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ck> 정말 무서운 게 뭐니?
Canada/USA;2007;85min;35mm;color
Director: Stuart Gordon
Cast: Mena Suvari, Stephen Rea
Director: Stuart Gordon
Cast: Mena Suvari, Stephen Rea
부천국제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2005년 영화제 집행위와 부천시의 갈등 이후 맥을 못 잡던 영화제는 올해도 그저그런 행사로 기억될 듯하다. 게다가 기간 내내 태풍 갈매기가 쏟아낸 비 때문에 상영관이 아니면 영화제라는 분위기를 어디서도 느끼기 힘들었다.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작품을 들고 먼길 마다않고 참석한 게스트들에게 까지 민망하게 기억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좋은 영화들이 더 빛을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할 영화제의 미숙한 운영이 답답할 뿐이다. 부산은 그렇다치고 서울에 근접한 지리적 이점과 보다 대중적인 영화를 상영한다는 컨텐츠적 이점을 갖고서도 전주국제영화제보다 관객이 적은 점은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이번 영화제에 '좋은' 영화들이 관객들을 찾았다. 개막작 <바시르와 왈츠를>부터 시작해 각 섹션별로 '판타스틱'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영화들이 쏟아졌다. 놓친 영화들이 있어 아쉽긴 하지만 9편을 봤으니 배가 고픈 정도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9편 중 최고는 B급 영화의 마스터피스라 할 수 있는 스튜어트 고든의 2007년작 <스턱 stuck>이었다. 바시르와 왈츠를, 시암의 사랑, 어둠 속의 공포, 단편 소프트 까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작품들이 많았지만 판타스틱 영화제의 이름이 어울리는 영화는 아무래도 <스턱>의 자리가 아닐까 한다.
미국과 캐나다의 합작인 <스턱>은 스튜어트 고든이라는 감독의 이름답게 B급 공포 영화의 재미를 한껏 누릴 수 있는 작품이다. 살이 터지고 피가 넘치고 뼈가 부러지는 잔인한 장면들은 그런대로 눈뜨고 볼 수 있을 정도로 'excuse'됐고(오히려 이 영화의 가장 '헉'소리 나오는 장면은 오프닝 시퀀스의 '똥'이다.) 반면에 유머와 위트는 적재적소에서 분위기를 붇돋고 있다. 여기에 날카로운 사회 풍자는 씁쓸하면서도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실화에 살을 붙인 이야기는 전보다 더 풍성해졌고, 배우들의 호연이 맞물리면서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빠질 수 없는 영화로 기억될 듯 하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지금 미국이 처한 상황 자체를 공포 영화의 배경으로 끌어오고 있는 점이다. 약에 취한 브랜디(미나 수바리)의 차에 치인 톰(스티븐 레아)이 탈출하는 과정을 주된 내러티브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고 괴기스럽게 만드는 것이 각각의 배우들이 처한 상황이다. 미국 중산층의 몰락, 편협한 인종주의가 상징하는 폭력과 공포, 두려움이 이야기 전반에 강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이다.
브랜디는 침대시트에 똥을 싼 할아버지의 엉덩이를 아무렇지 않게 닦을 만큼 환자들과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노인요양원의 간호조무사다. 상사는 그런 그녀에게 팀장직을 제안한다. 단, 토요일 근무에 나와 달라는 것. 상사의 협박 아닌 협박을 받아들이고 그녀는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를 오로지 '약'에 의존한다. 클럽에서 실컷 약에 취한 그녀는 토요일 근무를 위해 집에 돌아오는 중 톰을 친다. 그녀의 자동차 앞유리에 낀(stuck) 톰. 하지만 브랜디는 그를 걸치고 달릴 수밖에 없다. 교통사고를 내고 일에 나가지 못하면 팀장 자리는 물 건넌 나룻배일 뿐이다. 그녀에게 톰은 승진을 위협하고, 아직 할부도 끝나지 않은 자동차를 박살낸 방해물같은 존재다. 승진도 하고, 차도 고치고, 다시 안락한 삶은 살기 위해 브랜디는 톰이 죽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톰은 세들어 사는 아파트 생활비를 내지 못해 물건 다 뺏기게 생긴 실직자다. 집주인은 인터뷰에 가기 위해 양복 한벌 빼달라는 사정도 듣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직업소개소에 도착하지만 안하무인에 도통한 직원들은 자신들의 실수로 누락한 서류 때문에 톰을 돌려보낸다. 그의 경력조차도 무의미하다. 갈 곳 없는 톰은 공원 한 켠에 자리를 잡지만 경찰은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맘씨좋은 노숙자에게 선물로 받은 카트를 이끌로 밤거리를 헤메는 톰은 결국 비틀거리는 브랜디의 자동차와 충돌한다. 그리고 그녀의 차고에서 앞유리에 몸을 낀 채 살기 위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애원하고, 읍소하고, 매달렸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결국 톰은 살기 위해 브랜디와 그녀의 애인 라시드를 죽여야 했다.
의료보험제도와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연신 신문과 TV에 오르내리면서 그 동안 미국에 가지고 있던 환상이 국내에서도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 아메리카 드림의 실체가 보이면서 미국은 돈 없으면 아프면 안 되고, 우리만큼 집 한 채 장만하기 힘든 곳이라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중산층의 몰락이 있다. 톰은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갈 수 없는 미국 중산층의 현실을 환유하고 있다. 그의 상황이 공포스러운 이유는 누구나 그처럼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랜디는 아슬아슬하게 생활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녀가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약' 뿐이다. 요양원에서 천사와 같은 모습과 달리 브랜디의 폭력성은 결국 어뚱하게도 톰에게 튀고 만다. (이 폭력성은 라시드가 바람피는 장면을 목도한 순간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으로 폭발한다.) 그녀의 내재된 폭력성과 약에 대한 의존은 중산층의 성격과 다르지 않다.
떨어지면 올라올 수 없고, 자리를 지켜도 아슬아슬한 미국인들이 처한 지금은 모습은 감독의 냉소적인 시선읕 통해 영화 속에서 재연된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도 결국 인생의 마지막은 영화의 첫 장면 똥 싼 노인네와 다르지 않다고 놀리는 듯 하다. 그리고 감독은 이와 더불어 어쩔 수 없는 도덕의 '붕괴' 역시 꼬집는다. 브랜디는 범죄를 짓는 줄 알면서도 톰이 죽도록 방관하고, 수세에 몰리자 남자친구를 시켜 톰을 죽이도록 사주한다. 요양원에서 찬사같은 브랜디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상황에 따라 천사와 악마의 양면성을 가진 브랜디의 모습 역시 미국인들의 이중적인 도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몰인정한 톰의 집주인, 동료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브랜드의 직장상사, 배려를 모르는 직업소개소의 직원들, 일에만 충실한 경찰들까지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린 미국인의 모습이다. 이 영화에서 아직 인간애가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단지 톰에게 술 한 잔과 카트를 선물로 건넨 노숙자와 톰을 구출하기 위해 애쓴 옆집 히스패닉 불법체류자 가족, 즉 주변부에 있는 이들 뿐이다. 감독은 이들에게서 미국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을 엿보는 듯 하다. 현실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공포 영화라는 친구의 말에 귀신이 달라붙은(stuck) 이야기인 줄 알고 있었지만 영화는 미국이라는 환상이 가지고 있는 추악한 이면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오랜만에 만나는 통쾌한 B급 영화였다. 아메리칸 뷰티의 미나 수바리와 라잉 케임의 스티븐 레아의 눈에서 다르지만 같게 느껴지는 두려움이 영화가 끝난 후 지금까지 잔상으로 남는다. 왠지 텔레비전 속의 미국인의 눈동자 역시 다르지 않게 보인다.
<님은 먼 곳에> 당신이 거길 왜 갔나요
결론적으로 이준익은 영화를 대중적으로 아주 잘 만드는 감독이다. 어떤 소재를 쥐어줘도 대중의 코드에 어울리도록 판을 짤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 그렇다고 대중이 좋아할만한 소재들을 골라 만드는 감독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전작들은 흥행과 멀어보이는 소재들을 다루고 있었다. 영화판에서는 그다지 반응이 좋지 않은 사극 <황산벌>, 동성애 코드에 맞춘 <왕의 남자>, 한물간 가수와 매니저의 우정을 그린 <라디오 스타>에 기력 없는 아저씨들을 전면에 등장시킨 <즐거운 인생>까지 솔직히 '땡기는' 이야기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준익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을 매표소로 끌어들이는 영리하고 운 좋은 감독이다. 한국 관객이 스크린에서 보고 싶어하는 '무엇'을 정확히 읽어낼 줄 알고, 그것을 표현할 줄 안다는 의미다. 그리고 소통 역시 게을리 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현재 충무로에서 감독의 색깔과 대중의 기호 사이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감독이 됐다.

그의 여섯번 째 영화 <님은 먼 곳에> 역시 이준익 감독의 균형감각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베트남전에 대한 감독의 철학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관객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풀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적 사건을 가지고 만든 이 '낯선 멜로드라마'는 제목과 줄거리에서 풍기는 신파적 감성에도 불구하고 이전 전쟁영화에서 느끼기 힘들었던 세련된 영상과 구성을 보여준다. 전쟁영화, 음악영화, 멜로드라마에 로드무비 형식까지 복잡한 장르적 구성을 깔끔하게 엮어내면서 베트남 전쟁을 한국의 처지에서 진실성 있게 그려내고 있는 점이 이 영화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다.
영화에서 베트남으로 떠나는 세 종류의 인물이 등장한다. 상길은 군대에서 친 사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터로 끌려가고, 순이는 그런 상길을 만나기 위해 주소 하나 들고 무작정 베트남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돈'을 벌기 위해 배에 오른 정만과 그의 밴드 멤버들이 있다. 상길과 정만은 1970년대 초반 베트남으로 떠났던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사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던 상길과 노래로 돈을 벌어야 했던 정만. 그들은 모두 외화벌이를 위해 베트남으로 떠났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상길이 국가를 위한 외화벌이 수단으로 떠났다는 점과 정만이 순수 개인적인 목적으로 갔다는 점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찌됐든 상길과 정만이 상징하는 그 시대의 인물들이 메고 있던 십자가는 외화벌이였다.
하지만 순이는 다르다. 당시에도 순이와 같이 남편을 찾기 위해 베트남을 찾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4대 독자의 씨를 말릴 수 없다는 시어머니의 반 협박에 의해서는 말이다. 가장 영화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순이는 이런 점에서 한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환유한다고 볼 수 있다. 남편, 애인, 친구, 가족을 베트남으로 보내고 한국에 남은 사람들이 곧 순이가 되는 것이다.(순이가 여성이어야 했던 이유다.) 과연 그들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서 우리와는 아무 원한도 없는 베트남인들과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준익 감독은 순이를 통해 그 물음에 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은 영화의 마지막, 말이 아닌 순이의 행동으로 드러난다. 천신만고 끝에 마주선 상길에게 순이는 아무말 없이 그의 뺨을 연신 내려친다. 그리고 상길 역시 아무 말 없이 순이의 손을 받아낸다. 순이의 행동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당신이 도대체 이곳에 왜 와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 원망이 아니었을까? 그토록 순이에게 '화끈한 것'을 요구했던 정만도 마지막 순이의 변화에 절망한다. 그리고 용득이 달러를 불태우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다. 정신 마저 겁탈당하고 벌어온 달러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감독은 직설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 없는 전쟁에 왜 우리가 갔었야 했는지......"

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베트남 사이의 전쟁이었기는 했지만 한국이 참전하면서 우리 현대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아직까지 베트남전 참전을 둘러싼 논쟁이 마무리되지 않았고, 고엽제 부작용과 베트남 양민 학살 문제 처럼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영화 쪽에서 베트남전을 다루는데 게을렀던 것이 사실이다.(하긴 베트남전 뿐이겠는가) <하얀 전쟁>이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 곳에>는 70년대의 베트남전쟁이 현재의 시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영화적으로 풀어보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을만 하다. 그의 정치적 판단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선 그의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특히 주인공 순이가 처한 상황이 그렇다. 순이가 왜 베트남을 가야하는 이유는 개연성이 있다기 보다는 상당히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당시 그런 상황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겠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과 맞지 않은 설정이었다. 때문에 순이가 끝까지 밴드를 이끌고 호이안으로 가서 남편을 만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정만으로 나온 정진영의 극적인 변화 등도 매끄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감독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메시지와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은 영화적 구성은 이 영화를 애정을 갖고 볼 수 있는 이유다. 특히, 순이와 상길의 병렬적 이야기 전개와 마지막 그들의 만남은 극을 이끌면서 긴장을 풀지 않게 한다. 영화적 상황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70년대의 히트곡들과 더불어 정진영, 엄태웅을 비롯한 조연배우들의 가볍지 않은 연기와 '수애'라는 보물같은 배우를 발견한 것도 영화의 빠질 수 없는 매력이다.
결론적으로 이준익은 영화를 대중적으로 아주 잘 만드는 감독이다. 어떤 소재를 쥐어줘도 대중의 코드에 어울리도록 판을 짤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 그렇다고 대중이 좋아할만한 소재들을 골라 만드는 감독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전작들은 흥행과 멀어보이는 소재들을 다루고 있었다. 영화판에서는 그다지 반응이 좋지 않은 사극 <황산벌>, 동성애 코드에 맞춘 <왕의 남자>, 한물간 가수와 매니저의 우정을 그린 <라디오 스타>에 기력 없는 아저씨들을 전면에 등장시킨 <즐거운 인생>까지 솔직히 '땡기는' 이야기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준익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을 매표소로 끌어들이는 영리하고 운 좋은 감독이다. 한국 관객이 스크린에서 보고 싶어하는 '무엇'을 정확히 읽어낼 줄 알고, 그것을 표현할 줄 안다는 의미다. 그리고 소통 역시 게을리 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현재 충무로에서 감독의 색깔과 대중의 기호 사이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감독이 됐다.
그의 여섯번 째 영화 <님은 먼 곳에> 역시 이준익 감독의 균형감각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베트남전에 대한 감독의 철학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관객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풀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적 사건을 가지고 만든 이 '낯선 멜로드라마'는 제목과 줄거리에서 풍기는 신파적 감성에도 불구하고 이전 전쟁영화에서 느끼기 힘들었던 세련된 영상과 구성을 보여준다. 전쟁영화, 음악영화, 멜로드라마에 로드무비 형식까지 복잡한 장르적 구성을 깔끔하게 엮어내면서 베트남 전쟁을 한국의 처지에서 진실성 있게 그려내고 있는 점이 이 영화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다.
영화에서 베트남으로 떠나는 세 종류의 인물이 등장한다. 상길은 군대에서 친 사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터로 끌려가고, 순이는 그런 상길을 만나기 위해 주소 하나 들고 무작정 베트남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돈'을 벌기 위해 배에 오른 정만과 그의 밴드 멤버들이 있다. 상길과 정만은 1970년대 초반 베트남으로 떠났던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사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던 상길과 노래로 돈을 벌어야 했던 정만. 그들은 모두 외화벌이를 위해 베트남으로 떠났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상길이 국가를 위한 외화벌이 수단으로 떠났다는 점과 정만이 순수 개인적인 목적으로 갔다는 점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찌됐든 상길과 정만이 상징하는 그 시대의 인물들이 메고 있던 십자가는 외화벌이였다.
하지만 순이는 다르다. 당시에도 순이와 같이 남편을 찾기 위해 베트남을 찾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4대 독자의 씨를 말릴 수 없다는 시어머니의 반 협박에 의해서는 말이다. 가장 영화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순이는 이런 점에서 한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환유한다고 볼 수 있다. 남편, 애인, 친구, 가족을 베트남으로 보내고 한국에 남은 사람들이 곧 순이가 되는 것이다.(순이가 여성이어야 했던 이유다.) 과연 그들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서 우리와는 아무 원한도 없는 베트남인들과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준익 감독은 순이를 통해 그 물음에 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은 영화의 마지막, 말이 아닌 순이의 행동으로 드러난다. 천신만고 끝에 마주선 상길에게 순이는 아무말 없이 그의 뺨을 연신 내려친다. 그리고 상길 역시 아무 말 없이 순이의 손을 받아낸다. 순이의 행동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당신이 도대체 이곳에 왜 와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 원망이 아니었을까? 그토록 순이에게 '화끈한 것'을 요구했던 정만도 마지막 순이의 변화에 절망한다. 그리고 용득이 달러를 불태우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다. 정신 마저 겁탈당하고 벌어온 달러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감독은 직설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 없는 전쟁에 왜 우리가 갔었야 했는지......"
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베트남 사이의 전쟁이었기는 했지만 한국이 참전하면서 우리 현대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아직까지 베트남전 참전을 둘러싼 논쟁이 마무리되지 않았고, 고엽제 부작용과 베트남 양민 학살 문제 처럼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영화 쪽에서 베트남전을 다루는데 게을렀던 것이 사실이다.(하긴 베트남전 뿐이겠는가) <하얀 전쟁>이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 곳에>는 70년대의 베트남전쟁이 현재의 시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영화적으로 풀어보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을만 하다. 그의 정치적 판단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선 그의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특히 주인공 순이가 처한 상황이 그렇다. 순이가 왜 베트남을 가야하는 이유는 개연성이 있다기 보다는 상당히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당시 그런 상황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겠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과 맞지 않은 설정이었다. 때문에 순이가 끝까지 밴드를 이끌고 호이안으로 가서 남편을 만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정만으로 나온 정진영의 극적인 변화 등도 매끄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감독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메시지와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은 영화적 구성은 이 영화를 애정을 갖고 볼 수 있는 이유다. 특히, 순이와 상길의 병렬적 이야기 전개와 마지막 그들의 만남은 극을 이끌면서 긴장을 풀지 않게 한다. 영화적 상황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70년대의 히트곡들과 더불어 정진영, 엄태웅을 비롯한 조연배우들의 가볍지 않은 연기와 '수애'라는 보물같은 배우를 발견한 것도 영화의 빠질 수 없는 매력이다.
<발굴된 과거> 역사의 화려함과 씁쓸함
학부때 <한국영화사> 강의를 들으며 일제시대 영화에 대한 페이퍼를 쓴 기억이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 올라있던 1943년 이마이 타다시의 <망루의 결사대>와 45년 최인규의 <사랑의 맹서>라는 영화에 대한 감상이었다. 자막이 없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전영화와 '옛날 외국 영화'가 같이 생각되는 현실에서 "우리 영화도 고전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영화사적으로 1940년대는 국내 영화가 기술적, 산업적으로는 성장했을지언정 '한국영화'라는 범주에서는 심한 왜곡과 굴절을 겪어야 했던 시기였다. 한 편에서는 때문에 이 시기를 한국영화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부인하거나 피할 수 없는 영화 역사의 한 부분이다. 식민지 시기를 우리 역사에서 뺄 수 없듯이 말이다. 더구나 영화 역사 100년을 자랑하면서도 식민지와 전쟁으로 대부분의 필름들이 없어져 볼 수 있는 초창기 영화들이 몇 개 되지 않아 아쉬움이 더 크다.(신문시가에 의하면 보관, 관리 개념이 없었던 당시 사람들이 필름을 밀짚모자 테를 두르는데 썼다고 한다.) 그나마 남아 있는 영화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적은 편이다. 아프고 감추고 싶은 기억을 굳이 영화로 다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한국영상자료원의 고전필름을 찾기 위한 노력은 비워있던 역사를 채워넣는다는 의미가 있다. 이미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46년 최인규의 <자유만세>와 같은 영화들이 디지털로 복원되는 등 역사채우기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그리고 2004년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발굴, 수집한 해방 전 1940년대 영화 4편이 작년 10월 DVD로 출시됐다. 41년 최인규의 <집 없는 천사>, 41년 안석영의 <지원병>, 41년 이병일의 <반도의 봄>, 그리고 43년 박기채의 <조선해협> 4편이 묶인 DVD 세트의 이름은 <발굴된 역사>. 영상자료원의 복원 작업과 꽤나 어울리는 타이틀이다. 검은색 전면에 카메라를 비춘 듯한 작은 원 안에 담긴 흑백 영상 화면이 타이틀 디자인이다. 왠지 우울하면서도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엿보이는 포장이다. 게으른 탓에 구입한 지 한참되는 DVD 타이틀을 이제서야 꺼내 봤다. 생각보다 화면과 사운드가 깨끗해서 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당연히 우울한 시기에 만들어진 어용영화 네 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내용이나 구성면서에 장르적 공식을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영화 4편을 보고나면 왜 당시 사람들이 '문예봉'이라는 여배우에게 열광했지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집 없는 천사>
최인규 감독의 1941년 <집 없는 천사>는 도시에서 앵벌이로 살아가는 아이들과 함께 서울 근교에 <향림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운 방성빈 목사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이 시기 일본에서 영화공부를 했던 다른 감독들과 달리 순수 국내파였던 최인규 감독의 배경 때문인지 계몽주의 색채가 강하면서도 이야기 구성에서 있어는 토속적인 색깔이 짙게 베어난다. 엿을 몰래 사먹은 벌로 앵벌이 두목에게 위기에 몰린 용길, 명자 남매가 향림원에서 극적으로 재회하는 설정, 그들을 뒤쫓는 두목이 개연성 없이 착하고 도덕적인 인물로 변하는 설정까지 고전소설 속의 '우연성'과 '권선징악'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계몽영화에 속한다. 삶의 목적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이 향림원을 통해 노동을 익히고, 협력을 배우면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이야기는 식민지 시대의 전형적인 계몽 스토리다. 영화의 마지막에 뜬금 없이 황국신민선언을 제창하고 일장기에 경례를 하는 장면이 식민지 시대를 어렵지 않게 짐작케 한다. 한국의 네오리얼리즘이라는 평론가들의 평가답게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면서도 우울한 당시 조선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해방 후 "감독으로서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일본에 대한 반항"이었다는 감독의 변명이 진심인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반도의 봄>
이병일 감독의 데뷔작인 <반도의 봄>은 1941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무색할 정도로 식민지 상황이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다. 오히려 당시 한국영화인들이 어떻게 영화를 만들었는지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요소들을 가득 안고 있다. 이 시기는 한국영화사의 큰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고 한다. 영화가 '혁명의 무기'가 될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던 '카프'계열의 영화인들의 꿈이 일본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산산히 무너지고 영화시장의 기업화와 대형화가 시작된 것이다. 현재의 영화사들이 태어나는 순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많은 영화인들이 영화가 자본으로 만들어진다는 현실에 대한 일본의 영화시스템을 끌어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마치 주인공이 마지막 일본으로 영화 유학을 떠나는 것처럼)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화가 <반도의 봄>이다. 영화 <춘향전>의 제작비가 부족해 중단 위기에 몰리자 주인공 영화제작자(김일해)가 돈을 대주고 있던 레코드 회사의 공금을 빼돌리게 되고, 곧 적발돼 경찰에 붙잡히고 만다. 하지만 막 창립된 반도영화사의 도움으로 춘향전이 완성되고 큰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이 기본 스토리다. 여기에 영일, 정희, 안나의 삼각관계가 극의 주된 갈등을 제공한다. 일본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이병일 감독은 화면, 편집, 구성 등에서 장르영화의 공식을 적절히 사용하며 극을 이끌고 있다. 영화에 대한 영화를 하며 영화작업을 위해서는 '회사'가 필요하다는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게 들릴 말을 영화로 풀어낸 점이 흥미롭다.
<지원병>
<반도의 봄>에서 언급한 카프의 변화를 경험적으로 증명해주는 영화가 <지원병>이다. 이 영화는 카프의 발기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안석영이 만든 대표적인 친일 영화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급격한 이동이 오늘의 일만은 아닌듯하다. 영화는 일본군이 되고 싶어하는 조선 청년에 관한 이야기다. 조선의 농촌에서 약혼녀와 땅을 일구고 열심히 살아가지만 주인공에게는 더 큰 꿈이 있다. 그것은 일본의 군인이 되어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 그는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 있지만 전혀 게의치 않는다. 오히려 주변의 인물들은 그가 일본군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심지어 아버지가 죽고 마름자리를 바꾸려던 지주 역시 그의 선택에 감복해 남아있는 가족들을 보살필 것을 약속한다. 이렇듯 영화는 이전 두 편의 영화와 달리 적극적이고 본격적으로 일본의 편에 설것을 강요하고 있다. 남아 있는 가족은 국가가 책임질 터이니, 조선의 청년은 충성심을 가지고 국가를 위해 싸우라는 강한 파시즘적 메시지다. 어찌 됐든 힘들게 영화작업을 했던 조선 영화인들에 대한 연민과 그 때문에 자본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안석영의 변화는 당대의 슬픈 현실을 대변하는 듯 하다.
<조선해협>
1943년 박기채의 영화 <조선해협>은 최인규의 <사랑의 맹서>처럼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의 청년들에게 일본군이 되길 부추기는 어용영화들 가운데 하나다. 1942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라는 어용단체가 영화제작을 독점하게 되면서 한국영화가 취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나오는 영화 족족 내선일체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조선해협>의 줄거리는 일본군에 지원하는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여자, 그리고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하는 여인 금숙과 살면서 가족과 남처럼 지냈던 주인공 성기는 전쟁터에서 전사한 형의 영정 앞에서 자신도 일본군에 지원하기로 결심을 한다. 그 결정 하나로 그간의 가족과의 갈등은 한 순간에 봉합된다. 금숙 역시 군에 지원하기 위해 자신을 떠난 성기에게 자신의 임실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주인공 성기가 전쟁터로 가고 손자가 있다는 사실에도 눈한번 꿈쩍않던 아버지는 총후부인이 되어 자신의 건강을 헤치면서 까지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금숙을 보고 며느리로 받아들인다. 영화는 태평양 전쟁 중 조선인의 군대 지원을 강요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멜로 드라마의 장르적 속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때문에 일본에서는 이 영화를 정치성이 없다는 이유로 비판했다고 한다.) 특히 성기와 금순의 사랑이 주된 이야기로 전개되면서 지금봐도 어색하지 않은 영상들이 놀랍기도 하다. 금순과 성기의 전화 통화를 파도로 연결하는 장면, 전쟁터의 총성과 금순이 재봉질을 하는 장면과 연결시키는 시퀀스 등 화려한 교차편집 역시 볼만한다. 분명 일본 유학파인 박기채 감독은 보다 장르영화에 충실하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 국내파였던 최인규 감독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4편의 영화를 보고 나니 놀라움과 씁쓸함이 겹쳤다. 놀라움은 생각보다 예상보다 "영화적 재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집 없는 천사>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다른 당시 조선의 리얼리즘이 무었이었는지를 경험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에서 영화를 공부한 감독의 작품들에게서는 헐리우드 장르 영화에서 봐왔던 장치들이 극의 긴장과 이완을 적절히 조절하고 있었다. 지금봐도 어색하지 않은 편집과 구성이다. 과연 이후 신상옥, 유현목, 임권택으로 이어져 지금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초가 된 영화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재미와는 별개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안석영의 예처럼 많은 조선 영화인들은 시대적 운명 속에서 친일의 색채를 담은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타의에 의한 것일수도 자의에 의한 것일수도 있다. 최인규 감독은 해방 직후 자유만세와 같은 영화를 만들면서 식민지 당시 어쩔 수 없었던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영화인이 영화를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감독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은 문예영화였다. 선전성을 약하게 하는 대신 예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감독들이 시대적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군사정권 때도 영화인들이 이러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계몽영화는 더욱 그렇다. 일본의 식민지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뚜렷한 구분이 생긴다. 무력항쟁처럼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민족주의 좌파와 우선 조선인들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민족주의 우파가 그것이다. 비극은 민족주의 우파에서 시작됐다. 조선인들의 계몽은 달리 말하면 조선이 미개한 상황에서 벗어나 일본과 서양의 신식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의 지배가 장기화되면서 이들의 주장은 일본의 '대동아'에 흡수된다. 강대국들과 싸워 승전하는 일본의 모습에 우파 지식인들은 일본에 대한 입장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이광수의 변심 역시 이러한 맥락이다. 영화 역시 다르지 않다. 시대적 책임에 침묵하고 있었던 문예영화와는 다르지만 계몽영화 역시 그 의도와는 다르게 친일의 때를 묻힐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운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영화인들의 다른 모습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방 후 친일 문제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면서 영화 쪽도 같은 입장에 처혔다. 네 편의 감독들 모두 한국영화계를 이끌며 많은 작품을 찍고 후배 영화인들을 양성했다. 해방 조선에서의 그들의 활동과는 별개로 식민지에서의 활동 역시 명과 암이 구별되어야 한다. 지금은 이런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다. 영화계에서도 과거가 현재의 빛이 되는 모습을 기대한다.
P.S. 문예봉이 나오는 영화를 더 찾아 봐야겠다. 북한 영화들을 좀 뒤져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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