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날리지언/my lifE'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09.08.23 '어른'을 보내며
  2. 2009.08.08 어데로 가야할꼬...
  3. 2009.07.08 제주도. 2009.7.3~7.5 (5)
  4. 2009.03.16 증명사진
  5. 2009.02.09 혼자사는 남자 (9)
  6. 2009.01.02 2008의 마지막과 2009의 출발 (6)
  7. 2008.12.25 크리스마스!!!
  8. 2008.10.20 <관계2> (2)
  9. 2008.10.08 <13th PIFF> 1박 3일 방문기
  10. 2008.09.28 이사
2009.08.23 03:13

'어른'을 보내며


'어른'을 보내며

2009. 8. 28 (금) 서울광장에서



2003년 제대 후 학교로 돌아와 북한과 통일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난 신문방송을 전공하면서 왜 연결고리가 빈약한 북한학을 복수전공으로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단 한 번도 그럴듯한 답을 한 적이 없다. 몇 번 멋있는 답을 찾아보고자 머리를 굴려봤지만 그 때마다 떠오르는 유치한 생각들을 누가 알까 두려워 접어두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답을 찾기 힘들 것 같다. 이제 아예 후자쪽으로 전공을 돌렸으니 어려운 고민 하나는 줄어든 셈이다. 순전히 다른 차원의 호기심이라고만 해둬야 할 듯하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공부에 재미가 붙었던 건 당시 분위기가 분명 한 몫을 했던 것 같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과의 관계는 분단 이후 가장 역동적이었다. 하루하루 눈에 보이는 변화들이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왔다. 가장 중요한 역사의 순간을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벅찼고, 그 순간을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판단할 수 있음이 뿌듯했다. 전공을 바꿔 공부를 계속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도 그 상황에서 더 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공부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누가 원인을 제공했든 똑같이 반복되는 상황들에 지쳤고, 정권에 따라 지역에서 우리의 공간이 줄어드는 현실에 실망했다. 이 학문 분야의 특성상 순수 사회과학에서 추구하는 이론적 함의 보다는 정책적 함의를 더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여기서 어떤 정책적 함의를 찾을 수 있을까?, 정책이 있더라도 우리가 현실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지는가?, 과연 뭔가 해보고자하는 의지는 가지고 있는 것일까?... 책을 읽는 내내 이런 희망 잃은 물음표들이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다. 특히나 요즘은 더더욱...

그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보며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그는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암울했던 상황에서 어떻게 누구도 갖지 못한 '희망'을 얘기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남북관계이든, 민주주의이든 한 번의 꺾임도 없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걸로 말이다. 그가 '어른'이 될 수 있는 건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때문이 아니라 분명 누구도 쉽게 꿈꾸지 못했던 희망이 이 땅에서 가능하다는 믿음을 쉼없이 주었기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의 죽음에 현실이 지지부진하다는 핑계로 책 열기를 게을리하는 내가 부끄럽다. 나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알려준 그가 다시 한 번 길을 보여준다.


 

금요일 서울광장에 다녀왔다. '국장'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서일까? 석달 전과는 많이 달랐다. 광장을 둘러싼 경찰차도 없었고, 덕수궁 담장을 따라 늘어선 사람들도 없었다. 모두들 그의 죽음을 준비한 듯 차분한 추모 분위기였다. 집에 돌아와보니 100일 가까이 어쩌지 못하고 책상 위를 지키고 있는 근조리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오늘 가져온 리본을 뉘였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말이 쏟아질 것 같아 노트북을 열었는데 목에서 막히고 손끝에서 굳어버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조문 기간 동안 유시민 전 장관은 한 영화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뜨거운 추모 열기를 보는 소회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짧게 답을 했다. "우리가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한거죠..." 짧은 말이지만 갑작스런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는 듯하다. 한 분의 어른을 보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존경할만한 어른을 존경한거겠죠."


P.S. 어느 누구의 것보다도 그의 자서전이 기다려진다. 원고지 5,000매 분량이 지금 마무리 작업 중에 있고, 곧 출간 예정이라는 보도를 봤다. 그의 인생이 곧 한국의 현대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현대사가 굴곡졌듯 그의 발걸음에도 공과 과가 존재한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그의 기억과 기록을 통해 확인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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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8 17:08

어데로 가야할꼬...


어데로 가야할꼬...


가끔 "담임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살면서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놓일 때 특히 그렇다. 더구나 나이에 비례해 선택의 순간들은 점점 많아지고, 무게감 역시 육중해진다. 초, 중, 고 늘 옆에 있을 때는 그렇게 귀찮고 성가시기 그지없던 존재가 이제는 아쉽기만 하다. 12년 공교육이 이리도 사람을 타성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이거 해!!!" 라고 썩소를 날려줄 누군가가 필요한 건 어쩔 수 없다. 그토록 내 인생은 나 혼자 결정하고 이끌어갈 수 있다고 자부했건만 그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저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혹시 다른 변수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가만히 그냥 있는 게 좋을까..." 나이는 생각의 곁가지들만 무성하게 키웠을 뿐 결단력에는 물과 거름을 야박하게 준 것 같다.

궁시렁 대면서도 누군가의 말에 의지해 방향을 잡고 한 발 내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이제와 담임 선생님을 찾는 건 그 만큼 나이가 더할 수록 인생의 멘토를 찾기 어렵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순간부터 인생의 멘토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 주위의 누군가가 됐든, 역사 속의 인물이 됐든, 아니면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성공시대나 무릎팍 도사에 나올 누군가가 됐든 그건 개인의 선택이다. 내 그릇에 어울리는, 그래서 내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오늘부터 저 사람을 내 삶의 멘토로 삼겠어!" 떵떵거리고 선언하는 건 아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의식하게 될 때 그 누군가는 멘토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내게 있어 그런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니 누구일까?

부모님이라는 행사용 멘트는 차치하고 내가 지금까지 좇아왔던 멘토들은 책과 영화를 통해 만나왔던 것 같다. 박경리와 황석영... 그들이 살아온 삶과 상관없이 문장을 통해 그들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문장을 통해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고, 그 궤적을 훑어가는 과정에서 둘은 내 삶의 방향타로 자리를 잡았다. 조변석개하는 역사적 순간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생각과 행동, 문장을 일치시키고자 애쓴 흔적들이 마냥 멋있게 보였던 것 같다. 박경리가 지난 해 그토록 경외하던 '땅'의 부분이 되었고, 남은 건 황석영이었다. [오래된 정원]을 읽으며 뒤늦게 황석영의 작품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초기작까지 뒤져가며 거의 모든 작품들을 손에 잡았다. 네이버에 청년을 위한 소설 연재를 시작할 때도, 무릎팍 도사에서 예능에 어울릴 법한 과장된 몸동작을 보여줄 때도 여느 무게 잡는 작가들과 다른 그의 행적들을 응원했었다. 하지만 그가 얼마 전 '그 분'과 함께 중앙아시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모습은 내게 숱한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표 만을 남겼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는 믿을 수 없은 말들, 그리고 그에 대한 황석영 자신의 길고 긴 해명과 같은 글... 무엇이 진실이든 한쪽에서는 '변절자'로, 다른 한 쪽에서는 '첩자'로 전락한 그의 모습 자체가 내게는 상처였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의 글을 읽겠지만, 풀리지 않을 물음표들은 그를 예전처럼 대할 수 없게 만들 것 같다.

그리고 최근 신문기사에서 또 하나의 이름을 발견했다. 영화면이 아닌 국제면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문장을 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분명 문화부 기자였다면 그의 이름은 자장커가 아닌 지아장커라고 적었을 것이다. 페이지를 잘못 잡아 이름조차 낯선 그 이름이 그가 아니기를 바랐지만 우려는 현실이었다. 호주에서 열리는 멜버른 영화제에 중국 영화 감독들이 보이콧을 선언했고 그 가운데 지아장커가 있었다. 위구르 자치구 소요 사태의 배후로 지목 받은 레비야 카디르의 다큐멘터리(제프 다니엘스 감독)가 상영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중국의 해커들은 영화제 홈페이지를 급습했고, 지아장커 역시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물론 멜버른 영화제가 충분히 정치적인 의도에서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정치적인 쇼라면 꼭 정치적인 쇼로 답을 했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어느 쪽의 편을 들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지아장커라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대응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데뷔작 <소무>부터 시작해 최근작 <24시티>까지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영화를 난 좋아했다. 그리고 그 온기는 모두를 향해 있음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의 이름 앞에 하나를 추가시켰다. 그는 '중국인' 영화감독이었다. 이제 그가 어떤 따뜻한 영화를 만들어도 모두를 향한 '보편적 메시지'는 찾기 힘들 것 같다.

어찌 멘토가 사람만이 될 수 있을까. 물건이든 공간이든 마음을 붙일 수 있다면 충분한 자격 요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사이 멘토와도 같았던 공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화문 아트플러스 극장의 터줏대감 씨네큐브가 문을 닫을 지도 모른다는 소식... 백두대간이 10년 가까이 운영해 오던 씨네큐브에서 방을 뺀다고 한다. 흥국생명에서 단독으로 운영을 한다고 하니 정확히 말하면 당분간 씨네큐브가 문을 닫는 것은 아닌 듯하다. (물론 내년 3월 이후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음식맛이 좋았던 단골집도 주인이 바뀌면 이전만 못한 법이다. 20살 상경해서 지금까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숱한 기억과 추억이 그 곳에 있다. 해머링맨도, 씨네큐브도 그대로 있겠지만 이 친구들을 바라보는 나는 전과 같지 않을 것 같다. 술에 취한 주인을 실고 천관녀를 찾은 김유신의 말처럼 나 역시 광화문 사거리에서 무의식적으로 씨네큐브로 향할지 모를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이젠 여기가 아니야..." 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백두대간은 이대의 아트하우스 모모로 자리를 옮긴다고 한다. 부디 그곳을 통해서라도 오래된 친구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러가지 확인되지 않은 "썰"들이 난무하지만 무엇이 진실이든 인사는 해야할 것 같다. "그 동안 덕분에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씨네큐브!!!" 

여하튼 하 수상한 시절... 여러가지 방향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몸과 마음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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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8 14:19

제주도. 2009.7.3~7.5


기억도 가물가물한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12년만에 제주도를 찾았다.

용두암을 지켜봤고,
함덕해수욕장에 발을 담갔고,
성산일출봉을 올랐고,
섭지코지를 걸었고,
주상절리를 찾았고,
오설록 다원의 향을 맡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촬영장을 찾기 위해 한림읍 귀덕리를 기웃거렸고,
삼성혈을 돌아봤고,
성판악에서 출발해 한라산 정상에 발을 디뎠다.

절대 비리지 않았던 갈칫국,
담백하고 씹는 맛이 좋았던 둠베고기,
미역국 비슷했던 복말국,
내 입에 딱 맞았던 오분자기 해물 뚝배기,
짭쪼롬한 바다냄새가 났던 갈치조림,
여름 날씨와 어울렸던 물회,
무한리필 초밥와 상다리 휘어지는 쓰까다시가 일품이었던 도미회,
신선함이 무엇인가 보여준 오설록 녹차프라푸치노와 녹차케익,
5,000원이 믿기지 않았던 동네 백반집 정식,
한라산 등반 지킴이 김밥 2줄,
7시간 등반이 끝나고 뚝딱 해치운 국수 한 그릇,
차 안에서 이동하며 먹었던 이런저런 간식거리들...
모두 아직까지 침을 꼴깍이게 만든다.

중문 해수욕장의 제트보트는 황홀했고,
섭지코지의 말은 타고 있으면서도 좀 안쓰러웠고,
6명이 고작이었던 찜질방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던 날씨에 고맙고,
세계자연유산 등재 2주년 기념으로 입장료를 받지 않았던 성산일출봉과 한라산은 아싸!!!였다.

이 밖에 기록하지 못한 2박 3일의 2009년 제주도 여행...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제주도를 가기 전까지 구름 한 점, 바다 냄새 한 톨까지 고이고이 기억하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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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6 12:23

증명사진


증명사진을 찍었다.
학교에 제출할 서류에 사진 4장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시간이 없어
단 5분 만에 증명사진 8장을 만들어준다는 놀라운 능력의 지하철역
마술 제조기에서 부랴부랴 사진을 찍었다.

가격은 생각보다 비싼 8,000원...
잔돈이 없어 만원짜리를 투입구에 넣었다.
거스름돈은 사진이 출력된 다음에 나온단다.
자세를 고쳐잡고, 표정도 '스마일'~~~
처음 찍은 두 장의 컷이 화면에 떴다.
내가 봐도 못 봐주겠다.

양심은 있는지 두 번의 기회를 더 준단다.
두 컷의 사진이 화면에 떴다.
아까 사진보다 더 못 봐주겠다.
4장의 사진을 놓고 고민하던 중에 개중에 제일 낳은 것을 골랐다.
볼수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급한 맘에 찍었지만 정말 이건 아닌 거 같다.
사진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지만 왜곡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이 정도면 정말 심각한 왜곡이다.

그래도 시간이 없어 사진을 들고 학교로 갔다.
행정실 조교에게 사진을 들이밀며 '사진이 이것밖에 없네요...'
라고 말했더니 정말 진지하게 되묻는다.
"이건 좀 힘들지 않겠니...?"
"좀 그렇죠..."

사진을 들고 급민망해졌다.
분명 내 얼굴인데 들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로...
그래도 웃지 않은 조교형이 고맙다.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사진을 들고 왔다면
난 배가 찢어지도록 웃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조교형이 묘안을 찾았다.
학적부에 있는 사진을 파일로 저장해 학교에 있는 사진점에서
증명사진으로 인화할 수 있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이런 놀라운 기술이 있다니...
결국 여기에 10,000원이 들었다.

행정실에 사진을 주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문을 닫고 나왔다.
한 시간 사이에 생긴 긴박한 긴장이 확 풀리면서 몸이 노곤해졌다.
그리고 번개처럼 생각하는 한 가지...
난 그 능력없는 지하철역 사진기에 거스름돈마저 곱게 쥐어주고 나왔다.
급한 마음에 출력된 사진만 들고 학교로 뛰어갔던 것이다.

어떤 누군가는 거스름돈으로 4,000원을 가져갔겠지...
끝까지 뒤가 씁쓸하다.

저녁에 만난 친구에게 은근슬쩍 그 사진을 보여줬다.
"웃기지...?"
역시 오래 만난 친구답게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제대로 "빵" 터졌다.
우울할 때마다 본다며 돈 주고 사겠단다.
눈물나게 고마운 녀석이다.
하지만 내가 평생 꼬투리 잡힐 일을 왜 하겠는가

집에 돌아와서 한동안 그 증명사진을 쳐다봤다.
한참을 봐서 그런가
그렇게 민망한 사진에서도 내 얼굴이 보였다.

'분명 내 얼굴에 이런 표정이 있단 말이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은 표정도 어쩔 수 없이
노출할 수밖에 없는게 얼굴의 운명이다.
되도록이면 좋은 인상만을 남기도 싶지만
얼굴 근육 하나하나를 내가 컨트롤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가끔 잘못 나온 사진을 보면 흠칫 놀랄 때가 있다.
분명 내 얼굴의 표정이면서도 너무 낯설기 때문에...
내가 지을 수 있는 표정 하나하나를 알고 있다면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사진 찍을 때는 이 표정,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이 표정, 등등
필요할 때마다 기계적으로 꺼내 쓸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고 보면 배우들은 참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아무튼 오랜만에 거울을 보면서
얼굴 근육 하나하나를 만져봤다.
타인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지만 
정작 나는 내 얼굴을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절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날 어떤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기억할까?
되도록이면 좋은 인상을 갖고 싶다.
누군가가 오늘 찍은 증명사진의 표정으로 날 기억하는 알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내가 모르는 '못난' 얼굴을 봐서 기분이 썩 좋은 하루는 아니었다.
난 그 모습까지 사랑할 수 있을 만큼 '대인배'가 아니다.




P.S.
알고 봤더니 지하철역 증명사진기를 찍는 요령이 있단다.
뭐... 얼굴은 이렇게, 각도는 이렇게 하라는데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사진기사님이 표정 하나, 자세 하나 만져주는게 좋다.
그 분들은 내 얼굴에서 최적의 표정을 찾아주는 '고마운' 분들이다.
기계보다는 사람이 사람 얼굴을 잘 알겠지...

잘 나온 증명사진은 사람의 기분까지도 즐겁게 만든다.
씁쓸한 기분을 지우기위해서라도 사진관을 찾아 다시 한 번 찍어봐야 겠다.
근데 더 씁쓸해지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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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9 21:53

혼자사는 남자


혼자 사는 남자


물론 난 혼자 살지 않는다. 5살 터울의 형과 함께 살고 있다. 집이 여관인양 잠 자고 몸만 빠져 나가는 형의 직업 때문에 본의 아니게 혼자 사는 것처럼 살고 있다. 근 10년 가까이를 이렇게 산 것 같다. 그 동안 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은 '살림'이라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그리고 이 세상 엄마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갖게 됐다. 의술이 대단하겠지만 '살림'에 비할 게 아니다. 오죽하면 '살림'이 살림(살리다)겠는가...

살림 중 가장 최고난도를 자랑하는 것이 단연 '주방살림'이다. 혼자 살림을 맡아 얼마 되지 않으면 왜 횐 옷의 때는 세탁기에 돌려도 깔끔하게 지워지지 않는지, 백색 가전제품들은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 창틀과 구석구석의 먼지는 어떻게 닦아내야 하는지 나름의 방법을 찾게 된다. 하지만 주방살림은 그렇지 않다. 이건 정말이지 웬만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고서는 노하우가 쌓이지 않는다.

난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게 되면 습관처럼 주방의 행주를 본다. 행주는 그 집의 주방살림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줄 수 있는 '척도'다. 행주를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보관, 관리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정갈하게 '빛'이 나는 행주는 그 집의 주방살림이 흠 잡을 데 없음을 말해준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난 아직도 이걸 잘 못한다. 그래서 여간해서는 흰 색 행주는 잘 쓰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행주를 오래 쓰기 위해서...

혹시나 탐나도록 하얀 행주를 보면 "도대체 어쨌길래 행주가 저렇게 될 수 있냐?"고 붙잡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가스레인지 기름때 없애는 방법, 냉장고 잡냄새 없애는 방법, 음식물 오래 보관하는 방법도 나름 노하우가 생겼지만 정말이지 혼자사는 남자에게 행주는 난공불락이다. "삶어!!!" 엄마에게 물어보면 당연한듯 말하지만 삶기에도 기술이 있다는 걸 엄마는 모른다. 아니 엄마는 아는데 그걸 설명을 못한다. 엄마는 항상 주방살림에 있어서 '학자'이긴 하지만 '선생'은 아니다.


행주가 주방살림에 척도라면 주방살림의 미학은 단연 '요리'에서 꽃을 핀다. 그리고 혼자 사는 남자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 요리다. 세상 모든 남자가 알렉스, 김호진, 앤디 같은 건 아니다. 전골냄비에 해물을 깔고, 생닭 속을 채워 뚝배기에 끓여 낼 수 있는 남자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책을 보고 따라해도 맛은 국적불명이고, 모양은 정말이지 아방가르드해지기 일쑤다. '제법 음식처럼 보이고 넘길만하다...' 라고 인정받기 까지 적어도 1~2년은 투자해야 한다. 도중에 포기하면 동네 분식집, 중국집, 야식집의 엄청난 조미료에 중독되는 방법 밖에 없다.

나이가 들어 여자와 남자의 권력관계가 전환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난 '밥'에 있다고 믿는다. 다 늙어 어디가서 밥 한 그릇 얻어먹겠는가. 먹고 살려면 주방의 절대 강자들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나이 들면 팔뚝에 힘줄은 주방 국자만도 못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집만 봐도 그러니까... 평생 주방은 여자들의 공간이고, 요리는 여자들의 몫이라고 배워왔던 한국 남자들의 비극이다.

요즘 요리에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게 주기를 타는데 요즘 거의 정점에 오른 것 같다. 이번에는 왠지 좀 오래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끝까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아니 인간대접 받으려면 요리는 필수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철학'이 생겼다. 내 밥 그릇은 내가 만들 줄 알아야 할 게 아닌가... 언젠가 생길 내 가족에게도 뿌듯한 일이다. 그리고 계속 하다보니 재미도 있다. 이제서야 내가 주방살림에 대해 조금씩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10년이 지나서야 말이다.

집에서 떡볶이를 했다. 그러고보니 처음인 것 같다. 똑같이 혼자 사는 친구에게 사진 찍어 보내줬더니 혼자 먹으려고 그 짓을 했냐고 미쳤단다. 여자친구 없이 혼자 나이 먹더니 별 짓을 다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너 늙어서 누가 웃는지 두고보자. 떡볶이 못 하는 너보다 내가 더 인정받는 날이 분명 온다!!!" 분식류는 "그렇게 비싸지도 않은데 밖에서 사먹지 귀찮게 해먹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게 조미료 중독의 지름길이다. 철저히 God made 재료 만을 취급하는 난 그 친구보다 건강하게 오래 살거다. 오늘의 도전 과제는 고등어무조림과 오징어국이다.ㅋㅋ


P.S. 누가 나 8종 식과도 세트 하나 사줬으면 정말 소원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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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2 01:51

2008의 마지막과 2009의 출발

2008의 마지막과 2009의 출발

아직 2009라는 숫자가 낯설다. 2008년의 어느 날처럼 느껴진다. 아마 좀더 시간이 지나야 2009가 현실로 다가올 것 같다. 기분과는 별개로 현재는 이미 2009년이다. 그리고 벌써 하루가 지났다. 난 새로운 일년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제 정말 내 얘기를 할 때가 오는 것 같다. 일부러 마주하기 싫어 피했던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을 해야 할 때가 오는 것 같다. 한 선배가 말했다. '도망다니는 사람은 끝까지 도망만 다닌다. 하지만 결국엔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감이 잡힌다.

도망치듯 20대를 보내고 이제 20대의 끝자락에 있다. 그 동안 도망치듯 청춘을 보냈다. 치열한 고민도 없었다. 순간을 살았다. 그러고보니 다들 예전에 했던 고민들을 나는 이제서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나를 보는 게 점점 힘들다. 뭔가에 미쳐서 정말 미친듯이 뭔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 뿐이다. 그게 뭔지 모르겠다. 농담처럼 담임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누군가 길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어느 누구도 해주지 않겠지만...

그 동안 나를 포장하고 있던 것. 그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고 있다. 진작에 던저버렸어야 하는 그것을 버리고 난 뒤가 무서워 아직까지 끌고 있었다. 버리고 나면 정말이지 내가 아무것도 아닌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모든 걸 처음에서 시작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초연해지자... 초연해지자... 초연해지자... 스스로를 달래지만 참 말처럼 되지 않는다. 아니... 처음에는 타인이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문제의 출발은 나였다. 내 안에 내가 쌓아 올린 짐을 내려놓지 못하면 난 결국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 그저 그 무게에 점점 침잠할 뿐이다.

2009년 나 자신을 좀 다독여야겠다.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씩 발을 옮겨보자...
길을 찾아보자.
그리고 나를 보자.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나를 보이자.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그래서 내가 한결 가벼워졌을 때... 나도 모르는 사이 난 한 걸음씩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새해가 밝았다.
모두들 희망을 이야기한다.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인사를 빼먹은 사람이 있나 생각을 해보니 정작 나에게는 전하지 못했다.
나 스스로에게도 그 상투적이고 흔해빠진 하지만 절절한 새해 인사를 전해야겠다.

"세뼘왕자...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올 한 해 네가 바라는 일 모두 잘 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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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5 03:27

크리스마스!!!


Merry Christmas!!!

크리스마스~~~
연말을 들뜨게 만드는 날. 
커플들에게나 솔로들에게나 뒤숭숭하기는 마찬가지다.
올해도 어김없이 솔로로 크리스마스를 보낼 생각으로
나와 같은 신변을 가진 이들을 하나둘 모아 조촐하게 저녁이나 함께 하며
우리 내년에는 이렇게 만나지 말자고 기약을 하려고 한다. ^^

그래도 크리스마스니 기분은 내야겠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비싼 선물은 해주지 못해도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 씩이라도
써주자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문구 코너가 있는 대형 서점에 갔는데...

이게 웬 일 크리스마스 카드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
내 기억으로 1000원 내외에서 살 수 있었던 것 같은데
하긴 그 기억이 언젠지 나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니
정말 오랜 만에 카드를 사는 것 같았다.
카드 몇 장을 들었다 놨다를 몇 번 반복하고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카드 코너를 등지고 돌아섰다.

"이 돈 주고 사느니 차라리 내가 만들고 말자!!!"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분명 연말은 참 사람을 센치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나보다.

아무튼 문구 코너에서 값싸게 찾을 수 있는 편지지와 봉투 (각각 50원)을
필요한 갯수만큼 사고 장식을 할 수 있는 잡다한 것들을 샀다.

집에 돌아오니 참 가관이다. 
받는 사람도 이거 보면 어안이 벙벙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생각을 했으니 요리조리 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말이 만드는 것이지 그냥 편지지에 크리스마스 스티커 붙이는 게 끝이다. ㅋㅋ



아무튼 손쉽게(?) 카드가 완성이 됐다.
만들고 나니 그럭저럭 폼새는 나는 것 같다.
이제 내용을 채워야 하는데 갑자기 민망해진다.
뭐라고 써야할지...

늘상 하는, 늘상 듣는 말들은 임팩트가 없다.
좀 강한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고 싶은데
하긴 이 카드 자체가 임팩트가 있을 것 같다.
친구들이 버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

그래도 카드를 쓰는 것과 다르게 만들면서 색다른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자식아, 니 생각하면서 만들었다!" 하면서 주면 한 대 맞으려나 ㅋ

올해는 정신 없이 급하게 만드느냐고 뭔가 허술하지만
내년에는 한 번 제대로 만들어봐야 겠다. ^^

Anyway, Everybody,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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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0 00:48

<관계2>

<관계2>

난 성격이 둥글둥글해서 화 내는 일 별로 없고, 분위기 어색해지는 게 싫어서 되도록이면 좋게 좋게 지내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 때문에 상처 받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그게 스트레스가 된다고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다보니 그 평평하기 그지 없던 일상도 깨지기 마련이다.

살면서 내 사람, 내 측근이라고 믿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을 제외하더라도 영어 쓰는 사람들이 검지와 중지를 두 번 깔짝이면서 강조하는 '친구'들이 그렇다. 내게도 다행처럼 너무도 고맙게 그런 친구들이 있다. 물론 징글징글하게 옆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사람들이고, 문득문득 생각하면 가슴이 찡한 그들이다.

올해로 12년을 함께한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친구로 지냈으니 정말 12년이다. 언제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싶지만 그 동안 그 친구와 있었던 일을 쭉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그냥 흘러간 것 같지는 않다. 서로 비슷하기도 하면서 많이 달라 때로는 상처를 준 적도 많았지만 나에 대해서 그리고 그에 대해서 가장 객관적으로 판단해줄 수 있는 서로라고 믿었다.

이 친구와 최근 들어 다소 연락이 뜸했다. 서로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기 바빠서 그런 것도 있지만 한 번 연애를 시작하면 상대방만 바라보는 친구의 성격 때문에 으레 연애기간 동안에는 얼굴보기가 하늘에 별따기다. 이제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지만 한편에서 서운한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더구나 연애하기 전에 같이 만나 어울리면서 친해진 내 친구들의 안부 연락에도 답을 하지 않는 지나침에 괘씸함을 느끼기도 했다.

올해 두 번 정도 밖에 만나지 못 했는데, 해 넘기기 전에 한 번 봐야지 생각하고 있던 차에 며칠 전에 그 친구로부터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나 12월 27일에 결혼해. 놀랍지..." 순간 뒤통수 얻어 맞고, 서운하고 섭섭하고 안 좋은 생각이 떼로 덤벼드는 건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까?

사실 그 친구가 결혼을 할 거라는 얘기는 같이 사는 룸메이트를 통해서 이미 들었다. 그러면서 내심 조만간 만나 이차저차 해서 결혼하게 됐다... 에서부터 시작해 결혼하는 사람들이 늘상 하는 시시껄렁한 얘기들을 해주겠지라는 기대가 있었다. 당연히 12년을 돈독하게 지낸 친구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 친구는 내가 생각했던 만큼 나를 친구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걸까?

문자를 받도 한 동안 멍해 있다가 축하하고 조만간 보자는 문자를 찍어 보내줬다. 결혼 소식 알리는 사람한테 기분 나쁜 티 내는 것도 우스웠다. 졸업하고 한 번도 연락 없던 친구들도 결혼 때가 되면 으레 전화한 통 씩 돌리는게 상식인데, 왠지 그 친구와 나의 관계가 문자 한 통밖에 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에 입이 쓰고 텁텁하다. 

나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내 기준에 맞춰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는 행동과 말인줄 모르고 쏟아내고 뱉어냈을 것이다. 그들도 분명 나처럼 이렇게 글 몇 줄로 서운함을 풀거나, 속으로 삭혔겠지. 그 때 그 사람들이 나에게 한 마디씩 던져줬다면 나는 정말 충고로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고까워 했을까? 생각이 나의 문제로 넘어오면서 더 복잡해졌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소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다. 분명하지만 난 12월 27일 그 친구의 결혼식에서 갈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내가 어떻게 웃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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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18:30

<13th PIFF> 1박 3일 방문기

<13th PIFF> 1박 3일 방문기

<3일-내려가기>

개천절인 금요일 밤 11시 서울역에서 무궁화호에 올랐다. 가방에 노트북과 티셔츠와 가디건 한 장씩, 속옷과 양말만 대충 챙겨넣고 도망가듯 밤기차를 탔다. 5시간이 넘는 열차 여행은 4시 20분 목적지 부산역에서 멈췄다. "이제 햄들어서 무궁화 못 타겠다."고 투덜대며 열차를 빠져나왔다. 새벽임에도 열차는 꽤 많은 사람들을 토해냈고, 역사 안에도 꽤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두 나처럼 영화제를 찾은 사람들인가?"라는 생각에 3년 만에 부산영화제를 다시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물론 떨림과 두근거림과 함께.

친구와 부산행을 갑자기 정하고 내려왔기 때문에 예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티켓 예매는 물론 숙소까지. 내려오기 전, 잠깐 동안 해운대 근처의 호텔, 모텔에 전화를 했지만 "오늘은 해운대에서 방 구하기 힘들건데요."라는 말만 계속 들어야했다. "남포동은 그래도 하룻밤 묵을 곳이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택시를 잡았지만 그곳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한 시간 쯤을 헤맨 뒤에야 자갈치 시장의 짠 바다냄새가 고스란히 올라오는 한 모텔에서 겨우 방을 찾을 수 있었다. 긴 열차 여행과 방 잡으러 돌아다녔던 게 화근이었는지 친구와 그대로 쓰러져 점심을 훌쩍 넘겨 모텔을 기어나왔다.
 
<4일-돌아다니기>

야속하게도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남포동을 한 바퀴 훑어보고 해운대로 곧장 자리를 옮겼다. 예전에는 부산영화제하면 남포동이었는데 이제는 어쩐지 이전만큼 분위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 "썰렁하네." 기념품 부스에서 그나마 잠시 머무른 뒤 설렁탕 한 그릇을 허겁지겁 헤치우고 해운대에서 5시와 8시 영화를 골랐다. 어차피 티켓 남는 영화 아무거나(?) 보자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조바심은 없었는데 해운대 메가박스 매표소 앞에 세워진 상황판에 거의 모든 영화가 매진된 걸 보고서야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기왕 영화제 왔으니 그래도 영화 몇 편은 봐야지 않겠나. 다행히 티켓 교환 부스 앞을 서성이다 5시 영화 <워낭소리>와 8시 영화 <수치 disgrace> 티켓을 구했다. 힘겹게 구한 표를 들고 친구와 "우리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라며 쓰게 웃고는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국제영화제인데 영화들이야 검증됐겠지... "라고 자위하며.

<워낭소리>는 노부부와 그들이 키우는 소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풀어낸 인간극장류의 다큐멘터리다. 시작 전에 상영관 앞에서 손수건을 나눠줬는데 끝날 때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사의 마케팅이 적중한 듯. 영화가 끝난 후 진행된 GV에서도 노부부와 영화 제작에 대해서 질문들이 쏟아졌다. 누군가 너무 감정이입이 됐다고 지적을 했는데 꼭 다큐멘터리가 건조할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멘터리도 영화의 한 장르인데 굳이 그 외연을 한정지을 필요가 있을까? 아무튼 다음 영화가 남포동이었기 때문에 GV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거의 1시간을 걸려 아슬아슬하게 남포동 대영극장에 들어갔다.

다음 영화는 <수치 Disgrace>.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존 말코비치가 나왔다. "이 영화가 범상치 않겠다." 싶었는데 역시였다. 정말 많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포스트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에 대한 정치적 함의가 느껴졌고, 아버지(존 말코비치)의 성적 메타포가 강한 어떤 메시지들이 뚜렷하게 잡히지 않고 쏟아졌다. 극장을 나와서도 한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나 이 영화 잘 모르겠다."는 말로 매듭졌다. 올라와서 영화를 검색해 보고 알았는데 존 쿳시의 소설 추락(disgrace)를 원작으로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부터 애매모호하던 메시지들이 형체를 갖고 잡히기 시작했다.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었군." 존 쿳시의 책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밖에 보지 못했는데 왠지 존 말코비치는 최적의 캐스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따로 포스팅을 할 계획)

롯데시네마에서 영화를 보고 온 친구와 다시 만나 모텔 옆 자갈치 시장에서 꼼장어를 먹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음식은 아닌데 부산에 왔으면 꼭 먹어야 한다는 친구의 성화에 무작정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도 바닷바람 맞으면서 먹는 음식이라는게 서울에서는 경험하기 힘드니 분위기는 그럭저럭 좋았다. 손님을 게의치 않고 맛깔나는(?) 욕을 섞어가며 열심히 싸웠던 1번과 8번 가게 아주머니의 타이틀 매치를 보면서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숙소로 돌아왔다. TV에서 최진실의 삼우제를 보고 친구와 그녀에 대한 몇 마디를 나눴더니 벌써 2시가 가까웠다. 자야 한다면 침대에 누웠는데 친구가 예상에 없던 <연애불변의 법칙-커플 브레이킹>에 빠져 5시에야 잠이 들었다. 일찍 일어나서 11시 타임 영화봐야 하는데 말이다.

<5일-올라오기>

당연히 아침 11시 영화를 패스했다. 둘다 침대에 등짝이 달라붙어 버렸다. 그래도 오후에 서울로 짐 싸들고 올라와야 하니 2시 영화는 꼭 보겠다는 생각으로 모텔을 힘겹게 빠져나왔다. 예상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길. 편의점에서 우산 2개를 사고 남포동으로 나왔다. 그래도 사람들이 북적북적 우연히 아는 부부(?)를 만나 남포동 골목 깊숙이 숨어 있는 회국수 집에서 점심 요기를 대충하고 부산극장으로 갔다. 분명히 <순회상영>인 줄 알았는데 표를 보니 <이방인>이었다.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지. 뭐 아무거나 봐도 상관 없었지만 부산극장 2관과 3관이 붙어 있어 살짝 3관으로 들어가 인기작 중 하나였던 <신은 없다>를 봤다. 매진이라더니 제법 빈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신은 없다>는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허구성을 유머와 위트를 섞어 비꼬는 다큐멘터리였다. 중간중간 외국인들만 크게 웃는 바람에 덩달아 따라 웃긴 했지만 이런 문제에 있어서도 쿨(?)하게 넘기는 그들의 태도가 부럽긴 했다. 영화를 보고나서 국내에서는 절대 상영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둑 관람하길 잘한 듯. 원래 이 영화를 보고 서울로 올라올 예정이었으나 못내 뭔가 아쉬워 친구와 한 편 더 보기로 했다. 어렵게 티켓교환소에서 구한 영화는 스페인과 칠레의 합작 영화 <좋은 인생>. 칠레의 한 도시를 배경으로 다수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전개되는 영화였다. 각자 사연 많은 사람들이 서로서로 무심한 듯 살아가지만 결국 네트워킹 되어 있다는 소소한 진리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영화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영화가 끝나고 나니 집에 가는 일이 급해졌다. 기념부스에서 기념품 몇 개를 사고 노포동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내려올 때 무궁화에 너무 시달려 갈 때는 우등타고 편하게 가자 했지만 하늘은 그런 호사를 허락하지도 않았다. 매진된 우등을 피해 8시 15분 일반 버스를 타고 새로 놓인 부산-대구 고속도로를 탔다. 피곤했는지 타자마자 한 시간을 미친듯이 자고 휴게소에 들러 군것질거리들로 요기를 했다. 다시 출발한 버스 안에서는 거의 끝나가는 여행이 아쉬워 친구와 내내 수다를 떨었다. 이런저런 기억나지 않는 대화를 주고 받으며 12시 반이 가까운 시간에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줄지어 있는 택시를 같이 타고 친구를 내려놓고 집에 도착하니 1시가 조금 넘었다. 한 숨 한 번 길게 내뱉고 내일부터 또 어떻게 일주일을 시작하나 투덜대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여독풀기>

다음 날부터 미친듯이 수업 준비를 하면서 중간중간 1박 3일 짧은 여행을 떠올렸다. 즐겁고 유쾌했지만 왠지 예전에 느꼈던 감동들은 없었던 것 같다. 남포동 거리를 빼곡히 채웠던 영화 부스들이 사라졌고, 그 앞에서 기념품을 받기 위해 줄지어 있던 사람들의 부산스러움이 없었다. 부스들은 모두 해운대로 이동했지만 영화와 상관 없는 기업 부스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기업 홍보장이 된 것 같아 해운대에서는 쓸쓸한 기억 밖에 나지 않는다. 점점 영화제가 관객과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아직까지 입가를 씁쓸하게 적신다. 그럼에도 내년에도 또 가야지 생각하는 걸보면 참 나도 답이 없긴 하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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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8 01:05

이사


이사

내일이면 화곡동을 떠나 잠실동으로 이사를 간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하면서부터 화곡동에 살았으니 5년이 넘었다. 아직까지도 내일 다시 일과가 끝나고 이 곳으로 와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아직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다. 주변에 널려진 이삿짐만이 정말 내가 내일 이사를 가는구나를 현실로 느끼게 만들 뿐이다. 술을 약간 마신 늦은 밤이라 그런가 왠지 센티멘탈해진다.  

오늘은 친구 결혼식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에 들어왔다. 며칠 전부터 이삿짐을 쌌으니 짐은 대충 마무리 됐고 이제 옮길 일일만 남았다. 현관문을 열고 이삿짐을 요리조리 피해 형광등 스위치을 눌렀다. '탁!' 가구들이 사라진 방 곳곳을 돌아 큰 공명을 내는 그 소리는 평소와는 달랐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나는 소리였다. 내가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처음 불을 켰을 때  들었던 소리가 분명했다.

그 자리에서 몇 번 스위치를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결국 처음으로 다시 돌아왔구나." 이제 이 곳에서 생활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처음이었다. 나는 또 새로운 곳에서 새 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5년을 살면서 이제야 간신히 여기가 우리 동네구나라는 생각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하니 약간 겁도 난다. 아마 그 곳에서도 생활은 별로 달라질 것이 없겠지만 남의 집에 와 있는 기분은 한 동안 될 것 같다.

23살부터 28까지 내 20대 절정기를 함께 했던 곳. 좋은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쁜 일만 있었던 곳도 아니다. 제대 후 학교 생활을 다시 시작했고 졸업도 했다. 대학원에서 공부도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병원 신세를 졌고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 그 흔적들이 아직 이 공간 곳곳에 남아 있다. 그 흔적마저 모두 가져가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기억으로만 남겠지.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아마 다시 이 쪽을 찾는 일이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아주 장기간이 될지도 모른다. 20대의 한 때가 그대로 묻어 있는 이 곳이 이제는 현실이 아닌 과거가 된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 이 곳도, 이 곳에서의 기억들도 하나의 점으로 남겠지. 아마 기억조차 못하게 되는 순간도 오지 않을까.

마지막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인사는 해야겠다.
고마웠다. 이 징글징글한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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