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09 21:53

혼자사는 남자


혼자 사는 남자


물론 난 혼자 살지 않는다. 5살 터울의 형과 함께 살고 있다. 집이 여관인양 잠 자고 몸만 빠져 나가는 형의 직업 때문에 본의 아니게 혼자 사는 것처럼 살고 있다. 근 10년 가까이를 이렇게 산 것 같다. 그 동안 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은 '살림'이라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그리고 이 세상 엄마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갖게 됐다. 의술이 대단하겠지만 '살림'에 비할 게 아니다. 오죽하면 '살림'이 살림(살리다)겠는가...

살림 중 가장 최고난도를 자랑하는 것이 단연 '주방살림'이다. 혼자 살림을 맡아 얼마 되지 않으면 왜 횐 옷의 때는 세탁기에 돌려도 깔끔하게 지워지지 않는지, 백색 가전제품들은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 창틀과 구석구석의 먼지는 어떻게 닦아내야 하는지 나름의 방법을 찾게 된다. 하지만 주방살림은 그렇지 않다. 이건 정말이지 웬만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고서는 노하우가 쌓이지 않는다.

난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게 되면 습관처럼 주방의 행주를 본다. 행주는 그 집의 주방살림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줄 수 있는 '척도'다. 행주를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보관, 관리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정갈하게 '빛'이 나는 행주는 그 집의 주방살림이 흠 잡을 데 없음을 말해준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난 아직도 이걸 잘 못한다. 그래서 여간해서는 흰 색 행주는 잘 쓰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행주를 오래 쓰기 위해서...

혹시나 탐나도록 하얀 행주를 보면 "도대체 어쨌길래 행주가 저렇게 될 수 있냐?"고 붙잡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가스레인지 기름때 없애는 방법, 냉장고 잡냄새 없애는 방법, 음식물 오래 보관하는 방법도 나름 노하우가 생겼지만 정말이지 혼자사는 남자에게 행주는 난공불락이다. "삶어!!!" 엄마에게 물어보면 당연한듯 말하지만 삶기에도 기술이 있다는 걸 엄마는 모른다. 아니 엄마는 아는데 그걸 설명을 못한다. 엄마는 항상 주방살림에 있어서 '학자'이긴 하지만 '선생'은 아니다.


행주가 주방살림에 척도라면 주방살림의 미학은 단연 '요리'에서 꽃을 핀다. 그리고 혼자 사는 남자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 요리다. 세상 모든 남자가 알렉스, 김호진, 앤디 같은 건 아니다. 전골냄비에 해물을 깔고, 생닭 속을 채워 뚝배기에 끓여 낼 수 있는 남자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책을 보고 따라해도 맛은 국적불명이고, 모양은 정말이지 아방가르드해지기 일쑤다. '제법 음식처럼 보이고 넘길만하다...' 라고 인정받기 까지 적어도 1~2년은 투자해야 한다. 도중에 포기하면 동네 분식집, 중국집, 야식집의 엄청난 조미료에 중독되는 방법 밖에 없다.

나이가 들어 여자와 남자의 권력관계가 전환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난 '밥'에 있다고 믿는다. 다 늙어 어디가서 밥 한 그릇 얻어먹겠는가. 먹고 살려면 주방의 절대 강자들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나이 들면 팔뚝에 힘줄은 주방 국자만도 못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집만 봐도 그러니까... 평생 주방은 여자들의 공간이고, 요리는 여자들의 몫이라고 배워왔던 한국 남자들의 비극이다.

요즘 요리에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게 주기를 타는데 요즘 거의 정점에 오른 것 같다. 이번에는 왠지 좀 오래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끝까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아니 인간대접 받으려면 요리는 필수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철학'이 생겼다. 내 밥 그릇은 내가 만들 줄 알아야 할 게 아닌가... 언젠가 생길 내 가족에게도 뿌듯한 일이다. 그리고 계속 하다보니 재미도 있다. 이제서야 내가 주방살림에 대해 조금씩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10년이 지나서야 말이다.

집에서 떡볶이를 했다. 그러고보니 처음인 것 같다. 똑같이 혼자 사는 친구에게 사진 찍어 보내줬더니 혼자 먹으려고 그 짓을 했냐고 미쳤단다. 여자친구 없이 혼자 나이 먹더니 별 짓을 다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너 늙어서 누가 웃는지 두고보자. 떡볶이 못 하는 너보다 내가 더 인정받는 날이 분명 온다!!!" 분식류는 "그렇게 비싸지도 않은데 밖에서 사먹지 귀찮게 해먹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게 조미료 중독의 지름길이다. 철저히 God made 재료 만을 취급하는 난 그 친구보다 건강하게 오래 살거다. 오늘의 도전 과제는 고등어무조림과 오징어국이다.ㅋㅋ


P.S. 누가 나 8종 식과도 세트 하나 사줬으면 정말 소원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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