾌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남은 건 짜증과 멸시에 찌든 상훈의 표정 뿐이다. 그 표정에서 연민과 동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똥파리>의 첫 장면, 감독은 폭력의 변이를 파노라마가 이어지듯 보여준다. 첫 시퀀스로 똥파리 상훈의 캐릭터에 대한 모든 설명이 끝이 난다. 상훈은 보통 사람이 가진 평범한 감정을 공유하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과 표정을 갖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폭력'이다. 이 후의 영화는 그가 가진 폭력이 어떻게 체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몇 번의 플래시백을 통해 드러나는 상훈의 폭력은 '가족'으로부터 출발한다. 특히 아버지는 상훈이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배설하는 욕설과 폭력의 실체가 된다. 약한 어머니에게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고, 그 와중에 어린 여동생을 죽인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것이다. 동시에 상훈의 폭력에는 가해자였던 아버지만큼이나 피해자였던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함께 얽혀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매맞는 여자를 대한 상훈의 태도는 "속수무책으로 맞고만 있었던 어머니"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상훈은 어머니에게 피해자로서의 연민과 어린 자신과 여동생을 지키지 못한 원망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상훈의 폭력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와 여동생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아버지에 대한 분노,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그가 아버지보다 더 큰 폭력을 갖게 된 것은 - 어머니와 같은 약한 존재가 되어 또 다른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겠다는 - 삶의 궤적이 만들어준 그만의 삶의 양식(a way of life)이다. 


더불어 <똥파리>는 지극히 감독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을 하고 있지만 '폭력'에서 사회적 맥락을 제거하지 않는다. 솔직히 <똥파리>를 보고 있으면 몇몇 장면에서 가난을 폭력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상훈과 영재의 가족이 속한 도시의 빈민촌은 지난한 가난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 곳에서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폭력이, 형제를 향한 다른 형제의 폭력이, 이웃을 향한 이웃의 폭력이 '가난'을 이유로 이뤄진다. 또한 영재가 가난을 벗어나고자 폭력을 휘두르는 용역 깡패가 되는 모습에서는 가난의 되물림이 폭력의 되물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약 이렇게 가난과 폭력을 등호의 관계를 놓고 영화가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갔다면 <똥파리>가 가진 윤리성은 심각하게 훼손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양익준 감독은 가난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위기를 돌파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가난하지만 '필사적'으로 그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가난의 굴레에서 한 걸음도 도망칠 수 없다. 그것은 가난이 이미 개인의 능력을 벗어나 사회적 구조 속에서 무한 반복되기 때문이다. 연희의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건 구청직원들에게 언제 헐릴지 모르는 포장마차였고, 그의 딸 연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시급 몇 천 원의 떡볶이집 아르바이트가 고작이다. <똥파리>는 가난이 폭력이 뿌리내리기 쉬운 토양을 제공하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가난한 사람이 폭력적 사람이 된다는 논리로 환원하지는 않는다. 
 
연희의 아버지는 폭력이 가진 사회적 맥락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국가를 위해 전쟁(베트남전)에 참여했다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그는 국가로부터 버려진 인물이다. 얼마 정도의 보조금을 받고 있지만 한 가정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노동력을 상실한 그는 곧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방기하고, 남자로서의 기능을 거세당한다. 그가 끊임없이 아내를 의심하고, 가족을 폭력으로 대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남자' 임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엄청난 국익을 가져올 것이라는 이유로 국가는 생면부지 전쟁터로 젊은이를 보냈고, 다시 돌아왔을때 국가로부터 소외 당한 참전용사는 고스란히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폭력의 시작점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들을 통째로 감당해야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닌 온전히 가족의 몫이 되었다. 결국 <똥파리>가 보여주는 폭력의 실체는 사회사와 개인사가 복잡하게 얽힌 결과물인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의 결과물... 영화 포스터의 카피처럼 "세상은 엿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은 아닐지언정 그 감정만큼은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폭력의 확대

영화 <똥파리>에서 아버지들(연희의 아버지와 상훈의 아버지)은 한국의 권위주의 시대에 가족에게 자행된 폭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리고 아버지들로부터 출발한 폭력은 이후 세대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오히려 더 확대된다. 폭력은 그 폭력을 누를 수 있는 더 큰 폭력을 야기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상훈의 아버지가 행하는 폭력이 가족의 틀 안에 있었다면, 상훈의 폭력은 아버지의 폭력을 방기한 세상을 향해 있다. 그의 폭력은 성별은 물론이거니와 적(敵)과 아(我)를 가리지도 않는다. 나이까지 경계가 없는 듯 보인다. 심지어 경찰로 상징되는 공권력에게까지 그의 폭력은 거침이 없다. 연민과 동정과 같은 감정은 애초에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분노 뿐이다. 그가 하는 말은 욕이고, 그가 하는 행동은 폭력이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상훈은 '언어 이전의 인간'인 것이다. 또한 등록금 시위현장에서 보듯 그의 폭력은 윤리와 도덕 이전의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폭력을 이용해 돈을 벌 수 있는 용역깡패가 고작이다. 


또 다른 상훈, 영재가 있다. 상훈처럼 불운하게 어머니를 잃고, 가장으로서 기능을 상실한 아버지를 두고 있다. 둘에게 아버지는 공히 분노와 원망의 대상일 뿐이다. 똑같이 마음을 쓰게 만드는 누나가 한 명을 두고 있는 점도 닮아 있다. 하지만 상훈의 폭력이 세상 밖으로 거칠게 표출되는 반면에 처음 영재의 폭력은 가정 내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상훈은 아버지와 누나에게 절대적인 폭력을 행사하지만 밖에서 그렇지 못하다. 친구 승훈을 따라나선 용역 현장에서 영재는 지금까지 경험으로 감당하기 힘든 폭력(상훈)을 마주한다. 그리고 영재는 그의 앞에서 우물쭈물한다. 하지만 그 주저함은 껍질을 벗고 더 큰 몸을 얻기 위해 몸부림 치는 파충류의 변태 과정과도 닮아 있다. 그 과정을 통해 영재는 더 큰 폭력을 물려받는다. 영재는 다른 용역들처럼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영화의 마지막, 영재는 자신의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상훈에게 충동적으로 막무가내 폭력을 휘두른다. '절대적인 폭력'이라고 믿었던 상훈의 약한 모습은 순간적으로 약자와 강자의 위치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영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영재는 상훈을 제거함으로써 그보다 강한 폭력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버지들의 폭력은 상훈을 통해 다시 영재에게로 확대, 전이된다. 결국 상훈과 영재는 한국의 근대사(우리의 아버지 세대)가 만든 폭력의 결과물인 셈이다.

폭력의 소멸


영화의 전반부가 상훈을 중심으로 한 폭력의 전이를 보여주고 있다면, 후반부는 치유의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치유의 파동이 시작되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가족'이다. 아마도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치유는 생채기가 생긴 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상훈의 아버지와 상훈이 행하는 폭력의 차이점은, 아버지 폭력의 피해자가 오직 가족이었던 반면 상훈의 폭력은 가족을 제외한 모든 세상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상훈에게 가족은 그토록 없었으면 하면서도, 그가 간절히 욕망하는 대상이었다. 15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세상에 나온 아버지에 대한 상훈의 무자비한 폭력은 자신에게 온전한 가족을 만들어주지 못한 원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가 아버지가 없는 동안 배다른 누나(현서)와 그의 자식(형인)을 돌봤던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아버지씨의 씨를 타고났지만 상훈은 현서와 형인에게서 희미하게 남아있는 가족의 흔적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표현이 거칠고 어설프지만 말이다. 

가족을 향한 상훈의 한 걸음은 만식과 연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상훈보다 네 살이나 많은 만식은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그의 유일한 친구이다. 세상과 이리저리 치받으며 결국에는 스스로 상처를 내는 상훈을 마음 쓰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만식은 아파하는 걸 알면서도 상훈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계속 상기시킨다. 아마도 상훈이 가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이다. 그리고 연희가 있다. 우연히 만난 이 겁없는 고3 소녀는 상훈에게 죽은 어머니이자 여동생, 구원자이자 친구와 같은 존재이다. 상훈 만큼이나 복잡한 가정사를 가진 연희 역시 가정과 학교 어느 곳에서도 위로를 받지 못한다. 그리고 세상과 소통하지 못했던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위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 상훈은 단 한 번 크게 웃고, 단 한 번 크게 운다. 항상 연희가 그 옆에 있었다. 연희 역시 상훈과 같이 웃고, 같이 눈물을 흘린다. 연희를 통해서 상훈은 타인과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운다. 둘은 질척거리는 가정사를 주저리 떠들지 않아도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상훈은 다시 가족을 용기내본다. 조카의 유치원 학예회에 상훈을 통해 탄생한 '가족'이 모인다. 여기서 감독은 가족을 굳이 혈연으로 뭉친 1차집단으로 한정시키지 않는다. 이미 <다섯은 너무 많아>, <가족의 탄생>에서 전복적으로 그려낸 가족의 탄생은 <똥파리>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상훈의 아버지, 현서, 형인, 만식, 그리고 연희까지... 이들에게는 '가족'이라는 타이틀도 붙지 않았고,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라는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 지붕 아래 모여 살지는 않지만 그들은 '가족'을 이루며 산다. 각자는 그 안에서 그저 서로를 보듬고 배려하는 동등한 구성원일 뿐이다. 감독은 근대적 가족이 가진 편협한 정의를 거부하고 타인에게까지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연희와 영재 남매가 슬프게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영재의 존재는 분명 한 번 전이된 폭력이 쉽게 없어질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연희를 통해 영재가 확대된 개념의 가족 공간으로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영재 역시 상훈 만큼이나 건강한 가족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닌 응당 해야할 일이다. 폭력은 개인과 가정의 테두리에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기에 그렇다.

여기서 상훈의 위치는 어디일까? 감독은 상훈에게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상훈의 아버지가 거세된 폭력이라면, 상훈은 살아있는 폭력을 의미한다. 곧 그의 죽음은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폭력의 마침표이자, 권위주의 시대 폭력의 종결인 것이다. 힘이 가득 들어간 '주먹'으로 영화 속에 들어온 상훈은 숨이 떨어진 그 손을 마지막으로 영화를 떠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에서 톰(비고 모르텐슨)의 가족은 폭력의 실체를 알면서도 침묵한다. 그 침묵은 엄청난 폭력을 묻어두고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상징이다. 하지만 <똥파리>는 상훈의 죽음을 통해 남은 자들에게 온전한 평화를 선물하고자 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는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다. 똥파리는 없어졌다.  
 


솔직히 <똥파리>의 모든 감정들이 이해되고, 모든 인물을 안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의 화해와 용서에 어느 정도의 물음표가 남는 것도 사실이다. 표현 방법에서도 여러 장르의 클리세들은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런 부족함에도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것은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뜨거운 '진심'에 있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난 누구를 위해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 만든다." 는 말을 했다. 그 만큼 <똥파리>는 한 컷, 한 컷에서 감독의 진한 인생이 묻어난다. 그럼에도 사변적이지 않고 그 진심이 온전히 전달되는 이유는 처음에 얘기했듯이 상훈의 이야기가 특별할지언정 그 메시지는 보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로 인한 갈등과 그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극복하기까지 한 개인이 겪는 감정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보편적이다. (영화의 엄청난 수상 성적을 봤을 때 서양 역시 마찬가지인 듯하다.) 감독은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녹여내 영화로 풀고 있다. 그리고 감독은 메마르고 황량한 현실에서도 감히 희망을 얘기한다. 또한 그것이 이뤄질 거라고 믿는다. 양익준은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다. 그 진심이 스크린에 그대로 묻어난다.


P.S. 1
긴 러닝타임에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 것은 스토리의 재미와 구성의 탄탄함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적재적소에서 터져주는 유머와 배우들의 군더더기 없는 연기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 듯 하다. 인물들이 뱉어내는 대사는 특히나 찰졌고, 캐릭터를 완벽하게 살려냈다. (개인적으로 콘프레이크를 먹는 채무자 장면과 만식의 대사들이 인상적이었다.) <똥파리>를 배우들의 발견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양익준은 감독, 각본, 주연까지 충무로의 좋은 영양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김꽃비, 이환, 정만식까지 벌써 차기작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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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6 06:38

<인물사진의 거장 카쉬展> 시대의 얼굴들


<인물사진의 거장 카쉬展> 시대의 얼굴들


장소: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일반:8000)
기간: 2009년 3월 4일~2009년 5월 8일
시간: 11:00~20:00(화~일), 13:00~20:00(월)

 
지금도 그렇지만 난 어렸을 때 위인전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국어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위인들의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백과사전, 동화전집과 함께 책꽂이 트로이카를 이루고 있었던 위인전집 역시 기피 대상 1호였다. 그 때는 그냥 그 인물들을 따라 살아야지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내게 강요를 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렇게 크게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원인을 찾아 들어가면 책 속의 인물들에게 '인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 때 교과서 속의 위인들은 현실적인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기보다 하나같이 초현실적인 영웅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난을 이겨내고,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고민이나 한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원래부터 그렇게 태어난 '영웅'들이었다. 장군들은 어린 시절에 모두 호랑이를 때려잡았고, 대학자들은 모두 사서삼경을 걸음마 전에 독파했으며, 훌륭한 임금은 어려서부터 백성의 안위와 나라의 안보를 걱정했다. 그들에게는 모두 '인간적인 이야기'가 결핍되어 있었다. (몇 년 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어린 시절을 겁쟁이로 묘사했다가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은 일화를 보라. 위인은 그 정도로 우리에게 초현실적인 존재들이다.) 

반 고흐의 <영혼의 편지>를 읽으면서 받았던 충격은 그래서 신선하고 오래 남는 울림을 남겨주었다. 동생 테오와 주고 받은 편지에서 느껴지는 화가 반 고흐는 위인전 속에 살고 있는 무오류의 식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당장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그림을 팔아야 하는 처지의 인간이었고, 타인과의 관계에 괴로워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에 빠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위인이기 이전에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천재는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소소한 진실이 페이지 곳곳에 담겨 있엇다. 숱한 위인전을 접하며 느꼈던 목마름을 두 형제가 주고 받은 편지의 문맥에서 배어나오는 인생의 진물을 마시며 해결할 수 있었다. 그 뒤로 고흐의 그림을 더욱 좋아하게 됐다. 천재 고흐가 아닌 인간 고흐의 그림을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간으로서 위인들을 만나는 기회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항상 "something special"을 원하는 매스컴을 통해 비춰지는 인물들은 점점 현실에 활착한다기 보다 점점 멀어지고 있다. 나와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되는 것이다.


요즘 다시 책 속의 위인이 아닌 '인간의 얼굴을 가진 위인들'을 만날 기회가 마련됐다. 3월부터 시작된 유섭 카쉬(Yousuf Karsh)의 인물사진展이 그 주인공이다. 솔직히 사진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인물 사진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는 것이 없다. '유섭 카쉬'라는 인물 역시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디지털 현상이 아닌 오리지널 빈티지프린트라는 홍보도 사실 처음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처럼 무지함에도 전시를 찾은 이유는 단 하나. 버스를 타고 오가는 길에 마주친, 예술의 전당 정면에 붙어 있는 오드리 햅번의 눈부신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바라는 바는 오직 하나였다. "저 빛나는 아름다움을 가슴에 품고 오리라!!!" 금요일 저녁, 일부러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때를 골라 전시장을 찾았다. 전시장 안은 예술의 전당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만큼 한가했다. 나처럼 때를 잘 맞춘 몇몇 사람만이 전시장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있었다. 

<Faces of Our Times>라는 부제답게 오드리 햅번 말고도 카쉬가 작업을 했던 많은 명사들의 인물사진이 전시중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이력이 스쳐지나가는 인물도 있었고, 처음 만나는 생소한 인물들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르게는 20년대 후반부터 늦게까지는 80년대 후반까지 그의 카메라에 담긴 인물들은 윈스턴 처칠, 아이젠하워, 소피아 로렌, 아인슈타인, 파블로 피카소, 헤밍웨이, 장 시벨리우스, 제시 노먼 등 정치인에서, 과학자, 작가, 미술가, 음악가, 배우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초월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 영역이 달랐음에도 카쉬의 카메라에 잡힌 얼굴들에서는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모두 자신의 영역에서 잠시 벗어나 '인간의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한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뤘거나,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친 존재들이었지만 프레임 속의 그들의 표정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다. 카메라 앞에선 그들은 근엄하면서도 익살스러웠고, 자신감에 찬 듯 하면서도 어딘가 두려운 듯한 어색함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배우가 아닌 인물들의 사진이 더욱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아마도 실제 그들을 만났다면 꼭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 같았다.

사진과 함께 한켠에 마련된 에피소드들은 사진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단지 인물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 아닌 피사체와 어떤 정서적인 교감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소통하고자 했던 카쉬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는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그 교감 때문이었는지 사진들은 유명한, 천재적 '인물'로서 머리를 울리기 보다는, '인간'으로서 가슴에 먼저 와 닿았던 것 같다. 하얀색 캠버스 위의 마치 그림 같았던 오드리 햅번의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 때문에 더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스탈린이 죽고 난 후 그를 비판하며 정권을 잡았던 흐루시초프의 장난기 가득한 사진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정치인 이전의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헤밍웨이의 땀이 느껴지는 얼굴도, 피카소의 익살기가 묻어나는 얼굴도 작가, 화가라고 부르기 전의 인간의 표정이었다. 제시 노먼의 눈 밑 상처가, 테레사의 가득한 주름이 오드리 햅번의 미소만큼이나 아름다웠던 이유이기도 하다.


카쉬는 조명에서부터 배경, 소품까지 그 인물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도록 철저하게 구성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진 속의 모든 장치들은 인위적인 느낌이라기보다 인물과 함께 살아있는 듯 자연스러워보인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해 그대로 박제해버리는 예술이다. 그래서 사진은 영원하지만, 살아있는 것 같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그 박제된 사진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과 그 앞에 있는 피사체와의 '이야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의 옛 사진을 보면서 절대 '죽은 사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진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다. 때로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태평양의 어느 아름다운 섬의 사진보다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어린 시절 마을 사진이 더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법이다. 그렇듯 사진은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살아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카쉬의 인물사진에서 이런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이유 역시 그것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따뜻한 이유는 인물들이 '무엇인 척' 하지 않는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을 나오며 뒤를 돌아봤을 때 윈스턴 처칠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귀여웠던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P.S.1
카쉬의 인물 사진과 더불어 그의 초기 작업들, 캐나다의 산업화 시기를 담은 사진들도 함께 전시중이었다. 카쉬의 전체 작품 세계를 조망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이 많지 않아 다소 아쉬운 감이 있다. 근데 공장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 노동자일까? 아무래도 얼굴과 몸을 봤을 때 모델들을 데려다 찍은 것 같다. ^^

P.S.2
임응식, 육명심, 박상훈, 임영균, 김동욱 등 다섯 명의 한국 인물 사진 작가들의 작품도 딱 맛만 볼 수 있을 만큼 전시돼 있다. 물론, 턱없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 (임영균이 찍은 유섭 카쉬의 인물사진이 눈길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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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6 10:30

<해피 투게더> 장국영을 추억하다.


<해피 투게더> 장국영을 추억하다.


HongKong; 1997; 96min; Drama
Director: 왕가위
Cast: 장국영, 양조위, 장첸


 
1980년대와 90년대를 중,고등학생으로 보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장국영에게 빚지고 있는 사연 하나 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특히 만우절 정말 거짓말처럼 떠나버린 그의 마지막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난 그 때 군대에서 제대를 100일도 남겨두지 않은 노쇄한 말년 병장이었다. 그 날도 평소와 다름 없이 만족스런 표정(달력이 한 장 넘어가는 날이었으니까...)으로 달력에 X표를 하고, 병장들만 쓸 수 있다는 사제 폼클렌징와 함께 세면장에 들어섰던 걸로 기억한다. 곧 밖에서 만날 사람들에게 보다 탱탱한 피부를 보여주겠다는 각오 하나로 구석구석을 씻던 중 뒤따라오는 후임이 허겁지겁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왜 하필이면 장국영이냐..." 난 그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무심한 듯 핀잔을 줬다. 만우절 농담치고는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차라리 내 제대 날짜가 밀렸다는 구라를 치지..." 하지만 뉴스를 통해 거짓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묘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뭐라 감정을 설명할 수 있었을까. 동창회 모임에서 오래 전 같이 죽고 못살던 친구의 안부가 아닌 부고를 들었을 때의 느낌이 이럴까. 솔직히 아직까지도 그의 죽음은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를 열렬히 좋아했던 그 때도 장국영은 현실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딘가 내가 숨 쉬는 세계와는 다른 공간에서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으니까. 여전히 그는 어디에선가 늙지 않고 나이를 먹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대학생이 되면서 홍콩영화는 본격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국 반환이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 전부터 감지되던 홍콩영화의 매너리즘과 지리멸렬함이 더 큰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홍콩영화의 운명과 함께 장국영의 이름을 떠올리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만큼 그에 대한 관심도 희미해졌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피터팬과 같은 표정과 동작을 간직하고 있을 것 같았던 그의 죽음이 믿기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견디기 힘들었을 그의 외로움에 나 역시도 가볍지 않은 돌 하나를 얹은 기분이었다. 슬프지만 그의 죽음이 그를 온전하게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줬던 것 같다. 그를 추억함이 미안함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과거를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나의 사춘기 시절도 오랜만에 먼지를 걷어내고 한바탕 신나게 머릿속을 헤짚고 다녔다. 그가 선물처럼 주고 간 사춘기의 알싸함을 난 그와 동시에 잊고 지내고 있었다. 난 장국영, 그의 음악, 그의 영화와 함께 어떤 10대를 보냈을까. 


중학교 때 학원에서 만난 마음에 드는 친구에게 난 장국영이 녹음한 야반가성의 OST를 선물했던 기억이 있다. 음악을 듣고 "고마워, 노래가 너무 좋았어..." 라고 말하면 같이 그 영화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던 것 같다.) 결국 기대했던 해피엔딩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만큼 장국영의 음악과 영화는 나의 사춘기 시절과 오롯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의 노래는 나도 잊어버린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같은 해 나온 앨범 <총애장국영>은 거의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던 것 같다. 묘한 재즈풍의 <풍월> 삽입곡 A thousand dreams of you는 셀린 디옹, 마이클런스투락, 퀸의 노래와 함께 당시에 내가 외우고 다니는 몇 개 안 되는 영어 노래였고, <야반가성>의 삽입곡 야반가성과 심정상옹은 눈을 감고도 부를 수 있는 중국어 노래였다. 야반가성의 발음을 한글로 옮겨 놓은 음악잡지를 오려다가 수없이 되풀이하며 의미도 모르는 가사를 외웠다. 왜 그렇게 그 노래를 외우려 했는지 잘 모르겠다. 하긴 지금의 감수성으로 그 때의 감수성을 이해하려는 것이 무리이기도 하겠다. 암튼 난 '즈요우짜이예션 워흐어니짜이넝 창카이링헌 취스팡티엔젠~~~'을 연신 중얼거리고 다녔었다. (난 아직도 이 노래를 외워서 부를 수 있다!!!) 그 날 4월 1일 난 그의 죽음 때문에 현실같은 꿈을, 꿈같은 현실을 보냈다. 장국영을 추억하며 자연스럽게 되살아난 사춘기의 기억에 약간 센치해지면서 말이다. 하긴 그래봤자 군대 아니었나. 야반가성을 듣고 싶어도 귀에 들리는 건 "OOO 병장님 점심 드시러 가지 말입니다." 였으니...

그리고 또 6년 가까이 지났다. 세상에나 시간 참... 그 만큼 시간에 비례해 장국영은 또 기억에서 잊혀졌다. 이제 그는 리모콘을 이리저리 돌리다 우연처럼 만나는 케이블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배우가 됐다. 슬픈 일이지만 그의 음악도, 영화도 이제는 도서관에서나 존재하는 듯하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그와 함께 사춘기와 청춘을 보냈던 이들이 과거를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서울의 한 극장에서 장국영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영웅본색1, 영웅본색2, 해피투게더, 야반가성, 가유희사, 아비정전, 백발마녀전> 솔직히 그의 전체 필모그래피를 봤을 때 소박하기 이를 때 없는 차림상이다. 아쉬움이 없다고 하면 솔직히 거짓말이다. 하지만 파편들을 통해 그의 전체를 추억할 수 있는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 스크린에서 그를 만나고, 그를 추억함이 그가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있지 않은 지금, 가슴 떨리는 사춘기를 선물해 준 은인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제는 밥 먹으러 가자고 눈치 없이 보채는 후임병도 없으니 말이다.


토요일 해가 막 저물 때쯤 극장을 찾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매를 했는데 다행이다 싶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객석을 꽉 채운 사람들을 보니 장국영 그가 남긴 흔적이 적지 않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다. 늘 썰렁하던 극장에 사람이 붐벼서 그런지 극장 직원들도 꽤 당황하는 눈치였다. 발권이 늦어져 상영도 10분 늦춰지는 등 낙원상가 4층이 모처럼 만에 북적북적 그야말로 극장 다워 보였다. (모스필름 회고전이 열리는 시네마테크는 상대적으로 관객이 적어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시간이 지연되는 것에 상관 없이 기다리는 사람들 얼굴의 홍조는 변함이 없었다. 영화 자체가 주는 설렘만으로 극장의 분위기가 이렇게 긴장될 수 있다는 것에 묘한 감동도 받았던 것 같다. 나이를 지긋하게 드신 어르신부터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 그리고 갓 대학생이 된 듯한 학생들까지 고른 연령층의 관객들 역시 새롭긴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작품은 왕가위 감독의 1997년도 작품 <해피 투게더>. 이번 회고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일 것이다. <춘광사설>, <부에노스 아이레스> 등 세 가지 제목으로 알려진 영화는 파격적인(?) 동성애 묘사로 인해 국내 개봉 당시 일부를 들어내고 상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반발심 때문이었던가 난 개봉 당시 영화를 보지 않았다.) 무삭제로 처음 상영되는 <해피 투게더>... 지금 보면 파격적이라는 말이 왠지 민망하기까지 하다.

상영관의 불이 꺼지고 장국영이, 아니 보영이 스크린에 모습을 보였다. 한 동안 잊고 지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그의 모습에서 불안과 외로움이 비친다. 여린 얼굴의 보영은 자유분방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한껏 몸을 움추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낯선 아르헨티나에서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가시를 세우고 자신을 단단하게 지키려는 듯... 그의 옆에 아휘(양조위)가 있다. 보영에 대한 사랑 말고는 그를 지탱시켜주는 것이 없는 듯 보인다. 보영을 사랑하기에 함께 아르헨티나까지 왔고, 보영과 함께 이과수 폭포를 찾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보영은 아휘에게 지친 듯, 일상이 되어 버린 그들의 반복된 사랑에 지친 듯, 홍콩과 다를 바 없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지친 듯 그렇게 떠난다. 

홍콩의 우울한 거리를 비추던 왕가위 감독의 카메라는 똑같이 희망을 찾을 길 없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골목골목과 사람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 골목과 사람들 속에 아휘와 보영이 살고 있다. 홍콩을 피해 흘러들어 간 곳. 하지만 지구 반대편 그 곳에서도 그들은 희망을 찾지 못한다. 아휘와 보영이 마주한 현실은 비슷한 일상과 비슷한 일탈 뿐이다. 결국 보영은 지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아휘에게 돌아온다. 하지만 그의 불안과 두려움은 아휘를 사랑함에도 다시 그를 떠나게 만든다. 남은 아휘는 보영을 가슴에 묻는 법을 익힌다. 그리고 보영과 함께 오기로 했던 이과수 폭포를 끝으로 아르헨티나를 떠나 홍콩으로 돌아온다. 그와 보영의 추억은 창(장첸)의 녹음기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앙코르 와트에 '화양연화(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를 묻은 차우처럼, 아휘는 창의 녹음기에 '춘광사설(봄 햇살처럼 짧은 사랑)'을 두고 떠난 것이다. 세상의 끝을 향하는 창은 그 곳에 아휘의 아픔을 놓고 오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세상의 끝 아슈야의 등대에서 그는 아휘의 아픔(눈물)을 바람에 흘려 보낸다. 하지만 아휘와 창, 둘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다. 우연히 대만을 들른 아휘가 그 곳에서 창의 흔적을 발견하듯,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Happy Together...

혼자 남은 건 보영 뿐이다. 자신의 사랑을 두려워 했던 것에 대한 벌을 받듯 그는 아휘가 떠난 흔적을 더듬을 뿐이다. 아휘가 머물렀던 곳을 닦으며, 그를 위해 담배를 채워놓고, 그가 앉던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린다. 아휘가 일하던 곳을 찾아 그를 찾지만 보영에게 남은 건 지독한 외로움 뿐이다. 아휘는 돌아갈 곳이 있었지만 보영은 그렇지 않기에 혼자 그 지독한, 절망 같은 외로움을 견녀내야 한다. 영화 속 보영의 마지막 장면에서 순간 장국영의 모습이 보였다. 떠나간 아휘의 이불을 끌어안고 이제까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보영... 평생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이 두려워 아무도 모르는 순간 혼자 눈물을 쏟아내야 했던 장국영의 외로움이 묻어났다면 무리였을까. <해피 투게더>는 보영에게 '해피 투게더'를 허락하지 않은 듯하다. 영화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서랍장을 뒤져 장국영의 흔적들을 찾아봤다. 근데 총애장국영 테이프와 해피투게더, 동사서독 포스터, 아비정전 비디오테이프가 전부다. 그 많던 것들은 다 어딜 건건지...


솔직히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가 아닌 장국영의 <해피 투게더>를 보고 왔다. 자신만의 영화 언어로 뚜렷한 자기 세계를 만들어 가는 왕가위는 해피 투게더를 통해 더욱 원숙한 미학과 언어, 이야기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해피투게더> 이전의 왕가위보다 이후의 왕가위를 더 좋아한다. (역시 <해피 투게더>와 <화양연화>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좋다.) 사실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를 봤다면 인물의 심리를 그대로 담아낸 마치 시와 같은 그의 영상과 더불어 홍콩 반환(1997)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을 것이다. (난 <해피 투게더> 속에 홍콩의 중국 반환에 대한 감독의 희망 혹은 안정감이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왕가위와 양조위, 장첸에게는 미안하지만 시선이 향했던 것은 오로지 장국영이 연기한 보영이 뱉어내는 대사와 움직임이었다. 그를 추억하고, 그와 함께한 내 사춘기를 추억하기 위해 그곳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보이지만 깊은 외로움이 묻어나는 보영이 왠지 장국영의 실제 모습과 가장 닮은 캐릭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더욱 몰입을 했던 것 같다. 그의 인생을, 그의 죽음을 둘러싼 확인되지 않은 많은 얘기들이 흘러다니지만 그런 것들에 귀를 닫으려 한다. 애초에 장국영은 영화 속에서 살며 말을 건네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난 앞으로도 영화 속에서 살아 있는, 늙지 않는 장국영을 기억할 것이다. 내 알싸한 추억과 함께...



P.S.1
오랜만에 <총애장국영> 앨범을 듣고 싶어 테이프를 꺼냈는데 오디오에 카세트 플레이어가 없다. 포기하려던 찰나 '찍찍이(공식명칭: 어학기)'가 눈에 들어왔다. 토익 리스닝 찍찍대던 스피커에서 장국영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어색하지만 나름 분위기가 있다. 어딘가 모르게 앤틱한 분위기???

P.S. 2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인가? 세계화를 본격적으로 부르짖으면서 중국식 이름을 원어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장만옥은 장만위가 됐고, 유덕화는 류더화가 됐고, 여명은 리밍이 됐다. 어찌 보면 그렇게 불러야 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 이름에는 왠지 추억이 빠져 있는 듯하다. 난 량차오웨이보다는 양조위가 좋고, 장궈룽보다는 장국영이 좋다. 장개석을 장제스로, 등소평을 덩샤오핑이라고는 부를 수 있지만 양조위는 양조위고, 장국영은 장국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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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3 01:17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달콤 쌉싸름한 무대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달콤 쌉싸름한 무대


Germany; 120min; Semi-Documentary
Cast: 토마스 쿠친스키 외 7명
2009. 3. 27~3. 28: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신문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텔레비전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그 사이 책을 보고, 컴퓨터 화면을 보고, 광고를 보고, 사람들도 본다. 그다지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시간이 허락한다면 가끔은 공연도 보고, 영화도 본다. 보는 것은 일상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늘 사실이다. 때로는 진실에 가깝기도 하고, 때로는 진실에서 한참 벗어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진실만을 본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간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회의로 가득찬 눈으로 우리는 단 하루를 견뎌내기 힘들 것이다. 현실에서 허구와 사실은 그렇게 간단하고 명료하고 편이하게 구분되어 있는 개념이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면 사실의 다른편에 완전한 허구의 영역이 존재한다. 가장 쉽게 영화, 드라마, 소설, 연극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극장에 들어설 때, 소설의 페이지를 넘길 때 우리는 속편하게 허구의 세계가 제공하는 이야기 속에 흠뻑 취할 준비를 한다. 현실을 토대로 만들어 낸 허구의 세계... 앙드레 바쟁이 현실의 깊이를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리얼리즘 영화를 갈망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그도 인정했듯이) '현실의 재현'이다. 그래서 영화든, 소설이든 그것은 현실의 환영이자, 한편으로는 현실의 도피처가 된다. 

연극도 다르지 않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몸을 움직이고 대사를 뱉어내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아무리 실제 일어난 일을 토대로 극을 꾸몄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재현에 그친다. 배우들이 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허구를 더욱 사실처럼 만들기 위함이다. 그것이 허구라는 것 자체를 관객이 느끼지 못하도록 애초에 봉쇄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무대와 관객이 암묵적으로 맺고 있는 일종의 계약이다. 그리고 이 계약이 지금까지 연극을 유지시켜 온 바탕인 것이다. 온갖 종류의 드라마투르기(dramaturgy)가 있다 하더라도 이 계약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절대명제와도 같은 이 '계약'이 무대 위에서 의도적으로 해체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독일의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의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이 국제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 기간 동안 상연됐다. 애초에 세계 근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마르크스의 난공불략의 책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얼마나 쇼킹한 일인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공연장을 찾았지만 무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새롭고 신선한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 공연은 자본론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극화'한 것이 아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했겠는가...) 간단히 설명하면 현재를 살아가는 8명의 인물이 과연 두 세기 전에 출판된 '이 책'과 어떤 인연을 맺고 있는지를 각자의 입을 통해 무대에서 들려주는 것이다. 8명 중에는 노동자, 대학교수, 경영인, 영화감독, 학생, 통역가, 시각장애인 등 다양한 군상들이 포함돼 있다. 중요한 것은 8명의 인물들이 모두 전문배우가 아닌 실제 직업인들이며,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모두 자신의 인생 중 실제 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곧 그들이 연기하는 인물은 그들 자신이다. 앞에서 말했던 관객과 무대 사이의 계약이 파기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관객은 이 무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무대 위의 세계는 사실일까?, 허구일까?> <그것은 현실인가?, 현실의 재현인가?> <자본론 제1권>은 너무도 명확히 구분되어 있던 두 개념의 경계를 해체하는 실험을 무대 위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무대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에 연결된 비디오 영상은 이런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킨다.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한 해체이냐." 는 점이다. 솔직히 리미니 프로토콜이 실험적 무대로 잘 알려져 있다고는 하지만 단 한 번의 관람으로 속뜻까지 하나하나 짚어내기에는 연극에 대한 내 내공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다만 해체의 중심에 '소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본다. 물론 그 소통은 무대와 관객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굳어진 연극의 소통 방법은 잘 짜여진 극본과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상황과 잘 어울리는 무대 장치 등으로 요악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론 제1권>은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비전문배우들이 기댈 만한 탄탄한 대본은 없고, 인물들 역시 연기를 억지로 잘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대사를 잊기도 하고, 동선이 뒤틀어지기 일쑤다. 그럼에도 관객과 무대 사이에는 시종일관 커뮤니케이션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다. 극에 대한 완전한 몰입을 거부한 브레히트의 소격효과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즉, <자본론 제1권>의 커뮤니케이션은 평범한 연극 무대가 만들어 놓은 소통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8명 인물들의 행동이나 대사는 종이에 적힌 것을 단순히 흉내내는 것이 아닌 즉흥적으로 표현되는 느낌이 더욱 강하다. 물론 극의 순서가 정해져 있겠지만 자신의 차례에서 배우들이 내뱉는 말은 고정적이라기보다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다. 또한 그들은 대사를 서로 주고받는 것이 아닌 관객과 대화를 한다. 공연 도중 배우가 객석으로 뛰어들고, 관객에게 말을 거는 이제는 유행처럼 되어 버린 짤막한 퍼포먼스가 아닌 <자본론 제1권>은 정말 관객과 배우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공연 전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공연 도중 무대 책장에 가득 꽂혀 있던 자본론이 객석으로 전달되고, 실제 한국어판 번역을 맡은 학자와 함께 책의 주요 내용을 낭독한다. 이것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닌 무대와 객석, 현실과 허구를 이어주는 가교인 셈이다. 공연이 시작하고 낯선 설정에 당황했던 관객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소통의 방법에 적응을 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꽤 걸렸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뛰어 넘는, 그 구분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두 시간 동안 관객들은 더 이상 수동적인 리시버(receiver)가 아니다. 일방적으로, 의도적으로 쏟아내는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포획된 사람이 아니다. 함께 무대에 참여하고, 메시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공연의 주체'가 된다. 진정으로 '관객을 위한, 관객을 주인공으로 하는 무대가 되는 것'이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연출자와 대표(사진: 한겨레 신문)


개인적으로 리미니 프로토콜의 계속된 실험은 "관객과의 소통을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인가." 의 고민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이 실험적인 극단은 그 답을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도전에서 찾고자 한다. 세미 다큐멘터리(semi-documentary) 연극이라고 이름 붙여진 괴상한 무대는 연극과 다큐멘터리의 조합을 통해 사실과 허구의 해체라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소통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이종 결합 혹은 경계 해체는 연극에 비해 영화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이뤄졌던 것 같다. 지아장커의 경우처럼 극영화에 다큐멘터리의 화면을 삽입하는(스틸라이프), 반대로 다큐멘터리에 꾸며진 이야기를 삽입하는(24시티) 방법은 이야기가 완전한 허구도, 완전한 사실도 아님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 관객과 새로운 종류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연극이 물론 영화에 비해 현실적인 제약이 많은 분야이기는 하지만 <자본론 제1권>에서 볼 수 있는 스스로 틀을 깨고자 하는 시도는 관객의 입장에서 충분히 고맙고, 의미 있는 일이다. 머리는 복잡하게 만들지언정 계속해서 곱씹게 만드는, 그래서 답을 얻는 것이 아닌 스스로 안에서 떠오르게 만드는 경험은 쓰지만 자꾸 생각나는 초콜릿의 달콤함과 닮아 있다. 

연극의 새로움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더니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빼먹은 것 같다. 왜 리미니 프로토콜은 마르크스의 난해하기 짝이 없는 책을 무대 위에 올려야 겠다고 생각했을까?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누구나 이야기하지만 그만큼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 책이다. 분량도 부담스럽고, 내용도 어렵다. 그만큼 현실에서 마르크스는 '실체'보다 '허구'로 떠돌아다니는 '유령'과도 같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한다면 리미니 프로토콜이 마르크스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현재 자본주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병폐들은 어쩐지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했던 시기와 너무도 닮아 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자본의 흐름과 노동의 흐름을 비도덕적, 비윤리적으로 몰아가는 지금은 마르크스가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라고 인정했던 19세기 후반의 상황에서 조금도 낳아진 바가 없다. 오히려 그 구조가 확대, 강화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꾸준히 시험하는 이 극단에게 마르크스는 현실의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다가왔을 수 있다. 물론, 마르크스의 생각이 통째로 현실 자본주의를 교체해야 한다는 위험한 생각은 아니다. 다만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이라는 자신감에 벅찬 선언이 더 이상 의미를 잃은 지금 마르크스가 가진 인간에 대한 예의와 따뜻한 세계에 대한 열망이 하나의 알림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황'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미국에서 출발한 세계 경제 위기 속에서 마르크스가 다시 주목받고, 읽히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온기가 없는 자본의 흐름,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 노동은 더 이상 대안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대에서 함께 읽었던 <자본론>의 문구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본다.

- 이 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근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혀내는 데 있다.
-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富)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직접'으로 나타나고, 하나하나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형태로 나타난다.
- 자본가는 다른 모든 구매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구매한 상품(노동자)의 사용가치에서 가능한 한 최대의 효용을 얻어내려고 한다.
- 노동수단은 기계의 형태를 취하자마자 곧바로 노동자의 경쟁상대가 된다. 기계를 통한 자본의 자기증식은 기계로 말미암아 생존조건을 박탈당한 노동자 수에 비례한다.
-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력을 구매하는 목적은 노동력의 용역이나 생산물을 통해 구매자의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구매자의 목적은 자기 자본의 가치증식에 있다. 즉 그기 지불하는 것보다도 많은 노동을 포함하는 상품의 생산에 있다.
- 자본주의적 생산의 큰 장점은 그것이 끊임없이 임노동자를 임노동자로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자본의 축적에 비례하여 임노동자의 상대적 광잉인구를 늘 생산해낸다는 점에 있다. 그럼으로써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올바른 궤도 위에서 이루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필수불가결한 사회적 종속이 보장된다.
-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축적양식(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은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사적 소유의 절멸(노동자의 수탈)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이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도이칠랜드2) 공연 모습





P.S. 1
리미니 프로토콜의 공연은 작년 백남준 아트센터 개관기념으로 콜커타(call cutta in a room) 이후 두 번째 공연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많은 작품이 있다고 한다. 홈페이지의 작품 목록만 봐도 오감이 짜릿하다. 국내에서도 더 많은 작품으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http://www.rimini-protokoll.de/website/en/index.php

P.S.2
더 늦기 전에 자본론은 읽어봐야 겠다. 책장에 꽂혀서 묶은 때만 쌓이는 게 안쓰러워서라도 안되겠다.

P.S.3
국제다원예술제를 모토로 내세운 페스티벌 봄(Festival Bo:m)이 진행 중이다. 올해로 벌써 세 번째 행사다. 서울의 곳곳에서 연극, 영화, 미술, 무용 등 서로 다른 분야들이 흥미로운 '통섭'을 시도하고 있다. 분명 의미 있는 기획이고, 꼭 필요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좋은 프로그램으로 계속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짚어 넘어가야 할 문제점이 꽤 있는 것 같다.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에서도 배우들의 대사와 자막이 잘 매치되지 않아 불편함이 있었다. 회원가입을 해야지만 프로그램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도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다. (게시판에 불만이 많아서 그런지 곧 개선됐다.) 가장 아쉽고 안타까웠던 점은 10시간에 가까운 독일 영화를 자막없이 상영한 점이다. 알렉산더 크루게가 마르크스를 테마로 만든 인터뷰 형식의 영화 <이념적 고물로부터의 뉴스: 마르크스-에이젠슈타인-자본론>은 <자본론 제1권> 만큼이나 기대가 컸던 작품이다. 인터뷰로 이뤄지는 영화를 자막 없이 밤을 세워 보라니 도무지 대중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상영이 갑자기 결정됐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페스티벌의 이름이 '봄(보다)' 인데 볼 수 없게 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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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3 11:30

<레볼루셔너리 로드> 충돌하는 욕망들 - Who is right?


<레볼루셔너리 로드> 충돌하는 욕망들 - Who is right?


U.S.; 2008; 119min; Drama; Color
Director: Sam Medes
Cast: Leonardo Dicaprio, Kate Winslet, Kathy Bates, Michael Shannon

 
1925년 발표된 버지니아 울프의 네 번째 장편 소설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영국의 중상층 사람들의 하루를 담고 있다. 파티를 준비하는 댈러웨이 부인의 시선에서 시작하는 소설 속 이야기는 그녀와 연결된 여러 인물들의 내면과 의식을 농밀하게 훑고 지나간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군상들이 바로 그들이다. 영광 못지 않게 많은 상처를 안겨준 전쟁은 그들의 '삶'에 있어 현실성을 극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전장에서 가까운 누군가를 잃어버린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다름 아닌 살아있음(생존)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숨을 쉬고,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있다는 사실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충분조건이 되는 것일까? 적어도 버지니아 울프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그녀가 당시의 소설 양식을 거부하고 선택한 <의식의 흐름>을 통해 그토록 인물의 내면에 침잠했던 이유는 분명 인물의 존재는 밖이 아닌 안을 통해야만 볼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댈러웨이 부인> 속의 인물들은 과연 어떤가? 버지니아 울프가 만들어 낸 인물들은 모두 그녀의 펜끝에 자신들도 미쳐 감지하지 못했던 의식의 깊은 곳까지 드러내게 된다. 활자로 옮겨진 그들의 내부는 겉모습과 닮아 있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한 가지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어느 누구도 '확신'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파티를 열고, 휘트브레드는 권력을 탐하고, 브래드쇼는 사람들의 존경을 구하고, 브랜튼 여사는 명예를 떠받들고, 샐리는 평범한 주부의 모습에 안주한다. 모두들 각자의 방법으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확신에 찬 듯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자신의 삶이 진정으로 원하는 곳으로 흘러가는가?' 의 질문 앞에서 그들은 모두 주저한다. 댈러웨이 부인, 샐리, 피터의 삶은 그들이 젊은 시절 욕망하고 꿈꿨던 것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중년에 접어든 그들은 어디를 가든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누군가가 되어 있을 뿐이다. 이들은 모두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못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겉모습과 달리 이들의 안(內)은 회의와 의심으로 가득차 있다.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과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대부분은 전자의 승리로 끝이 난다. 이들의 반대편에 셉티머스가 있다. 모순적이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삶을 포기한다. 정상인의 루트에서 벗어난 그래서 정신병자라고 낙인이 찍혀버린 그는 일반적인 욕망의 잣대들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견디지 못한다. 그가 창밖으로 몸을 던진 이유는 '타인의 욕망'에서 '자신의 욕망(존재)'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댈러웨이 부인이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는 셉티머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 마음이 동요하는 이유는 분명 그녀 역시도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현실적 욕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욕망들은 모두에게 공유되고 있는 것들이다.(그 욕망은 '수상'으로 요약된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타인을 바라보며 마음의 안도감을 얻는다. "내가 틀리지 않게 살고 있어..." 그 안도감은 댈러웨이 부인이 한없이 못마땅하면서도 그들을 파티에 불러 모으는 이유이다.
 

샘 멘더스의 새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한 중산층 가정의 위험하고도 위태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작 <아메리칸 뷰티>를 통해 미국 중산층 가정의 모순과 허위를 풍자적이면서도 극적으로 그려냈던 감독은 이번에도 역시 평화롭기만 해보이는 한 가정의 은밀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결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가 알고 알고, 모두가 갖고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순간 그 폭발력을 감당할 수 없어 평생을 없는 척 묻어둬야 하는 그런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솔직히 영화를 보면서는 <레볼루셔너리 로드> 역시 <아메리칸 뷰티>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 갇힌 사람들의 파국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일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생뚱맞은 생각도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담고 있는 엄청난 텍스트를 곱씹을수록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 계속해서 생각의 이곳저곳을 파고들었다. 앞에서 소설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길게 풀어쓴 이유이기도 하다. 

공간도 시대도 다른 두 텍스트가 오버랩되는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어쩌면 각각 1차 대전과 2차 대전 직후라는 상황적 유사성이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소설과 영화 속의 캐릭터와 그 인물들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이야기에 있다.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은 댈러웨이 부인을 닮아 있고,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피터와 리차드를 섞어놓은 듯하다. 존(마이클 새넌)은 셉티머스의 또 다른 모습이고, 그들을 둘러싼 이웃은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장에 모인 사람들과 연결된다. 이 인물들은 모두 욕망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욕망은 한 개인의 내부에서부터 충돌을 일으킨다. 하지만 결국 선택되고, 행동으로 옮겨지는 욕망은 사회가 허용하고 합의한 범주 내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공허하고 희망은 없더라도 최소한 다른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안도감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그 범주에서 벗어난 욕망을 시도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부러움을 느끼지만 그보다 더한 '공포'를 느낀다. 사람들이 정신병자로, 낙오자로, 부적응자로 그 이탈자를 낙인을 찍는 이유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인물들 역시 평범한 듯, 평화로운 듯 살아가지만 각자의 욕망을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욕망이 표출되었을 때 갈등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욕망

애이프럴(케이트 윈슬렛)은 특별하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직업과 이름을 묻는 대신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냐." 고 묻는다. 그리고 그와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동화 속에나 있을 법한 교외의 조용한 마을(Revolutionary road)에 살고 있는 그녀는 중산층이라면 누구가 꿈꾸는 부족함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욕망하는 바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재능이 없음에도 연극배우를 놓치 않는 것은 뭔가 다른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무대가 아니면 청소와 빨래, 육아로 정작 자신은 누구인지 잃어버리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사는 삶에 숨이 막힌다. 피터의 <영혼의 죽음>이라는 말이 댈러웨이 부인을 도망치게 했던 것처럼, 범부의 삶은 애이프럴에게 영혼이 없는 삶일 뿐이다. 애이프럴은 스스로 욕망을 이룰 방법을 잃어버렸을 때, 자신의 욕망을 남편을 통해 이루고자 한다. 모든 안락하고 보장된 환경을 뒤로하고 파리로 떠나고자 했던 것. 애이프럴은 파리가 남편의 진정한 삶을 찾아줄 수 있는 곳이라 믿었다. 하지만 사실 파리는 남편의 욕망이 아닌 그녀의 욕망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 욕망이 좌절됐을때 그녀는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다. 자신의 욕망을 좌절시킨 남편에 대한 실망과 뱃속의 아이에 대한 원망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만약 댈러웨이 부인이 리차드가 아닌 피터와 결혼을 했다면 그녀 역시도 애이프럴과 닮아 있지 않았을까? 

그의 욕망

애이프럴에게 파리로 가자는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프랭크는 비웃으며 "Great!!!"를 연신 외친다. 현실성 제로의 제안이 당황스럽고 황당했을 뿐이다. 하지만 평범한 회사원으로서의 공허한 일상과 희망이 없는 미래에 그 역시 지쳐가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탈이란 아내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아내의 계속된 설득에 프랭크 역시 파리에 대안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금씩 갖게 된다. 결국 그는 가족과 함께 파리에서 자신의 진정한 삶을 찾을 계획을 세운다. 한동안 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날 기대감으로 행복에 취해 있지만 일상의 욕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그를 포기하지 않는다. 회사의 승진 제안과 아내의 임신은 그가 '현실의 욕망'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리고 전혀 다를 수 있었던 삶을, 그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을 기회를 포기한다. 그에게는 "미래의 무엇"이 아무리 핑크빛일지라도 그것을 위해 현재의 모든 것을 내던질만큼의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누구나 탐을 낼만한 달콤한 현실의 욕망들이 있다. 문제는 "혁명적 길"을 포기한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와 존(마이클 새넌)의 시선이다. 프랭크는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려 하지만 아내와 존에게 자신은 그저 내면의 욕망에 애써 침묵하는, 또 한 명의 범부가 되려는 비겁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 시선을 견디기 힘들다. 그에게 파리는 처음부터 실현되지 않을 꿈이었을지 모른다. 그저 퇴근 시간 건물에서 우르르 몰려 나오는 직장인들이 술자리에서 희망 없이 내뱉는 레퍼토리처럼 말이다.


그리고 타인의 욕망

영화의 배경이 되는 레볼루셔너리 로드... 그곳은 미국의 안정적인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평화로운 곳이다. 미국인 누구라면 꿈을 꾸는 그런 곳이다. 그 곳에 프랭크 부부가 이사를 온다. 중개인 헬렌의 말처럼 마을에 가장 어울리는 부부일지 모른다. 비슷한 일상을 즐기고, 꿈을 공유하며,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 헬렌이 자신의 아들 존을 프랭크 부부에게 소개시켜주는 이유 역시 그들 부부에게서 '건전한 상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프랭크 부부가 파리행을 결정했을 때 그들의 기대는 무너진다. 앞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철없고 대책없다고 단정한다. 프랭크 부부가 모두가 공유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동이 자신들의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 두려워한다. "어리석은 짓이야." 남편 셉의 말 한 마디에 밀리는 눈물을 쏟아낸다. 아마도 그녀는 남편의 말에서 자신의 가정은 그런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레볼루셔너리 로드 사람들에게 일상은 절대적이고, '변화'는 두렵기만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비춘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허황되지 않은 건전한 욕망이라는 확신과 안심을 얻는다. 다른 욕망이 있더라도 절대 밝혀서는 안 된다. 아예 없던 것처럼 여기고 살아야 한다. (셉 캠벨은 애이프럴에 대한 욕망을 끝까지 함구한다.) 만약 누군가 그 확신에 돌을 던진다면 더 이상 좋은 이웃과 친구가 될 수 없다. 마치 "존"이 정신병자가 된 것처럼 말이다. <댈러웨이 부인>의 셉티머스와 닮아 있는 존 역시 끝없이 '전향'을 요구받는다. 그가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방법은 일상은 공허하지 않고, 그 곳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전향)이다. 하지만 셉티머스가 전향을 거부하고 창밖으로 몸을 던졌듯이, 그 역시 사회의 요구에 저항한다. 마음이 통할 것이라고 믿었던 프랭크 부부에게서 얻은 실망은 그래서 더욱 거칠게 폭발한다. 애이프럴의 욕망, 프랭크의 욕망,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타인의 욕망은 모두 다르다. 솔직히 그들 각자가 어떤 욕망들을 갖고 사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들이 평화를 유지하며 사는 방법은 그저 일상을 벗어나지 않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목표들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단지 나른한 봄날 어쩌다 한 번 씩 생각하는 달콤한 욕망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과연 누가 옳은가?

샘 멘더스의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리차드 예이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원작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감독은 영화에서 과연 누가 옳은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누가 옳은 것인가? 당신은 누구의 편에 서겠는가? 불필요한 욕망은 접어둔 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들은 내심 프랭크 부부의 성공적인 파리 안착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영화니까 가능하겠지..." 라는 생각을 갖으면서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애이프럴의 입장에서 그녀의 시도와 절망에 계속 마음이 쓰인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눈앞의 보장된 성공을 선택한 프랭크를 비겁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정확히 모른채 무작정 파리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 애이프럴의 욕망이었다. 가장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현실의 벽을 높게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주고자 헌신했지만 절망감에 아이를 스스로 포기한 애이프럴은 동정 받을 수 있을까? 그녀에게 도덕적, 윤리적 잣대만을 들이댄다면 절대 그럴 수 없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며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었던 그녀가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을 때 느꼈을 박탈감은 여전히 그녀는 보듬게 만든다. 그녀에게는 앞으로 '영혼이 없는 삶'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애이프럴에게는 의미 없는, 곧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이다.


이렇게 보면 누가 옳은가의 질문은 무의미하다. 어찌 보면 옳고 그름의 질문 자체를 봉쇄하는 것이 프랭크와 애이프럴, 그리고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회의와 염증을 가졌던 존은 정신병자가 됐고, 도전하고자 했던, 벗어나고자 했던 애이프럴에게 찾아온 것은 결국 비극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를 유지시킬 수 있는 욕망일 뿐이다. 다른 것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사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메리칸 뷰티>에서 통쾌한 일탈을 시도했던 래스터 번햄은 '비극적 해피엔딩'을 맡는다. 릭키의 말처럼 그의 죽음은 일면 아름답다. 하지만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결말은 수식어가 필요 없는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이 아직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현실이다. 미국이든, 대한민국이든 어디에도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P.S. 1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이젠 두말 할 필요가 없겠다. 솔직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은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더 어울린다.(<더 리더>에서의 연기가 더 못하다는 말이 아니다. <더 리더>는 한나의 이야기라기보다 마이클의 영화기이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선이 굵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디카프리오 역시 프랭크의 캐릭터를 잘 소화한다. 하지만 수염을 깍은 말쑥한 얼굴의 디카프리오는 너무 동안이다. 살을 찌워 몸은 자연스럽지만 같은 또래의 케이트 윈슬렛이 가지고 있는 원숙함이 그의 얼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애이프럴과 프랭크는 부부라는 느낌이 다소 들지 않는다. (어떤 때는 엄마와 아들 같기도 하다.) 동안도 배우에게는 꼭 좋은 것만은 아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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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5 01:06

<어떤 개인 날> Listen to Her Stories


<어떤 개인 날> Listen to Her Stories


Korea; 2008; 87min; Drama; Color
Director: 이숙경
Cast: 김보영, 지정남, 박혁권

 
2009년 3월 13일 금요일, 정말 '어떤 개인 날'이었다. 전날 밤부터 그리고 아침까지 내리던 비는 오후가 가까워질 쯤 잦아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검은 구름을 머금은 흐린 하늘이었지만, 분명 비가 멈춘 후의 하늘이었다. 그 구름들의 틈을 비집고 곧 뜨겁게 비출 태양을 어딘가 숨겨 놓은 그런 개인 날이었다. 점심을 급하게 챙겨먹고 압구정의 한 극장을 찾았다. 날씨와 너무도 어울리는 제목의 영화 <어떤 개인 날>의 티켓을 끊었다. 비가 온 다음 늘상 찾아오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3월의 개인 날, 영화는 어떤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우습지만 영화에서는 단 한 번도 비가 내리지 않는다. 아직 두툼한 코트에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영화 속 인물들은 여전히 겨울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 비가 오지 않고 찾아오는 '개인 날'은 어떤 의미일까?


추운 날씨 만큼이나 그들은 몸을 한껏 움크리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 보영의 표정 역시 잔뜩 흐린 겨울 하늘을 닮아 있다. 뭔가 모를 불만에 가득찬 얼굴을 한 그녀는 모든 게 짜증난다. 자신의 차를 막아선 택배 직원도, 원고 독촉을 하는 출판사 사장도, 잔뜩 어질러 놓고 치울 생각을 하지 않는 어린 딸 아이도 모두 짜증이 난다. 보영의 표정, 말투, 걸음걸이 어디에서도 행복이나 기쁨의 흔적은 자취를 감춘 듯하다. 오직 1년 전 이혼을 하고 혼자 아등바등 딸을 키우며 살아가기가 버거울 뿐이다. 하지만 좁은 방에서 노트북, 술과 담배에 싸여 딸아이 등교도 챙겨주지 않는 그녀에게 엄마라는 이름이 어색하다. 혼자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딸이 오히려 어른스러워 보인다. 그녀의 직업은 작가... 이름만 작가일뿐 이런저런 글쓰기 강의로 벌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삶에 치여 글쓰는 흉내만 내고 있는 그녀에게는 작가라는 직업도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인다. 수강생에게 마음을 편안히 하고 사물을 집중해서 관찰하라는 그녀의 말도 허공을 맴돌 뿐이다. 정작 그녀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이 그녀에게 이토록 결핍을 느끼게 만들었을까?  보영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혼자 사는 이혼녀라는 이유로 친구들이 피하고, 남자들이 쉽게 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우습게 보는게 싫다. 항상 날을 세우고 사람들을 공격하는 이유이다. 보영은 정확히 자신의 삶이 왜 불만으로 가득찼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그 이유를 애써 찾으려 하지 않는다. 보영은 하루하루를 견디듯 살아가고 있지만 실은 매일매일 도망만 다니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양평의 한 기업 연수원에서 만난 소리 강사 정남은 다르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혼은 보영보다 선배인 정남은 그녀가 내뱉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 만큼이나 속을 감추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살갑게 말을 붙이고, 술이 들어가면 자신의 상처를 흉금없이 털어 놓는다. 그런 정남에서 꼭꼭 싸매고 입을 닫아 벌이는 보영은 영화 속 표현대로 까도까도 속을 알 수 없는 '서울 다마네기'일 뿐이다. 

보영과 정남 모두 이혼을 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고,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닮은꼴의 인물이다. 하지만 둘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정남은 문제를 애써 피하려고 하는 보영에게 답을 찾는 방법을 일러주고 싶어 하지만 보영은 늘 그렇듯 독이 든 표정과 목소리를 거절한다. 계속 도망만 다니면 병이 들고 죽게 된다는 말도, 글로만 다 아는 척 한다는 정남의 말도 보영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그리고 불꺼진 방에서 누가 듣지 않도록 눈물을 흘릴 뿐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연구과정의 첫 결과물 중 하나인 이숙경 감독의 <어떤 개인 날>은 감히 말할 수 없었던, 알지 못했던 여자들의 속 깊은 이야기들을 스크린에 펼쳐 놓는다. 여성학자로 더 이름이 알려진 감독은 영화 속에서 도도한척, 배운척, 책 속에나 나올 법한 어려운 이야기들로 '폼'을 잡지 않는다. 먹물을 쫙 빨아낸 자리에는 여자이면서 이혼녀로 살아야 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견뎌내야 하는 대한민국의 흐린 현실들만이 남아 있다. 감독은 마흔을 넘겨 도전한 첫 영화감독의 데뷔작에서 여성에 대한 좀더 진솔한 소통을 시도하고자 한 것이다.

이혼 1년차인 보영과 2년차의 정남. 혼자 아이를 키우고 생계를 떠맡은 이들은 많은 부분에서 이혼한 여자로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버거운 현실에 공감을 한다. 주로 정남의 입을 통해 발설되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침묵한 채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누군가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녀들의 침묵은 어쩌면 힘에 겨워 곪고 아픈 상처를 내뱉었을 때 그것들이 결국엔 그녀들의 몸을 할퀴는 칼날이 되어 돌아오는 이 땅의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우리가 모르거나 외면하고 지나쳤을 뿐이다.

그래서 더욱 단단한 보호망으로 자신을 감쌀 수밖에 없었던 그녀들... 보영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차가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영과 정남의 만남은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보영의 시선은 항상 자기 내부가 아닌 밖을 향하고 있다. 보영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을 항상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쏟아낸다.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주변의 시선과 행동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약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을 아예 닫아버린 듯 보인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과의 소통 역시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남은 다르다. 정남의 시선은 항상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정남은 그녀가 겪어야 했던 험난한 '여자의 일생' 속에서도 단단한 자아를 지킬 수 있었다. 그녀가 뱉어내는 여자로서 성장, 사랑, 결혼, 이혼, 섹스에 대한 거침 없는 말들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보고,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에서 치유가 얻어진다는 것을 정남은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어찌 보면 정남은 보영보다도 '작가'처럼 보인다.

결국 보영과 정남은 닮은 듯 하면서도 전혀 다른 인물이다. 보영은 정남과 헤어진 이후 어떤 변화를 얻게 될까? 솔직히 <어떤 개인 날>에서 결말로 넘어가는 이음새가 그렇게 깔끔하지는 않다. 자연스런 인과관계보다는 결말로 넘어가기 위해 고리를 짜맞춘 듯한 느낌이 적지 않다. 하긴 삶이 언제나 논리적인 것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어떤 개인 날>의 결말에서 볼 수 있는 보영의 따뜻한 모습과 한결 가벼워진 표정은 영화를 마무리로 부족함이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 딸아이의 아침을 챙겨주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아침 밥상에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어느 평범한 가정의 엄마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딸을 꼭 껴안으며, 귓속말로 "안전벨트"를 속삭이는 보영의 모습은 적어도 그녀가 "왜 소중한 존재인지"에 대한 이유 중 하나를 찾은 듯 보인다. 더 이상 스스로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는 방법을 말이다. 그리고 보영은 옥상에서 빨래를 넌다. 그녀 위로 이제 거의 개인 하늘이 있다. 어떤 개인 날... 보영의 표정 역시 흐린 겨울 하늘에서 이제 막 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수컷으로 살아가기에 함부로 그녀들이 주고받은 농밀한 이야기를 모두 가슴으로 껴안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시건방은 떨지 않겠다. 내가 영화를 보며서 담아내지 못한 그녀들의 이야기가 훨씬 많이 있을 것이다. 단지 이야기들(Her stories)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다는데 만족을 느낀다. 그리고 스스로를 상처내는 보영의 모습에서 자신을 지키고, 소중히 하는 방법을 하나 배워간다.

결과적으로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연구과정의 첫 결과물인 <어떤 개인 날>은 기대 이상이었다. 2009년 베를린영화제 넷패상 수상작이라고 했지만 3000만원이 조금 넘는 제작비로 만든 장편 데뷔작에 그다지 많은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단편에서 갓 장편으로 넘어온 초보 감독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안정적인 만듦새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 역시 어색함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너무 힘이 들어가거나, 호흡을 맞추지 못하거나, 이야기가 들쑥날쑥 하거나, 흔한 말로 잰 척하는 등의 장편 데뷔 감독들이 쉽게 범하는 오류들을 밸런스를 맞추며 잘 풀어낸 듯 보인다. 다른 세 작품들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지지부진한 새반찬이 없는 충무로에 KAFA 프로젝트가 분명 새롭고 영양가 있는 반찬이 될 것 같다. 벌써 촬영에 들어갔다는 두 번째 장편들도 기대가 된다.


 
 
P.S. 1
보영과 정남을 연기한 김보영과 지정남을 빼놓고 갈 수 없을 것 같다. 솔직히 <어떤 개인 날>은 두 배우가 영화의 30분 정도를 책임지는 연수원 숙소 장면 만으로도 충분한 매력을 갖춘 영화다. 한 공간에서 두 배우가 만들어 내는 앙상블은 마치 잘 짜연 연극을 한 편 보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 두 배우가 아니었다면 그녀들이 주고 받은 숱한 이야기들에 생명력이 없었을 것 같다. 주인공 김보영을 처음 기억하게 된 것은 몇 년 전 연극 <상사주>를 통해서였다. 그 이후 몇 편의 영화에서만 간간히 찾을 수 있었는데 <어떤 개인 날>은 그녀의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시켜준 작품이 될 것 같다. 광주에서는 이미 스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는 지정남의 촌철살인의 대사들 역시 영화를 오래 기억시킬 양념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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