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16 12:23

증명사진


증명사진을 찍었다.
학교에 제출할 서류에 사진 4장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시간이 없어
단 5분 만에 증명사진 8장을 만들어준다는 놀라운 능력의 지하철역
마술 제조기에서 부랴부랴 사진을 찍었다.

가격은 생각보다 비싼 8,000원...
잔돈이 없어 만원짜리를 투입구에 넣었다.
거스름돈은 사진이 출력된 다음에 나온단다.
자세를 고쳐잡고, 표정도 '스마일'~~~
처음 찍은 두 장의 컷이 화면에 떴다.
내가 봐도 못 봐주겠다.

양심은 있는지 두 번의 기회를 더 준단다.
두 컷의 사진이 화면에 떴다.
아까 사진보다 더 못 봐주겠다.
4장의 사진을 놓고 고민하던 중에 개중에 제일 낳은 것을 골랐다.
볼수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급한 맘에 찍었지만 정말 이건 아닌 거 같다.
사진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지만 왜곡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이 정도면 정말 심각한 왜곡이다.

그래도 시간이 없어 사진을 들고 학교로 갔다.
행정실 조교에게 사진을 들이밀며 '사진이 이것밖에 없네요...'
라고 말했더니 정말 진지하게 되묻는다.
"이건 좀 힘들지 않겠니...?"
"좀 그렇죠..."

사진을 들고 급민망해졌다.
분명 내 얼굴인데 들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로...
그래도 웃지 않은 조교형이 고맙다.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사진을 들고 왔다면
난 배가 찢어지도록 웃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조교형이 묘안을 찾았다.
학적부에 있는 사진을 파일로 저장해 학교에 있는 사진점에서
증명사진으로 인화할 수 있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이런 놀라운 기술이 있다니...
결국 여기에 10,000원이 들었다.

행정실에 사진을 주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문을 닫고 나왔다.
한 시간 사이에 생긴 긴박한 긴장이 확 풀리면서 몸이 노곤해졌다.
그리고 번개처럼 생각하는 한 가지...
난 그 능력없는 지하철역 사진기에 거스름돈마저 곱게 쥐어주고 나왔다.
급한 마음에 출력된 사진만 들고 학교로 뛰어갔던 것이다.

어떤 누군가는 거스름돈으로 4,000원을 가져갔겠지...
끝까지 뒤가 씁쓸하다.

저녁에 만난 친구에게 은근슬쩍 그 사진을 보여줬다.
"웃기지...?"
역시 오래 만난 친구답게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제대로 "빵" 터졌다.
우울할 때마다 본다며 돈 주고 사겠단다.
눈물나게 고마운 녀석이다.
하지만 내가 평생 꼬투리 잡힐 일을 왜 하겠는가

집에 돌아와서 한동안 그 증명사진을 쳐다봤다.
한참을 봐서 그런가
그렇게 민망한 사진에서도 내 얼굴이 보였다.

'분명 내 얼굴에 이런 표정이 있단 말이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은 표정도 어쩔 수 없이
노출할 수밖에 없는게 얼굴의 운명이다.
되도록이면 좋은 인상만을 남기도 싶지만
얼굴 근육 하나하나를 내가 컨트롤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가끔 잘못 나온 사진을 보면 흠칫 놀랄 때가 있다.
분명 내 얼굴의 표정이면서도 너무 낯설기 때문에...
내가 지을 수 있는 표정 하나하나를 알고 있다면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사진 찍을 때는 이 표정,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이 표정, 등등
필요할 때마다 기계적으로 꺼내 쓸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고 보면 배우들은 참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아무튼 오랜만에 거울을 보면서
얼굴 근육 하나하나를 만져봤다.
타인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지만 
정작 나는 내 얼굴을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절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날 어떤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기억할까?
되도록이면 좋은 인상을 갖고 싶다.
누군가가 오늘 찍은 증명사진의 표정으로 날 기억하는 알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내가 모르는 '못난' 얼굴을 봐서 기분이 썩 좋은 하루는 아니었다.
난 그 모습까지 사랑할 수 있을 만큼 '대인배'가 아니다.




P.S.
알고 봤더니 지하철역 증명사진기를 찍는 요령이 있단다.
뭐... 얼굴은 이렇게, 각도는 이렇게 하라는데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사진기사님이 표정 하나, 자세 하나 만져주는게 좋다.
그 분들은 내 얼굴에서 최적의 표정을 찾아주는 '고마운' 분들이다.
기계보다는 사람이 사람 얼굴을 잘 알겠지...

잘 나온 증명사진은 사람의 기분까지도 즐겁게 만든다.
씁쓸한 기분을 지우기위해서라도 사진관을 찾아 다시 한 번 찍어봐야 겠다.
근데 더 씁쓸해지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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