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04 10:35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제4회 블로거 상영회 후기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제4회 블로거 상영회 후기


Russia; 1989; 105min; Drama; B&W
Director: Vitali Kanevsky
Cast: Pavel Nazarov, Dinara Drukarova


지난 1월 31일 토요일 오후 8시 이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2009년 첫 블로거 상영회이자 네 번째 상영회가 있었습니다. 상영 영화는 투표 결과에 따라 러시아 출신 비탈리 카네프스키 감독의 1989년도 작품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였습니다. 솔직히 투표 참여 인원이 많지 않아 관객이 적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정말로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기우'라는 표현은 딱 이럴 때 쓰라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예정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상영관에 도착을 했는데, 그 때부터 매표소에 '매진'이라는 빨간 글씨가 떠 있더군요. (믿기지 않아 매표소에 몇 번이고 정말 매진이냐고 물어봤습니다.^^) 블로거 상영회가 네 번째 만에 드디어 매진을 기록했습니다!!! 역시 첫 회 때부터 느꼈지만 투표에서 1등을 한 영화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정해진 객석을 꽉 채우고, 보조의자를 놓고, 그것도 부족해 심지어 대기표까지 받아 서서 보시는 분들, 계단에 앉아서 보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죄송스럽고, 고마운 마음에 감정이 벅차더군요. 좋은 영화는 관객이 찾는다는 말은 다시 한 번 믿게 됐습니다. 워낙에 오래된 필름이고 보관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영상이 불안정하고 만족스럽지 않았음에도 영화를 보기 위해 오신 분들이 참 너무너무 사랑스러웠습니다.^^


감독이 55세의 나이에 만든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는 그에게 제 43회 칸느 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안겨준 작품입니다. '신인'이라는 말이 감독의 나이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그의 굴곡 많은 인생이 이 영화 이후 <눈오는 날의 왈츠>, <우리, 20세기의 아이들>로 이어지는 러시아 영상 미학의 '극'을 보여주는 3부작의 원형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감독의 <눈오는 날의 왈츠> 역시 '겨울'을 테마로 했던 이번 상영회의 후보작 중 하나였는데, 다음 상영회라도 꼭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7년 러시아의 극동 지방인 블라디보스토크의 스촨이라는 가난한 탄광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전후 스탈린의 서슬 퍼런 독재와 대중선동, 경직된 경제정책 등이 최고조에 이를 무렵 모든 것이 망가진 한 마을을 12살 발레르카와 갈리야라는 어린 아이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마을은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군대도 정상적인 작동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소련'을 환유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물론, 어린 발레르카는 감독 자신의 과거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짧게 영화를 평가한다면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는 전쟁 직후 국가의 폭력적 통제와 억압, 무능력이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고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상황에서 사람들의 이성은 어떻게 매몰되는지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핵심인 배급은 유명무실해지고, 군인과 경찰의 폭력은 제어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소련이 추구하는 공산주의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요원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제 막 말을 배운 어린 아이가 반역자는 죽여야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폭력과 절도, 살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등 사람들의 이성 역시 생존의 본능 앞에서 무참히 옅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감독은 이 시기 스탈린의 정책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은 듯 보입니다. 학교 화장실에 이스트를 넣는 행동을 통해 교육정책을 불신하고,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자행하는 군대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맥컬리 컬킨을 닮은 발레르카가 저지르는 철 없는 장난들이 상당한 유머와 위트를 던져주면서 영화를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희극'과 '비극'이 공존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감독이 삶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선인 것 같았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저는 왠지 영화를 보면서 갈리야가 발레르카의 실질적인 어머니 내지는 구원자처럼 보였습니다. 특히 발레르카가 도망친 곳까지 갈리야가 찾아오는 것을 보면서 더욱 확신이 들더군요. 그런 갈리야가 발레르카를 대신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합니다. 부상을 당한 발레르카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의 원제가 "얼음, 땡" 놀이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발레르카에게는 더 이상 "땡"을 해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되겠죠. 결국 감독은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역사의 한 현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영화가 비극이라고만 믿고 싶지 않습니다. 영화 제목이 주는 메타포도 있지만, 감독은 분명 그 비극적 상황에서도 "삶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를 영화 전체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저런 상황에서도 인간이 살아야 하는 것일까?" 영화를 보면서 계속 질문을 던지게 되지만 답은 항상 하나로 수렴이 되더군요. 그것이 꼭 희망적인 메시지나 영상을 통해 드러나지 않아도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유가 충분한 것 같습니다. 언젠가 부활하게 될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꼭 살아있어야겠죠...

(덧붙여, 영화의 음악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본인 포로들이 부르는 노래들이 배경음악으로 많이 흘러 나오는데 이국적이지만 왠지 영화의 분위기와 상당히 잘 맞아떨어지더군요. 감독이 어린 시절 많이 듣고 자라 익숙했겠지요.)





제 감상은 이 쯤 정리하고, 씨네토크에서 나왔던 의견들 역시 상당한 깊이가 있었습니다. 매진이 됐던 만큼 가장 많은 분들이 영화가 끝난 후 씨네토크 시간까지 함께 해 주셨는데요. (40분 가까이 씨네토크가 진행이 됐는데 끝나고 나서까지 열기가 식지 않더군요.^^) 기억을 열심히 되살려 짧게 정리해 보면...

1. 우선, 중년의 여성 분이 이번에 대학에 입학한 조카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 왔다고 하셨는데요. 조카분에게 어떻게 보셨는지 물어보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2. 많은 분들이 자신의 어린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됐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여성분은 자신이 광주에서 겪었던 일들을 전해주셨는데요. 어린시절 받은 상처들을 떠올리면서 깊은 공감과 울림을 받으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3. 특히, 영화가 비극적인지 희망적인지를 놓도 다소 다른 의견들이 오갔던 것 같습니다. 영화의 제목 때문에 희망적이라고 보시는 분들도 계셨고, 극 중의 비극적 결말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4. 씨네마테크에서 <미러>를 보고 오셨다는 분은 고전영화 애찬론을 피셨는데요. 카메라 워크가 화려하고 컷이 짧고 기교가 우선인 지금의 영화들보다 호흡도 느리고, 컷과 컷의 연결은 부자연스럽지만 사고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 고전영화의 매력이라고 하셨습니다. 

5. 지금 우리의 상황과 비교하면 더 마음이 무거워진다는 의견도 있었고요.

6. 제가 감독이 목소리를 통해 영화 속에 자주 개입하는 장면은 어떻게 보셨는지에 대해 물어봤었는데요. 영화가 허구가 아니라 사실임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 개입이었다는 감상이 있었습니다.

7. 마지막으로 한 여성 분이 제게 질문을 하셨는데요. 제가 말을 많이 하면 안 되는 자리라서 편하게 대답드리지 못한 것 같아 불편한 마음에 몇 자 적습니다. 광주에서 경험을 말씀하신 분의 말을 받아 제가 "좋은 영화는 특수한 상황을 영화 속에 그리고 있으면서도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라고 코멘트를 단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질문은 "광주의 상황이나 영화 속과 같은 상황을 경험해보지 못한 입장에서 제가 느낄 수 있었던 '보편적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지?"였던 것 같습니다.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보편적 메시지란 "삶에 대한 의지", "삶이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반복되어서는 안 될 비극"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위에서 설명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 경험을 하신 분들과 그렇지 못한 제가 느낀 감정이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 분들께 "얼마나 힘드셨어요. 제가 다 이해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주제넘은 짓이겠죠. 제가 말하는 바는 머리로 하는 '이해'의 차원이 아닌 '공감'의 차원입니다. 전 기본적으로 제가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는 모든 행동이 결국 '공감의 층'을 넓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경험하지 못했던, 갈 수 없는 역사와 세계에 대한 의식의 확장이죠.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과거의 상처는 치유되고,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현재의 우리가 경험해지 못해 공감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만큼 비극을 경험하신 분들께 죄스럽고 비극적인 일은 없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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