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26 23:33

여덟번째 블로거 상영회 <안개 속의 풍경>



2009년 5월 제 8회 씨네아트 블로거 정기 상영회가
5월 29일(금) 저녁 8시 20분,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개최됩니다.


안개 속의 풍경
(Landscape in the Mist, 1988)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슴 저미도록 슬프고도 아름다운 영화” 
“영상과 감흥, 그리고 번뜩이는 상상력이 화면 전체를 압도한다”

- LA Times


사랑하는 아빠, 우린 낙엽처럼 여행하고 있어요
앵콜문의 1순위!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안개 속의 풍경'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더듬어 찾는 여행

<안개 속의 풍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찾아나선 어린 남매가 황무지와도 같은 오늘날의 그리스를 가로질러 여행하면서 겪는 시간을 그리고 있다. 공연할 극장을 구하지 못해 바닷가를 배회하는 유랑극단, 시가행진을 벌이는 군인들, 11살의 소녀를 강간하는 트럭운전사, 결혼식 날 울며 도망가는 신부, 불라가 첫사랑을 느낀 오레스테스가 동성연애자라는 사실 등 그들이 겪는 경험들은 그리스의 현실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어린 남매는 희망을 찾아 마지막까지 여행한다. 언젠가는 ‘새로운 날’이 밝아오리라는 환상과 꿈을 버릴 수 없으므로.

안개 속의 풍경. 우수에 잠긴 조국 그리스

앙겔로풀로스는 풍경의 색깔과 모양을 사용하여 인간의 감정적 굴곡을 절묘하게 표현해낼 줄 아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영화에 나오는 그리스는 여행책자에 나오는 햇빛 찬란한 얼굴이 아니다. <안개 속의 풍경>에서도 비 내리는 음산한 겨울 날씨가 등장하며, 회색빛의 바닷가는 멀리 떨어진 공장을 향하고 있고, 트랙터는 죽어가는 말을 눈 속에 파묻는다. 잿빛 안개, 짙은 구름, 스산한 마을, 황량한 정류장, 텅 빈 광장 등을 통해 그리스가 겪은 격동의 역사와 현실적 고통을 절실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진한 감청색의 블루톤으로 이어지는 화면은 고된 현실을 적절하게 표현하면서도 작품에 서정성을 더해준다.
유려한 영상과 가슴이 아리도록 감미로운 음악의 절묘한 조화
앙겔로풀로스의 영상미학을 가장 잘 이해하고 충분한 시간을 활용하면서도 유려한 쁠랑 세깡스 촬영에 능한 요르고스 아르바니티스가 카메라를 지켰으며 엘레니 카라인드루가 정확한 타이밍에 파고드는 주제음악으로 화면 가득 우수에 찬 선율을 더해주고 있다.
<안개 속의 풍경>의 스텝들은 모두 앙겔로풀로스의 침묵의 3부작에 참여하고 있어 각 작품에 독특한 색깔을 주면서도 일관된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침묵의 3부작은 깊이 있고 시적인 대사, 긴 호흡으로 마련한 여백의 공간에 관객의 사유를 머물게 하는 활영, 감성적이고 호소력 짙은 음악을 고루 갖춘 것!


  영화 정보 더보기 

제 8회 상영회 후보작들과 투표 결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씨네아트 블로거 정기 상영회는

관객들이 영화를 직접 고르고, 함께 보고, 이야기하는
새로운 컨셉의 상영회입니다.

또한 유명인사나 평론가 없이, 블로거들과 관객들이 동등한 시각에서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에 대한 감상을 교류할 수 있는
색다른 씨네토크도 함께 진행됩니다.

상영회 일시: 5월 29일 금요일 저녁 8시 20분
상영회 장소: 아트하우스 모모


* 상영 후에는 관객들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공유할 수 있는 씨네토크 시간이 이어집니다.
* 본 상영회는 유료 상영입니다. (7,000원)


지난 씨네아트 블로거 상영회 관련 내용 보기
제 1회 씨네아트 블로거 상영회 : 10월 31일(금) <원더풀 라이프>
제 2회 씨네아트 블로거 상영회 : 11월 29일(토) <쥴 앤 짐>
제 3회 씨네아트 블로거 상영회 : 12월 27일(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제 4회 씨네아트 블로거 상영회 : 01월 31일(토)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제 5회 씨네아트 블로거 상영회 : 02월 27일(금) <인 디스 월드>
제 6회 씨네아트 블로거 상영회: 03월 28일(토) <로리타>
제 7회 씨네아트 블로거 상영회: 04월 24일(금) <연애의 기술>




댓글을 남겨주시면 상영회 초대권을 드리겠습니다.
비밀댓글로 성함과 전화번호 끝 4자리를 남겨주세요.
참 필요한 티켓 수도 적어주세요. (8장의 티켓이 있습니다.)
신청하시는 분이 많을 경우 먼저 올리는 순서대로 드리겠습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Trackback 0 Comment 2
2009/04/23 10:30

<똥파리> 무쓸모의 존재감


<똥파리> 무쓸모의 존재감


Korea; 2008; 130min; Drama
Director: 양익준
Cast: 양익준, 김꽃비, 이환, 정만식


 
시간을 뛰어넘어 2009년 연말로 가서 한 해 영화계를 정리할 때, 그 리스트에 "독립영화의 약진"이라고 적어놔도 쉽게 이의를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워낭소리>가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잭팟을 터뜨린 이후 <낮술>, <할매꽃> 등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여름의 시작과 함께 또 한 편의 독립영화가 수상한 세를 모으고 있다. 연이은 국제영화제 수상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극장 개봉에 성공한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가 그 주인공.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감독, 각본, 주연까지 혼자 1인 3역을 도맡은 신인 감독의 영화에 쏠리는 관심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제목부터 범상하지 않다. 여름이면 모기와 함께 찾아오는 무쓸모의 양대산맥이 "똥파리"다. 과연 영화 <똥파리>는 어떤 존재감을 갖고 있을까? 여러가지 기대감으로 극장을 찾았다. 영화가 시작하고 2시간 10분이 지나서 다시 상영관에 불이 들어왔다. 다소 긴 러닝타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스토리는 흥미로웠고, 구성은 찰졌다. 짧게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우리 이전 세대 아버지들의 권위주의적 폭력에 '안녕'을 고하는 영화"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거친 제목과 달리 영화는 따뜻하고, 인간적이었다. 감독의 자기고백적 느낌이 강하지만, 누구나 한 번 쯤 품었을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래서 왠지 많은 사람에게 깊은 울림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폭력의 시작

늦은 밤, 한적한 동네 사거리에서 한 남자가 여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질을 하고 있다. 잠시 후 상훈이 앵글 안으로 들어온다. (상훈은 '주먹'을 통해 처음 영화 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남자는 상훈에 의해 폭력의 가해자에서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폭력에 더 큰 폭력으로 남자를 응징한 상훈에게서 관객들은 묘한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상훈은 돌아서 매를 맞던 여자에게 뺨을 날리고 침을 뱉는다. 방금 전의 쾌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남은 건 짜증과 멸시에 찌든 상훈의 표정 뿐이다. 그 표정에서 연민과 동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똥파리>의 첫 장면, 감독은 폭력의 변이를 파노라마가 이어지듯 보여준다. 첫 시퀀스로 똥파리 상훈의 캐릭터에 대한 모든 설명이 끝이 난다. 상훈은 보통 사람이 가진 평범한 감정을 공유하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과 표정을 갖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폭력'이다. 이 후의 영화는 그가 가진 폭력이 어떻게 체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몇 번의 플래시백을 통해 드러나는 상훈의 폭력은 '가족'으로부터 출발한다. 특히 아버지는 상훈이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배설하는 욕설과 폭력의 실체가 된다. 약한 어머니에게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고, 그 와중에 어린 여동생을 죽인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것이다. 동시에 상훈의 폭력에는 가해자였던 아버지만큼이나 피해자였던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함께 얽혀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매맞는 여자를 대한 상훈의 태도는 "속수무책으로 맞고만 있었던 어머니"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상훈은 어머니에게 피해자로서의 연민과 어린 자신과 여동생을 지키지 못한 원망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상훈의 폭력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와 여동생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아버지에 대한 분노,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그가 아버지보다 더 큰 폭력을 갖게 된 것은 - 어머니와 같은 약한 존재가 되어 또 다른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겠다는 - 삶의 궤적이 만들어준 그만의 삶의 양식(a way of life)이다. 


더불어 <똥파리>는 지극히 감독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을 하고 있지만 '폭력'에서 사회적 맥락을 제거하지 않는다. 솔직히 <똥파리>를 보고 있으면 몇몇 장면에서 가난을 폭력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상훈과 영재의 가족이 속한 도시의 빈민촌은 지난한 가난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 곳에서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폭력이, 형제를 향한 다른 형제의 폭력이, 이웃을 향한 이웃의 폭력이 '가난'을 이유로 이뤄진다. 또한 영재가 가난을 벗어나고자 폭력을 휘두르는 용역 깡패가 되는 모습에서는 가난의 되물림이 폭력의 되물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약 이렇게 가난과 폭력을 등호의 관계를 놓고 영화가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갔다면 <똥파리>가 가진 윤리성은 심각하게 훼손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양익준 감독은 가난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위기를 돌파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가난하지만 '필사적'으로 그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가난의 굴레에서 한 걸음도 도망칠 수 없다. 그것은 가난이 이미 개인의 능력을 벗어나 사회적 구조 속에서 무한 반복되기 때문이다. 연희의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건 구청직원들에게 언제 헐릴지 모르는 포장마차였고, 그의 딸 연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시급 몇 천 원의 떡볶이집 아르바이트가 고작이다. <똥파리>는 가난이 폭력이 뿌리내리기 쉬운 토양을 제공하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가난한 사람이 폭력적 사람이 된다는 논리로 환원하지는 않는다. 
 
연희의 아버지는 폭력이 가진 사회적 맥락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국가를 위해 전쟁(베트남전)에 참여했다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그는 국가로부터 버려진 인물이다. 얼마 정도의 보조금을 받고 있지만 한 가정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노동력을 상실한 그는 곧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방기하고, 남자로서의 기능을 거세당한다. 그가 끊임없이 아내를 의심하고, 가족을 폭력으로 대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남자' 임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엄청난 국익을 가져올 것이라는 이유로 국가는 생면부지 전쟁터로 젊은이를 보냈고, 다시 돌아왔을때 국가로부터 소외 당한 참전용사는 고스란히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폭력의 시작점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들을 통째로 감당해야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닌 온전히 가족의 몫이 되었다. 결국 <똥파리>가 보여주는 폭력의 실체는 사회사와 개인사가 복잡하게 얽힌 결과물인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의 결과물... 영화 포스터의 카피처럼 "세상은 엿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은 아닐지언정 그 감정만큼은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폭력의 확대

영화 <똥파리>에서 아버지들(연희의 아버지와 상훈의 아버지)은 한국의 권위주의 시대에 가족에게 자행된 폭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리고 아버지들로부터 출발한 폭력은 이후 세대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오히려 더 확대된다. 폭력은 그 폭력을 누를 수 있는 더 큰 폭력을 야기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상훈의 아버지가 행하는 폭력이 가족의 틀 안에 있었다면, 상훈의 폭력은 아버지의 폭력을 방기한 세상을 향해 있다. 그의 폭력은 성별은 물론이거니와 적(敵)과 아(我)를 가리지도 않는다. 나이까지 경계가 없는 듯 보인다. 심지어 경찰로 상징되는 공권력에게까지 그의 폭력은 거침이 없다. 연민과 동정과 같은 감정은 애초에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분노 뿐이다. 그가 하는 말은 욕이고, 그가 하는 행동은 폭력이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상훈은 '언어 이전의 인간'인 것이다. 또한 등록금 시위현장에서 보듯 그의 폭력은 윤리와 도덕 이전의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폭력을 이용해 돈을 벌 수 있는 용역깡패가 고작이다. 


또 다른 상훈, 영재가 있다. 상훈처럼 불운하게 어머니를 잃고, 가장으로서 기능을 상실한 아버지를 두고 있다. 둘에게 아버지는 공히 분노와 원망의 대상일 뿐이다. 똑같이 마음을 쓰게 만드는 누나가 한 명을 두고 있는 점도 닮아 있다. 하지만 상훈의 폭력이 세상 밖으로 거칠게 표출되는 반면에 처음 영재의 폭력은 가정 내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상훈은 아버지와 누나에게 절대적인 폭력을 행사하지만 밖에서 그렇지 못하다. 친구 승훈을 따라나선 용역 현장에서 영재는 지금까지 경험으로 감당하기 힘든 폭력(상훈)을 마주한다. 그리고 영재는 그의 앞에서 우물쭈물한다. 하지만 그 주저함은 껍질을 벗고 더 큰 몸을 얻기 위해 몸부림 치는 파충류의 변태 과정과도 닮아 있다. 그 과정을 통해 영재는 더 큰 폭력을 물려받는다. 영재는 다른 용역들처럼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영화의 마지막, 영재는 자신의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상훈에게 충동적으로 막무가내 폭력을 휘두른다. '절대적인 폭력'이라고 믿었던 상훈의 약한 모습은 순간적으로 약자와 강자의 위치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영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영재는 상훈을 제거함으로써 그보다 강한 폭력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버지들의 폭력은 상훈을 통해 다시 영재에게로 확대, 전이된다. 결국 상훈과 영재는 한국의 근대사(우리의 아버지 세대)가 만든 폭력의 결과물인 셈이다.

폭력의 소멸


영화의 전반부가 상훈을 중심으로 한 폭력의 전이를 보여주고 있다면, 후반부는 치유의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치유의 파동이 시작되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가족'이다. 아마도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치유는 생채기가 생긴 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상훈의 아버지와 상훈이 행하는 폭력의 차이점은, 아버지 폭력의 피해자가 오직 가족이었던 반면 상훈의 폭력은 가족을 제외한 모든 세상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상훈에게 가족은 그토록 없었으면 하면서도, 그가 간절히 욕망하는 대상이었다. 15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세상에 나온 아버지에 대한 상훈의 무자비한 폭력은 자신에게 온전한 가족을 만들어주지 못한 원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가 아버지가 없는 동안 배다른 누나(현서)와 그의 자식(형인)을 돌봤던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아버지씨의 씨를 타고났지만 상훈은 현서와 형인에게서 희미하게 남아있는 가족의 흔적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표현이 거칠고 어설프지만 말이다. 

가족을 향한 상훈의 한 걸음은 만식과 연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상훈보다 네 살이나 많은 만식은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그의 유일한 친구이다. 세상과 이리저리 치받으며 결국에는 스스로 상처를 내는 상훈을 마음 쓰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만식은 아파하는 걸 알면서도 상훈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계속 상기시킨다. 아마도 상훈이 가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이다. 그리고 연희가 있다. 우연히 만난 이 겁없는 고3 소녀는 상훈에게 죽은 어머니이자 여동생, 구원자이자 친구와 같은 존재이다. 상훈 만큼이나 복잡한 가정사를 가진 연희 역시 가정과 학교 어느 곳에서도 위로를 받지 못한다. 그리고 세상과 소통하지 못했던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위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 상훈은 단 한 번 크게 웃고, 단 한 번 크게 운다. 항상 연희가 그 옆에 있었다. 연희 역시 상훈과 같이 웃고, 같이 눈물을 흘린다. 연희를 통해서 상훈은 타인과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운다. 둘은 질척거리는 가정사를 주저리 떠들지 않아도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상훈은 다시 가족을 용기내본다. 조카의 유치원 학예회에 상훈을 통해 탄생한 '가족'이 모인다. 여기서 감독은 가족을 굳이 혈연으로 뭉친 1차집단으로 한정시키지 않는다. 이미 <다섯은 너무 많아>, <가족의 탄생>에서 전복적으로 그려낸 가족의 탄생은 <똥파리>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상훈의 아버지, 현서, 형인, 만식, 그리고 연희까지... 이들에게는 '가족'이라는 타이틀도 붙지 않았고,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라는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 지붕 아래 모여 살지는 않지만 그들은 '가족'을 이루며 산다. 각자는 그 안에서 그저 서로를 보듬고 배려하는 동등한 구성원일 뿐이다. 감독은 근대적 가족이 가진 편협한 정의를 거부하고 타인에게까지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연희와 영재 남매가 슬프게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영재의 존재는 분명 한 번 전이된 폭력이 쉽게 없어질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연희를 통해 영재가 확대된 개념의 가족 공간으로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영재 역시 상훈 만큼이나 건강한 가족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닌 응당 해야할 일이다. 폭력은 개인과 가정의 테두리에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기에 그렇다.

여기서 상훈의 위치는 어디일까? 감독은 상훈에게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상훈의 아버지가 거세된 폭력이라면, 상훈은 살아있는 폭력을 의미한다. 곧 그의 죽음은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폭력의 마침표이자, 권위주의 시대 폭력의 종결인 것이다. 힘이 가득 들어간 '주먹'으로 영화 속에 들어온 상훈은 숨이 떨어진 그 손을 마지막으로 영화를 떠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에서 톰(비고 모르텐슨)의 가족은 폭력의 실체를 알면서도 침묵한다. 그 침묵은 엄청난 폭력을 묻어두고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상징이다. 하지만 <똥파리>는 상훈의 죽음을 통해 남은 자들에게 온전한 평화를 선물하고자 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는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다. 똥파리는 없어졌다.  
 


솔직히 <똥파리>의 모든 감정들이 이해되고, 모든 인물을 안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의 화해와 용서에 어느 정도의 물음표가 남는 것도 사실이다. 표현 방법에서도 여러 장르의 클리세들은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런 부족함에도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것은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뜨거운 '진심'에 있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난 누구를 위해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 만든다." 는 말을 했다. 그 만큼 <똥파리>는 한 컷, 한 컷에서 감독의 진한 인생이 묻어난다. 그럼에도 사변적이지 않고 그 진심이 온전히 전달되는 이유는 처음에 얘기했듯이 상훈의 이야기가 특별할지언정 그 메시지는 보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로 인한 갈등과 그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극복하기까지 한 개인이 겪는 감정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보편적이다. (영화의 엄청난 수상 성적을 봤을 때 서양 역시 마찬가지인 듯하다.) 감독은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녹여내 영화로 풀고 있다. 그리고 감독은 메마르고 황량한 현실에서도 감히 희망을 얘기한다. 또한 그것이 이뤄질 거라고 믿는다. 양익준은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다. 그 진심이 스크린에 그대로 묻어난다.


P.S. 1
긴 러닝타임에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 것은 스토리의 재미와 구성의 탄탄함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적재적소에서 터져주는 유머와 배우들의 군더더기 없는 연기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 듯 하다. 인물들이 뱉어내는 대사는 특히나 찰졌고, 캐릭터를 완벽하게 살려냈다. (개인적으로 콘프레이크를 먹는 채무자 장면과 만식의 대사들이 인상적이었다.) <똥파리>를 배우들의 발견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양익준은 감독, 각본, 주연까지 충무로의 좋은 영양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김꽃비, 이환, 정만식까지 벌써 차기작이 기다려진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Trackback 6 Comment 8
2009/04/20 16:45

<게공선> Between 1929 and 2009


<게공선> Between 1929 and 2009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양희진 역, 문파랑, 2008

 
1. 1925년 소련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영화 <전함 포템킨>

영화의 배경은 1905년 황제 짜르가 러시아를 통치하던 시기. 전함 포템킨에 몸을 실은 병사들은 자신들에 대한 학대와 열악한 근무환경에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러던 중 자신들이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이 썩은 고기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억누르고 있었던 그들의 분노는 함선 내 봉기로 이어진다. 봉기에 성공한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사람들이 오뎃사 항구로 모여든다. 하지만 함선의 봉기가 시민 봉기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 한 짜르의 코사크 군대는 총과 칼을 내세워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한다. 하지만 무고한 시민에 대한 폭력적 진압은 오히려 시민과 군을 결집시키는 촉매제가 된다. 그리고 혁명이 시작된다. 단지 충동적인 반항이 아니다. 그 저변에는 짜르 시대에 축적된 모순과 불만이 엉켜 있다.

2. 1929년 일본

러시아의 1차 혁명 이후 25년이 지났다. 1929년 연합국을 도와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일본은 서구 강대국의 아류국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의 맹주로서 자리를 잡았다. 식민지는 굳건했으며, 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정치는 번성했다. 하지만 세계 대공황의 여파는 그대로 일본에도 전해졌다. 일본은 공황으로 인한 본토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밖으로 눈을 돌렸다. 전장이 확대될수록, 세계 곳곳에서 황군의 승전보가 전해질수록 일본의 군국주의는 더욱 단단해졌다. 이의를 제기하는 개인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천황을 위해 충성을 다짐하고,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국민' 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반항과 저항은 곧 '공공의 적'으로 매도됐다. 



3. 1929년 고바야시 다키지의 소설 <게공선 蟹工船>

<"어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
훗카이도의 하코다테. 게 공선 하쓰코호號에 노동자들이 오른다. 전국 각지에서 배를 타기 위해 모여든 어업노동자, 선원, 보일러공, 잡일꾼 등이 그들이다. 누구는 더 나은 벌이를 찾아 왔고, 누구는 좋은 직장이라는 꼬임에 빠져 왔으며, 누구는 어쩔 수 없이 매번 배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이 향하는 곳은 '지옥'이다. <선박이 아닌 공장선이기에 항해법의 적용을 받지 않고, 그렇다고 공장법의 적용도 받지 않았던> 이 무법지대에서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겪어내야 한다. 캄차카 반도 인근의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바다를 견디며 일을 해도 그들에게 엄청난 보수와 복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얻은 이익은 고스란히 배를 소유한 자본가들의 몫이다. 자본가가 실재하지 않은 배 안에서 노동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감독을 비롯한 배의 '윗사람'들. 그들 역시 자본가에게 고용된 사람이지만 배 안에서 그들은 자본가의 노릇을 대신하고 있다. 그들은 오직 노동자들이 쉬지 않고 생산량을 늘리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충성을 다하는 황민이되어야 한다고 다그칠 뿐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비인간적인 폭력과 살인적인 노동 뿐이다. 감독에게 노동자들은 먹고, 씻고, 자고, 싸고, 나머지는 죽자고 일을 시켜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서 생존의 갈림길에서 천황의 자랑스런 국민이라는 '립서비스'는 아무 필요가 없다. 감독의 무자비함과 자본가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은 결국 층층이 쌓이던 하쓰코호의 노동자들의 분노에 불을 붙인다. 결국 하쓰코호의 노동자들은 집단행동을 결의하고 대표들은 감독을 포함한 간부들과 협상을 시도한다. 하지만 평화롭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들의 기대는 순식간에 끝나 버린다. 힘없는 노동자의 편이라 믿었던 군대는 그렇지 않았다. 국가와 자본가, 그리고 군대는 각자 서로의 필요에 의해 하나로 뭉쳐 있다. 그리고 노동자는 그들에게 착취를 당하는 대상일 뿐이다. 1929년 일본에서 노동자의 의미는 생산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군대의 무력 진압에 그들의 봉기는 짧게 끝이 난다. 하지만 실패를 통해 그들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배운다. 
<그리고 그들은 들고 일어섰다. 다시 한 번 더.> 



4. 그들의 분노는 슬픔이었다.

하쓰코호에는 두 개의 공간이 존재한다. 하나는 갑판 위의 세계. 감독, 선장, 잡부장, 공장대표가 그곳의 주인이다. 그리고 다른 세상이 있다. '똥통'이라고 불리는 갑판 아래의 세계. 이와 벼룩이 들끓고, 악취가 지배하는 그 곳에 어업노동자, 선원, 잡일꾼, 보일러공이 있다. 노동자들은 원형감옥에 갇힌 죄수마냥 일거수일투족을 감독에게 감시 당한다. 그들에게 저항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노동력과 돈이 맞교환 되는 계약관계에서 항상 우위는 노동력이 아닌 '돈'을 쥐고 있는 쪽이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배를 탈 수 있는 사람은 어디서든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노동력 공급의 과잉은 마르크스가 밝히고 있듯이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를 무한 재반복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핵심 법칙이다. 당장을 살아야하는 노동자들에게 자본가는 결국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럼에도 하쓰코호의 노동자들이 총과 칼도 없이 포템킨의 병사들이 그랬듯 저항을 시도한다.

어떻게 그들은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캄차카 인근에서 조업을 힘들게 했던 바다와 추위는 그들이 견딜 수 없는 시련이 아니었다. 하쓰코 호에 몸을 실은 노동자들은 바다로 인한, 감독으로 인한 온갖 고통을 이겨내지만 결국 그들을 뭉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은 인간답게 죽을 권리마저 빼앗긴 동료의 주검을 마주하고 나서였다. 즉 마지막 불을 당긴 화살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조차 갖을 수 없는 '슬픔'이었던 것이다. 원망과 분노를 넘어선 슬픔. 그 슬픔이 하쓰코 호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짙게 배어 들어 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단지 자본가를 위한 생산수단이 아닌 모두 평등한 인간으로서 무엇이 우선해야 하는지를 비로소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쓰코 호 노동자들의 절규가 공히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는 이유 역시 이 슬픔에 있다.

5. 게공선을 넘어

게공선의 슬픔은 게공선 만의 것이 아니다. 책에서 묘사하고 있듯이 도시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느끼는 슬픔은 넘쳐난다. 광업, 임업 노동자들 역시 하쓰코 호의 노동자 만큼이나 절박한 삶을 살아야 한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하쓰코 호를 넘어 전체 일본 사회에 드리워진 노동자들의 피폐한 생활을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 것이 아니라 과감히 깰 수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외치고 있다. 어떻게?

고바야시 다키지의 시신 - 사진출처 : 절망한 일본 젊은이들, 80년 전 소설에 열광하다 - 오마이뉴스 (시라카바문학관 다키치 라이브러리)


6. 반대편의 실체

고바야시 다키지는 해결책을 말하기 앞서 노동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존재들의 실체를 밝히는데 주력한다.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실체'를 밝히는데 집중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반대편에 있는 존재들. 고바야시 다키지는 그 곳에 자본가, 국가, 군대를 한 편에 세워두고 있다. 국가와 군대로 대표되는 공권력은 모두 자본가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동원하고, 군대가 그런 자본가를 보호한다는 것. 그 관계에서 노동자는 국가와 자본가에 의한 이중의 착취 대상이 될 뿐이다. 나아가 노동자들은 국가와 자본가가 유도한 경쟁과 갈등의 구조 속에 스스로를 할퀴며 살아갈 뿐이다. 감독 역시 자본가의 대리인의 노릇을 하고 있지만 노동자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노동자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감독은 파업을 야기한 책임을 지고 회사로부터 무일푼 해고를 당한다. 그리고 "아아 분한다! 내가 지금껏, 젠장, 속고 있었어!" 라며 절규한다. 그 역시 착취의 대상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내릴 수 있는 해결책은 분명해진다. 노동자들은 누구의 도움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 스스로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 

7. 답은 무엇인가?

하쓰코 호 노동자들의 첫 번째 봉기는 너무도 짧게 끝이 난다. 어업노동자, 잡일꾼, 선원, 보일러공의 9명 대표들이 감독을 찾아가 담판을 짓지만, 총을 들이대는 감독을 보기좋게 후려친 것으로 그들의 만족은 끝나야 했다. 하지만 실패를 통해 그들은 또 하나의 가능성을 배운다. 즉, 몇 명의 주도에 의해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노동자 전체가 행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바야시 다키지가 '태업'을 주요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 역시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덧붙이는 말'에서 "조직, 투쟁이라는 위대한 경험을 처음으로 알게 된 어업노동자와 젊은 잡일꾼들이 경찰서의 문을 나서자 다양한 노동계층 속으로 각각 파고들게 되었다." 라고 적고 있다. 실패가 포기가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밝히고자한 것이다.



8. 2009년에 읽는 <게공선>

비슷한 시기 각각 소련과 일본에서 완성된 에이젠슈타인과 고바야시 다키지의 작품은 비슷하면서도 차이점을 보인다. <전함 포템킨>이 '(혁명으로 이어지는)봉기' 자체에 초점을 두고 전개된다면,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은 노동자들이 행동을 하기까지 처절하게 이어지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독자들은 투쟁의 필연성 내지는 윤리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생각이 모두 옳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 저자가 의도적으로 노동자들의 '이름'을 모두 제거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각각 인물들에게 노동자로서 보편적인 문제 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효과도 있었겠지만, 개인이 아닌 몰개성의 집단으로만 노동자를 요구한 것은 현재로서는 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생각이다. 현재의 노동운동은 과거보다 훨씬 복잡한 가치와 요구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역시 점점 '맞춤형'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80년이 지난 소설이 다시금 현실에서 재조명을 받는 것은 응당 이유가 있다.

그 이유란 무엇일까? 수 년 간 지속되던 경제 호황이 최근 들어 위태롭게 기우뚱하는 모습이다. 작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가 전세계를 뒤덮고 있다. 갑작스런 위기가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글로벌 경제 흐름을 지배하고, 모두가 잘 살게 될 것이라고 낙관론에 젖어 있던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해 현재의 위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몫이다. 임금은 줄어들고, 고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으며, 경제 회복에 밀려 노동자의 복지는 뒤로 미뤄졌다. 경제가 힘들수록 더욱 고통스러운 건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현재의 위기만 지나가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산다. 과연 그럴 것인가? 그 희망은 누가 만들어 준 희망인가? 1929년과 2009년 80년의 시간이 지났다. 많은 모습이 변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그대로 변함이 없다. 노동자들의 슬픔은 그대로이다. <게공선>을 사람들이 다시 손에 든 이유는 여전히 우리가 그 슬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P.S.1
일본에서의 엄청난 인기 때문인지 벌써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포스트맨블루스>의 사부(히로유키 다나카)가 감독하고, <집오리 들오리의 코인로커>의 마츠다 류헤이가 주연을 맡는다. 과연 영화도 책 만큼의 반향이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P.S.2
<게공선>의 저자 고바야시 다키지는 지하운동을 전개하던 중 경찰 고문에 의해 1933년 요절했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Trackback 0 Comment 0